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009화 (1,009/1,329)

15화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지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진우야. 하! 하! 하!”

“선생님은 왜 웃으십니까?”

“일 많은 게 절대 나쁜 건 아니다만, 주말 당직이 김지훈 선생님과 우리 송진우 선생님이시네. 축하한다. 재수 좋으면 수술 한두 개는 받을 수 있을 거야.”

최대한 수술을 받겠다고, 김지훈의 모든 것을 배우고 말겠다는 각오를 다졌던 송진우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다 좋지만 쉴 때는 쉬어야 했다.

김지훈이 온 이후 평일 근무 중에는 다리 펴고 쉴 시간조차 없었다. 기존 업무도 많은데 연이어지는 새로운 시도에 밤늦게 퇴근하기 일쑤였다.

그나마 이삼 주에 한 번 맞는 주말 오프 때가 가장 마음 편하게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지훈과 주말 당직을 선다면 내리 삼 주를 쉬지 않고 달리는 꼴이었다.

그것도 격렬하게.

눈가에 급성 기미 깔릴 것이다.

자칫 주말 내내 오하석 얼굴도 보지 못할 수 있었다. 충분히 이해해 주겠지만 체력 방전이 빤히 보이는 상황에서 멀쩡한 월요일을 맞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김지훈 선생님도 우리와 거의 똑같이 생활하신다. 이 정도에 힘들어하면 가르쳐 주시는 것조차 받아먹지 못한다. 좋게 생각하자.’

송진우가 스윽 고개를 들었다.

“나종진 선생님, 과연 수술 한두 개가 끝일까요? 요새 김지훈 선생님이 변하셨다는 사실을 잊으셨군요. 후후후!”

웃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닌지 얼굴 벌게진 상황에서.

고경철은 아예 사색이 됐다.

“금, 토, 일 연짱 당직인 전 어떻게 되는 거죠?”

“불쌍한 놈! 일복 터져 죽을 놈!”

다들 힘들긴 힘든 모양이었다.

현실은 역시 잔인했다.

따르르릉!

“고경철 선생님, 응급실 전화예요.”

“어후! 경철아, 먼저 내려가 환자 보고 있어. 회진 돌고 바로 내려갈게.”

아직 하루 일과 끝나지 않았다.

어느새 여덟 시가 넘었다.

김지훈이 말끔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부교수로서 샤워 정도는 할 권리가 있었다.

“회진 돌자. 나종진 선생은 응급실 가 봐.”

“어떻게 아셨습니까?”

“계단에서 경철이 만났어.”

엘리베이터 놔두고 계단으로?

목소리가 팔팔했다.

발걸음 역시 힘찼다.

강철 체력이란 말 여전히 유효했다.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꼼꼼하게 환자를 살폈다. 누구라도 마음이 급할 텐데 허락 가능한 시간을 다 써 가며 환자의 말에 귀 기울였다.

마지막으로 최인선 환자를 찾았다.

문 앞에서 멈춘 김지훈이 조용히 물었다.

“송진우 선생, 데메롤 투여했나?”

“수술 직후 한 번 투여했습니다. 이후 통증 호소할 때마다 직접 확인한 결과 의존성 때문인 것 같아 일반 진통제만 처방했습니다.”

“환자가 잘 버티는 것 같아?”

“굉장히 힘들어 보이지만 다행히 의지를 잃진 않아 보였습니다. 점점 더 심해질 텐데 어떻게 할까요?”

김지훈이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합법적이지만 오남용의 위험성을 잘 아는 의료진조차 중독되는 무서운 약물이 바로 데메롤이었다. 또한 만성췌장염의 유일한 통증 완화제라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했다.

“데메롤 의존성, 췌장염에 의한 통증, 수술 통증 중 어느 것 때문인지 잘 판단해야 돼. 라파로 덕에 훨씬 덜 아플 테고, 몸부림친다고 해서 절개 창이 터질 일도 없으니까 확실하게 대처해. 필요하다면 내과 정신과에 컨설트 내.”

문득 애증이 교차하는 누군가가 떠올랐다.

‘정갑수는 잘 지내나? 한때나마 같이 근무했다고 잊을 만하면 떠오르네.’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세월은 미움도 깎아 내리는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혀를 차며 병실 문을 열었다.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 보였다.

아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이혁원 선생, 퇴근 안 했어?”

“퇴근하기 전에 잠깐 들렀는데 상황이 좋지 못해 선생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혁원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환자를 가리켰다.

우려했던 문제가 터졌다.

최인선 환자가 식은땀을 흘리며 손을 떨었다.

수술이나 췌장염으로 인한 통증이 아니었다.

데메롤 금단증상이 분명했다.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네.’

“환자분, 많이 힘드세요?”

“후우! 선생님, 너무 힘듭니다. 딱 한 번만 더 맞으면 안 될까요? 내일부터는 절대 안 맞겠습니다.”

“환자분, 다른 환자도 치료하기 벅찬 일반외과 전체의 도움까지 받아 가며 약속을 지켰습니다. 환자분도 약속을 지키길 바랍니다.”

“선생님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르세요. 제발!”

또다시 정갑수가 아른거렸다.

동정조차 파고들 틈일 뿐이었다.

김지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삶을 찾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한 번 물러서면 다신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도움이 되는 모든 조치를 취할 테니 실망시키지 마십시오.”

“후우! 후우!”

환자는 말이 없었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무언가를 갈망했다.

김지훈이 매정하게 말을 이었다.

“일반 병실에서 버티지 못한다면 정신과에 폐쇄 병동 입원을 의뢰할 수도 있습니다. 수술 전 어떤 마음과 각오를 가졌는지 잊지 마세요. 송진우 선생, 드레싱하자.”

복부 절개 창은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드레인을 확인했다.

복부를 닦아 낸 물이 이제야 흘러나와 거즈를 흠뻑 적셨지만 출혈 기미는 물론 냄새도 나쁘지 않았다. 수술 부위에 국한되는 한 오늘 밤은 안심해도 좋았다.

질책과 함께 응원도 필요했다.

“환자분, 수술 잘됐고 현재까지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약속을 잊지 않고 회복에 전념한다면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하게 퇴원하실 수 있습니다. 힘내세요. 의지를 잃지 마세요.”

수술은 치료 시작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간곡히 당부를 전한 김지훈이 회진을 끝냈다.

“혁원아, 진우야, 오늘 수고 많았다.”

이혁원이 씨익 웃었다.

환자와 다른 의료진 앞에서는 꼬박꼬박 선생이라는 호칭을 붙였지만 개별적으로 볼 때는 이름을 불렀다. 사실 송재덕 교수를 비롯해 모든 교수들도 다르지 않았다.

친근함이자 아끼는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그때마다 떠오르는 전공의 시절의 아련한 추억도 절대 나쁘지 않았다. 힘들었을 때면 힘든 대로, 좋았을 때면 좋은 대로 다 소중한 기억이었다.

스테이션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최인선 환자를 보는 순간 국내 최초로 시도한 췌장 공장 문합술 성공이 주는 흥분과 감동이 또 한 번 물결처럼 가슴을 적셨다.

반면 합병증 없이 회복될지, 데메롤 중독이 끼칠 여파가 어느 정도일지 알 수 없어 서늘한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대책이 필요했다.

아홉 시가 훌쩍 넘은 탓에 병동 스테이션이 조용했다.

“송진우 선생, 당직 선생들에게 절대 데메롤 투여하지 말라고 전해.”

“예, 알겠습니다.”

그도 불안한지 간호사들에게도 한 가지 당부를 했다.

“혹시 수술 스트레스까지 받은 환자가 데메롤을 요구하며 난동을 부릴 수도 있어요. 즉시 당직 선생들에게 연락하고, 만약 제어가 안 될 것 같으면 내게 전화 주세요.”

“직접 나오시려고요?”

“필요하다면 당연히 그래야죠. 나 아직 혁원이나 진우는 거뜬할 정도로 힘 셉니다.”

이혁원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그럴까요?’

불안할 수밖에 없는 간호사들을 가벼운 농담으로 달래 준 김지훈이 교수실로 올라갔다. 한동안 의자에 앉아 차분하게 오늘 수술을 검토한 후 퇴근하려던 김지훈이 멈칫 걸음을 멈췄다.

멀찍이 떨어진 공동 교수실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사인방 중 한 명이겠지만 오늘 일과가 끝난 지 오래였고, 특별한 일이 있다는 말도 듣지 못했다.

‘이 시간에 누가 남아 있는 거야?’

열린 문 사이로 두런두런 오가는 나직한 대화가 들렸다. 맞은편에 위치한 TV에 아주 익숙하면서도 따끈따끈한 영상이 돌아가고 있었다.

‘어? 나도 못 본 최인선 환자 수술 테이프를 언제 가져왔대? 절개 과정은 다 보고 문합 과정을 보는 건가? 모인 지 꽤 된 모양이네.’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 살며시 귀를 기울였다.

한동안 감탄인지 탄식일지 모르는 소리만 들렸다.

“휴우! 대단하네. 현수야, 그런데 저 방향에서 접근하는 게 가장 안전했을까? 조금 더 아래쪽이면 한결 수월할 것 같지 않아?”

“기구 조작은 편할 것 같은데 시야가 잘 나올까요? 췌장 절개면 확보가 불완전해서 도리어 위험할 것 같네요.”

복강경 수술 경험 결코 적지 않은 신현수와 이경석이었다. 각자 자신의 경험을 총동원해 수술을 검토하며 복기하고 있었다.

도움이 되고도 남을 말이 많았지만 한계 또한 명확했다. 집도라는 실전과 영상으로 보고 판단하는 이론의 차이일 것이다.

“이 부분 처리도 절묘하네. 혁원아, 진우야, 너희는 어떻게 생각해? 최근에 지훈이하고 수술 많이 해 봤잖아.”

“잘 모르겠습니다.”

이혁원과 송진우는 또 언제 올라왔을까?

퇴근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총각은 몰라도 유부남에겐 상당히 위험한 도박이었다. 외과에서 가장 당찬 단발머리 심하게 찰랑거리면 얼굴 벌게지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에헤! 내가 이래서 집도의를 앉혀야 한다고 그랬잖아. 현수야, 우리끼리 백날 토론해야 답 안 나온다. 지훈이보다 저 상황을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손일석까지?

“지금쯤 회진 끝내고 피곤해 죽을 텐데 어떻게 불러?”

“강철 체력이라도 힘들긴 하겠지. 근데 내가 왜 여기 앉아 있는 거야? 어차피 발표할 게 빤하니까 조금만 더 보고 퇴근하자. 요새 와이프 눈초리가 심상치 않아요.”

일과 가정의 조화만큼 중요한 일도 없었다.

이미 꽤 늦은 시간이었다.

신현수도 동의했다.

“그럼 문합 마지막 과정만 확인하고 가자.”

“오케이! 이왕 늦은 거 거기까지는 가자. 에휴! 내가 왜 이 자식들하고 엮였을까?”

“일석아, 내가 형이라는 사실 자꾸 잊는데 조심해라.”

“어이쿠! 형님, 강호 법도를 누구보다 잘 아는 제가 감히 그 사실을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농담 속에 숨은 동료들의 무서운 열정에 김지훈이 웃고 말았다.

‘들어갈까? 아니지. 그럼 무조건 길어진다. 열두 시 넘고도 남을 텐데 오늘은 쉬자. 미안하다. 나 없이 열심히 검토해.’

강렬한 자극을 받았다.

수술 발표에 대한 부담도 가중됐다.

‘핵심은 항상 환자다. 모든 문제를 극복하고 건강하게 퇴원해야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겠지. 성급하면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역시 내일 집담회에서 발표하는 것은 무리야. 끝난 후 수술 테이프 리뷰하며 미흡한 점이 있었는지 확인해야겠다. 서민자 환자분도 봐야 하는데 어쩌지?’

교수들 모두 왕성한 학문적 욕심으로 눈에 불을 켜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술 하루도 지나지 않아 집중포화를 받기엔 너무 일렀다.

충분히 준비해 발표하는 것이 마땅했다.

이혁원, 나종진의 몫이었다.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갑자기 손가락을 튕겼다.

‘쉴 시간도 없는 경철이가 스스로 참관했단 말이지? 좋았어. 너도 당첨이다.’

열다섯 시간 만에 병원을 나섰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고민하다 마침내 으스스한 미소를 머금던 김지훈이 갑자기 고양이 걸음을 했다.

희연이가 단잠에 빠져 있었다.

부교수가 돼 근무를 시작한 후 딸 얼굴 본 날이 얼마나 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빠 노릇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었다.

‘아빠가 정말 여러모로 미안하다. 제길! 이번 주 내내 늦게 들어왔는데 주말까지 당직이라니, 이러다 희연이한테 아저씨 소리 듣는 건 아니겠지?’

왕성한 활동기에 들어선 써전이 공통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비애였다. 누구도 가지 못했던 길을 개척하고 있는 김지훈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살금살금 고경아를 찾았다.

“고생했어요. 걱정 말아요.”

남편의 마음을 아는지 토닥토닥 등을 두드렸다.

꼬르륵! 꼬르륵!

“저녁 못 먹었어요?”

“엉덩이 붙일 시간이 없었네요.”

“바로 밥 차릴게요. 잠시만 기다려요.”

“내가 알아서 먹어도 되는데.”

“피곤할 텐데 쉬어요.”

하루 종일 움직인 탓에 입 안이 텁텁했다.

“칼칼한 라면이 먹고 싶네.”

고경아가 손수 고춧가루 팍팍 뿌려 끓여 준 특제 라면에 찬밥을 두 그릇이나 곁들여 배를 채웠다. 포만감에 급격히 눈이 감겼다.

얼마나 잤을까?

전화벨이 한밤의 정적을 뚫고 울렸다.

(선생님, 환자 통제가 안 돼요.)

“어후!”

“어쩌겠어요. 빨리 다녀와요.”

김지훈이 밤거리를 달렸다.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강렬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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