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신현수와 통화하기에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증례 파악도 다 하지 못했고, 대상이 될 환자와 보호자 의향부터 확인해야 했지만 점점 마음이 급해져 애가 탈 지경이었다.
곧바로 퇴근한 김지훈이 희연이와 잠시 놀아 준 후 메일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 또 한 명의 환자에게는 분명 희망적인 소식이었고, 장미라에게도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로 떼어 놓고 보면 각각의 일에 불과하지만, 하나로 엮으면 병원과 재단의 결정에 영향을 주고도 남을지 모른다.’
고경아에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어때요? 원장단과 이사장님께 이런 식으로 말하면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난 설득당할 것 같긴 해요.”
“오케이! 환자만 동의하면 한꺼번에 해결될 수도 있겠어요. 그 전에 자료부터 완전히 숙지해야겠죠?”
김지훈이 고경아와 함께 꽤 늦은 시간까지 책상을 지켰다. 아내는 간호대 교수가 되기 위해, 남편은 장미라와 정재복 환자의 간 이식을 위해 스탠드를 밝혔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아예 없는 것보다 잡을 수 있는 것이 훨씬 나은 법이다.
김지훈의 발걸음에 힘이 실렸다.
‘하나하나 준비해 나가자.’
난이도와 별개로 어떤 수술이든 기본과 원칙은 동일했다. 또한 매 수술에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붓는 써전이 수술을 잘하기 마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손일석은 최고의 파트너였다.
“일석아, 부탁 하나 하자.”
“아침부터 무슨 부탁?”
“장미라 수술 같이하자.”
“뭐? 나보고 퍼스트 서라고?”
“혈관 전문의가 필요해.”
손일석의 입가가 말렸다.
내심 바라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하하하! 김 교수가 날 제대로 보고 있었네. 간 이식의 핵심은 절제가 아니라 혈관 처리지. 역시 내가 적임자 아니겠어? 간정맥, 간문맥, 간동맥 모두 확실하게 이어 주마.”
“고맙다. 다 좋은데 집도의가 나라는 사실 잊지 마.”
“아후! 당연하지. 간 이식 수술인데 누가 감히 김 교수 자리를 넘보겠어? 대신 혈관 넘보지 마라. 어디까지나 각자 영역 속에서 손을 빌려주는 것뿐이다.”
‘자식! 네 계획 속에 나도 포함돼 있다는 말이 이거였어? 간 이식 때마다 들어가 줘야 한단 말이지. 너랑 손 맞추면 깔끔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부탁 하나 더 하자.”
“말씀만 하세요.”
“우리 파트 펠로우들에게 혈관 수술을 가르쳐 줬으면 해. 생체 간 이식 때는 공여자 수술 역시 혈관 처리가 정말 중요하잖아.”
“이준영 선생님이 계시잖아?”
“간암 수술이 적지 않아. 공여자 수술까지 전담하시면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어.”
“하긴 이젠 나이가 있으셔서…….”
영원히 제자의 앞을 밝혀 줄 줄 알았던 스승이었다.
이마에 그려진 주름이 하나둘 늘어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척 가슴 아픈 일이었다. 제자들의 마음과 달리 송재덕 교수를 비롯해 이혁민 교수, 신기동 교수 모두 다르지 않았다.
말끝을 흐리던 손일석이 급히 표정을 바꿨다.
“좋지! 내가 간절히 원하던 바야. 나도 수술하며 태울 놈이 절실하게 필요했거든.”
“전문의다. 예의 지키면서 살살 다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거야. 조교수인 나도 툭하면 칠지도에 찔리는데, 내 비수 맛보기 싫으면 못 배우는 거야.”
그렇긴 했다.
요란한 말 이상으로 누구보다 성심성의껏 가르칠 손일석이었고, 이를 모를 펠로우들도 아니었다. 혈관 외과가 쉬운 분야도 아니고 말이다.
김지훈이 미소를 머금다 말고 슬쩍 고개를 돌렸다.
문득 신규 병원이 떠올랐다.
언제 어디서나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동료이자 친구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수술하며 모두의 미래를 열어 가고 싶었다.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수는 없지만, 일석이와 경석이 형만은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욕심이겠지. 누구보다 빨리 과장, 병원장이 된 경석이 형과 일석이를 보는 게 더 멋진 일인가?’
훗날의 바람이었다.
지금은 여러모로 힘들고 복잡한 시기였다.
현실에 충실하지 못하면 어떤 일도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없는 법이었다. 손일석과 깊은 말을 나눌 때가 곧 다가올 것이다.
한동안 나직한 대화를 이어 간 김지훈이 회진을 마치자마자 펠로우들을 불렀다.
“이혁원, 나종진, 송진우, 너희 모두 장미라가 간 이식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
“예. 알고 있습니다.”
“생체 간 이식이기 때문에 공여자 수술 또한 수혜자 수술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점도 잘 알고 있을 거야. 감담췌 파트라면 누구나 참여하고 싶은 수술이지만 불행히도 퍼스트는 이 중 한 명밖에 설 수 없어.”
다들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말았다.
공여자, 수혜자 수술이니 최소 두 명은 퍼스트를 설 줄 알았던 펠로우들이었다.
“왜 한 명입니까? 누가 섭니까?”
“최종 결정은 안 났지만 공여자 수술은 이준영 선생님이 집도하시고, 수혜자 수술은 손일석 선생과 내가 하게 될 거야. 남은 자리가 어디인지 알겠지?”
이혁원이 눈가를 굳혔다.
누구나 욕심낼 정도로 귀중한 기회였다. 하지만 수술 자리를 두고 무의미한 경쟁을 유도할 김지훈이 아니었다. 무엇인가 다른 요인이 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공여자 수술에 들어가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굳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세컨을 서도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예리한 놈!’
“공여든 수혜든 간 이식의 핵심은 간 절제와 더불어 정확한 혈관 처리야. 이번 수술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혈관 수술에 숙달된 써전이 필요해. 시간 나는 대로 신기동 선생님과 손일석 선생 수술 들어가. 이번 수술 퍼스트는 혈관 파트에서 정할 거야.”
헉! 소리 터졌다.
신기동 교수의 칠지도와 손일석의 비수에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능력과 강한 열정을 보인 사람이 퍼스트를 서게 될 것이다.
당연히 부딪쳐야 할 일이었다.
또한 철저함을 기본으로 하는 김지훈의 성격, 수술의 난이도와 더불어 장미라가 어떤 상태인지 빤히 아는 이상 날로 먹을 수 있는 수술 자체가 아니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준비만으로도 췌장 복강경 이상으로 수술 전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할 환자였다. 여기에 혈관 수술까지 참여하라니 퇴근 반납하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수술이었다.
‘김지훈 선생님이 시작한 이상 간 이식 또한 간담췌 파트 주요 수술이 될 게 분명해. 이번 기회를 잡아야 또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간담췌 파트 써전에게 요구되는 능력을 확실하게 갖춰야 자신의 입지를 구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했다.
피할 수 없는 경쟁이 분명했다.
펠로우 모두 이를 악물었다.
김지훈이 한 방 더 날렸다.
“우리 펠로우 선생들 집도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긴장하는지 잘 알지? 열심히 하고 있는 건지, 대충 삼 년 때우고 라파로나 배워 나갈 생각인지 감별하기 참 어렵더라. 여기에 개복 수술 실력과 이론 평가까지 필요해서 보통 난감한 게 아니야. 교수 되기도 어렵지만 뽑는 일은 더 어려운 것 같아. 원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말이야.”
헛바람 연신 터졌다.
명백한 협박이었다.
복강경과 개복을 가리지 않고 간담췌 수술, 혈관 수술, 이론을 강조한다는 말은 결국 한시도 긴장 늦추지 말라는 말이었다.
전공의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이 될 것이다.
다른 누구의 말도 아닌 김지훈의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다.
실수는 용납해도 노력하지 않는 써전은 절대 인정하지 않는 의사의 요구였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김지훈 뒤에는 더 무서운 이준영 교수가 버티고 서 있었다.
펠로우 세 명의 어깨가 동시에 떨렸다.
말로 끝낼 김지훈이 아니었다.
교육과 수련을 잊지도 않았다.
정규 수술이 진행되는 내내 집중했다.
메스를 넘긴 수술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원 포트 수술까지 배워야 하는 펠로우 입장에선 도리어 환영할 일이었다.
가뜩이나 열심히 일하는 펠로우였다.
그럼에도 어딘가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한 오창도 교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들 왜 이렇게 적극적이야?’
이준영 교수는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볼 뿐이었다. 공여자 수술 퍼스트를 누가 서게 될지 궁금했지만 꾹꾹 누르고 있었다.
‘혁원아, 지훈이가 정한 기준에 들어야 한다.’
오후 수술을 마친 김지훈이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부지런히 병동을 찾았다. 평소보다 빠른 회진에 잰걸음을 놀리던 고경철이 당황하고 말았다.
‘회진 준비 다 못했는데 죽었다.’
담담히 책임지면 된다.
화르륵! 화르륵!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부분을 놓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문득 하루 종일 수술실에 있었는데 어떻게 자신보다 환자 상황을 잘 아는지 궁금했지만 이내 머리를 숙여야 했다.
“점심시간에 오시고 또 오셨네요.”
환자의 한마디 말로 모든 것이 설명됐다.
어쨌든 교수 한 명의 일과가 빨리 끝났다.
그만큼 여유가 생겼다는 생각도 잠시 허겁지겁 김지훈의 뒤를 따라야 했다.
“경철아, 정재복 환자 보러 내과 병동 가자.”
더 이상 외과 치료가 필요한 환자가 아니었다.
수술한 써전의 관심으로 보기에는 의아한 일이었다.
병실로 들어섰다.
정재복 환자의 안색만큼 분위기가 어두웠다.
복수가 차 불룩한 배, 노란 눈과 피부, 바짝 마른 팔다리까지 수술로 목숨은 건졌지만 지금도 간경화가 악화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루하루 예정된 죽음을 기다리며 죽어 가는 자신을 느끼는 환자의 마음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어떤 치료로도 간이 회복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완전히 희망을 잃은 얼굴이었다. 무기력하게 곁을 지키는 보호자 역시 체념의 빛이 역력했다.
김지훈의 방문이 반갑긴 한 모양이었다.
보호자가 희미한 웃음을 보였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오셨어요?”
“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환자분, 보호자분, 지금이라도 이식이 가능하다면 받으시겠습니까?”
환자와 보호자가 눈만 껌벅거렸다.
“간 이식이 가능하다고요?”
“그렇습니다.”
“기증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생체 이식을 제한했던 조건을 돌파할 길이 생겼습니다. 가장 적합하다고 판정됐던 아드님의 동의와 용기가 또 한 번 필요합니다.”
환자와 보호자가 동시에 눈가를 찡그렸다.
“혈액형이 맞지 많아 불가능하다고 하셨잖아요?”
“맞습니다. 여전히 적합도 검사 이상으로 혈액형 일치 여부가 중요합니다만, 최근에 미국 병원에서 최신 자료를 받았습니다. 몇 년 전 혈액형이 다른 환자에게 간 이식을 시도했고, 지금도 건강하게 생존하고 있답니다.”
의사가 아닌 이상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건강, 생존이라는 단어야말로 정재복 환자가 가장 원하는 말이었다.
“수술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제가 살 수 있다는 말입니까?”
환자 목소리가 떨렸다.
“어떤 사람에게든 한 사람에게라도 가능했다면 환자분에게도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다만 모든 검사가 적합한 경우보다 위험한 것은 확실합니다. 아드님의 동의도 필요하고요. 토요일 오전에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때 뵐 수 있을까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개만 끄덕였다.
보호자가 달려 나와 이것저것 물었지만 김지훈에게도 충분히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당연히 수술 팀이 될 파트 써전과도 사전 논의가 필요했다.
“많이 궁금하시겠지만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곧바로 주치의인 윤석진을 만났다.
이식이 가능하다는 소식에 뛸 듯이 기뻐하면서도 혈액형 불일치를 걱정했다. 역시 어느 방면이나 새로운 시도는 불안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환자부터 만나 미안하다. 자료 줄 테니까 검토해 봐. 이왕이면 토요일에 같이 환자 만나자.”
“아직은 내 환자니까 당연히 참석해야지. 자료에 허점은 없겠지?”
“미국 애들이 논문 윤리는 정말 확실하게 지키잖아. 부정 요소가 있으면 논문 철회 정도가 아니라 매장이야, 매장.”
“기대해도 되겠네. 빨리 보내 줘.”
윤석진이 상당히 적극적으로 나왔다.
이로써 오늘 만나야 할 사람은 다 만났다.
김지훈이 훅 숨을 내쉬었다.
장미라 단 한 명에게 국한된 수술과 연속된 간 이식 수술이 주는 의미는 분명 달랐다. 여기에 정훈철이 조금만 도와준다면 재단에서도 보다 큰 의미를 부여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희망을 갖자. 환자도, 우리도 마음 편히 수술해야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
앞으로 나갈 힘이 생겼다.
결과를 떠나 췌장 수술 때와는 비교도 하기 어려운 수술이었다. 재수술을 해야 하는 열네 살 어린아이, 혈액형이 맞지 않는 환자까지 철저한 준비만이 살길이었다.
김지훈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귀국 후 부담 없이 지낸 날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당장 최인선 환자의 데메롤과의 싸움도 끝나지 않았고, 수술 부위의 안정 역시 확신할 수 없는 시기였다. 누구에게도 벅찰 중환이 줄줄이 이어지는 꼴이었다.
‘여러모로 힘들다. 힘들어.’
아무리 강한 태풍도 시간이 지나면 소멸된다.
이런 날도 곧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물론 때가 되면 다시 오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