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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012화 (1,012/1,329)

18화

내심 신경 많이 쓰였다.

특히 희귀 질환은 물론 열네 살이라는 말이 여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아니었다.

(김 교수, 수요일 저녁에 보기로 했어. 집에서 요양 중이라 직접 찾아가야 할 것 같은데 괜찮을까?)

“열네 살 여자아이라고 했죠? 집으로 찾아가는 건 상관없지만, 만나기 전에 검사 결과 카피본이 있어야 합니다. 혹시 정확한 병명은 들으셨나요?”

(미안해. 나도 일이 바빠서 연락하기 쉽지 않네. 검사는 환우회 사람들에게 챙겨 달라고 할게. 모레 내가 병원으로 갈 테니까 기다려.)

“주소 알려 주시면 제가 찾아갈게요.”

(찾기 쉽지 않아. 가면서 할 얘기도 있고, 내가 먼저 부탁한 일이니까 기다리고 계셔.)

전화를 끊은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이미 어렸을 적 한 차례 수술받았고, 추가 수술이 필요한 간 질환이라 했다. 가능성 있는 질환이 몇 가지 떠올랐지만 하나같이 치료가 어려운 병이었다.

더욱이 희귀 질환 대부분 보험이 되지 않아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 것이 빤했다. 정훈철과 환우회가 도움을 청할 정도면 경제적 상황까지 극도로 나쁠 것이다.

무작정 혼자 만난 후 상의할 일이 아니었다.

‘일은 벌일 수 있어도 나 혼자 끝까지 수습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훈철이 형도 그쯤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라 생각하실 거야.’

급히 사인방을 찾았다.

절대 신현수가 빠져선 안 되는 자리였다.

김지훈이 상황을 설명했다.

“무슨 병일 것 같아?”

“어려서 수술했고, 재수술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간 기능에 심각한 문제까지 생겼다면 선천성 담도 폐쇄일 가능성이 제일 높아요.”

“섬뜩하네.”

어떤 치료가 필요한지 생각하던 이경석이 톡톡 책상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치료는 그렇다 치고, 훈철이 형님이나 네 뜻은 잘 알겠는데 분위기를 봐서 무료 치료 이외에 답이 없네. 얼마나 들지 생각은 해 본 거야? 분명 우리 과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준은 아닐 테고, 재단에서 선뜻 동의할 정도의 액수도 훌쩍 넘을 것 같다.”

“많이 들겠죠. 현수야, 어느 정도 들까?”

“병명도 정확하게 모르는 상황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없지만 희귀 질환이면 상상하기 어려운 비용이 들어. 약값만 일 년에 억대가 필요한 질환도 많잖아.”

억이라!

대충 짐작했지만 억 소리를 듣는 순간 머릿속이 딱 멈췄다. 아뻬 백 개 이상을 해야 그 정도 수입이 발생하는데 그나마 총수입이지 비용을 뺀 순수익도 아니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돈이 요구되는 상황인 것이다.

답답한 침묵이 흘렀다.

과장도 아닌 외과 교수 넷이 백날 머리를 맞대야 답이 나올 상황이 아니었다. 정훈철에게나 병원에게나 입장 곤란해진 김지훈은 입도 열지 못했다.

그때 손일석이 손가락을 튕겼다.

“지훈아, 수요일에 아이 만나 바로 결정해야 하는 건 아니지? 다른 병원에서도 돈 문제로 치료하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곤란하다고 해서 비난받을 일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편하게 생각하자. 그런데 결국 비용 문제라면 다르게 접근할 수도 있어. 어떤 식으로든 비용에 준하는 이득을 얻으면 재단이나 윗분들을 설득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현수가 발 벗고 나서야 하겠지만 그럴듯한 명분까지 있다면 그 정도 수고쯤은 감수하고도 남을 것 같다.”

사인방의 귀가 쫑긋거렸다.

손일석이 손짓을 했다.

“머리 모아 봐. 일단 수요일에 지훈이하고 현수가 같이 가는 거야. 정확한 병명, 필요한 치료가 무엇인지 알아 비용부터 계산해 보고, 어느 정도 균형이 맞는다 싶으면 훈철이 형에게 반대급부를 요구하는 거지.”

“반대급부? 훈철이 형님은 순수한 뜻으로 지훈이에게 연락했을 텐데 껄끄럽지 않겠어?”

이경석의 말에 손일석이 고개를 저었다.

“기브 앤 테익! 그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 아닙니까? 사실 천 단위도 힘든데 억 단위라면 훈철이 형은 물론 환우회나 환자 가족 모두 무리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돈 대신 다른 걸 요구하고, 누군가 제공할 능력이 있다면 제안은 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정훈철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딱 하나였다.

신현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확신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내심 반대급부를 요구한다는 사실이 찜찜하기도 한 모양이었다.

“찝찝하긴 해도 제안 자체는 해 볼 수 있겠지. 그런데 재단을 설득할 만한 이득이 있을까?”

“왜 없어? 라파로! 특히 췌장 라파로를 대두시키고, 엄청난 비용이 드는 환아를 무료로 수술한다는 사실까지 부각시키면 무형의 이득이 어마어마할걸?”

“그럴까?”

“어허! 이 사람아, CF 한 편 찍는 데 수천만 원이 드는 세상에서 특집 방송 한 번 타면 그게 얼마겠어? 요새 사람들 건강에 무지무지 관심이 많으니까 방송국도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닐 거야. 안 된다는 생각보다 된다는 생각으로 덤비자고. 이왕 칼을 뽑을 거면 무라도 베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지.”

무엇 하나 구체적인 정보가 없는데 너무 많이 나갔다. 걱정과 달리 큰 부담 없는 부탁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희귀 질환의 특성에 맞게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정훈철을 만나 상황을 파악하고, 환아의 질환과 상태부터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후에야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김지훈이 자리를 정리하고자 했다.

“다 귀담아들어야 할 말이네. 정말 억 단위로 비용이 든다면 일석이 말도 충분히 생각해 볼 문제야. 현수야, 수요일 일과 끝나고 함께 가자.”

“우리만?”

은빛 안경테 너머 손일석과 이경석을 보는 눈빛이 범상치 않았다.

“왜 날 봐? 설마 나도?”

“훈철이 형과 방송 문제를 매끄럽게 얘기하려면 얼굴 두꺼운 놈이 필요해. 애초 아이디어를 낸 것도 너고, 말발이 있어야 기브 앤 테익도 가능한 거 아니겠어? 경석이 형도 시간 좀 내세요.”

“좋은 표현 놔두고 얼굴 두껍다는 게 뭐야? 신현수 특유의 정갈하고 예의 발랐던 말투는 어디 간 거야?”

“두껍다는 말이 싫으면 철판 깔았다고 해 줄게. 그런데 현수야, 나는 왜?”

“만약 환아 치료가 결정되면 만나야 할 사람이 많습니다. 억이라고 치고, 일인당 이천오백씩 책임지죠. 원장님 설득에 경석이 형보다 적임자는 없잖아요.”

졸지에 네 명 모두 정훈철과 만나게 생겼다.

김지훈이 반색하면서도 눈가를 찌푸렸다.

묻어 두었던 문제가 생각났다.

‘행정적인 일을 마다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미룰 현수가 아니다. 일석이와 경석이 형을 끌어들인 게 단지 이 때문일까? 혹시 신설 브랜치!’

지금도 평생 함께하고픈 동료들이었다.

같은 공간만이 함께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고, 넓게 보면 소속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가슴 아린 일임은 분명했다.

피할 수 없다면 최대한 좋게 생각할 일이었다.

본원과 분원의 연결 고리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두 병원의 거리마저 브랜치 중 가장 가까웠다. 무엇보다 누군가 과장, 부원장, 원장으로 쭉쭉 달릴 것이다.

‘그래! 누가 가든 가장 빨리 병원장 돼서 병원 크게 키운 후 후배들 팍팍 이끈다면 그 이상 멋진 일이 없겠지.’

도리어 박수 쳐야 할 일일지도 몰랐다.

문득 의문 하나가 다가왔다.

병원 건물 완공이 머지않았다고 들었다.

신규 채용 이상으로 경력자가 필요할 것이다.

기존 병원 인력이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모든 과 의사와 간호사들이 새로운 병원 인력 배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것이다. 특히 사인방처럼 파견 혹은 재배치가 유력한 중견 의사들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왜 아직 말이 없을까?

김지훈이 신현수에게 눈길을 주었다.

“현수야, 신설…….”

아직 말할 때가 아니라는 듯 급히 말을 자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신설 브랜치에 관한 대화마저 막을 일이 아닌데 다소 의아한 일이었다.

김지훈이 입맛만 다셨다.

오늘 대화의 쟁점이 아닌 데다 이름은커녕 병명도 모르지만 도움의 손길이 절실하게 필요한 환아에게 집중해야 할 때였다.

무엇보다 한 아이의 생명이 달린 일이었다.

신현수가 없는 시간을 쪼개 바삐 움직였다.

정훈철은 환아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데다 자신의 일까지 무척 바쁜지 연락이 되질 않았다. 결정도 나지 않은 상태에서 환우회에 연락할 수도 없었다.

결국 예측 가능한 질환을 꼽은 후 원무과까지 찾아 비용이 얼마나 들지 알아보았다.

“어떤 질환이든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천에서 억 단위까지 다 가능하네. 휴우! 이걸 무료로?”

김지훈은 돈 문제 이상으로 큰 고민에 빠졌다.

“현수야, 선천성 담도 폐쇄증이면 장난 아니다.”

“어떤 질환이 됐든 열네 살에 재수술인데 수술이 가능하기나 할까?”

“병력과 현 상태를 봐야 재수술 여부를 결정할 수 있겠지. 에휴! 다른 질환이었으면 좋겠는데 느낌이 안 좋다.”

비용을 떠나 의료진조차 어떤 치료가 필요한지 모른 채 환아와 가족을 만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최악의 경우 헛된 희망만 줄지 몰랐다.

정훈철에게 환아를 만나는 날을 미뤄서라도 검사 결과부터 미리 확보해 달라고 재촉하는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연락이 닿았고, 최대한 빨리 구하겠다는 답을 얻었다.

‘후우! 훈철이 형도 일이 많을 텐데 이것저것 부탁만 해야 해서 미안하네. 일석이가 말한 건 또 어떻게 얘기하지?’

째깍! 째깍!

은근히 답답한 시간이 흘렀다.

수요일 내내 수술이 끝날 때마다 김지훈이 무엇인가 고민하며 얼굴을 풀지 못했다. 오후 회진이 끝날 무렵에는 툭하면 휴대폰을 꺼냈다.

“선생님, 무슨 일 있으세요?”

“연락 올 사람이 있어서 그래.”

회진까지 모두 끝났다.

사인방 전원이 퇴근할 생각도 하지 않고 한데 모여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중대 사안이나 응급 수술도 없는데 말이다.

뭔가 낌새를 눈치챈 이혁원이 눈가를 좁혔다.

“종진아, 무슨 일 있는 것 같지?”

“술자리였으면 벌써 나가셨을 테고, 저렇게 모이실 일이면 환자밖에 없잖아?”

“내 생각도 그래. 진우야, 오늘 김지훈 선생님하고 수술하면서 들은 말 없어?”

“말씀은 안 하시는데 굉장히 중요한 일이 있는 건 확실합니다. 다른 때와 미묘하게 다르셨습니다.”

“그러니까 더 궁금하네.”

궁금함이 하늘을 찔러도 당장 해소해야 하는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펠로우 모두 슬그머니 자리를 지키며 퇴근을 미뤘다.

김지훈의 교수실을 예의주시했다.

띠리리리! 띠리리리리!

드디어 김지훈의 휴대폰이 울렸다.

사인방이 후다닥 사라졌다.

잠시 후 펠로우들에겐 다소 낯선 인물과 함께 공동 교수실로 들어갔다.

이혁원의 눈이 번쩍였다.

“종진아, 김지훈 선생님 손에 들린 거 봤지?”

“차트, CT, MRI 복사본이네.”

송진우가 입을 오물거렸다.

“선생님, 사인방 선생님이 모두 모일 정도면 분명히 큰 건이 있습니다. 모른 척하고 들어가죠.”

“그래야지. 어떤 환자인지 모르지만 치사하게 우릴 쏙 빼냐. 펠로우라고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분개는 분개일 뿐, 이혁원이 주먹을 휘두르다 말고 급격히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똑똑!

“들어오세요.”

펠로우들을 본 손일석이 조용히 고갯짓을 했다.

비밀은 아닌 모양이었다.

책상 위에 차트가 펼쳐져 있었다.

CT와 MRI는 걸리지도 않은 상황이건만 사인방의 얼굴이 심각하기 짝이 없었다. 의료 쪽엔 문외한인 정훈철까지 분위기에 휩쓸려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김지훈이 중얼거렸다.

“후우! 선천성 담도 폐쇄만 아니길 바랐는데.”

난데없는 소리에 흠칫 놀란 펠로우들을 빤히 보면서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차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14살. 여자 환자. 장미라.

진단명:선천성 담도 폐쇄증.

담관과 췌장관이 합쳐지는 부위 상방의 담도 형성 부전으로 간에서 내려오는 통로가 좁아지며 막히는 질환이다. 모래시계처럼 중간이 잘록해진 모양을 연상하면 된다.

그나마 담즙이 흐르는 담도와 소장을 연결해 주는 수술이 유일한 치료법이다. 생후 팔 주 내에 치료해야 하기 때문에 수술 자체가 결코 쉽지 않았다. 가뜩이나 작은 몸에 가늘어져 거의 보이지도 않는 담도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환아 역시 생후 2개월에 카사이 수술로 불리는 담도공장 문합술을 시행받았다. 무난한 경과를 보이며 특별한 문제 없이 지내다 10세 무렵 다시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일 년도 지나지 않아 간 기능 저하에 따른 전신 쇠약과 발육 부진 양상까지 발생했다. 기존 연결 부위의 담도 폐쇄가 확대되며 간에도 영향을 준 것이다.

전적으로 해부학적 문제였다.

진행을 막을 어떤 약물도 없었다.

치료는 오직 재수술뿐이었다.

답답한 공기가 흘렀다.

재수술 가능 여부는 CT, MRI 소견에 달렸다.

김지훈이 검사 결과를 걸었다.

모든 눈이 간담도 부분에 쏠렸다.

정훈철이 초조한 기색으로 물었다.

“김 교수, 치료가 가능할 것 같아?”

CT를 보던 김지훈이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사인방은 물론 펠로우들까지 번갈아 확인했지만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이미 수술로 인해 정상 구조를 잃은 상태였다.

담도가 지나갈 부분에 소장을 연결해 장기들이 겹친 상태라 더욱 구분하기 힘들었다.

“이 부분이 담도로 보이지 않아?”

“워낙 가늘어서 확신할 수가 없네.”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상당한 시간을 투자하고 나서야 결론을 내려야 할 김지훈의 입이 열렸다.

모든 시선이 김지훈에게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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