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췌장 쪽은 누구도, 어떤 수술이라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최소 집도의만은 확신을 갖고 수술에 임해야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준영 교수가 눈가를 좁혔다.
“김 교수, 성공을 확신해?”
“지금은 말씀드리기 힘듭니다. 하지만 진충기 선생님의 환자의 수술까지 성공한다면 보다 강한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경험이 쌓이면 그만큼 발전한다.
묘한 우연이지만 진충기 교수의 제안이 또 한 명의 환자에게 희망을 줄지도 몰랐다. 단순히 목숨 연장이 아닌 삶의 영위를 말이다.
써전들의 눈길이 김지훈에게 집중됐다.
말과 달리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자신감이나 다를 바 없었다.
회의를 요청했을 때 이미 결론은 났다.
진충기 교수의 요청을 받아들여 복강경을 이용한 췌장 절제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췌장 공장 문합술까지 시행해 성공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준영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내가 따라가야 할 상황이구나. 확실하게 지원할 테니 반드시 성공해.’
“수술 팀은?”
“오창도 선생님과 진행하고 싶습니다.”
“오 교수 생각은?”
아내의 수술 결과를 보았다.
김지훈의 실력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후배라 할지라도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써전에게 배우는 일은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오창도 교수가 숨도 쉬지 않고 대답했다.
“김 교수 제안이 고마울 뿐입니다. 이준영 선생님, 진충기 선생님 환자를 수술할 때 참관이라도 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집사람 수술할 때 직접 보지 못해 퍼스트를 제대로 설지 걱정됩니다.”
“그래야겠지. 김 교수, 진충기 선생 환자 수술 날짜는 토요일이 좋겠다. 최대한 빠르게 협의해. 필수 인원만 남기고 모두 참석하자.”
주말 반납이었지만 어떤 문제도 있을 수 없었다.
야심만만한 간담췌 파트 써전 모두 눈에 불을 켜고 참가할 것이다. 필수 인원으로 남아 자리 지키는 것이 도리어 안타까운 일이었다.
더구나 대가인 이준영 교수까지 움직인다.
또한 진충기 교수가 먼저 집도와 시연을 모두 부탁했다. 주말이라고 해서 일정을 조정할 써전도 아니었고, H 병원 써전들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김지훈이 훅 숨을 내쉬었다.
판이 커졌다.
모든 일을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해 집도하기 전 환자부터 만나 반드시 신뢰부터 쌓아야 했다. 한 번으로 될 일이 아니기에 저녁 시간을 여러 번 반납해야 할 것이다.
수술 후에도 환자가 무사히 퇴원할 때까지 노심초사하며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병원 왕복만 한두 시간 정도 걸릴 테니 또다시 가족에게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노력하겠지만 의사가 된 순간, 바이탈을 다루는 일반외과를 선택한 그 순간부터 숙명처럼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경아 씨, 미안해요. 희연아, 아빠가 최선을 다할게.’
논의가 끝났다.
이런저런 부담을 안은 김지훈이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잠시 자리를 뜨지 못했다. 강한 자신감을 보였지만 내심 걱정이 무척 컸다.
이준영 교수가 다가왔다.
“해 보자.”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승의 말이었다.
툭 어깨 한 번 치며 무심한 듯 던진 말이었지만 김지훈에겐 천군만마와 같은 격려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야지.”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무뚝뚝함의 대명사, 스승의 웃음을 본 것 같았다. 환자와 수술 앞에서 엄격하기만 했던 목소리마저 예전과 다르게 다가왔다.
‘뭐지? 설마 약해지신 건가? 그럴 리가 없어. 췌장 수술을 앞두고 최대한 격려하시는 거겠지. 기분 좋다고 풀어지면 타 죽는다. 긴장하자.’
그래도 간만에 외쳐야 했다.
까르페 디엠!
소중한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김지훈이 부리나케 전화기를 잡았다.
“진충기 선생님, 환자 면담 일정을 최대한 당겨야겠습니다. 이번 주에 가능할까요? 그리고 집도와 시연 날짜를 토요일로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귀한 시간 내줘서 고맙습니다. 모레 저녁에 면담을 잡겠습니다. 날짜도 걱정하지 마세요.)
일말의 주저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연락하기를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김지훈의 입장도 다르지 않았다.
서로가 절실하게 원하는 일이 됐다.
누구도 꾸물거릴 틈이 없었다.
성공 여부를 떠나 새로운 시도가 예정되는 순간, 양 병원 간담췌 파트 써전들에게 도전과 발전의 시간은 이미 시작됐다.
다음 날 아침.
여느 날과 다름없는 일상이 이어지겠지만 상당히 의미심장한 날이기도 했다. 새로운 시도의 결과를 확인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김지훈이 허진아 환자를 찾았다.
오창도 교수까지 함께했다.
마지막 확인이 남았다.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췌장을 절제한 지 불과 열흘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퇴원이 가능했다. 더욱이 짧은 시차를 두고 두 건의 췌장 수술이 이어진다.
집도의로서 복강경 효과의 확신을 얻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원하는 결과를 얻어야 했다.
“사모님, 기분은 어떠세요?”
“괜찮아요.”
“불편한 점은 없고요?”
“예. 옆구리가 조금 아픈 것 말고는 없어요.”
“좋습니다.”
오늘 어떤 일을 앞두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허진아 환자가 밝게 웃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느꼈던 두려움을 모두 버리고, 기대에 차 있었다.
김지훈이 신중하게 복부 진찰을 시작했다.
장 소리가 원활했다.
복부는 물론 이미 봉합사를 푼 절개 창까지 특별한 통증을 호소하지 않았다. 굵은 드레인이 박힌 옆구리의 통증은 당연한 일이었다.
“송진우 선생, 드레싱(상처 치료)하자.”
직접 드레인 주변을 깨끗하게 소독한 김지훈이 신중하게 거즈를 살폈다. 냄새까지 맡아 가며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레인 양상은 괜찮다.’
“오늘 초음파와 CT를 시행할 겁니다. 결과 나오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허진아 환자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토록 기대했던 퇴원이라는 말이 들리지 않았다.
“혹시 다른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수술 부위에 어떤 이상도 있어선 안 됩니다. 만일 췌장 절제 부위에 체액이 고여 있거나 염증 소견이 보이면 추가 치료가 필요합니다. 당연히 퇴원도 연기됩니다.”
“전 아무렇지도 않은데 가능성이 높나요?”
“일단 검사부터 받으시죠.”
허진아 환자의 눈가에 그늘이 생겼다.
수많은 환자를 본 김지훈이 의사 말 한마디에 좌우되는 환자의 두려움을 모를까?
김지훈도 긍정적인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그러나 의사의 장담 후 실망하게 되면 환자는 정신적으로 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냉정을 유지할 때였다.
‘환자분, 조금만 참으세요. 괜찮을 겁니다.’
“송진우 선생, 방사선과 초음파 끝난 후 센터 초음파실에서 다시 검사할 거니까 시간 잘 맞춰.”
김지훈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병실을 나갔다.
허진아 환자가 몸을 움츠렸다.
검사 결과가 좋아야 옆구리에 박혔던 심지를 뺀다는 사실을 남편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몸 상태도 좋아 퇴원 소리를 듣기를 기대했건만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의 두려움을 본 오창도 교수가 어깨를 감싸 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여보,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되는 수술을 받았잖아. 예상대로 흘러갈수록 더욱 조심하는 게 의사야. 나도 똑같이 얘기했을 거야. 김지훈 선생님을 믿으면 돼.”
“그래도 불안해요.”
“불안해할 이유가 없어. 퇴원 소리만 못 들었지 나쁜 말 한마디라도 들었어?”
남편도 의사지만 집도의가 아니었다.
수술실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허진아 환자의 얼굴이 풀리지 않았다.
때문인지 CT를 찍으러 가는 길에도, 초음파를 받으러 가는 길에도 발걸음이 다소 무거웠다. 거치적거리며 은근한 통증을 전하는 심지 탓만은 아니었다.
“라파로로 했다며? 환자 상태는 괜찮아?”
과를 불문하고 관심사가 된 지 오래였다. 검사를 앞둔 방사선과 의사들도 상당한 관심을 보이며 꼼꼼하게 검사를 진행했다.
그날 오후.
진료 사이를 틈탄 송진우가 허진아 환자의 CT와 초음파 결과를 들고 들어왔다. 잠깐 한숨 돌리며 휴식을 취하던 김지훈이 곧바로 손짓했다.
“보자.”
췌장 절제 환자의 마지막 고비는 수술 부위에 체액이 고이는 것이다. 크기가 작으면 무증상일 수도 있지만 소화액이 섞였을 가능성이 높아 결국 치명적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었다.
물혹을 만드는 막이 생기면 드레인을 통해 배출되지 않는 데다 복강경으로는 제거 불가능하기에 개복만이 답이었다. 그간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으로 변하는 것이다.
김지훈이 꿀꺽 침을 삼켰다.
끝까지 방심할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스며드는 긴장에 손이 축축해졌다.
CT와 초음파를 세세히 살폈다.
방사선과 전문의의 소견도 확인했다.
살짝 상기된 김지훈이 송진우를 보았다.
“사모님 초음파실로 모셨어?”
“예. 오창도 선생님과 기다리고 계십니다. 추가로 또 하실 이유가 있습니까?”
“내가 첫 진료를 하며 했던 말 잊지 마.”
‘헉! 실수다!’
얼굴 벌게진 송진우가 부리나케 앞장섰다.
김지훈이 추가 초음파를 시행했다.
대충 결과를 들었을 텐데 허진아 환자가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모든 결정은 오로지 김지훈의 입에 달렸기 때문일 것이다.
“사모님, 보이시죠? 간, 비장, 콩팥 모두 좋네요. 담낭, 담도도 정상적으로 보이고, 췌장 머리 부분 역시 괜찮아 보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심지가 박혀 있는 수술 부위를 볼까요?”
까맣고 하얀 음영만 보여 의사도 직접 하기 전에는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초음파였다. 환자 눈에 뭐가 심지인지, 뭐가 췌장인지 구분될 리가 없었다.
스윽! 스윽!
신중하게 수술 부위를 확인한 김지훈이 초음파를 끝내며 송진우에게 눈짓했다.
“드레싱하자.”
드레인을 소독한 김지훈이 부드럽게 힘을 주었다.
구 일 동안 수술 부위에 박혀 있던 드레인이 쑥 빠져나왔다. 묘하게 몸을 자극하는 느낌에 몸을 떤 허진아 환자가 김지훈을 보았다.
간절히 원하는 말이 나올까?
김지훈이 밝게 웃었다.
“어떤 문제도 없습니다. 내일 마지막 혈액 검사까지 괜찮으면 바로 퇴원하셔도 됩니다.”
“내일 퇴원이요?”
“예. 퇴원하세요. 고생하셨습니다. 처음 시도하는 수술이라 많이 불안하셨을 텐데 끝까지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보!”
활짝 웃는 허진아 환자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이제야 가슴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두려움을 떨쳐 냈다. 오창도 교수 역시 아내의 손을 잡으며 입술을 꽉 물었다.
퇴원이라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구 일 만이었다.
활기찬 아침이 시작됐다.
중한 환자가 수술받고 무사히 퇴원하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었다. 하물며 국내 최초 시도인 복강경으로 췌장 병변을 제거한 환자가 개복 시보다 훨씬 빠르게 퇴원하는 날이었다.
생면부지의 환자도 웃음을 주고받으며 축하할 일인데 오창도 교수의 아내였다. 동료와 가족에 대한 애틋함까지 더해져 회진 분위기까지 들뜰 지경이었다.
“오 교수, 고생했다. 고생했어. 제일 힘들었던 사람은 환자다. 환자. 퇴원했다고 마음 놓지 말고 부인 되시는 분에게 잘해라. 와이프가 웃어야 일이 잘되고, 남편이 웃어야 가족이 화목한 법이다. 알지. 그치?”
“감사합니다.”
“김 교수, 수고했다. 수고했어. 남은 수술도 잘해라. 당연히 잘할 거야. 당연히. 라파로는 네가 최고잖아. 그치? 내 말이 맞지?”
이준영 교수, 오창도 교수는 말이 없었지만 신현수, 이경석은 달랐다. 무언가 강력한 항의의 의지를 담아 송재덕 교수를 바라보았다.
천하의 송재덕 교수가 은근 당황했다.
“아! 지훈이 나이대에서는 그렇다는 말인데……. 아니구나. 아니다. 췌장 쪽에서만 그렇구나. 위장은 현수가, 대장은 경석이가 최고지. 덥다. 더워. 병원 사정 어려운 것도 아닌데 에어컨은 왜 안 틀어? 현수야, 말 좀 해라. 에어컨 팡팡 틀라고 말 좀 해.”
사인방의 위치가 이제 제자만은 아닌 탓이었다.
김지훈이 훅 치고 나오며 눈에 뜨일 뿐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써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평일에는 쉴 틈도 없이 밀려드는 환자와 수술이 이를 증명하고도 남았다.
그럼에도 인정할 것은 인정했다.
사인방 모두 라이벌이자 영원한 친구였다.
신현수가 김지훈의 옆구리를 툭 찔렀다.
“김 교수, 곧 병원 차원에서 췌장 라파로 홍보할 거야. 예정된 수술 두 개 반드시 성공해.”
“현수야, 소문 확 나게 국내 최초라는 사실을 더 강조할 방법이 없을까?”
손일석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경석이 형, 김 교수가 움직이면 좋은 방법이 있긴 해요. 문제는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거죠.”
“뭔데?”
“정훈철 PD님이 계시잖아요. 국내 최초 이거 기삿거리 됩니다. 형 동생 하는 사이에 방송국을 꽉 잡고 있으니까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어요? 돈 안 들이고 홍보하는 거죠. 췌장이 뜨면 우리도 뜰 수 있고요. 단, 우리 김 교수님이 얼굴에 철판을 깔 수 있을지 그게 문제네요.”
반짝이는 눈길이 일제히 김지훈에게 향했다.
중이 제 머리 깎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