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특정 파트라 해도 외과인 이상 함께 알려질 수 있다. 충분히 개연성 있는 말이었지만 정훈철에게 부담 주기 싫은 김지훈이 손사래를 쳤다.
“이제 한 건 성공했어. 예정된 수술 실패하면 설레발치다 창피만 당하는 꼴이야. 그리고 훈철이 형한테 뭐라고 해?”
“자랑할 건 자랑해도 돼. 다른 병원은 방송 타려고 로비까지 한다는데, 국내 최초란 타이틀을 이대로 썩힐 거야?”
“환자만 알면 돼.”
“내 말이! 그래야 더 많은 환자가 알지?”
“그만해. 선생님, 내일 저녁 환자 면담하기로 약속 잡았습니다. 수술 팀만 다녀올까요?”
김지훈이 이준영 교수를 보며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그 스승에 그 제자다.
더 말해 봤자 어떤 반응 나올지 빤히 아는 손일석이 눈을 부라리며 급히 입을 다물었다. 역시 정훈철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게 좋겠다. 나종진, 회진 돌자. 원장님도 회진 도시죠.”
“어? 그래. 그래. 회진 돌자. TV 뭐 그거 안 나오면 어떠니? 그래도 나오면 좋겠다. 좋겠어. 병원하고 우리 과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니? 경석아, 가자. 가자.”
엉뚱하지만은 않은 제안을 뒤로하고 분주한 회진이 시작됐다. 김지훈을 비롯해 이혁원, 송진우에게 유달리 뜻 깊은 시간이었다.
함께 수술했기에.
“사모님, 벌써 옷 갈아입으셨네요.”
“마음이 급하네요. 김지훈 선생님, 정말 감사드려요.”
“아닙니다. 무엇보다 사모님이 절 믿어 주신 덕분이고,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일주일 후 외래에서 뵙겠습니다.”
“예. 이혁원 선생님, 송진우 선생님, 신경 많이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진아 환자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병원을 나서는 모습까지 볼 수는 없었다.
환자의 밝은 웃음으로 충분했다.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하는 것 자체로, 진정이 담긴 고맙다는 말이야말로 국내 최초라는 타이틀을 정말 값지게 하는 것이었다.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선생님도 몸 관리 잘하셔서 저처럼 아픈 환자 건강하게 해 주세요.”
회진을 마친 김지훈이 어깨를 들썩였다.
입이 귀에 걸렸다.
이제 마음 놓고 즐거워해도 좋았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먼저 갔다는 사실을 즐기며 자부심을 가져도 괜찮았다. 자만을 경계한다면 이어질 수술도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믿었다.
까르페 디엠!
이혁원과 송진우가 밝게 웃었다.
“김지훈 선생님도 어쩔 수 없네.”
“저 같으면 춤이라도 췄을 겁니다.”
“축하주를 사면 더 좋겠지. 부교수라면 소주보다 더 맛있는 술을 사지 않을까?”
손일석이 어깨동무를 하며 씨익 웃었다.
이혁원이 꼴깍 침을 삼켰다.
들뜬 마음을 추스른 김지훈이 일상으로 돌아왔다.
내일 저녁, H 병원으로 가 진충기 교수의 환자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또 다른 기대와 부담을 불러일으켰다. 의사 인생 처음으로 타 병원에 가 수술한다는 사실에 강한 흥분마저 느껴졌다.
째깍! 째깍!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훌쩍 지났다.
어느새 일과가 끝났다.
김지훈이 세컨을 설 가능성이 높은 오창도 교수, 참관을 원하는 이혁원, 나종진과 함께 H 병원으로 향했다. 멀리 세련되어 보이는 건물이 보이는 순간 두근두근 이상스레 심장이 요동쳤다.
‘단순한 집도가 아니다. 우리 병원, 우리 과를 대표한 수술이다. 무엇보다 환자에게 신뢰를 얻지 못하면 시도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자랑, 명예, 명성은 금기였다.
오직 환자만을 생각하고 수술에 성공한 이후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대가임을 잊지 말아야 했다. 진충기 교수가 자존심을 접은 이유 역시 가슴에 담아야 할 마음이었다.
병원 입구에 들어섰다.
누군가 달려와 반갑게 맞이했다.
“오창도 선생님, 오셨습니까? 김지훈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 예전 학회에서 뵀었는데 기억나십니까?”
갸웃거리던 김지훈이 반색했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 찬찬히 보니 낯익었다.
“아! 기억납니다. 지금 펠로우?”
“맞습니다. 진충기 선생님 밑에서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선생님도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건강한 눈빛이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법이다.
사람 변하기 쉽지 않건만 욕망에만 충실했던 진충기 교수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수술 요청 자체로 이미 의심할 여지가 없긴 했다.
H 병원 펠로우를 따라 상당히 잘 꾸며진 회의실로 안내됐다. 마치 오래간만에 고향을 찾은 듯 오창도 교수가 여기저기 둘러보며 감회에 젖었다.
회의실 문을 열었다.
김지훈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진충기 교수와 파트 구성원 몇몇만 있을 줄 알았는데 무려 십여 명이 넘는 의사들이 모여 있었다. 특히 파트가 다른 외과 과장까지 남아 환대할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김 교수님, 잘 오셨습니다. 진 교수에게 상황 전해 들었습니다. 우리 외과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하하하! 학회 때부터 쭉 봐 왔는데 여전히 겸손하군요. 좋은 결과 나오길 바랍니다.”
간단한 다과를 앞에 두고 의사로서, 동료로서 나눠야 할 말을 전하고 들었다. 타 병원 의사에게 수술을 요청했지만 창피해하거나 데면데면한 사람은 없었다.
도리어 H 병원 의사들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최고의 병원에서 최상의 치료를 하고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환자를 위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짐작은 했지만 분위기가 확 변했네.’
놀라움은 끝이 없었다.
분위기가 잡히자 펠로우들을 놔두고 진충기 교수가 직접 환자 소개를 시작했다. CT, MRI, 초음파 결과까지 상세히 설명한 후 곧바로 마이크를 넘겼다.
“환자 케이스 및 자료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지훈이 넥타이를 고쳐 매며 훅 숨을 내쉬었다.
학회 발표만큼이나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안녕하십니까? S 병원 간담췌 파트 김지훈입니다.”
준비해 간 자료와 슬라이드를 통해 첫 번째 수술 경험을 공유했다. 열정적인 눈빛과 배우려는 자세는 또 하나의 놀라운 경험이었다.
‘이런 자세는 반드시 배워야 해. 뒤처지기 전에 부지런히 다른 병원의 앞선 지식을 찾아 배워야겠다.’
경쟁 병원 의사임에도 진지하게 대하는 모습에 의욕이 넘쳤다. 마지막 슬라이드까지 김지훈의 열정적인 목소리가 잦아들지 않았다.
“이상으로 증례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질문 있으십니까?”
“대동맥과 인접한 부분 처리를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후복막 박리 시 유의해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질문이 빗발쳤다.
“라파로에 상당한 숙련도가 요구된다고 하셨습니다. S 병원에서는 어떤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까?”
“부끄럽게도 원 포트 시연까지 부탁하셨습니다. 아마도 그것에 길이 있지 않나 합니다.”
질문과 대답이 이어지는 사이 어둠이 짙게 내렸다.
이제 환자를 만나야 한다.
큰 박수를 마무리로 자리를 끝냈다.
감탄과 놀람 속에 간담췌 파트가 아닌 써전들까지 진한 아쉬움을 보였다. 자리를 뜨지 못하며 쉽지 않은 걸음을 해 줘 고맙다는 말을 거듭했다.
파트가 다름에도 복강경 혹은 새로운 시도에 이렇듯 뜨거운 관심을 보이다니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김지훈이 훅 숨을 내쉬었다.
‘현수, 경석이 형, 일석이 같은 의사가 차고 넘치네. 유학까지 다녀왔으면서 아직도 우물 안 개구리처럼 생각하고 살았어. 반성하자.’
북적거리던 자리가 정돈됐다.
양 병원 간담췌 파트만 남았다.
안내를 맡았던 펠로우가 재빨리 병실에 연락을 취했고, 잠시 후 환자가 내려왔다.
75세 여자 환자, 서민자.
아들 셋과 함께였다.
진충기 교수의 소개로 인사를 나눈 후 곧바로 면담에 들어갔다. 김지훈이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신중하게 첫마디를 꺼냈다.
“안녕하십니까? S 병원 김지훈입니다.”
“안녕하세요.”
연로한 노모가 환자일 경우 으레 그렇듯 아들이 대신 인사했다. 결국 의사 결정은 자식의 몫이었고, 환자 못지않은 불안감이 엿보였다.
환자와의 유대가 가장 중요하지만 보호자와의 신뢰 역시 강하게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환자를 보는 순간 복강경 수술이 강력하게 요구되는 경우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바로 나이와 쇠약한 전신 상태였다.
‘유리한 말부터 해야 할까? 아니야. 장단점이 아니라 왜 라파로로 해야 하는지 설명해야 한다. 무엇보다 지금은 어떤 감정도 도움이 안 된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핵심을 짚어야 한다.’
“수술의 필요성과 위험성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들으셨을 겁니다. 어떤 방법을 택하든 만만한 수술이 아닙니다만, 복강경 수술이 왜 필요한지 한 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수술 후 고생 덜 하시고, 회복이 훨씬 빠르기 때문 아닙니까?”
“맞습니다. 덧붙여 말씀드리면 어머님이 고령이시고, 몸 상태가 상당히 약해지셨다는 사실을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개복하면 젊은 사람도 힘들어하는 수술입니다. 생각 이상으로 장기간 입원을 요할 수도 있고요. 반면 복강경의 장점은 명확합니다. 성공한다면 기대 이상의 결과를 얻게 됩니다.”
보호자가 눈가를 찡그렸다.
“장단점은 충분히 들었습니다. 실패 시 개복 때보다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까지요. 아들 입장에서 성공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의사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복강경 수술의 당위성이었지만, 보호자가 진정 알고 싶은 것은 성공 확률일 수밖에 없었다.
편법이나 말장난은 역효과만 낼 것이다.
비록 단 한 번의 경험이 있을 뿐이었지만 필요한 자세는 단호함과 자신감이었다.
김지훈이 가슴을 폈다.
“똑같은 질환으로 수술받은 분이 무사히 퇴원하셨지만 확률은 의미가 없습니다. 의사로서 최선을 다해 어머님을 치료할 뿐입니다. 췌장 복강경 수술의 장점과 단점을 떠나 적극적으로 권유하는 이유는 어머님께 가장 유리하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는 말씀해 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한 번의 경험, 한 번의 성공에 불과합니다. 의사는 환자를 두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절대 실패를 염두에 두고 수술에 임하지도 않습니다. 성공을 전제로 진행합니다.”
보호자가 입술을 꽉 물었다.
진충기 교수에게 귀가 닳도록 복강경 수술의 장점과 필요성을 들었다. 당연히 동의해야 했지만 수술 중 유발될 수 있는 위험은 단지 실패가 아니었다.
정확히 어디에 어떤 식으로 붙어 있는지 몰라도 대정맥, 간문맥 출혈이란 소리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복강경으로 개복보다 안전하게 처리한 사례나 경험이 단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더욱 두려움을 키웠다.
무엇보다 젊은 자신들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수술이었다. 충분한 고민 없이 연로한 어머니를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성공하면 어머님에게 더없이 좋은 일이지만 실패했을 때 목숨까지 위협할 수 있다니 어느 쪽이 최선인지 모르겠다. 김지훈 선생이라고 했나? 진 교수님 말처럼 최고의 실력을 가진 의사가 맞나?’
김지훈이 나직한 콧소리를 냈다.
보호자의 눈빛과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역시 환자, 보호자와의 신뢰와 유대가 문제였다. 집도의가 아닌 진충기 교수가 대신해 쌓아 줄 수 있는 감정도 아니었다.
지금 당장 결정할 이유가 없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보호자분, 소속 병원이 다른 관계로 다음 주 토요일이 아니면 수술 날짜를 잡기 힘듭니다. 수술 전에 준비할 것이 많습니다. 충분히 생각해 보시고 늦어도 이삼 일 내에 결정해 주십시오.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
아쉬움을 안고 H 병원을 나섰다.
‘소속 병원이 다른 것 자체가 벽이네.’
진충기 교수가 주차장까지 쫓아와 준비 미흡을 사과했다. 누구 탓도 아니고,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기에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또 다른 수술이 있기에 내심 잘 해결해 주길 바랐다.
강렬한 자극이 서로에게 기폭제가 될 것이다.
“진충기 선생님, 곧 췌장 공장 문합술을 라파로로 시행할 예정입니다. 한 번의 경험이라도 더 쌓으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서민자 환자분 잘 부탁드립니다.”
진충기 교수가 순간 말을 잃었다.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만성 췌장염 환자는 개복해도 문제가 많아 수술을 기피하는데 라파로로 췌장과 소장을 연결하겠다고? 무모한 시도야. 그런데 왜 자신감이 보이지?’
“췌장 공장 문합술을요? 가능하겠습니까? 장점에 비해 단점이나 위험도가 너무 높은 것 아닙니까?”
“누군가의 삶이 걸린 상황이라 피하기도 힘들지만 회피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환자의 웃는 얼굴을 꼭 봐야 편할 것 같습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말이었다.
의사의 답일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분명한 사실은 김지훈이 이미 마음을 굳혔다는 것이었다. 불현듯 서민자 환자의 수술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가 짐작됐지만 진충기 교수 자신에게도 대단한 자극이었다.
‘한 발이 아니라 몇 발을 앞서가고 있다. 췌장 절제술을 꼭 봐야 한다. 그래야 쫓아갈 수 있다.’
“언제 수술하십니까?”
“준비가 미흡해 날짜는 확정하지 못했지만 일이 주 내에 시행할 생각입니다.”
“참관해도 될까요?”
“언제든 환영합니다.”
진충기 교수의 눈이 번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