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013화 (1,013/1,329)

19화

잔뜩 얼굴을 굳힌 채였다.

“어렸을 때 이어 준 담도와 소장 연결 부위 상부에 담도가 관찰됩니다. 간에 비해 담도 굵기가 가늘긴 하지만 기존 연결을 제거하고 다시 연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술이 가능하다는 말이지? 후우! 다행이다.”

정훈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어떻게든 선의에 기댄 병원의 협조와 부족한 비용을 마련하는 일만 남았다. 전액 무료로 치료할 수 있다 해도 간병과 생활에 드는 돈 자체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김 교수, 내가 늦게 오는 바람에 오늘은 늦었으니까 다음 주에 다시 약속 잡자. 그게 좋겠어.”

김지훈이 굳은 얼굴을 펴지 못했다.

“형님, 괜찮으시면 오늘 가죠. 아이를 꼭 봐야겠습니다.”

“벌써 여덟 시가 다 됐어.”

“시간이 늦었습니다만, CT 찍은 날짜가 너무 마음에 걸립니다. 희귀 질환 특성상 사 년 전 소견을 믿고 병원을 설득하거나 치료를 진행시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계속 시간을 낼 수도 없고요.”

신현수를 비롯해 사인방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모인 자리였다.

저마다 당직에 개인 일정이 있다.

하루 저녁 투자로 하루 이상을 아낄 수 있을 것이다.

장미라를 보기 위해 출발했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있는 이경석이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동행을 원했던 신현수가 도리어 단칼에 잘랐다. 자칫 확정되지도 않은 일을 두고 과도한 기대와 실현되지 못할 희망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네 명 모두 갈 상황이 아니긴 했다.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을 수도 있어요. 도움을 청할 때 적극적으로 움직여 주세요.”

물론 말로 설득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고경희의 허락만 떨어지면 뒤로 뺄 궁리 자체를 안 하는 성격을 가진 손일석이었다. 말도 하기 전에 자청해서 운전대를 잡았다.

“현수야, 필요한 얘기가 있을지 모르니까 훈철이 형하고 가. 김 교수, 내 차로 가자.”

도로가 혼잡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동안 김지훈은 별말이 없었다.

현재 아이의 상태가 무척 궁금했다.

한 번 칼을 댄 사람의 몸은 헌 집 허물고 새집 짓듯 고칠 수 없다. 그나마 사 년 전과 비슷한 상태면 다행이지만 수술 자체의 난이도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손일석도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지훈아, 기존 수술 부위가 주변 조직과 완전히 달라붙었을 텐데 재수술하게 되면 몇 시간을 잡아야 할까?”

“예측이 안 돼. 다른 수술은 아예 못 잡을 것 같다.”

“담도 폐쇄가 더 진행됐으면 어떻게 하지?”

선천성 담도 폐쇄는 다양한 경과를 보이지만 문제없이 성장할 확률은 10퍼센트 정도에 불과했다. 완치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아 대부분 각종 합병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최악이 아니기만 바라자.”

‘증상 발현 후 사 년 동안 보존 치료는 제대로 받았을까? 지금까지 버텼다면 새로운 통로를 만들어 주는 것으로 충분할 수도 있다. 희망을 갖자.’

대로를 벗어났다.

드문드문 가로등만 희미하게 불을 밝힌 골목을 앞에 두고 차를 세워야 했다. 언덕길을 따라 오르는 동안 답답한 한숨만 터졌다.

형편 좋은 동네가 아니었다.

장미라가 그동안 왜 치료를 못 받았는지, 왜 정훈철과 환우회가 발 벗고 나섰는지 굳이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가난! 가난 말고 다른 이유는 없었다.

환아의 집에 도착했다.

정훈철이 먼저 들어가 도착을 알렸다.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이들이 급히 달려 나왔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십니까? 김지훈입니다. 아이가 많이 아프다고 해서 보러 왔습니다. 만나 볼 수 있을까요?”

“들어오세요. 마실 거라도 드려야 하는데…….”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단칸방이 부모와 아이 셋의 보금자리였다.

작고 여윈 아이가 누워 있었다.

단지 성인 두 명이 더 들어갔을 뿐인데 앉아 있기 힘들 정도로 좁았다. 정훈철에게 양해를 구하고 신현수와 함께 장미라를 살폈다.

“미라야, 어디 아픈 데는 없니?”

“배, 배가 아파요.”

“우리가 볼 수 있을까?”

살며시 이불을 들췄다.

절로 탄식이 터졌다.

팔다리는 앙상하건만 배가 볼록 솟아 있었다.

‘복수가 찼나?’

가벼운 타진에도 통증을 호소했지만 문제는 고통이 아니었다. 탄탄하게 전해지는 감촉은 배 속에 복수가 상당 부분 차 있다는 의미였다.

‘설마 간경화까지?’

어떤 합병증이 발생했는지 모르지만 당장 눈으로만 봐도 아이 상태가 좋지 못했다.

김지훈이 장미라의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정상을 넘어선 체온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마치 졸음이 쏟아지는 듯 목소리에 힘이 없었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미라야, 엄마 아빠가 어디 앉아 계신지 말해 줄 수 있겠니? 오늘 하루 종일 뭐 했어?”

“네……. 네.”

엄마 아빠를 가리키긴 했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극도로 나빠진 전신 상태 때문이겠지만 덜컥 의식마저 흔들리는 것이 아닌지 불안해졌다.

어두운 불빛에도 불구하고 황달까지 의심됐다.

담도 계통의 염증이 패혈증을 유발했을지도 몰랐다. 최악의 경우 체내 독성 물질을 분해하지 못해 일어나는 간성 혼수일 수도 있었다.

순간 이 지경이 되도록 아무 치료도 받지 못했단 사실에 상대를 특정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그보다 한 가족의 말도 못할 가난에 가슴이 아팠다.

‘누가 부모를 탓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안타까운 사실은 장미라의 상태가 나빠진 원인이 무엇이든 극도로 위험한 상황이란 점이었다.

절대 외면할 수 없었다.

김지훈이 신현수를 보았다.

“현수야, 바로 입원시켜야 돼.”

신현수가 콧등을 찡그렸다.

이대로 방치했다간 한 아이의 목숨을 잃을 것이다.

치료 이외의 문제로 미적거릴 때가 아니었다.

“후우! 이러다 큰일 나겠다. 빨리 119 불러서 이송하자. 보호자분, 아이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일단 우리 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하겠습니다.”

아이 부모의 안색이 변했다.

이 와중에도 덜컥 도저히 마련할 길 없는 돈이 떠오른 것이다. 한계를 넘어 극한의 상황에 몰린 가족을 탓할 수 없는 문제였다.

수차례 반복된 일이었다.

수술만이 딸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어마어마한 비용에 꿈도 꾸지 못했다. 그렇다고 생때같은 아이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동안 빚까지 얻어 급한 상황을 모면했지만 이젠 그마저 불가능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형편은 입원 치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간장이 끊어지는 아픔과 자책만이 남았다.

“돈이 많이 들…….”

“지금은 돈 걱정할 때가 아닙니다. 비용은 저희가 최대한 알아서 처리할 테니 아이만 보세요.”

아이 엄마가 눈물을 쏟았다.

“제발 우리 딸 살려 주세요.”

눈시울이 붉어진 아버지는 고개도 돌리지 못했다.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119가 와도 집 앞까지 차가 들어올 수 없었다.

김지훈이 장미라를 업었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일석아, 앞장서. 차 있는 데까지 가자.”

다행히 119가 제때 도착했다.

김지훈이 상태를 설명한 후 양해를 구하고 앰뷸런스에 동석했다. 손일석과 정훈철도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따라 비상 깜빡이를 켜고 달렸다.

얇은 담요 하나 덮은 채 산소마스크까지 쓴 장미라가 달달 떨었다. 창백한 안색과 이마를 적신 식은땀은 고열의 징후였다.

최대한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김지훈이 외과 당직 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급실에서 대기하며 도착 즉시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조처했다.

일 분이 한 시간처럼 길었다.

끼이이익!

응급실에 도착했다.

드르르륵!

고경철과 간호사가 달려 나와 장미라를 처치실로 이송했다. 바이탈을 체크하고, 즉각 혈액 샘플을 내보낸 후 나이와 질환을 고려한 최적의 수액을 달았다.

정확한 상태를 파악해야 적절한 치료를 할 수 있다.

“경철아, CT 바로 접수시키고. 항생제 투여해. 3세대 세파 쓰자.”

잠시 후 정훈철 일행이 도착했다.

외과 교수가 셋이나 나타나자 다들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환자의 특별한 위치를 고려할 의사들이 아닌 데다 빈한해 보이는 보호자의 행색이 더욱 궁금증을 자아냈다.

“어떤 환자기에 세 분이나 오셨지?”

“그러게. 친척으로 보이지도 않는데, 다들 가실 생각도 안 하고 정말 이상하네.”

일일이 설명할 상황이 아니었다.

마음이 급해진 김지훈이 직접 CT실로 가 검사를 확인했다. 윙 소리와 함께 모니터에 복부 단면이 차례차례 나타났다.

김지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가를 비비며 괴로워했다.

예상대로 복수가 차 있었다.

문제는 원인이었다.

담도가 좁아져 폐쇄된 부분이 광범위하게 관찰됐다. 그로 인해 지난 사 년 동안 정도만 다를 뿐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간 내 염증이 지속됐을 것이다.

결과는 간경화였다.

불과 열네 살 어린아이에게 말이다.

왜 치료 시기를 놓쳤을까?

경제적인 문제 말고 생각할 이유가 없었지만 화가 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어린아이가 왜 죽음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지, 그동안 이 사회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답답할 뿐이었다.

깊은 정적 속 나직한 한숨만 터졌다.

응급실로 돌아온 김지훈이 정훈철을 찾았다.

“형님, 간경화까지 발생했습니다. 그 전에 수술했어야 했고, 수술밖에 치료가 없었는데 왜 이렇게 늦었을까요? 지금은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정훈철 역시 사태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아이가 어렸을 때도 넉넉하지 않았지만 중간에 사기까지 당한 모양이야. 부모 모두 일용직으로 일하며 빚을 내 아이를 치료해 왔다는 말을 들었어. 그나마도 아이 상태가 나빠지면서 엄마는 일도 못하는 상황이야.”

김지훈이 차트를 확인했다.

의료보호가 아니라 의료보험이었다.

아마도 빚을 갚기에 턱없이 부족할 단칸방이 재산으로 잡혔을 것이다. 아이 치료에 다 써야 했을 부모의 수입도 소득으로 계산돼 의료보호 기준을 넘어갔을 것이다.

절로 욕이 나왔다.

넉넉한 집 아이라도 절대 이런 병에 걸리면 안 되겠지만 가난은 분명 치명적인 덫이었다. 게다가 드물다는 이유, 혹은 치료 효과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많은 희귀 질환이 보험에서 제외되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었다.

현실이 개탄스러울 지경이었다.

모두가 같은 심정일 것이다.

눈가를 찌푸리던 김지훈이 훅 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것은 가난, 어린아이, 보살피지 못한 사회에 대한 비판이 아니었다. 냉정한 이성이야말로 의사가 지켜야 할 자세였다.

‘감정은 아이를 살리는 데 조금도 도움이 안 된다. 냉정하게 상태를 판단해야 한다.’

담도 폐쇄와 이로 인해 유발된 간경화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파악해야 어떤 수술을 해야 할지 결정할 수 있었다.

뷰박스에 CT를 걸었다.

주름까지 만들며 검사를 확인하던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심각한 얼굴로 김지훈과 대화를 주고받은 신현수와 손일석 역시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김 교수, 왜 그래? 의학 용어를 쓰니까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수술이 불가능한 거야?”

“형님, 상태가 너무 심각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봐. 뭐가 문제야?”

“담도 염증이 간 전체에 만성적으로 발생했습니다. 간경화도 그 때문이고요. 이런 경우 치료 방법은 딱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게 뭔데?”

“간 이식입니다.”

희귀 질환이라 해도 막연히 수술만 하면 건강해지리라 믿은 정훈철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답답한 침묵이 이어졌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어린아이, 선천성 담도 폐쇄, 간경화, 간 이식, 감당할 수 없는 비용! 모든 게 해결돼도 이식할 수 있는 간을 어디서 찾지?’

온갖 생각이 뒤엉켰다.

문득 정재복 환자 상황이 다시 떠올랐다.

간 이식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충분한 경제력을 가졌다. 그러나 사후든 뇌사든 간 기증 자체가 턱없이 부족한 데다 순서조차 밀려 해결책은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생체 간 이식이다.

가족도 동의했다.

모든 검사에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면역 반응을 가늠하는 항원 검사까지 통과하고도 가장 기본 조건이 되는 혈액형이 맞지 않았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실패 위험성이 너무 높았다. 기증자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주는 이상 도박에 가까운 수술을 할 수는 없었다.

‘단 한 가지 조건만 맞지 않아도 간 이식 자체가 불가능하다. 부모 중 한 명이라도 적합해야 한다. 하지만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텐데 그건 또 어떻게 해결하지?’

사방이 꽉 막혔다.

입원시킨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제 열네 살 아이였다.

성인과는 또 다른 경과를 보일지도 몰랐다.

김지훈의 고민이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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