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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999화 (999/1,329)

5화

김지훈에겐 더없이 익숙한 과정일 텐데 오늘따라 유달리 진지했다. 마치 처음 복강경 수술을 집도하는 것처럼 무섭게 집중했다.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후배에게도 배울 점은 무궁무진했다.

더욱이 어느 써전도 완벽하게 똑같은 방식으로 수술하지 않는다. 다양한 방식을 보고 흡수해야만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었다.

“이혁원 선생, 마지막 수술 준비됐겠지?”

덩달아 긴장하던 이혁원이 식은땀을 흘렸다.

‘헉! 마지막 수술을 내게 주실 생각 때문에 더욱 집중하셨구나. 버벅거리면 원 포트 받기 전에 죽을 수도 있겠다.’

오해 속, 마지막 수술이 투 포트로 시작됐다.

김지훈의 예사롭지 않은 눈빛에 극도로 긴장한 이혁원이 초인적인 집중력을 유지했다. 박리와 수처는 물론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해냈다.

김지훈은 말이 없었다.

‘역시 혁원이만의 방식과 기본이 있어. 후배에게도 배워야 해. 스승님은 물론 라파로를 하는 모든 써전의 수술에 집중해야 한다.’

이혁원이 힐끗 눈치를 보았다.

평소와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선생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혹시 제가 실수라도 한 겁니까?”

“응? 아니야. 오늘 수술 잘했어. 펠로우 모두에게 매주 하나 이상의 수술을 반드시 줄 테니까 스케줄 잘 짜. 일단 투 포트에 전념해.”

좀처럼 듣기 어려운 칭찬이었다.

생각과 완전히 다른 반전이었다.

꼬박꼬박 수술까지 준다니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더구나 투 포트에 전념하라는 소리마저 곧 원 포트를 주겠다는 말로 들렸다.

수술 방을 나온 이혁원이 잰걸음을 놀렸다.

펠로우들이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질렀다.

김지훈도 바삐 움직였다.

“경아 씨, 내과에서 연락이 왔는데 만성 췌장염 환자를 라파로로 수술해 달라네요.”

“췌장 공장 문합술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 수술 웬만하면 안 하는 수술이잖아요?”

“맞아요.”

간담췌 전담 간호사로 근무하며 누구보다 풍부한 임상 경험을 쌓은 고경아였다. 어떤 수술인지 잘 알기에 놀라워하면서도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개복해도 어려워하는 수술인데 괜찮겠어요?”

“아직 결정한 건 아니에요. 검토부터 해야죠. 미안한데 오늘 조금 늦을 것 같아요. 희연이 부탁하고, 일단 스승님에게도 말하지 말아요.”

“알았어요. 너무 늦진 말아요.”

고경아의 눈이 반짝였다.

‘요즘 들어 뭔가 달라진 것 같아. 신현수 선생님과 단둘이 만난 이후부터 그런 것 같은데 착각일까? 췌장 수술에 너무 몰두해서 그렇게 보이나?’

김지훈은 자각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분명 갈수록 뭔가 달라지고 있었다.

아내의 예리한 직감으로 남편의 미묘한 변화를 잡아채고 있었다. 어떤 이유로든 중견 의사로서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헤쳐 나가는 모습은 환영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이준영 교수도 원하는 방향일 것이다.

어쨌든 최종 결정은 항상 이준영 교수와 함께 내렸지만 유학 전부터 홀로서기를 시작했던 김지훈이었다. 췌장 종물 제거 수술도 그랬고, 이번 역시 충분히 검토한 후 상의할 것이 분명했다.

‘지훈 씨, 파이팅!’

조용한 응원 속에 교수실로 올라간 김지훈이 차트와 CT를 보며 깊은 고민에 잠겼다.

만성 췌장염의 전형적 소견을 가진 환자였다.

과도한 술이 원인이었다.

‘하루에도 수차례 데메롤을 요구할 정도로 통증이 심하고, 의존성이 강해졌다. 췌장 효소 수치는 정상과 거리가 멀고, 간 기능마저 저하됐다.’

막다른 길에 몰리면 당연히 보일 증상이기에 오히려 수술이 더욱 필요하다는 지표였다. 하기에 써전이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췌장 염증 정도였다.

주의 깊게 CT를 보던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 정도 소견이면 췌장이 굳었을 것이다. 게다가 염증으로 변성된 부위가 광범위해. 수처를 안전하게 할 수 있을까? 수술을 성공한다 해도 소장과 붙을지나 모르겠다.’

유리한 점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복강경 수술이 실패하면 개복해야 한다.

이후 환자에게 가해질 부담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안 하느니 못한 상황이 될 것이다.

성공한다 해도 안심할 수 없었다.

최악의 경우 췌장과 소장을 연결한 문합 부위가 새는 순간 광범위한 복막염을 유발할 것이다. 자칫 혈관이 녹아 과도한 출혈이 발생하면 갑작스럽게 사망할 수도 있었다. 단백질과 지방을 분해하는 췌장 효소가 멀쩡한 장기와 혈관까지 녹이기 때문이었다.

답답한 신음을 흘리던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환자가 수술 위험을 모를까?

윤석진은 모든 합병증을 비롯해 사망까지 충분히 설명했을 테고, 복강경에 일말의 희망을 걸었을 환자는 위험을 감수하며 수긍했을 것이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평생 병원과 약물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비참하고 힘든 삶을 영위하기보다 차라리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고통스럽다는 말이었다.

의사의 의무가 다시 떠올랐다.

의무가 아니더라도 직업 자체가 주는 압박이었다.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내 일이다. 섣부른 희망을 줄지 모르지만 일단 만나 보자.’

돌파구는 역시 환자에게 있었다.

환자를 찾았다.

37세 남자, 최인선.

하루 종일 지속되는 통증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해 비쩍 말라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데메롤을 요구하는 육신에 손까지 떨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한계에 몰린 것이다.

김지훈이 갑갑한 한숨을 내쉬었다.

‘환자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 치부하기엔 너무 가혹하고, 젊다. 살아가는 내내 고통에 시달린다면 더 이상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힘들 것이다. 희망을 줄 수 있을까?’

현실은 냉혹했다.

희망은 실낱에 불과했다.

“환자분, 외과 김지훈입니다.”

“예? 절 수술해 줄 선생님인가요?”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그 전에 반드시 아셔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김지훈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도 반색했다.

어마어마하게 고통스러운 모양이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개복해도 어려운 수술입니다. 복강경으로 성공할 확률이 극히 낮습니다. 실패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들고 아플 겁니다. 최악의 경우 합병증으로 사망할 수도 있습니다.”

“들었습니다.”

“한 번도 시도해 보지 못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죽음까지 언급하며 경고했음에도 목소리가 담담했다.

“기술적인 문제를 떠나 췌장 염증이 너무 심합니다. 성공해도 통증이 얼마나 줄지 알 수 없습니다.”

“줄긴 주는 거 아닙니까?”

“절대 환자분이 원하는 상태까지 호전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통증은 지속될 겁니다.”

비관적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런데 환자가 웃었다.

“지난 시절, 몸이 망가지는 것도 모르고 술로 보냈습니다. 지금은 진통제가 아니면 몇 시간 버티지도 못합니다. 다 제 탓이라 감수해야 하지만 이대로 죽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희망이라도 잡고 싶습니다.”

“유리한 면만 보시면 안 됩니다. 더 절망적인 상황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선생님도 제 고통이 얼마나 큰지 모르지 않습니까? 지금도 시체와 다르지 않습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고통이 줄어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희망조차 없다면 차라리 빨리 죽었으면 합니다.”

생을 초월한 것 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눈물까지 말랐다.

이제 37세에 불과한 환자가 말이다.

환자의 고통을 모른다는 말까지 가슴에 박혔다. 하지만 막판에 몰린 환자를 두고 장담할 수 없었다. 초연함은 고통이 극에 달했던 시간 때문인지도 몰랐다.

언제 생각이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감정에 휘말리면 실수하기 마련이었다.

김지훈이 최대한 감정을 배제했다.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말만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환자분 생각은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사람의 목숨을 걸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도 시도한 적이 없고, 기술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수술입니다. 신중하게 생각해 결정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살고 싶습니다.”

‘죽을 수도 있다는데 살고 싶다고?’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단순한 목숨의 연장이 아니었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말이었다.

이보다 강력한 말은 없었다.

김지훈이 수술을 회피할 길은 없었다.

수술해야 한다는 생각, 복강경으로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각오가 벼락처럼 스쳤다.

“외과 전체의 능력과 뜻을 모으겠습니다. 희망을 갖고 기다려 주십시오. 만일 수술이 결정되면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데 결정적 걸림돌인 데메롤은 최대한 맞지 말아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참아 보겠습니다.”

절박했다.

마약성 진통제를 끊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만일 희망을 잡고자 강인한 의지로 버텨 준다면 써전 또한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의무였다.

환자에 대한 보답이자 예의였다.

“만성췌장염의 통증 조절은 메메롤밖에 없다는 사실 잘 압니다. 제가 우려하는 것은 환자분의 의존성입니다. 갈망을 통증으로 착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환자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병실을 나온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차트와 모든 검사 결과를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어떻게 수술해야 하는지 집중했다.

홀로 하는 수술이 아니었다.

부족함을 메워야 했다.

스승과 선배는 엄청난 조언과 힘을 줄 것이며, 후배는 자신만의 경험과 지식으로 도와줄 것이다.

퇴근한 후에도 내내 최인선 환자의 말을 곱씹던 김지훈이 힘차게 아침을 맞이했다.

“지훈 씨, 결정한 거예요?”

“아직 미정이지만 빠른 시간 내에 결정해야 할 것 같아요. 환자의 고통이 내 두려움을 압도하네요.”

“그럼 결정된 것 아닌가요?”

“그럴 수도 있지만 내 실력이 따라가 줄지 모르겠어요. 진충기 선생님의 요청도 다시 생각해야겠어요. 미적거릴 일이 아니었네요. 한 번뿐인 경험보다 두 번이 낫겠죠?”

“당연한 일 아닌가요?”

“희연이 돌보느라 많이 힘들죠? 돌아와서도 도와주지 못해 미안해요.”

고경아가 활짝 웃었다.

“걱정 말아요.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잘난 남편 둔 죄지만 지훈 씨도 내가 힘들어할 때 꼭 옆에 있어야 해요.”

김지훈이 미소를 머금었다.

‘경아 씨 같은 사람을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출근하는 어깨에 힘이 실렸다.

그날 오후, 이준영 교수를 비롯해 간담췌 파트 구성원 전체 회의를 요청했다.

교수실이 써전들로 가득 찼다.

그들 앞에서 복강경을 이용한 췌장 공장 문합술이란 주제를 과감하게 제시했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경악하고 말았다.

‘이거 가능한 거야?’

김지훈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집도의의 단호함에 우려 속에서도 은근한 흥분이 감돌았다. 췌장 절제를 성공한 이상 또 한 번의 새로운 시도 역시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이준영 교수마저 기대에 찬 눈빛을 보였다.

김지훈이 환자 설명을 시작했다.

“만성 췌장염으로 내과에서 치료 중인 37세 남자 환자입니다. 전신 상태 상당히 불량하며, 데메롤 의존성이 발생할 정도로 통증이 심해 펜타닐 사용까지 고려하고 있습니다. 현재 내과 치료에 반응하지 않아 췌장 공장 문합술이 필요한 환자임은 분명합니다. CT부터 보시겠습니다.”

췌장 조직의 섬유화가 심각하게 진행됐다.

각종 검사 결과가 아니더라도 기능 대부분을 상실했을 것이 빤했다. 췌장관은 염증으로 인한 협착과 확장의 반복으로 마치 염주 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소화 효소의 배출이 극도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준영 교수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염증이 너무 심해. 보다 안전한 방법은 없나?’

“김 교수, 일부 절제는 고려하지 않는 거야?”

“조직 변성과 췌장관 협착이 머리, 몸통, 꼬리에 걸쳐 광범위하게 발생했습니다. 몸통에서 꼬리 쪽으로 70퍼센트 이상 절제한다고 해도 증상 호전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개복한다고 해도 염증이 너무 심해 췌장과 소장을 정확하게 이어 주기 힘든데 라파로로 가능할까? 수술 중 사소한 문제라도 생기면 위험이 증가할뿐더러 개복을 피할 수 없어.”

“환자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개복 후 발생할 문제에 대해서 설명했어?”

“일단 설명했습니다만, 수술이 결정되면 보다 확실하게 고지하겠습니다. 환자 의지는 충분합니다.”

통상적인 방법인 개복 수술을 한다면 더 이상 토론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환자는 복강경으로 수술한다는 전제하에 동의했다.

김지훈 또한 논의 내내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관건은 성공 가능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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