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환자와 함께 데메롤 의존성과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반면 수술로 만성췌장염이 주는 지독한 통증을 모두 경감시킬 수 없기에 실제 통증을 절대 간과해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석진이는 보다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
경험 있는 의사의 지식과 조언이 절실했다.
특별한 치료제는커녕 중독 우려 없이 안전하게 대체할 수 있는 진통제도 없지만 말이다.
“으으으! 이번엔 정말 아파요. 배 속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새우등을 한 채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갈망이 아닌 실제 고통으로 판단됐다.
‘보통 사람에겐 치명적일 정도로 고용량의 데메롤을 맞았던 환자다. 수술 부위가 완전히 아물어도 만성췌장염으로 인한 통증은 완화될 뿐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은 투여할 수밖에 없다.’
“데메롤 하나 주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환자가 안정을 찾았다.
당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통증 때문에 주사를 끊을 수는 없지만, 일상생활이 가능하려면 데메롤 의존성만큼은 완전히 없애야 한다는 것을 아시죠? 단, 어떤 고통이 진짜 통증인지 환자분 이외에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환자분의 의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최인선 환자가 눈가를 비볐다.
지독하게 힘든 하루였다.
수술 전 다가온 긴장과 수술 후 시도 때도 없이 느껴지는 통증에 온몸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진짜 통증인지, 갈망인지조차 구분할 정신이 없었다.
너무도 고통스러워 누구도 자신을 돕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런데 하루 종일 수술해 피곤이 극에 달했을 의사가 새벽 한 시에 자신을 위해 나왔다.
삶을 되찾아 달라 한 자신의 말을 절대 외면하지 않은 의사의 마음과 노력이었다.
‘하루에도 대여섯 번씩 찾았던 주사를 오늘은 단 두 번만 맞았다. 정말 힘들었고, 절대 중독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중독이 맞았어. 이겨 내야 한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고맙다는 말은 환자분이 원했던 일상생활을 이룬 후에 듣고 싶습니다.”
최인선 환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윤석진 교수부터 김지훈 교수까지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스스로 해야 할 일은 오직 정상적인 삶을 되찾기 위한 노력뿐이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주무세요.”
돌아서는 김지훈의 표정이 어두웠다.
‘정말 어려운 환자다.’
오늘의 수술로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통증에서 상당 부분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랐다. 최소 외래 치료만으로도 충분하길 말이다.
***
다음 날 아침.
눈가가 까매진 써전 네 명이 회진을 앞두고 연신 목과 어깨를 풀었다. 오창도 교수, 나종진, 고경철이야 당직이었으니 당연하지만, 푹 쉬어야 했을 김지훈마저 때깔이 좋지 않았다.
송재덕 교수의 눈길을 끌고도 남았다.
“오 교수, 고생했다. 고생했어. 종진아, 경철아, 젊어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 잊지 마라. 쓸데없이 몸 축내란 소리가 아니다. 뭐든 배워 내 것으로 만들라는 말이다. 그래야 고수가 된다. 특히 써전은 더하다. 더해. 알지? 그치?”
“예. 명심하겠습니다.”
“근데 김 교수 몰골이 왜 저러니? 어제 무척 피곤했을 텐데 밤에 안 자고 뭐 했을까? 뭐?”
이경석이 힐끗 눈길을 주었다.
“술 먹은 얼굴도 아닌데 환자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렇구나. 그래서 만성췌장염 환자는 다들 수술하기 꺼려하는 거야. 잘돼도 본전 찾기 어려운 수술인데 누가 하겠니? 누가? 라파로로 해서 다를까? 확실히 덜 아플까? 현수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어떻게?”
“수술은 깔끔하게 됐으니까 어느 정도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요? 데메롤 의존성이 문제긴 하지만 환자 의지도 상당히 강한 것 같습니다.”
“응? 신 교수가 그걸 어떻게 아니? 김 교수 환자잖아. 김 교수 환자.”
신현수가 은근슬쩍 딴청을 피웠다.
파트가 다르지만 처음부터 지금까지 촉각을 곤두세웠을 정도로 관심을 가졌다. 김지훈 못지않은 라파로에 대한 열정만이 아니라 병원 입장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로 내세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원장님, 지훈이 저 자식하고 경쟁도 벅찬데 홍보까지 생각해야 돼 골치가 지끈거릴 정도입니다.’
최고의 써전이라는 목표에 더해 대형 병원의 행정 문제까지 배워야 하는 신현수였다. 조화와 타협이 절실하게 필요했지만 양립하기 힘든 두 가지 일은 일종의 딜레마였다.
가족의 동의하에 김지훈 이상으로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윤서연도 마취과에 대단한 열정을 갖고 있어 천만다행이긴 했다.
웅성웅성 대화가 오가는 사이 교수들이 차례차례 올라와 회진을 돌기 시작했다. 차트를 모두 확인한 김지훈도 재빨리 병실로 향했다.
최인선 환자에게 상당한 시간을 쏟았다.
퇴원할 때까지 반복될 일이었다.
그 와중에 환자 한 명의 회복이 마음의 짐을 덜어 주었다. 간경화로 시달리는 정재복 환자가 드디어 내과로 전과해도 될 정도로 호전됐다.
외과 문제에서 벗어났을 뿐이었다.
‘짐 덜었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네.’
여하튼 중한 환자가 적을수록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자 솔직한 마음이었다.
다소 늦게 회진을 끝낸 김지훈이 스테이션으로 향하다 부리나케 발을 놀렸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 있는 이준영 교수를 보는 순간 이유를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환자 어때?”
“데메롤 말고는 문제없습니다.”
“의사도 통제할 수 없는 약물이라는 점 명심해.”
“혹시 몰라 내과, 정신과에 컨설트를 냈습니다만 뾰족한 방법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만성췌장염 환자가 그래서 어렵지.”
말투는 여전했지만 상당히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이젠 한 명의 교수로서 제자를 대해 사적 개입을 철저하게 피했던 이준영 교수였지만 환자에 관해서는 여전히 예외를 두고 있었다.
진지하게 경청하던 김지훈이 슬그머니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 말이 길어질 때마다 스승의 속마음이 엿보이기 때문이었다.
‘수술 성공해서 좋으면 좋다고 하시지.’
초점을 벗어나면 불길 쏟아진다.
은연중 뿌듯해진 김지훈이 급히 표정을 감추고 더욱 진지한 자세를 취했다.
“췌장 공장 문합술은 보름이 지나도 연결부 유출이 발생할 수 있어. 끝까지 방심하면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이준영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집담회에서 이번 수술 토론은 제외한다고?”
“예. 발표 자체가 무리일 것 같습니다. 박승준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허락받았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 하자.”
점점 다가오는 주말 집담회 시간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이혁원과 나종진이 숨죽인 만세를 수없이 불렀다.
이보다 기쁜 소식은 없었다.
온몸을 휘감았던 부담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참관했다는 죄 하나로 얼떨결에 발표 준비까지 함께하게 된 고경철은 말할 것도 없었다.
힐끗 눈길을 주며 시간을 준 만큼 단단히 준비하라는 경고를 보낸 이준영 교수가 돌아섰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 들렸다.
“수고했다. 성공해서 기쁘다.”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뚜벅! 뚜벅!
멍하니 스승의 등을 바라보던 김지훈이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힘차게 외쳐야 했다.
카르페 디엠!
이혁원, 나종진, 고경철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수술 테이프 보며 주요 과정 슬라이드로 만들고, 학회 증례 발표에 준해서 자료 준비해.”
나종진이 화들짝 놀랐다.
전공의 일 년 차 손이라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학회 증례 발표에 준하라고 했다. 주말 집담회 수준을 훌쩍 뛰어넘으라는 말이었다.
“선생님, 학회 수준으로 만들라는 말씀입니까?”
“괜히 연기한 게 아니야. 나중에 또 써먹을지 누가 알아? 다음 주 목요일까지 확실하게 준비해.”
헉! 헛바람이 터졌다.
김지훈이 휘파람을 불며 유유히 사라졌다.
“고경철, 곧 해야 될 일이니까 잘 보고 배워.”
일복의 화신이 잠도 자지 못할 일을 던졌다.
또르륵!
고경철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똑 떨어졌다.
공포의 주말 집담회가 시작됐다.
김지훈까지 가세한 가공할 화력이 터졌다.
반복처럼 보여도 어제와 같은 오늘 없는 법이다.
같은 간, 위장, 대장이라도 질환, 환자, 상태가 제각각인 탓에 동일한 질문이라도 원하는 답은 달랐다. 너털웃음, 도마, 칠지도, 화염방사기가 멈추지 않는 까닭이었다.
그래도 췌장 공장 문합술이 빠져 이혁원과 나종진이 예정된 죽음을 한 주 미뤘다. 대신 오후 회진 전까지 김지훈과 수술 테이프를 돌려 보느라 눈이 빠질 뻔했다.
토요일 일과를 마칠 시간이 됐다.
김지훈이 훅 숨을 내쉬었다.
실로 대단한 한 주였다.
외과 구성원의 노력 덕이 컸지만 두 번의 사전 경험이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집도의로서 책임과 의무를 방기할 수 없었다.
고경아에게 허락을 득한 김지훈이 병원을 나설 준비를 했다. 막 교수실을 나오는 순간 오창도 교수와 이혁원이 급히 달려왔다.
“오창도 선생님, 퇴근 안 하셨어요?”
“선생님은요?”
“전 H 병원에 들렀다 퇴근할 생각입니다.”
이미 눈치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집담회 때 서민자 환자 언급하시는 걸 보고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같이 가시죠?”
“선생님도요?”
“왜 이러십니까? 퍼스트 섰습니다. 저도 제 할 일을 해야죠. 이혁원 선생도 환자 경과가 궁금하다고 해서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김지훈의 입이 쫙 찢어졌다.
“혼자 가기 심심했는데 잘됐네요. 누구 차로 갈까요?”
이혁원이 번쩍 손을 들었다.
역시 운전은 일행의 막내 몫이다.
물끄러미 차창 밖 풍경을 보던 김지훈이 무릎을 달달 떨었다.
‘H 병원 다녀올 때까지 환자가 안 왔으면 좋겠다.’
꽤나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H 병원에 도착했다.
수술 때 본 인연을 믿고 도착해서야 방문 사실을 알렸다. 뜻밖에도 진충기 교수가 병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십중팔구 환자 때문일 것이다.
‘보면 볼수록 대단하시네.’
“선생님, 환자분 경과는 좋습니까?”
“직접 확인하시죠.”
진충기 교수의 표정이 편안했다.
김지훈을 본 서민자 환자와 보호자가 깜짝 놀라며 무척 반갑게 맞이했다. 달랑 하나 매달린 수액 줄이 순조로운 회복을 암시했다.
“어머님, 몸은 어떠세요?”
“수술 잘해 주시고, 우리 선생님도 신경 너무 써 주신 덕에 내일부터 미음을 먹게 됐어요. 우리 선생님들 모두 고맙습니다.”
“오늘부터 물을 드신 모양이네요. 배 안 아프세요?”
“괜찮아요.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발간 혈색에 목소리가 정정했다.
수술 후 경과를 눈으로 확인하지 못해 그동안 내심 느꼈던 불안이 싹 사라졌다.
웃음이 절로 나올 정도로 뿌듯하고, 행복했다.
“곧 퇴원하시겠네요. 저희는 병원이 달라 또 찾아오기 어려울 수도 있어 미리 인사드릴게요. 몸조리 잘하세요.”
“아이고! 벌써 가시려고?”
서민자 환자가 손목을 놓지 않았다.
자신은 먹지도 못하는 음료수에 과일까지 내오라며 성화를 부렸다. 웃으며 달달한 주스를 꺼내던 아들이 김지훈을 보다 말고 정색했다.
“어머니, 오늘 토요일이에요. 선생님들도 쉬셔야죠. 김지훈 선생님, 이렇게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어머님 경과가 너무 좋아 한시름 놨습니다. 일간 찾아뵙겠습니다.”
인사치레라도 좋았다.
이미 보상은 다 받았다.
바로 돌아와야 했지만 예정에 없던 진충기 교수를 본 이상 시간을 더 낼 수밖에 없었다. 췌장 공장 문합술 성공 여부부터 시작해 많은 질문을 받았다.
진충기 교수가 무척 진지했다.
반짝이는 눈빛에 숨은 감탄과 강렬한 경쟁의식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예전처럼 명예만 추구할 써전이 아니기에 이미 훌륭한 라이벌이었다.
오고 가는 대화 속에 숨은 수많은 경험과 해박한 지식, 숨기지 못할 실력이 이를 증명하고도 남았다.
커피 한 잔이 다 식었다.
김지훈도 완전히 정리된 수술이 아니었다.
“부족하나마 다음 주까지 자료를 만들 생각입니다. 참관까지 하셨지만 원하신다면 보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확실하게 약속하고 나서야 H 병원을 나설 수 있었다.
김지훈이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원내만이 아니라 다른 병원에도 진충기 교수 같은 경쟁자가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한편으로 자신의 성과를 누군가 간절히 배우길 원한다는 사실에 기분이 묘해졌다. 물론 동료인 오창도 교수, 이혁원과 함께 왔다는 사실이 가장 기뻤다.
돌아오는 길, 김지훈이 차창 밖으로 비치는 거리에 눈길을 주며 상념에 잠겼다.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고, 선배들은 멀리 달아나야 나도 더 빠르게 발전할 수 있겠지?’
그럴 여건이 지속될까?
기피과라는 멍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기에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 오늘도 온갖 악조건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일반외과 써전들이 새삼 고마웠다.
평온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띠리리리리!
휴대폰이 울렸다.
김지훈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당직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