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016화 (1,016/1,329)

2화

병동으로 돌아가던 김지훈이 중환자실에 들렀다.

“미라야, 오늘 하룻밤만 더 있자. 이번에는 진짜야.”

장미라의 전신 상태가 좀처럼 호전되지 않아 거짓말을 한 꼴이었다. 이런 일에 익숙한지 고개만 끄덕일 뿐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걱정을 끼치려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부모도 아닌 의사에게까지 말이다.

‘오래 아파서 그러니? 너무 빨리 컸다.’

가슴이 아려 왔다.

최인선 환자를 보며 위안받을 수 있었다.

완치가 아닌 탓에 데메롤과의 싸움은 평생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일상의 삶으로 돌아가려는 의지를 잃지 않은 덕에 의존성에서 많이 벗어났다.

드디어 코 줄까지 뺄 수 있게 됐다.

“이 상태로 가면 내일 아침에 빼 드릴 겁니다. 시간 나는 대로 운동하시고, 데메롤과의 싸움도 이겨 내야 합니다.”

“고맙습니다.”

오랜 시간 유지된 코 줄로 목소리가 탁하게 갈라졌지만 눈빛은 맑았다. 그 속에 담긴 희망이 의료진의 우려를 덜어 주고 있었다.

압박감이 다소 줄었다 해도 앞으로 남은 수술이 주는 부담은 상상을 초월했다. 퇴근 전 간 이식 자료를 검토하며 펠로우를 찾으려던 김지훈이 피식 웃고 말았다.

‘셋 다 혈관 수술 들어갔단 말이지? 일석이 그 자식 신나게 수술하겠네. 끙! 나도 열심히 준비하자.’

동료가 주는 힘 결코 약하지 않았다.

집도의에게 요구되는 면도 다양했다.

김지훈이 최대한 끼니를 챙겼다.

‘체력 떨어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두 건의 간 이식 수술 준비를 위해 남은 힘을 다해야 할 때였다. 당연히 다른 환자에게 문제가 없어야 집중할 수 있다.

정규 일과 내내 정신 바짝 차렸다.

덕분인지 시작이 순조로웠다.

장미라가 중환자실을 벗어났다.

부모 모두 공여에 필요한 검사를 마쳤다.

이제 한 병실에서 엄마 품에 안겨 결과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매일매일 일터를 찾아야 하는 아버지의 빈자리가 다소 아쉬웠다.

김지훈이 입술을 깨물었다.

가난이 끝끝내 한 가족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누가 간을 떼어 주든 미라까지 간병하려면 부부 모두 몇 달은 일을 하지 못할 텐데 병원비만 문제가 아니구나. 그 이후에는 또 어떻게 살아가지?’

훗날 일이고, 의사가 책임질 영역도 아니었지만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제도적인 구제책이 마련되길 바랄 뿐이었다.

그나마 다른 가족에게 경제적인 문제는 없었다.

정재복 환자와 가족이 수술에 적극적 의사를 밝혔다.

혈액형 차이에 따른 위험성부터 간을 공여해야 하는 아들이 주의해야 할 부분까지 산적한 문제가 많았지만 청신호임이 분명했다.

더불어 최인선 환자도 무난한 회복을 보여 한시름 놓았다. 전적으로 복강경 덕만은 아니겠지만 여러 면에서 개복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것만은 확실했다.

수술 팀도 일상을 바짝 조였다.

이준영 교수, 김지훈, 손일석이 주축이 돼 수술 계획 논의에 돌입했다. 비록 수술 팀은 아니지만 오창도 교수도 상당한 열의를 보였다.

펠로우들의 퇴근이 늦어지기 일쑤였다.

정규 일과 후 수술 논의 참석 아니면 혈관 수술을 참관해야 했다. 일복 터진 써전과 당직이라도 걸리면 그야말로 초죽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강요하기보다 본인 스스로 먼저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선배와 스승이었기에 어떤 불평과 불만도 터트리지 못했다.

무엇보다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

하기에 기꺼이 감수했다.

전공의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고경철의 얼굴이 까맣게 죽었다.

이런저런 일로 집도식이 보름 이상 뒤로 밀렸지만 아뻬 하나 더 받은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귓가를 울리는 공포의 다시 소리에 부족한 잠마저 편하지 못했다.

‘송진우 선생님도 무섭다.’

치열한 하루하루가 흘렀다.

마침내 토요일 아침이 밝았다.

주말 집담회는 어떤 일이 있어도 취소되지 않는 성역이었다. 매주 같은 장소, 같은 교수들이건만 적응은커녕 치열함을 넘어 이젠 격렬 그 자체로 변했다.

간담췌 펠로우들이 죽어났다.

췌장 공장 문합술 발표도 모자라 참관한 죄 하나로 혈관 수술에서도 집중포화에 시달렸다. 유방 수술을 두고 이혁민 교수와 신기동 고수에게 조곤조곤 깔끔하게 다져진 오하석이 부러울 정도였다. 찰랑찰랑 흩날리던 머리카락이 윤기를 잃고 푹 젖어드는 정도로는 비교 자체가 불가했다.

“부부가 쌍으로 탔네.”

“그래서 조금 불쌍해.”

고경철은 깍두기였다.

“아뻬가 터져 뿌리 부분까지 녹았으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니? 경철아, 아뻬를 두 건이나 받았다면서 왜 말이 없니? 왜? 농양이 발생한 아뻬가 오면 어떻게 할래? 어떻게?”

더듬더듬, 멈칫멈칫.

말 더듬은 죄로 귀가 따갑도록 무한 반복되는 사랑의 질문과 너털웃음을 들어야 했다. 온몸이 젖을 정도로 식은땀 줄줄 흘렸으니 꿈에서도 시달릴 것이다.

몰랐던 지식, 경험해 보지 못한 수술과 치료, 선배 의사들만의 지혜를 엿보는 공포의 시간이 무려 한 시간 반 만에 끝났다.

휴식을 취하며 뻑뻑한 목을 풀어야 하는 시간이었지만 불행히도 펠로우들과 고경철은 예외였다. 병동에 전화를 걸며 부리나케 자리를 정리했다.

잠시 후, 따스한 커피 한 잔 즐긴 간담췌 파트 교수들과 손일석이 들어왔다. 만면에 걸쳐 있는 여유가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환자분들 아직 안 내려왔나?”

이준영 교수 앞에서는 찍소리조차 불가능했다.

이내 문이 열렸다.

정재복 환자 부부와 아들, 장미라의 부모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불안, 두려움 속에 희망과 기대의 눈빛이 교차했다.

각기 따로 만나 설명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같은 치료를 해야 하는 가족이 또 있다는 사실에 힘을 얻길 바랐다. 두 환자 모두 상당한 위험 요인을 가졌으니 무리한 기대가 아니었다.

김지훈이 말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자리가 불편하시더라도 잠시만 참아 주십시오. 서로 처음 보시겠지만 두 가족 모두 가족 내에서 간을 주고받아야 해서 한자리에 모셨습니다. 부담이 크실 테지만 먼저 수술에 동의하시는지 알려 주십시오.”

생체 간 이식이었다.

수혜자의 동의보다 공여자의 의사가 무척 중요했다. 작지 않은 수술을 통해 간 일부를 떼어 내야 하는 만큼 가족이라 해도 마음을 바꾸는 일이 발생할 수 있었다.

다행히 우려할 일이 없었다.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혈액형이 맞지 않아도 가능하다는 소리에 바로 달려왔습니다.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아버님 건강을 되찾아 주고 싶습니다.”

“우리 딸에게 해 줄 것은 간을 주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여자 동의서를 받았다.

수차례 반복해 확인하는 일은 의미가 없었다.

부모와 자식에 대한 사랑을 믿어야 했다.

“고맙습니다. 이제부터 확실하게 진행하겠습니다. 오늘은 일단 수술 전에 필요한 전반적인 준비와 주의할 사항만 설명드리겠습니다. 구체적인 수술 방법 및 진행, 위험 요소, 합병증에 대한 것은 일정이 잡힌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공여자와 수혜자를 가리지 않는 문제인 감염부터 전신 상태 유지까지 상세히 설명했다. 전신 마취하에 수술을 앞둔 모든 환자들이 유의해야 할 사항들이었지만 간 이식 환자들에겐 특별한 주의가 요구됐다.

“정재복 환자분은 혈액형 불일치, 미라는 재수술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하다못해 감기도 수술 연기 사유가 됩니다. 제가 드린 말씀 잘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 끝으로 누가 수술할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공여자 수술 팀으로 이준영 교수와 펠로우들을 소개했다. 생살을 찢어 간을 떼어 내야 하는 공여자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할 의료진이었다.

“이준영입니다. 검사는 다 받으셨으니 수술 이틀 전에 입원하시면 됩니다. 수술 시간은 다섯 시간 전후가 될 겁니다. 별문제가 없을 시 대략 일주일에서 열흘 후 정도에 퇴원이 가능합니다.”

“퇴원 후 일상생활은 가능합니까?”

“육 개월까지는 무리한 활동을 피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절제된 부위의 간도 빠르게 자라 정상 크기로 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결심한 일이지만 사람인 이상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이준영 교수의 충분한 설명과 확신 어린 목소리가 도움이 될 것이다.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이준영 교수와의 대화가 끝났다.

김지훈이 손일석에게 눈짓을 했다.

“혈관 수술을 담당하고 있는 손일석입니다.”

“손일석 선생과 함께 제가 환자분과 미라의 수술을 맡게 됐습니다. 지켜야 할 사항은 공여자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만, 기본적으로 몸이 안 좋은 만큼 철저하게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세부 사항을 떠나 이식을 앞둔 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았다.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윤석진이 허겁지겁 들어와 눈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죄송합니다. 병동에 일이 있어서 늦었습니다.”

자신의 주치의를 본 정재복 환자가 상당히 편안한 얼굴로 물었다.

“선생님, 언제 수술받을 수 있습니까?”

“환자분에게 사용할 면역 억제제를 구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윤석진 선생과 함께 투여 방법에 대해 논의도 해야 하고요. 게다가 미라가 열네 살 아이이기 때문에 환자분보다 먼저 수술하게 될 겁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순서는 상관없습니다. 빨리만…….”

정재복 환자가 돌연 입을 열지 못했다.

무언가를 꾹꾹 누르며 참다 참다 결국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들의 손을 잡았다.

소리 내 울지 않으려 어깨만 들썩였다.

아비가 살기 위해 자식의 몸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더 이상 감정을 통제하지 못했다. 수술을 재촉하는 자신의 모습에 죄책감마저 느낄 것이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아버지! 전 괜찮아요.”

아들과 아내도 울음을 참지 못했다.

경우가 다르다 해서 아픔이 다를 리 없었다.

미라의 부모도 서럽게 흐느꼈다.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차라리 내가…….”

애간장이 찢어지고, 타들어 갔다.

모두들 조용히 기다렸다.

뇌사자 장기 기증 이상의 감정적 동요를 극심하게 겪을 수밖에 없었다. 결코 쉬운 수술도 아니었다. 하물며 생체 이식, 그것도 가족의 몸이기에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누군가 헛기침을 터트렸다.

냉철한 이성으로 환자를 대해야 하는 의사들도 이런 순간만은 참기 어려웠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미국에서도 많이 경험했지만 아픈 사람을 수술하는 경우와 확실히 달라. 우리 손에 네 명의 건강이 달렸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한 가족의 평안과 건강이 걸린 수술이었다.

꽤 오랜 시간 울음소리만 들렸다.

정재복 환자가 간신히 울음을 멈췄다.

“주책없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수술을 성공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알려 주셨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리 미라 꼭 살려 주세요.”

생때같은 자식을 잃을까 단 하룻밤 잠도 제대로 못 이뤘을 엄마와 아빠의 얼굴은 까맣게 타들어 간 지 오래였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커 버린 장미라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막중한 책임감과 부담을 안고 환자와의 1차 만남을 끝냈다. 수술 전후로 긴밀히 협조해야 하는 윤석진과 몇몇 사안을 상의한 후 회의실을 나왔다.

김지훈이 크게 어깨를 뒤로 젖혔다.

‘후우! 동의까지 받았는데 아직 첫발도 넘지 못했다. 현수가 어떤 소식을 들고 올까?’

정재복 환자의 수술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반면 장미라는 이미 많은 부분을 진행했음에도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감정을 앞세워 무턱대고 수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주말 집담회가 끝나자마자 정훈철을 만나러 간 신현수와 이경석이 전해 올 소식을 기다려야 했다. 부디 두 건의 간 이식 수술과 맞물려 최상의 결과가 도출되기만을 바랐다.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초조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김지훈이 간만에 가족과 토요일 오후를 함께하면서도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몇 번이고 연락하고 싶었지만 자칫 과도한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결국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휴대폰이 울렸다.

“현수야, 어떻게 됐어?”

(이사님들 눈에 들지 애매모호하지만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었어. 훈철이 형님이 우리보다 더 신경을 써 주셨어. 수술 끝난 후 술 한 잔 사기로 했다. 참! 환자들 모두 수술에 동의했지?)

“곧바로 진행해도 문제없어.”

(잘됐다.)

한동안 통화가 이어졌다.

(오케이! 월요일에 보자.)

확실한 결과물을 얻었다.

신현수는 송재덕 교수가 버티고 있는 원장단을 충분히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병원 운영이 일차적 목표인 재단 이사회는 성격 자체가 달랐다.

특히 병원을 책임지고 있는 신동철 이사장이 핵심이었다. 한 사람조차 설득하지 못한다면 냉정하게 사안을 판단하는 거대한 벽, 이사회를 결코 넘지 못할 것이다.

막상 판을 다 벌여 놓으니 더 초조해졌다.

월요일 오후에 예정된 원장단과의 만남을 기다리며 주말 틈틈이 제임스가 보내 준 자료를 검토했다. 제법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고경아와 간 이식 수술을 상의하며 다소나마 불안을 지울 수 있었다.

힘을 주는 사람은 아내만이 아니었다.

희연이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대화를 나누던 김지훈이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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