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자신도 모르게 성공을 기원했다.
예전이었으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써전으로서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는 김지훈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다.
진충기 교수가 악수를 청했다.
“반드시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H 병원의 시간이 끝났다.
돌아오는 길, 오창도 교수가 물었다.
“보호자 눈치가 긍정적이지 않네요. 상당히 불안해 보이던데 동의할까요?”
“모든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역시 라뽀를 쌓을 시간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네요.”
“진충기 선생님에게 맡기시죠. 지난 삼 년 동안 많이 변하셨습니다. 다시 청년 의사로 돌아오신 것 같습니다.”
“청년 의사요? 좋은 말이네요.”
미소 짓던 김지훈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서민자 환자 수술의 의미가 전에 없이 다가왔다.
췌장 절제 한 번 더 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37세 남자 환자, 최인선의 췌장 공장 문합술까지 걸린 상황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욕심을 부리는 걸까? 욕심이 아니라면 반드시 내게 주어진 기회를 모두 잡아야 한다. 무엇을 해야 할까?’
집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진충기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동안 통화를 하며 무언가 깊게 상의하고는 홀가분한 미소를 머금었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최선을 다해야만 길이 보일 것이다.
의사 입장, 수술의 필요성과 장점 등을 떠나 환자의 절실한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 마땅했다. 수술은 분명 환자의 정신과 마음에도 극심한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이었다.
***
김지훈의 일상이 더욱 바빠졌다.
어느 하나 기본 아닌 것이 없었다.
한 건의 진료, 한 건의 수술이 남다르게 느껴졌다.
진료를 통해 환자의 마음을 이해하려 애쓰고, 수술을 통해 기본기를 다시 되짚었다. 지금까지 시행했던 수술 중 가장 고난도의 수술을 앞두고 초심을 떠올리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펠로우들의 생활도 달라졌다.
전공의처럼 눈을 반짝이며 수술에 임하는 김지훈이 자신의 위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었다. 췌장 공장 문합술 준비까지 겹쳐 일과 중에는 한 치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았다.
전공의들은 살인적인 상황에 헉헉거렸다.
일이 많아진 탓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본격적으로 연차에 맞게 수술을 주기 시작하면서 어마어마한 압박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엎친 데 덮친다고 교수들 중 가장 팔팔한 사인방마저 가세했다.
전공의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사 년 차 치프가 아뻬를 하고 까맣게 탔으니 말 다 했다.
“똑바로 하자.”
하필이면 이런 시국에 간담췌 파트를 돌고 있는 고경철은 거의 숨도 쉬지 못했다. 퍼스트에 만족하며 만세 부르는 환호마저 순간이었다.
수처와 타이가 있는 한 어떤 자리에 서든 결과는 동일했다. 더욱이 의사 평생 잊지 못할 특별한 통과 절차가 머지않았다.
김지훈이 더욱 매섭게 밀어붙이는 이유기도 했다.
“고경철!”
‘매형!’
그 한마디면 끝이었다.
그래도 다들 웃을 수 있었다.
일과 중에는 잠시도 쉬지 못했지만 교수 누구도 오프나 일과 후 생활을 침범하지 않았다. 충분히 쉬며 재충전하는 일과 간간이 벌어지는 회식 참가 역시 각자의 몫이었다.
물론 예외는 존재했다.
너무 잦아서 탈이지만 말이다.
“오늘 오후 오창도 선생님과 최인선 환자 수술 논의할 예정이야. 이준영 선생님도 참석하실지 모르지만 일 있는 사람은 빠져도 돼.”
호랑이를 언급하다니!
나쁜 놈!
펠로우 세 명과 미래를 꿈꾸고 있는 전공의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야말로 살이 되고 피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써전 또한 없었다.
최고의 써전이라는 목표를 위한 자리였고, 반드시 넘어서고 싶은 써전인 김지훈이 주재하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다들 불타올랐지만 김지훈만큼 열정에 빠진 의사도 없었다. 다만 환자가 인생의 모든 것이 될 수는 없었다.
당연히 고경아와 희연이에게도 최선을 다했다.
우두둑! 우두둑!
관절 꺾이는 소리를 달고 다녔다.
고민거리에 생각이 많아질 법도 했지만 베개에 머리 대는 순간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둘째는 꿈도 못 꿀 상황이었다.
똑똑똑!
김지훈이 점심시간을 틈타 병실을 찾았다.
식사를 앞에 둔 최인선 환자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 배를 움켜쥔 두 손, 발을 동동 구르는 보호자는 극심한 고통의 표현이었다.
“오… 오셨습니까?”
“많이 아프십니까?”
제대로 입을 열지 못했다.
간호사가 데메롤을 주사한 후에도 한참 동안 아픈 배를 부여잡은 채 고통에 시달렸다.
“죄송합니다. 버틸 수가 없네요.”
의지로 참을 수 있는 통증이 아니었다.
만성 췌장염이 유발하는 고통을 얼마나 줄여 줄지 모르지만 수술 이외의 해결 방안은 없다는 사실을 또 한 번 깨달았을 뿐이었다.
환자는 아직도 간절하게 수술을 바라고 있었다.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서민자 환자와 정반대 상황이었다.
자신은 두려움에 젖어 수술을 주저했는데 오히려 환자가 강력하게 수술을 요구했다. 목숨보다 정상적 삶이 중요하다는 말은 절규에 가까웠다.
‘반드시 라파로로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일까? 아니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어느 쪽이든 결국 내가 문제다. 환자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평생 후회하게 될 테고, 이런 경우가 닥치면 또다시 물러날 것이다.’
수술하기 딱 좋은 케이스만 고를 수 없는 일이었다. 고르고 고르면 성공률은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얻은 결과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명예,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일 따름이었다.
필요한 것은 자신감이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환자를 결코 피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철저하게 준비해 후회나 미련 없이 수술에 임하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한 번 내뱉은 말은 절대 무를 수 없다.
‘반드시 당신의 삶을 찾아 주겠습니다.’
“환자분, 복강경으로 수술 일정 잡겠습니다. 의지를 잃지 말아 주십시오. 저 역시 의지를 갖고 수술하겠습니다.”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메마른 미소, 일그러진 고통만 보였던 환자의 눈가가 붉어졌다. 수술 위험성과 실패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잊은 것인지, 기억하는지 몰라도 상관없었다.
확실하게 결정했다.
뚜벅뚜벅 전진하는 일만이 남았다.
반드시 성공해 인간다운 삶을 찾아 줄 것이다.
병원이 달라도 원칙은 동일하다.
오히려 더욱 강조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똑똑똑!
서민자 환자와 보호자들이 깜짝 놀랐다.
김지훈이 갑작스럽게 방문한 것이다.
“어쩐 일이십니까?”
“어머님 뵈러 왔습니다.”
“일정이 바뀌기라도 한 겁니까? 아니면 당장 결정을 해야 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소속 병원이 달라도 집도의의 역할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무엇이 불안하고,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모르면 수술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보호자가 무거운 한숨을 터트렸다.
“아들 셋 키우느라 평생 고생만 하셨습니다. 얻으신 거라곤 병들어 쇠약해진 육신뿐이네요. 수술받으면 괜찮다고 하지만 사망까지 언급하는 의사 선생님들 경고에 잠을 자기 힘들 정도입니다.”
단지 효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족이라면 누구나 갖는 두려움이었다.
특히 연로한 부모가 극도로 쇠약해졌다면 아뻬를 받는다 해도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하기에 반드시 복강경으로 수술해야 했다.
당위성을 말하려던 김지훈이 입을 열려다 말고 나직한 한숨만 내뱉었다. 최인선 환자를 보며 느꼈던 자신의 두려움을 보호자가 느끼고 있었다.
설득은 답이 아니었다.
들어 주고,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길이었다.
“이해합니다. 저 같아도 두려워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우리 경우라면 어떻게 하셨을 것 같습니까?”
“저도 주저했을 겁니다. 수술 자체가 두려운데 새로운 시도라니 누구도 선뜻 동의하기 어렵겠죠. 어머님 수술인데 유리한 점보다 불리한 점에 신경 써야 하는 것이 맞고요.”
“진충기 선생님과는 약간 다르시네요.”
“다르지 않습니다. 환자에게 함부로 감정을 이입하지 말라고 배워 드러내는 일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탓일 겁니다. 저 역시 오늘은 예외적이고요.”
솔직하게 말한 덕인지 보호자도 자신의 심경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서민자 환자는 아들의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도리어 자식들을 걱정했다.
환자와 보호자는 말하고, 김지훈은 들었다.
장점이나 유리한 점은 일언반구도 없이 환자와 가족의 두려움과 걱정을 마음으로 나눴다. 수술과 관련된 사항은 말이 나올 때만 대답했다.
제법 오래 시간이 흘렀다.
“이제 가 봐야겠습니다. 일정 내에 결정을 내려 달라는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네요.”
“가족 모두 걱정이 많았는데 정말 감사했습니다.”
“저도 환자분과 보호자분들의 마음이 어떤지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지훈이 H 병원을 나섰다.
수술을 권유하는 말은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대신 환자, 보호자와의 유대와 신뢰를 어느 정도 쌓은 것은 분명했다.
문득 아이러니한 생각이 들었다.
‘강력하게 수술을 원하는 최인선 환자를 보며 두려워했다. 반대로 집도의로서 강력하게 수술을 원하지만 서민자 환자와 보호자의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두려움이 남아 있는 한 어떤 경우든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빤히 알면서 아직도 의사가 전적으로 수술을 결정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우습네.’
의사와 환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단순히 육신을 치료하고, 치료받는 입장이 아니라 서로의 감정과 생각의 공유도 필요했다. 물론 냉철한 이성과 합리적 판단은 언제나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였다.
균형 잡기 어려워 탈이지만 말이다.
밤늦게 돌아온 김지훈을 보며 고경아가 물었다.
“잘됐어요?”
“모르겠어요. H 병원 환자를 수술한 후 췌장 공장 문합술을 하면 딱 좋을 것 같은데 마음처럼 쉽지 않네요.”
“마음대로 될 일이면 지훈 씨가 시도하기 전에 이미 누군가 라파로로 수술했겠죠. 첫 시도인데 이 정도 어려움도 없으면 재미없잖아요. 잘될 거예요.”
“재미로 수술하나?”
“수술실에서는 그렇게도 보여요. 열정인가? 호호호!”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김지훈도, 고경아도 마음이 편해졌다. 한 아이를 둔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보내는 사랑 때문일 것이다.
째깍! 째깍!
해가 뜨고 졌다.
약속한 날이 왔다.
저녁이 다 되도록 진충기 교수의 전화는 없었다.
은근히 초조해질 무렵 드디어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진충기입니다.)
서민자 환자와 보호자들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진충기 교수의 목소리가 살짝 상기됐다.
(라파로로 수술받겠다고 합니다. 최대한 안전할 수 있도록 이번 주부터 수술 준비 들어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다음 주 초 수술 팀 모두 모여 최종 점검을 해야 하니까 자리 준비해 주십시오. 오창도 선생님과 가겠습니다.”
김지훈의 목소리도 들떴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김지훈이 불끈 주먹을 쥐었다.
바라 마지않은 일이었다.
기대했던 대로 진행된 이유 중 결정적 요인은 없었다. 그동안 환자에게 기울였던 모든 노력, 행동, 대화의 결실이 종합적으로 작용한 것이 분명했다.
‘의사란 존재가 무엇인지 웬만큼 알고 있다고 여겼는데 갈수록 명심해야 할 일이 많아지네.’
강한 압박과 부담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마음 한구석이 홀가분해졌다. 성공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와 고민만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오창도 선생님!”
김지훈의 목소리를 따라 강한 긴장이 퍼졌다.
이제 철저한 준비와 실행만 남았다.
H 병원 수술 팀과 논의하기 전 모든 사항을 확실하게 정리해야 했다. 간담췌 파트 전 구성원이 구슬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주말 집담회는 매우 훌륭한 준비의 장이었다.
시작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일단 후줄근한 땀이 한 바가지 쏟아졌다.
다만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에 펠로우 이하 의국원 전체가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가 있었다.
김지훈의 주도하에 성격 자체가 약간 달라졌다.
서민자 환자의 증례를 두고 치열한 이 차 토론이 펼쳐졌다. 특히 수술 과정을 보며 다양한 의견이 개진됐고, 김지훈은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았다.
누구의 의견이든 듣고, 정리하고, 요약했다.
고경철이 눈가를 굳혔다.
‘매형은 가르쳐야 하는 입장일 수밖에 없는데 어떤 때 보면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눈에 보일 정도야. 의사는 평생 배워야 한다는 아버지 말씀이 이제야 와닿네.’
가족이라고 살가운 말을 건네는 것도 아니었다.
특별한 대우는 꿈도 못 꾸었다.
그래서 존경스러웠다.
그래서 더 좋았다.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던 고경철이 화들짝 놀라며 발을 놀렸다.
“고경철, 뭐 하는 거야? 정리 안 해?”
휴우! 고단한 일 년 차 생활 언제 끝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