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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017화 (1,017/1,329)

3화

자식은 사랑이었다.

티격태격 키우는 재미는 행복이었다.

“아빠,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노래 하나 해 주면 사 주지.”

“희연아! 너 아침에도 먹었잖아. 그만 먹어.”

“아침 먹었다고 점심 안 먹나? 희연아, 아빠가 사 줄게. 나가자.”

“와! 아빠 최고!”

“여보! 애 이빨 썩어요. 밥도 잘 안 먹는데 무슨 아이스크림이에요? 김희연, 너 어디 가? 엄마 말 안 들을래? 여보!”

이름 불렀다.

아이스크림 쪽쪽 빨고 있는 부녀를 보는 눈길이 곱지 않았다. 등짝 스매싱이라도 한 대 날릴 눈초리였다. 아빠 입장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엄마의 육아 원칙은 존중받아 마땅했다.

눈치 봐야 했다.

그동안 일 핑계로 주말마다 집구석에 박혀 뒹굴뒹굴 굴렀다는 사실이 새삼 미안했다.

‘경아 씨도 그렇고, 어렸을 적 많이 데리고 다니면 애한테 무척 좋다는데 너무 무심했어.’

“경아 씨, 간 이식 수술 잡히기 전에 1박 2일로 강원도나 갔다 올까요? 무릉계곡 거쳐 임원에서 회 한 그릇 하고, 정동진 일출까지 보고 오면 딱 좋을 것 같지 않아요?”

“시간이나 내세요.”

“아후! 내가 확실하게 약속할게요. 도장 찍을까?”

“이혼하고 싶어요?”

“어? 그 도장이 그게 아닌데…….”

“임원까지 가는 건 좋은데 MT 방은 사절이고, 여행도 간 이식 후에 가요. 놀러 가서 수술 때문에 끙끙대는 사람 보고 싶지 않아요.”

새록새록 연애 때 기억이 떠올랐다.

‘아! 이불로 쌓은 성 참 넘기 어려웠지. 그땐 정말 혈기왕성했는데 요새 너무 소홀했어.’

“경아 씨, 희연이 빨리 재울까요?”

“어머! 왜 이래요?”

무슨 짓을 한 걸까?

툭탁툭탁,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가족 모두 건강하다는 사실이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불안에 떨고 있을 두 가족과 다른 모든 환자들도 건강해져 소소한 일상 속 행복을 찾길 바랐다.

휴우! 샤워해야겠다.

***

월요일 오후.

박승준 교수의 주재하에 일반외과 교수 회의가 열렸다. 김지훈이 장미라의 상태와 집안 사정을 설명하고, 신현수가 제반 상황을 보고했다.

일반외과의 끈끈한 유대는 익히 알려진 일이었다.

비밀리에 진행한 일도 아니었다.

넉살 좋은 손일석과 두터운 신망을 가진 이경석이 수시로 교수들과 상의했다. 마지막 결과물만 모를 뿐이었지만 내부적으로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야 힘을 받는 법이었다.

“이상 현재까지 진행된 상황을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모로 미흡하지만 과장님께 정식으로 요청드립니다. 장미라 환자의 치료비 경감 문제를 원장단 회의 안건으로 올려 주십시오.”

신현수의 목소리가 당당했다.

사실 안건 상정 정도는 과장 직권으로 처리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박승준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외과라는 하나의 과 차원에서 요구하기에 액수가 워낙 큰 탓이었다.

무엇보다 송재덕 교수가 원장단 회의를 주재하기 때문에 도리어 지켜야 할 선이 있다고 여겼다. 만에 하나 일말의 부담이라도 느낀다면 무리한 요청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의견 이상으로 원장님의 생각이 중요해.’

박승준 교수가 다른 교수들의 의견을 구했다.

과장으로서 기울여야 할 최소한의 노력이자 예의였다. 곧바로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으로 보아 교수들의 생각도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신현수 선생을 비롯해 다들 노력은 했다만, 억대 이상 부담해야 할 경우를 배제할 수 없어 보인다. 원장단 선생님들이 의사이긴 해도 경영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위치인데 이 정도로 설득할 수 있겠나?”

“나도 이 교수 생각에 동의해. 환자 상황은 십분 이해하지만 병원 입장에선 단 한 명의 환자 때문에 큰 손실을 감수해야 돼. 자칫 행정 부분을 무시해서는 안 될 원장님에게 큰 부담이 될 수도 있어.”

“장미라 같은 환자가 우리 과에만 있을 리 없다. 다른 과에서 동일한 요구를 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저기에서 요청이 들어왔을 때 원장님 입장이 얼마나 곤란해질지 고려해야 되지 않겠나?”

장미라에 대한 연민, 의사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 책무와 별개로 이혁민 교수와 신기동 교수의 냉철한 현실 인식이었다.

지동훈 교수도 비슷한 우려를 했다.

“선생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일회성에 그친다고 해도 장미라 같은 환자가 한둘이겠습니까? 원장단은 물론 원장님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상황이 될 것 같습니다. 감정으로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때때로 직접 발로 뛴 사람은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 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부족하기 짝이 없는 경우가 태반인데도 말이다.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선의에만 기댈 일이 아니었다.

특히 송재덕 교수가 어떤 입장에 처할지 조금도 고려하지 못했다. 실제 가장 든든한 우군이어야 할 이준영 교수와 오창도 교수마저 별다른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송재덕 교수 역시 눈가를 좁힌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김지훈과 신현수에게는 정말 난감한 일이었다.

손일석과 이경석도 눈가만 문질렀다.

‘원장님이 얼마나 난처한 입장에 처할지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이것 말고는 현실적인 대안이 없는데 어쩌지?’

낙담해선 안 될 상황이건만 어깨가 절로 처졌다.

김지훈이 다시 한 번 장미라 수술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설명했다. 감정을 배제하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접근했지만 분위기를 반전시키지 못했다.

“의사로서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병원은 자선단체가 아니다. 이곳을 일터로 삼아 먹고사는 입이 몇인지 생각해 봤나? 장미라 같은 환자를 만날 때마다 무료 치료를 요구할 생각이야? 현실적이지 않다.”

오랜 기간 과장을 역임한 이혁민 교수만큼 행정 경험이 풍부한 의사도 없었다. 반박 자체가 불가능한 지적에 사인방 모두 감정에 치우쳤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머지않아 일반외과를 두 어깨에 짊어지고 이끌어 나가야 하는 위치임에도 말이다.

한동안 답답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교수들조차 설득하지 못하면 아무리 머리를 싸맨다 한들 해결 방도가 있을 수 없었다. 그때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만 지키던 이준영 교수가 힐끗 송재덕 교수를 보았다.

‘이 정도면 이런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잘 알았겠지. 미숙함이 꼭 잘못은 아니다. 너희 모두 자책할 필요는 없다.’

“원장님, 열네 살 아이가 죽습니다.”

“알아. 잘 알아.”

“우리만이 살릴 수 있습니다. 때론 좋은 일이라 해도 철저히 준비하지 못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지 충분히 배웠을 겁니다. 그만하시죠.”

정곡을 찌른 말이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푹 숙였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보다 철저하게 준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이준영 교수의 말과 교수들의 우려가 가슴에 와닿았다.

또한 부정 속 긍정적 동의였다.

미약하나마 희망이 보였다.

한 사람의 결정만 남았다.

무슨 일인지 송재덕 교수는 여전히 얼굴을 펴지 않았다.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인자한 성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까지 차며 일어났다.

사인방이 눈치만 보았다.

“이 교수, 신 교수, 지 교수는 내 입장 이해한다면서 왜 자꾸 힐끗거려? 말과 행동이 다르면 어떻게 하니? 어떻게? 내가 이래서 힘들다. 힘들어. 박 과장까지 총대 메라고 제사를 지내는구나. 제사를.”

시선은 사인방에게 꽂혀 있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문질렀다.

‘이 정도로 부담스러운 일을 너무 쉽게 생각했어.’

조금도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사인방 전체가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가장 가까운 관계인 이경석도 예외가 아니었다.

의문까지 가득할 뿐이었다.

‘우리 생각이 짧긴 했지만 절대 이러실 분이 아닌데.’

“오 교수, 자기는 왜 말이 없어? 왜?”

“저는 원장님 결정을 따를 뿐입니다.”

“나한테 다 미루는구나. 이것도 다 압력이야. 압력. 어떻게 원장인 내가 교수들한테 압력을 받니? 그중에 세 명은 조교수야. 조교수. 이게 말이 돼? 말이? 에이!”

뒤도 안 돌아보고 일어서 문을 열었다.

헛바람이 터졌다.

마음씨 좋은 사람이 화를 내거나 서운해하면 더 무서운 법이었다. 뜻밖의 사태에 사인방이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는 순간 그대로 사라질 줄 알았던 송재덕 교수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김지훈, 신현수, 손일석, 이경석, 내 방으로 와. 다시 들어야겠다. 다시. 날 설득하지 못하면 나도 원장단을 설득시킬 수 없어. 알았니? 알았어?”

“예, 원장님.”

사인방이 일제히 일어난 덕일까?

목소리가 확 변했다.

“이번 한 번은 봐준다. 이 교수 말이 맞다. 맞아. 우리만이 살릴 수 있지. 그래. 그래. 원장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너희들 넷이 이렇게 노력했는데 나도 노력해야지. 날 설득시키면 나도 너희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마. 내일 회의 연다. 열어. 대신 장미라 살려라. 꼭 살려야 한다.”

진짜 사라졌다.

맥이 탁 풀렸다.

안도의 한숨이 훅 터졌다.

갑자기 이혁민 교수와 신기동 교수가 웃었다.

“전공의 때부터 툭하면 놀라게 하시더니 나이 들어도 변하질 않으시네. 우리 교수들 제대로 교육시키셨다. 신 교수, 안 그러나? 경석이 니 간 안 떨어졌나?”

“설마 멋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

“누가 그걸 알겠나? 하하하!”

설마 지금까지 짜고 친 고스톱?

이제야 김지훈도 웃을 수 있었다.

농담 속에 뼈가 있다는 말 잊지 않았다.

판은 제자들이 벌였지만 정작 외과에서 가장 큰 짐을 지는 사람은 송재덕 교수였다. 그때그때 보다 자세하게 진행 상황을 설명했어야 했다.

마음속으로나마 장단을 맞췄다.

‘원장님, 다신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결정타 날리신 후 뒤도 돌아보지 않는 모습 정말 멋지십니다.’

손일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황야의 무법자를 보셨나? 총 한 방 날리고 그대로 사라지시네. 이준영 선생님 아니었으면 완전히 속을 뻔했어. 어쨌든 마음과 현실은 엄연히 다르다는 교훈 크게 얻었다.”

김지훈이 내심 웃고 말았다.

호응하지 않은 교수는 딱 한 명이었다.

역시 스승은 농담과 거리가 멀었다.

원장실을 찾았다.

최대한 냉철하게 설명했다.

“그래. 그래. 너희들 모두 이제 교수다. 교수. 끝까지 환자에 대한 정을 놓치면 안 되지만 현실 역시 절대 무시하면 안 된다. 알았지? 내 마음 이해하지? 그치? 잘했다. 잘했어. 내 새끼들답다. 허허! 허허허!”

“감사합니다.”

덕분에 많은 것을 배웠다.

치료에 임하는 자세, 환자를 대하는 마음만이 배워야 할 덕목이 아니었다. 선배로서 후배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도 절실히 느꼈다.

여하튼 미숙함에서 비롯된 우여곡절, 혹은 스승들의 장난기 섞인 가르침 끝에 첫 고비 무사히 넘었다.

감사할 따름이었다.

다음 날.

일반외과 요청에 의거해 원장단 회의가 열렸다.

일과 틈틈이 귀를 활짝 열었지만 예상 이상으로 길어진 회의에 애가 바짝 탔다. 오후 늦은 시간이 돼서야 원하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액수가 너무 커서 힘들었다. 힘들었어. 다들 부담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결국 재단에 건의하기로 했다. 긴 안목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이야. 단, 이번 일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자주 벌이면 그것도 민폐다. 민폐.”

“명심하겠습니다.”

“지훈아, 일석아, 이제 미라만 생각해라. 미라만.”

“감사합니다.”

사인방 모두 진심으로 감사함을 전했다.

“준영이 덕이야. 준영이 덕. 우리만이 살릴 수 있다는데 누가 반대를 하겠니? 누가? 병원 실적 생각하면서 자리에 연연해 봐야 몇 년이다. 몇 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회의 시간이 길어진 이유, 원장단이라 해도 재단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입장, 송재덕 교수가 얼마나 힘들게 설득했는지 말이다.

이로써 두 번째 고비를 넘었다.

일반외과 전체의 끈끈한 유대와 힘 덕분이라 할 수 있었다. 아울러 행여 있을지 모를 불이익을 감수한 원장단의 마음도 큰 몫을 했다.

마지막 난관만 남았다.

불행히도 신현수를 제외하면 재단 이사 중 의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환자 개개인의 사정보다 병원 전체, 특히 재정적인 부분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기에 마냥 선의나 호의만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물론 장미라 치료에 드는 비용이 억대라 해도 국내 굴지의 대형 병원 매출을 생각하면 극히 일부분이라는 시각도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매출은 수익이 아니다.

보험 수가 역시 원가에 미치지 못했다.

비영리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한때 여러 문제를 일으켰던 장례식장, 구내매점, 주차장에서 수익을 얻는 것을 합법화했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하고도 남았다.

수백 명에 달하는 수련의, 전공의, 전임의의 주당 백 시간이 넘는 엄청난 근무 시간과 낮은 보수가 아니면 그마저도 지탱하지 못할 구조였다.

그런 까닭에 절대 무시 못할 액수인 것이다.

송재덕 교수의 말에 반색하던 김지훈이 돌연 눈가를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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