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송진우였다.
(선생님, 아뻬 환자 한 명 있습니다.)
“준비하고 기다려.”
전화를 끊으려던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얼마 전부터 고경철을 볼 때마다 바짝 신경 쓴 일이 있었다. 더 이상 미루다간 집도식이 꽤 늦어질 것이다. 이미 그만한 능력도 보였다.
“송진우 선생, 경철이가 할 만한 케이스야?”
(첫 수술 주시려고요? 약간 살집이 있지만 터지진 않았습니다. 충분합니다.)
펠로우 일 년 차지 전공의 일 년 차도 아닌데 목소리가 들뜰 정도로 좋아했다. 고경철을 눈여겨보며 무척 아끼는 모양이었다.
“오케이! 일 년 차 집도다. 내가 도착하기 전까지 뭘 해야 하는지 알지?”
송진우가 잠시 머뭇거렸다.
수없이 휴게실을 울렸던 다시 소리가 주는 기억 때문이 아니었다. 아마도 벌게지는 얼굴만큼 모질지 못한 성격 탓일 것이다.
김지훈이 눈가에 주름을 만들었다.
“자신 없어? 전공의 트레이닝은 펠로우 몫이라는 점 잊지 마. 네 손에 써전 한 명 한 명의 미래가 걸려 있다.”
(알겠습니다. 확실히 준비시키겠습니다.)
통화 내용을 대충 짐작한 오창도 교수가 크게 웃었다.
“사람 너무 좋아도 탈이네. 가끔 걱정될 때도 있어. 구타가 난무했던 시절에 트레이닝받았으면 변했을까? 이혁원 선생, 어떻게 생각해?”
“동기가 괴롭혀도 군말 없이 일했던 진우가 나쁜 쪽으로 변할 리가 없죠. 하석이 때문인지 단단해진 것 같기는 합니다.”
“더 단단해야지. 써전에겐 강단도 필요해.”
맞는 말이었다.
마냥 순하고, 사람 좋다는 소리만 들리면 사회생활 녹록지 않게 변한다. 스스로 감수할 수도 있지만 수술 중 자주 결단해야 하는 써전은 보다 독해질 필요가 있었다.
“혁원이 말대로 진우도 많이 변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 얘기 저 얘기 하는 사이 병원에 도착했다.
응급실로 가 환자부터 살피며 집도의를 최종 결정한 김지훈이 내심 웃고 말았다.
송진우의 얼굴이 약간 상기됐다.
첫 집도를 앞두고 기대에 들떠 있어야 할 고경철은 창백한 안색으로 연신 땀을 훔치고 있었다. 사소한 과정 하나 놓치지 않을 때까지 다시 소리를 수없이 들은 것이 분명했다.
‘봤어야 했는데 아깝다.’
친동생 같은 처남에게 다시 소리 한 번 날리고 싶은 욕구를 꾹 참고 가슴 깊은 곳에 묻었다.
“고경철 선생, 환자 올리자. 송진우 선생, 잘했어. 수술 끝난 후에도 고경철 선생 맡겨도 되겠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드르르륵!
환자가 올라왔다.
고경철의 긴장이 극에 달했다.
김지훈은 물론 송진우도 조용히 지켜보았다.
모든 써전이 겪어야만 하는 첫 수술의 중압감과 두려움은 스스로 떨쳐 내는 수밖에 없었다.
마취가 끝났다.
“수술 시작하셔도 됩니다. 고경철 선생, 파이팅!”
“감사합니다.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고경철을 드디어 진정한 써전의 길로 들어서게 할 첫 집도, 아뻬 수술이 시작됐다.
김지훈이 세컨을 자청했다.
‘경철아, 수술을 쉽게 여겨서도 안 되지만 두려움 역시 이겨 내야 한다. 넌 잘할 수 있어. 네 노력을 본 내가 확신한다.’
고경철은 물론 송진우 손까지 매서운 눈으로 관찰했다.
부족함을 아는 집도의는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냈고, 퍼스트를 선 전문의는 기대한 대로 후배를 정확하게 가르치며 이끌었다.
‘기특한 자식! 경철아, 전보다 훨씬 더 충실해진 기본이 보인다. 이렇게만 가자. 진우를 보니 역시 펠로우 모두 믿고도 남아.’
진지하면서도 즐거운 수술이었다.
“컷!”
마지막 복부 봉합사를 잘랐다.
환자가 무난하게 마취에서 깨어났다.
고경철이 훅훅 거친 숨을 내쉬며 첫 집도의 흥분을 만끽했다. 오더를 내는 손에 신바람이 실렸고, 환자를 보는 눈에 강한 책임감이 보였다.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첫 수술치고 상당히 만족스러웠지만 언제나 일 년 차일 수 없었다. 숭숭 구멍 뚫린 것처럼 도처에서 보인 미흡함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선배의 의무를 방기하는 것이다.
송진우가 까딱 손짓을 했다.
휴게실행을 보는 것이 왜 이리 즐거운지 모를 일이었다. 새카맣게 타는 처남을 보며 반짝반짝 하얀 이를 드러내는 매형의 잔인한 사랑이었다.
‘좀 더 죽였어야 되지 않나?’
채찍 후에는 당근이 필요한 법이다.
“경철아, 다음엔 더 잘하자.”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야지. 써전의 길이 마음처럼 쉽지 않아. 그래도 난 우리 경철이를 믿는다.”
부드러운 말 몇 마디로 충분했다.
매형의 시커먼 속을 모르는 고경철이 남몰래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부르르 떨었다.
너무 좋아했다.
일복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토요일 오후를 기점으로 집, 응급실, 수술실, 병실을 뱅글뱅글 돌았다. 덕분에 수시로 최인선 환자를 찾아 데메롤과의 싸움을 함께할 수 있었다.
“힘내세요. 우리에게 기댈 생각도 하시면 안 됩니다. 이 싸움은 오직 환자분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온몸을 뒤틀 정도로 힘겨워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수술 부위 회복이 느려질까 염려됐지만 드레인 양상에 이상은 없었다.
소득이 적지 않았다.
응급실 콜이 올 때마다 겸사겸사 들렀건만 최인선 환자 눈에는 다르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의지를 잃지 않았다. 언뜻 의존성이 가져온 갈망과 만성췌장염이 유발하는 진짜 통증의 차이를 알아 가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 수술한 지 이틀도 채 지나지 않았다.
환자도, 의사도 끈기를 갖고 싸울 일이었다.
즐겁다고 해서 일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기분은 좋을지 몰라도 일복 터진 이상 육체적 대가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김지훈이 벅벅 눈가를 문질렀다.
주말의 끝이 다가올수록 급격하게 쌓이는 피로에 온몸이 뻑적지근할 정도였다. 송진우와 고경철은 더욱 처참한 몰골을 한 채 아예 피곤을 흘리고 다닐 지경이었다.
그런데 눈과 입은 웃고 있었다.
김지훈이 거의 모든 수술을 송진우에게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도 모자라 고경철의 퍼스트 능력이 닿은 수술이면 세컨을 마다하지 않았다.
대신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누가 수술을 하든 주치의는 김지훈 자신이었고, 결코 책임을 미룰 수 없기 때문이었다.
‘펠로우에 맞춰 트레이닝 방식을 바꿨더니 집도할 때보다 더 힘드네.’
따끔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송진우 선생, 무조건 기본만 생각해. 아뻬를 잘한다고 해서 큰 수술까지 잘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아뻬마저 못하면 어떤 수술도 잘할 수 없어. 마찬가지로 개복 수술을 못하면 라파로 역시 잘하기 힘들겠지?”
천생 써전들답게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누구나 허점이 있기 마련이었다.
고수의 눈에는 더욱 잘 보이는 법이었다.
송진우건 고경철이건 기본을 놓치는 순간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김지훈의 이글이글 불타는 눈초리를 감당해야 했다. 결국 송진우도 휴게실을 한 차례 방문했다.
나직한 소리만 들렸을 뿐이었다.
벌게져야 할 얼굴이 허옇게 떴다.
고경철은 집도의 기쁨과 흥분을 아예 잊었다.
퍼스트를 설 때마다 살 떨리는 살벌함을 맛보았다. 다시 소리의 효과에 힘을 얻었는지 사람 좋은 송진우의 눈길이 결코 예사롭지 않아진 탓이었다.
내리사랑이다!
말과 눈으로 태우기만 하면 반감된다.
일요일 저녁, 몇 번째인지 모를 수술이 끝난 후 김지훈이 당직 팀을 끌고 나갔다.
“힘들지? 이럴 때 배 속까지 허하면 수술하기 힘들다. 고기 먹자. 주머니 사정상 한우는 다음에 먹고, 오늘은 갈비로 가자.”
우걱! 우걱!
폭풍 흡입이다.
“소주 한잔했으면 좋겠는데 아쉽다. 아쉬워.”
이때까지는 술 생각이 날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어느 틈에 뼈만 남은 갈빗대가 수북이 쌓였다.
“아줌마, 여기 삼 인분 더 주세요.”
“경철아, 사 인분 시켜. 콜라도 더 있어야겠다.”
“사이다는 어떠십니까?”
“그것도 좋지. 바꿔 볼까?”
함께 허리띠 풀고 마음껏 배를 채우던 김지훈이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보기보다 먹성 좋은 송진우와 무엇이든 먹어 대는 전공의 일 년 차에게 고기 산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다.
뼈아픈 실책이었다.
띠이이이! 띠리리릭!
카드 긁히는 소리에 침이 꿀꺽 넘어갔다.
전표를 받아 든 김지훈의 손이 달달 떨렸다.
‘으으으! 무식한 놈들!’
한 달 용돈 3분의 1이 순식간에 송진우와 고경철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너무 많이 먹었나?”
“그럴 리가요. 우리 매형 먹성 아시잖아요? 누나가 항상 하는 말이 있어요. 매형이 하루 세끼 집에서 먹었으면 벌써 파산했을 거라고요.”
“하긴 김지훈 선생님 한창때 무지막지하게 드셨다는 소리 많이 들었다. 일복과 쌍벽을 이루는 전설이긴 해.”
“지금도 만만치 않아요.”
소곤소곤!
목소리 낮출 거면 들리지나 말아야 하는데 왜 이리 또렷하게 들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기껏 밥 사 주고 많이 먹었다고 성내면 쫌생이 된다.
‘전설은 간식으로 라면 다섯 개에 대접으로 밥 말아 먹은 악어야. 악어. 에휴! 저놈들이 악어가 누군지나 알까? 맞아 봐야 고마움을 알지.’
김지훈이 부르르 주먹만 떨었다.
어쨌든 빈 배 속 가득 채웠다.
힘차게 마지막 당직 날을 보내야 했건만 가공할 일복이 가져온 여파는 실로 적지 않았다. 환자도 환자지만 응급실과 수술실에서 쏟아지는 아우성을 외면할 수 없었다.
야식을 대령해야 했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김지훈의 어깨가 축 처졌다.
‘출혈이 너무 커. 이런 일이 또 벌어질 텐데 용돈 인상이 아니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굳은 각오를 다졌지만 곤히 자고 있는 고경아를 깨울 수 없었다. 보드라운 희연이 손만 만지작거리다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환자는 이제 그만 왔으면 좋겠다.’
신은 결코 죽지 않았다.
아침까지 내처 자는 엄청난 행운을 선사했다.
혹시 출혈에 가까운 용돈 값일까?
***
모든 직장인, 심지어 학생들에게도 월요일은 항상 바쁘고 힘든 날이다. 주말의 나른함과 밀린 일이 주는 부담은 월요병이란 말이 아니더라도 확실히 힘에 부친다.
휴식이라고는 꿈도 못 꾼 주말 당직 팀은 말할 것도 없었다. 회진이 끝나고 나서야 뻑뻑하게 시작된 병원 일상에 슬슬 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다른 날보다 많은 외래 환자.
줄줄이 이어지는 예약 수술.
온갖 고통과 불편을 호소하는 입원 환자.
북적이는 응급실.
오늘도 모든 의료진은 물론 행정직까지 눈코 뜰 새 없는 하루 일과를 보내야 할 것이다.
부교수 정도 되면 대개 약간의 여유가 있기 마련이었지만 환자 많은 과는 예외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김지훈에게는 다른 세상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전공의, 전임의를 거쳐 유학 시절은 물론 귀국해서도 기억날 정도의 여유를 가진 적이 없었다. 타고난 일복과 연이어 시행한 새로운 수술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하중이 너무 컸다.
그럼에도 불평할 처지가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병원 내 모든 의료진 개개인에게 가해지는 업무 부담은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가 많았다. 충분한 인력이 충원되지 않는 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오전 수술 후 간신히 점심 식사 시간을 얻은 김지훈이 쩝쩝 입맛을 다셨다.
‘수술이나 진료 건수가 적정하다고 느끼면 바로 적자 소리가 나오는 상황에서 인력 보강은커녕 우리 과를 더욱 세분화시킬 수나 있을까? 보면 볼수록 적자를 면할 길 없는 중증 외상 환자는 어느 병원이나 피하고 싶어 한다. 결국 돈이 문제인데 해결 방안이 있을까?’
미국 같은 의료 환경은 바라지도 않았다.
장점 이상으로 단점 또한 크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현 의료 체계가 이상적인 것도 아니었다.
도처에 수많은 사각지대가 존재했다.
보험 문제로 치료조차 받지 못하는 환경, 목숨을 다뤄야 할 가장 중요한 과가 기피 대상이 되는 상황 등을 엄연한 현실로 받아들여야 그나마 해결책이 나올 것이다.
잠시 답답함이 앞을 가렸지만 당장은 눈앞에 놓인 현실에 충실하지 않으면 불평불만에 그칠 뿐이었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일이었다.
단, 부당하다면 행동에 나서야 할 것이다.
여하튼 이제야 월요일 일과의 절반이 지났다.
남은 시간 역시 최선을 다해야 했다.
짬이 나는 대로 최인선 환자에게 필요한 단호한 의지에 강력한 응원을 펼치는 사이 또 하루가 저물었다. 온몸에 피곤을 뒤집어쓴 김지훈이 뻑뻑한 눈가를 문지르다 말고 톡톡 이마를 두드렸다.
아무래도 뭔가 빠졌다.
뭘까?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화들짝 놀라며 전화를 받은 김지훈이 손가락을 튕겼다. 뒤통수를 찜찜하게 만든 원인은 문득문득 기다려진 정훈철의 연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