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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005화 (1,005/1,329)

11화

김지훈의 발걸음이 힘찼다.

최인선 환자는 여전히 수술을 강력하게 원했고, 두 건의 수술 성공으로 가장 부족했던 자신감까지 확보했다. 방심은 금물이지만 커다란 소득이었다.

매일 환자 상태와 의지를 확인했다.

이준영 교수를 비롯해 이혁원, 나종진, 송진우 중 두 명이 함께할 수술 팀과 철저한 계획을 세웠다. 펠로우 간의 우열을 절대 가릴 수 없었지만 누군가 한 명은 눈물을 삼켜야 할 것이다.

경쟁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었다.

세부 전공을 택할 기준과 지식을 제공해야 했다. 따라서 고경철이 참가해야 하는 이유, 즉 교육의 목적도 배제할 수 없는 이유였다.

써전만의 준비로는 부족했다.

필요한 기구부터 사용할 실의 종류와 굵기까지 결정해 고경아와 함께 점검했다. 아울러 마취과에도 데메롤 의존이라는 환자의 특수한 상황을 미리 알렸다.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완벽한 호흡이었다.

수술 중에는 물론 수술 이후까지 쭉 이어진다면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을 것이다.

‘역시 수술은 팀이야. 원 포트 수술조차 혼자 하는 것 같지만 이런 바탕이 없다면 시행하지 못할 수밖에 없어.’

하루하루 수술 날이 다가와 긴장할 법도 했건만 김지훈의 어깨는 결코 처지지 않았다. 수술 팀 전체가 갖는 신뢰 이상의 힘은 없었다.

이제 이틀 남았다.

오늘도 모든 수술을 처음 하는 것처럼 열과 성을 다했다. 지금의 땀 한 방울이 최인선 환자의 삶을 찾아 주는 일에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이혁원, 나종진, 송진우에게도 눈을 떼지 않았다.

수술이란 기회를 줘 가능성과 열정을 엿보았다. 누구 한 명 나무랄 데 없었지만 미묘한 차이를 발견했다. 각자의 목표가 다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다들 최종 목표로 삼는 부분이 있겠지. 누가 스승님의 분야를 잇고, 오창도 선생님 분야는 누가 맡을까? 내가 추구하는 부분은 또 누가 목표로 삼을까?’

즐거운 상상을 하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스승의 뒤를 이을 제자?

김지훈이란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분명 모든 것을 배우고자 했는데 어느 순간 추구하는 분야가 달라졌다. 세세하게 쪼개지는 전문 분야 때문일 수도 있지만 새로운 시도로 도약하는 김지훈의 무서운 성장도 결코 무시 못할 요인이었다.

홀로서기일까?

그럴지도 몰랐다.

대가라 불리는 이준영 교수도 간담췌 파트의 모든 분야를 책임지고 발전시킬 수 없었다. 예전이라면 모르지만 지금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팔방미인이었던 김지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든 노력을 경주해도 부족할 새로운 분야를 추구하고, 도전하는 이상 더더욱 난망한 일이었다. 그러나 세대와 시간을 관통하는 핵심은 변하지 않는다.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한 번 제자는 영원한 제자인데 내가 별생각을 다 하네. 새로운 시도든, 새로운 분야든 스승님이 안 계셨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김지훈, 겸손해지자.’

스스로 민망한지 피식 웃음까지 터트렸다.

얼추 퇴근 시간이 다 됐다.

수술 전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려면 적절한 휴식이 필수였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막 교수실을 나서려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김지훈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바쁘다고 먼저 연락하지 못했던 선배나 연장자의 전화는 항상 미안하고 조심스럽다. 피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형님, 제가 먼저 전화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그동안 별일 없으셨죠?”

(김 교수 바쁜 건 세상이 다 아는데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야.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만 술은 곤란합니다. 모레 무척 중요한 수술이 있어서요.”

정훈철이 소리 내 웃었다.

(얼마나 중요한 수술이기에 술고래가 술을 마다해. 그럼 가족끼리 식사나 하자. 와이프도 그렇고, 승희도 무척 보고 싶어 해.)

“저를요? 승희 고삼이잖아요. 평일인데 시간이 있나요?”

(고삼에게 평일, 주말이 어디 있어? 김 교수 자네 말고 희연이 보고 싶다고 하도 성화를 부려서 오늘 하루 자습 뺐다. 따로 할 말도 있고, 내가 살 테니까 바로 나와. 제수씨에겐 와이프가 이미 연락했을 거야.)

‘이미 다 약속해 놓고 전화는 왜 하셨대?’

“알겠습니다.”

김지훈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서로 바쁜 사정 빤히 아는데 별일 없이 만나자고 할 정훈철이 아니었다. 게다가 평일인 탓에 가족 모임은 일종의 핑계일 뿐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는 말로 들렸다.

‘직접 얘기해야 할 일이 무얼까?’

전화 한 통에 이런 생각까지 하다니 맹탕은 아닌 모양이었다. 물론 손일석도 아니고 헛짚었을 가능성이 농후했지만 말이다.

김지훈이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조용한 일식집에서 두 가족이 마주 앉았다.

근간 술 한잔하지 못한 김지훈이었다.

소주가 팍팍 당겼지만 모레 있을 수술이 워낙 부담스러워 간단히 맥주 한 잔 곁들여 식사를 즐겼다. 활어회도 좋지만 두툼한 숙성회의 감칠맛 역시 일품이었다.

“여기 회 정말 맛있네요.”

“가격도 적당하고, 가족끼리 밥 먹기 딱 좋아. 희연이도 잘 먹네. 입 짧은 것 같아도 애들 입맛은 못 속인다니까. 아! 참치 먹어 봐. 요샌 참치가 점점 대세야.”

두런두런 그간 못 나누었던 대화를 이어 갔다.

올해 입시를 앞둔 승희도 간만에 본 희연이를 무척 귀여워했다. 언니, 언니 부르며 따르는 모습에 다들 미소를 머금었다.

슬슬 배가 불러 오기 시작했다.

마지막 남은 맥주를 탁 털어 넣은 정훈철이 헛기침을 하며 손깍지를 꼈다.

김지훈이 재빨리 반응했다.

“형님, 겸사겸사 할 말이 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응. 혹시 희귀 질환 환우회라고 들어 봤어?”

“알죠.”

“만나 본 적은 있어?”

“거의 대부분 내과, 소아과 해당 질환이라 우리 과하고는 접촉할 일이 없습니다. 간혹 소아외과 수술을 요하는 질환이 있지만 수술 후에는 내과나 소아과에서 치료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보긴 힘들죠.”

“그렇구나.”

“아시는 분이라도 있으세요?”

정훈철이 잠시 뜸을 들였다.

“아는 사이는 아니고, 특집 방송 준비하다가 딱한 사정을 들었어. 간 어디가 안 좋아 수술을 해야 한다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운 데다 보통 어려운 수술이 아닌가 봐.”

“무슨 병인지 모르시고요?”

“나도 그냥 한 다리 건너 들었어. 그보다 사정이 워낙 딱해서 김 교수 보자고 한 거야. 특집 방송 통해서 수술비 후원을 받긴 하겠지만 한 명에게 다 줄 수 없는 상황이라 딱히 방법이 없네. 수술 비용이 워낙 고가라니까 턱없이 모자랄 가능성이 높겠지.”

“희귀 질환은 보험이 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고, 치료 비용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들어서 경제적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일 겁니다. 제가 도울 일이라도 있을까요?”

정훈철이 다소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간 쪽인 데다 수술까지 무척 어렵다는 말을 듣고 우리 김 교수가 딱 떠올랐어. 아는 의사도 많지 않지만 김 교수 실력이 이거잖아.”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저보다 훌륭한 분들 많습니다. 간 쪽이라면 스승님을 빼고 말할 수가 없죠.”

“그건 그렇긴 한데 워낙 무뚝뚝한 양반이고, 실력이란 게 꼭 수술만 말하는 건 아니지. 혹시 전액은 아니더라도 병원 차원에서 아이 치료를 후원할 수 있을까? 김 교수가 적극적으로 나서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어때? 그만한 영향력이 있지 않아?”

“영향력이요?”

“간 센터 부센터장이잖아?”

김지훈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원장이나 부원장 혹은 과장이라도 되면 모를까, 대학 병원 구조나 생리상 명함도 못 내밀 직위였다.

어쨌든 오늘의 핵심은 환자 후원이었다.

정훈철의 사심이나 욕심이 아닌 이상 얼마든지 상의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정훈철이 기대하는 능력이나 영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치료비 지원은 우긴다고 될 일이 아니고, 이런저런 인연으로 어려운 환자 챙기다간 병원 재정 남아나질 않을 텐데 곤란하네. 이사님들을 설득할 수 있는 명분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힘든 문제다. 가만, 아이라고 하셨나?’

아이는 사회적 약자 중의 약자였다.

연민의 정이 아니더라도 최소 상황만이라도 알아보는 것이 기성세대의 의무이자 예의였다.

“형님, 환자가 몇 살입니까?”

“이제 열네 살이야.”

가뜩이나 마음이 안 좋았던 와이프들과 승희의 안타까움에 불을 질렀다. 세 쌍의 눈동자가 일제히 김지훈에게 쏠렸다. 덩달아 희연이까지 아빠를 빤히 쳐다보았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리며 얼굴을 감쌌다.

불현듯 구미에서 본 은비가 떠올랐다.

어른이건 아이건 질환과 치료는 차이가 없건만 아이가 아프면 유독 마음이 안 좋았다. 어떤 시도도 하지 않고 어렵다는 말로 끝낼 상황이 아니었다.

고개를 저으면 자신과 가족에 대한 배신이었다.

“일단 제가 아이를 만나 확인해 보는 것이 먼저일 것 같습니다. 이번 주는 정말 신경 써야 할 수술이 있어서 힘들고, 다음 주에 봤으면 좋겠습니다. 아! 간이 안 좋은 상태일 텐데 혹시 입원 중은 아닙니까?”

“돈이 웬수야. 의사들은 반대한다는데, 몸이 힘들면 입원했다가 상태가 조금만 나아져도 퇴원하길 반복하고 있다고 들었어.”

“억지로라도 퇴원이 가능하다면 최악은 아니라는 말이네요. 다행이네요. 그쪽 병원과 후원 문제는 상의하지 않으셨습니까?”

“말은 해 봤지.”

정훈철이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대화 중 마음이 상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병원이 자선단체가 아닌 이상 후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두고 비난할 일이 아니었다. 돈이 원수인 것은 환자나 병원이나 의사나 매한가지니 말이다.

김지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확언은 금물이었다.

희망 뒤에 찾아온 절망은 더 가혹한 법이었다. 자칫 아이와 가족에게 실망을 안겨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다만 이런 문제는 제가…….”

채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승희가 끼어들었다.

“삼촌, 수술해 주실 거죠?”

“응? 수술이야 뭐…….”

“난 삼촌을 믿어요. 삼촌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해요. 그 아이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솔직히 의대도 그래서 가고 싶어요. 희연아, 희연이도 아빠 믿지?”

“응!”

무척 곤란해졌다.

정훈철과 한수임이 눈치를 주며 입을 열려는 순간 김지훈이 승희를 보며 웃고 말았다. 이젠 어린아이의 단순한 치기가 아니었다.

정승희는 주관 뚜렷한 청년이었다.

“알았어. 삼촌이 최선을 다할게. 형님, 다음 주에 시간 잡아 연락 주세요.”

“고마워. 근데 무슨 수술이기에 술도 안 마시고, 이번 주는 아예 시간이 안 된다는 거야? 김 교수가 그 정도로 긴장하는 수술이 있나?”

분명 얼버무릴 김지훈이었다.

고경아가 쏙 끼어들며 활짝 웃었다.

“복강경으로 췌장 수술을 할 예정이에요.”

“제수씨, 그게 그렇게 어려운 수술이에요? 복강경 하면 우리 김 교수 아닌가?”

“쉬우면 벌써 했게요? 국내 최초로 시도하는 수술이에요. 부담이 얼마나 크겠어요?”

“국내 최초? 제수씨, 자세하게 얘기해 봐요.”

고경아가 남편 자랑에 열을 올렸다.

김지훈은 민망한 표정으로 그저 웃었다.

가족 모임이 끝날 때까지 정훈철과 정승희의 눈빛이 유난히 빛났다. 한 사람에게는 좋은 기삿거리를 주었고, 한 사람에게는 보다 먼 미래의 목표를 제시했다.

즐거운 시간이지만 내일의 생활이 있다.

“김 교수, 다음 주에 보자.”

꾸벅 고개를 숙인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열네 살 아이가 앓는 간 쪽 희귀 질환이 뭘까?’

김지훈의 관심이 질환 자체에 집중됐다.

돈과 관련된 후원이 가장 큰 문제기에 그럴듯한 명분이 필요했다. 사실 의사가 찾을 수 있는 명분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췌장 수술이 이슈가 되듯 환자, 질환 그 자체가 중요했다.

‘일단 발등의 불부터 해결하자.’

분산됐던 관심이 다시 최인선 환자에게 집중됐다.

수술 전날이다.

이혁원, 나종진, 송진우가 두 건의 췌장 종물 제거 수술 테이프를 다시 확인하며 퍼스트와 세컨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점검하고 또 점검했다.

오늘에야 수차례 반복했던 최종 점검이 끝났다.

이제 수술 팀을 결정해야 했다.

펠로우들의 열망과 긴장이 눈에 보였다.

난처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김지훈은 냉철한 판단력을 잃지 않았다. 개개인의 능력이 비등한 이상 각자의 경험과 기회 사이의 균형을 잃지 말아야 했다.

“이혁원, 퍼스트. 나종진, 세컨. 진우는 수술 테이프부터 기록 부분을 확실하게 챙겨. 능력 차이가 아니라는 건 너희들이 더 잘 알 것이라 믿는다.”

이혁원, 나종진은 주먹을 쥐며 움찔하면서도 티를 내지 않았다. 송진우 역시 얼굴이 살짝 발개졌을 뿐 실망한 기색을 내놓고 드러내지 않았다.

김지훈의 눈에도 기쁨과 실망이 분명하게 보였지만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신뢰하기에 일일이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이로써 수술 팀이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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