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나직한 한숨이 터졌다.
고령의 환자를 수술하고 있다.
수술을 멈출 때가 아니었고, 굳이 휴식을 취할 상황도 아니었다. 이런 긴장과 압박을 수없이 경험한 써전들에겐 당연한 진행이었다.
김지훈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후복막 부분 박리 진행합니다.”
삐이익! 삐이익!
하얀 연기 속 날카로운 보비음이 울렸다.
김지훈의 손이 더욱 빛을 발했다.
조직 속에 숨은 혈관과 위험 구조물들을 피해 가며 췌장을 들어냈다. 숱한 어려움이 이어졌지만 한 치도 주저하지 않았다.
개복 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째깍! 째깍!
서서히 끝이 보였다.
마지막까지 방심은 절대 금기였다.
처음과 똑같은 긴장감 속에 드디어 췌장이 떨어져 나왔다. 췌장 절단면, 후복막과 인접했던 부분, 대정맥의 박리 부위까지 철저하게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김지훈이 진충기 교수를 보았다.
“마무리해도 되겠습니까?”
“안전해 보입니다.”
“좋습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배꼽 절개창을 조금 연장해 췌장을 꺼냈다.
최종 확인 후 배를 닫았다.
“컷!”
마침내 두 번째 췌장 절제가 끝났다.
분명 흠잡을 데 없는 수술이었다.
고경아도 자신의 역할을 확실하게 수행했다.
김지훈이 이제야 뻐근한 목과 어깨를 돌리며 환자를 보았다. 마취과 의사의 능숙한 처치를 따라 서민자 환자가 반응을 보였다.
“끄으응! 끄으응!”
“환자분, 눈 떠 보세요.”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고령임에도 빠르게 마취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이 역시 복강경으로 수술한 목적이자 보람이었다.
수술 팀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오후 2시.
서민자 환자가 회복실로 옮겨졌다.
H 병원 펠로우들이 환자 상태를 집중적으로 점검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진충기 교수와 향후 치료에 대해 잠시 대화를 나눈 김지훈이 보호자를 만났다.
“어머니는요?”
“수술 잘 끝났습니다. 곧 병실로 올라가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긴장이 풀린 보호자들이 털썩 주저앉았다.
눈시울까지 축축해졌다.
두려움과 불안, 의심의 눈초리를 뚫고 수술에 성공했다. 어쩌면 기쁨의 미소보다 의사가 받을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일지도 몰랐다.
남은 설명은 집도의는 아니나 주치의인 이상 누구보다 큰 책임과 의무를 가진 진충기 교수에게 맡겼다.
“수술이 잘돼서 다행입니다. 병실에 올라가시면 오늘은 푹 쉬게 하시고…….”
진충기 교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무엇이 감정적 동요를 일으켰을까?
그 시간 참관실이 어색한 침묵에 잠겼다.
성공을 바라며 도입 의지를 가진 이들은 물론 위험성과 문제점에 더 주안을 두었던 이들까지 순간 말을 잃었다.
수술 내내 보여 준 김지훈의 기구 조작 실력은 절로 감탄을 자아냈다. 위험 구조물을 박리하는 과정은 손에 땀이 밸 정도였지만 과감하면서도 매끄럽게 해결했다.
수술 팀과의 호흡 역시 완벽했다.
노련한 써전들이 호흡을 맞춘 덕이었다.
그 결과 수술 부위는 깔끔했고, 어떤 문제도 남기지 않았다. 더욱이 수술 시간이 척도는 아니지만 개복과 거의 비슷한 시간에 췌장을 절제했다. 향후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 역시 개복과 크게 다를 수가 없었다.
오늘의 결과만 보면 복강경은 개복을 대체하고도 남을 훌륭한 수단이었다.
놀라움 이외에 표현할 말이 없었다.
‘후우! 라파로의 한계라 여겼던 췌장을 이 정도로 순조롭게 절제하다니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짝! 짝! 짝!
누군가 박수를 쳤다.
작은 파장이 큰 물결로 변하는 것처럼 박수 소리가 커졌다. 애초 어떤 생각을 품었든 김지훈과 수술 팀에게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짝짝짝짝짝!
당연한 의문이 뒤따랐다.
“이 교수님, 김 교수가 전공의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긴 했지만 정말 훌륭한 써전으로 키우셨습니다. 특별한 방법이라도 있는 겁니까?”
“노력과 도전이 답이겠죠. 췌장 절제 수술이 아니더라도 원 포트 시연을 보시면 김 교수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실 겁니다.”
나직하고 굵은 목소리가 참관실을 울렸다.
토요일 오후였다.
대부분 췌장 절제 수술만 보고 귀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준영 교수의 말과 눈앞에서 본 수술 결과에 생각을 바꿔야 했다. 자리를 뜨려던 몇몇마저 뒤늦게 H 병원에서 마련한 점심 도시락을 찾았다.
허기진 배를 채우자 다들 오늘의 주인공을 보고 싶어 했다. 근질거리는 입을 참지 못한 타 병원 주임 교수가 송재덕 교수에게 조용히 물었다.
“원장님, 김 교수 얼굴이 안 보이네요.”
“지금쯤 허겁지겁 빵, 우유로 배를 채우고 있을 겁니다. 빵, 우유로.”
“다음 수술 준비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고, 체력 소모도 심했을 텐데 빵, 우유로 되겠습니까?”
“환자 따라 병실 갔다 오고 다음 시연 준비하려면 시간이 없잖아요. 시간이.”
“H 병원 펠로우들이 있지 않습니까?”
“지훈이 그놈이……. 흠흠! 김 교수가 원래 그래요. 원래. 우리 신 교수와 손 교수도 원칙처럼 지키는 일입니다. 신 교수, 손 교수, 내 말이 맞지? 그치? 우리 그렇게 하잖아.”
손일석이 재빨리 대답했다.
“다 원장님께서 누누이 강조하며 가르쳐 주신 덕분입니다. 신현수 선생, 안 그래?”
“당연하지. 전공의 때부터 수시로 강조하신 일이잖아.”
“허허허! 그렇구나. 그랬구나. 오늘 도시락이 왜 이렇게 맛있니. 늦게 먹는 도시락이 더 맛있나? 여기 식당 아주머니 실력이 지훈이 뺨친다. 지훈이 뺨쳐.”
송재덕 교수의 어깨가 들썩였다.
남들에게는 아부처럼 들리겠지만 손일석 특유의 입담이자 사실이었다. 스승과 제자로 강하게 묶인 외과 의국의 힘을 보여 주는 말이기도 했다.
‘저런 말이 자연스럽게 들리다니 내가 일석이를 너무 좋게 보나? 현수도 능구렁이가 다 됐어.’
이준영 교수마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느새 늦은 점심시간이 끝났다.
거의 대부분이 남아 김지훈 집도로 시작될 원 포트 수술 시연을 기다렸다. 어떤 교육을 해야 S 병원의 독주를 막아 낼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또한 발전의 원동력이 분명했다.
수술실 전체 정경이 화면에 떴다.
김지훈을 필두로 수술 팀이 모습을 드러냈다.
짝! 짝! 짝!
들릴 리 없건만 박수가 터졌다.
각자 자신의 병원을 대표하는 간담도 교수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다니 대단한 영광이었다.
이준영 교수마저 움찔거렸다.
처컥! 처컥!
툭툭! 담낭이 떨어져 나왔다.
끼익! 클립으로 혈관 잡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담낭이 배 밖으로 나오고, 1.5센티미터 정도 되는 절개창은 배꼽 속으로 쏙 숨었다.
수술 세 개가 연이어졌다.
진충기 교수가 카메라를 잡고, 오창도 교수가 만일을 대비해 대기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김지훈의 독무대였다.
원 포트 수술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사전에 알지 못했으면 투 포트 수술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진행했다.
불과 두 시간 만에 모든 수술이 끝났다.
오후 다섯 시가 채 지나지 않았다.
매끄럽게 준비한 덕도 있지만 김지훈의 실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매서운 눈으로 모든 수술을 함께한 진충기 교수가 결국 나직한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한 발이 아니라 몇 발 앞서 있다. 유학 덕분일까? 무엇이 이유든 원 포트 수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빠른 시간 내에 췌장 절제를 성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췌장 공장 문합술은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뒤처졌다는 허탈함이 독기로 이어졌다.
질시나 비뚤어진 경쟁의식이 아닌 스스로 각오하고 다짐하는 건강한 독기였다. 그런 마음이 말과 목소리에 담기지 않을 수 없었다.
“김지훈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잘 배웠습니다. 오 교수, 김지훈 선생님이 어떤 수술을 하는지 혼자만 알지 말고 곧바로 알려 줘. 고 간호사님도 오늘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진충기 교수가 활짝 웃었다.
김지훈의 얼굴도 환해졌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 많이 변하셨다. 이젠 진짜 라이벌이 된 건가? 쩝! 안팎이 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적이네.’
“선생님도 수고하셨습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힘차게 인사를 건넨 김지훈이 참관실에 들렀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새로운 수술이 모두 성공적으로 끝나자 왕성한 지적 호기심이 발동했다. 하나라도 정보를 더 얻어야 빠르게 도입할 수 있다는 욕심도 적지 않았다.
진충기 교수도 애초 원했던 일인 모양이었다.
“예정에 없는 일이지만 간담회 형식을 빌려 추가 자리를 마련했으면 합니다. 이준영 선생님, 어떠십니까?”
“우리는 상관없습니다.”
김지훈이 빠지면 안 된다.
수많은 의사들의 시선을 받은 김지훈이 가볍게 목례한 후 후다닥 어디론가 향했다.
병실이었다.
끝까지 원칙을 잊지 않았다.
의외의 얼굴이 따라붙었다.
이혁원과 송진우 옆에 나종진이 보였다.
“너희는 쉬고 있지 왜 따라와? 종진이 너는 오후에 급한 일이 있다며 왜 여기 있어?”
“서민자 환자도 보실 거 아닙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환자분 얼굴은 보고 가야죠.”
“저는 시연이라도 보러 왔습니다.”
“자식들! 고맙다.”
절로 미소가 따라붙는 말이었다.
참관 의사들과의 대화 역시 진지하면서도 즐거웠다. 각 병원의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의 매서운 질문에 종종 땀을 흘려야 했다.
아침부터 시작한 H 병원의 시간이 오후 여덟 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진충기 교수의 강력한 요청에 양 병원 써전이 모두 모여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우호와 친분을 다지는 자리였다.
인맥을 경원시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리사욕이 아니라면 오히려 환영할 인연이었다. 서로를 끌고 밀며 발전할 토대가 될 것이다.
돌아갈 시간이 됐다.
술에는 입도 대지 않은 진충기 교수가 마지막까지 김지훈을 긴장하게 했다.
“오늘 내 스스로 설정했던 한계를 깬 것 같습니다. 췌장 공장 문합술 일정 잡히면 꼭 연락 주셔야 합니다.”
김지훈이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방심하는 순간 무섭게 추격해 올 것이다.
어쩌면 이미 같은 선에 서 있는지도 몰랐다.
“허허허! 가자. 가자. 좋구나. 좋아. 허허허!”
얼굴 발개진 송재덕 교수의 너털웃음 속에 긴장, 부담, 환희, 감탄, 놀라움까지 온갖 감정이 교차한 H 병원 집도와 시연을 마무리했다.
김지훈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이준영 교수가 고개만 까딱였다.
어떤 칭찬이나 어떤 감사함도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었다. 서로에게 보인 스승과 제자의 눈빛만으로 충분했다.
일요일 오후.
김지훈이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긴장이 한꺼번에 풀린 데다 피곤까지 덜 풀려 온몸이 나른했지만 서민자 환자를 만나고 왔다. 75세 고령에 어울리지 않는 회복을 보였다. 보호자들의 정성까지 겹쳐 복강경 수술의 효용성이 더욱 돋보였다.
‘이대로 가면 사모님하고 비슷한 결과를 밟을 수도 있겠어. 두려움이었던 고령이 오히려 라파로의 장점을 확실하게 보여 주다니 도전한 보람이 있어.’
불현듯 나종진이 떠올랐다.
수술 날이면 어김없이 볼 수 있는 원 포트 수술 시연을 굳이 보러 올 필요가 없었다. 아마도 무엇인가 확인할 겸 뚜렷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저녁에 벌어진 간담회와 회식 중 몇 번이나 기회가 있었지만 묻지 않았다. 만약 김지훈 자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해도 본인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마땅했다.
전문의를 대할 때 가져야 할 자세였다.
또한 그것이 후배를 향한 선배의 대접이었다.
‘종진아, 원 포트 전담이란 말은 잊어. 세부 전공으로 택할 수도 있지만, 보다 어려운 수술의 발판이란 점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만 하지 않으면 돼.’
소리 없는 응원을 보낸 김지훈이 간만에 모든 부담을 잊고 가정에 충실했다.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사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아내, 엄마로 사는 일은 더욱 만만치 않을 것이다. 어린 희연이마저 고민이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또 한 주가 지났다.
서민자 환자는 진충기 교수가 최선을 다해 치료할 것이다. 특별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이제 최인선 환자에게 집중할 때였다.
수술이 며칠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