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98화 (998/1,329)

4화

각별한 관계를 생각할 때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는 일이었지만 티를 내도 너무 냈다. 김지훈과 이준영 교수를 유난히 아끼고 좋아하는 송재덕 교수기에 도리어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꽤 서운할 것이다.

“야야!”

헉! 사인방이 동시에 움찔거렸다.

이준영 교수의 어깨마저 미세하게 흔들렸다.

‘절대 그럴 리 없지만 야야야! 터지는 줄 알았네. 이준영 선생님도 놀란 거 아니야?’

송재덕 교수가 김지훈에게 날카로운 눈길을 한 번 보낸 후 눈썹까지 찌푸리며 꽤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지훈아, 췌장 종물 집도를 라파로로 요청했다고? 진심이겠지? 진충기가 그런 써전이었구나. 멋있다. 멋있어. 근데 말이야. 췌장 쪽 문제 생기면 나도 도망가고 싶은데 책임은 누가 지니? 누가? 말로 약속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김지훈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묘하면서도 준엄한 경고를 날린 것으로 끝났다. 반복되면 뼈도 못 추릴 것이다. 어떤 상황이든 다시는 이런 일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져야 했다.

“저도 그게 걱정입니다. 공연히 다른 병원 환자 수술했다가 양쪽 모두 곤란한 입장에 빠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진충기와 네가 제일 문제다. 환자가 항의하면 자칫 빼도 박도 못할 수 있어. 곤란하다. 곤란해. 다른 수술도 아니고 췌장 라파로라 더욱 곤란하다. 신중하게 생각하자. 급하면 체하는 것으로 안 끝난다. 안 끝나.”

“원장님, 다르게 생각하면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명성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이참에 이름을 알리면 김 교수가 가고자 하는 방향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김 교수, 어떻게 생각하나? 당사자 생각이 제일 중요하지 않겠나.”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그렇긴 합니다만, 원장님 말씀도 절대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병원 환자 내팽개치고 회복 때까지 상주할 수도 없고요.”

분분한 의견이 오고 갔다.

좋은 기회라는 말과 경험이 쌓일 때까지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의견이 엇갈렸다. 팽팽함을 떠나 모두 맞는 말이기에 김지훈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난감하네.’

확고한 동의 아니면 확실한 반대가 필요했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이준영 교수가 입을 열었다.

“김 교수,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아. 환자가 반대해도 마찬가지야. 일단 환자를 만나 신뢰를 얻은 후에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의외의 요청에 정신 팔려 중요한 사실을 잊었다.

어떤 일이건 일단 시도해야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환자의 절대적 동의가 필요하기에 신뢰가 우선이라는 사실은 필수불가결한 조건이었다.

간담췌 파트 책임자인 이준영 교수의 의견 또한 절대적이었다. 독단이 아닌 원칙과 제자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된 결정을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그래. 그래. 준영이 말이 맞다. 내가 아주 중요한 사실을 놓쳤다. 환자부터 만나자. 환자부터.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몸을 맡겨야 하는 환자가 불신하면 돌팔이나 다름없다. 믿음이 먼저다. 믿음.”

“알겠습니다. 일단 환자부터 만난 후 충분히 고민해 결정하겠습니다.”

이것으로 일단락됐다.

김지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한결 홀가분해졌다.

의사로서,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원칙 속에 해답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그래서 제아무리 잘난 사람이라 해도 참된 스승이 필요할 것이다.

‘나도 스승님처럼 살아야 하는데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그나저나 송재덕 선생님 서운함을 어떻게…….’

누군가 다가왔다.

작은 키에 정수리 어딘가가 반짝였다.

“헉! 원장님!”

송재덕 교수가 조용히 머리를 내밀었다.

눈가에 걸린 잔주름이 예사롭지 않았다.

“지훈아, 왜 먼저 말 안 했니? 왜? 이런 일은 원장인 나도 알아야 잘 해결되는 법이다. 의사 한 명, 특히 김 교수처럼 일 많은 의사가 몇 날 며칠 자리를 비우면 병원에서 좋아하겠니? 그때 내가 막아 주는 거야. 내가.”

“죄송합니다. 어제 전화드렸을 때 바쁘다고 하셔서 다시 한다는 게 그만 깜빡했습니다.”

“응? 전화했었어? 정말 했어?”

“예. 기억 안 나십니까?”

“그렇구나. 그게 그 전화였구나. 그래도 네가 상의는 하려고 했구나. 근데 준영이는 왜 말 안 했을까? 왜?”

“제 옆에 계셨었습니다. 아마 통화한 줄 아셨을 겁니다. 제 잘못입니다.”

송재덕 교수가 고개를 저었다.

“잘잘못을 따지자는 건 아니다. 아니야. 조금 서운……. 뭐, 그렇다는 얘기지. 나는 그렇다고 치고, 이 교수하고 신 교수는 왜 몰라? 왜?”

“두 분 모두 늦게까지 수술이 있었습니다.”

헛기침이 터졌다.

모두들 바쁜 와중에 전화통에만 매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척 서운해서 그렇지 교수들에게 반드시 사전 보고할 사안도 아니긴 했다.

송재덕 교수의 말문이 턱 막혔다.

이럴 때 점수 따면 인생 상당히 편해진다.

김지훈이 재빨리 두 손을 비볐다.

“원장님, 제가 굉장히 잘못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신경 쓰여서 어제 잠도 제대로 못 잤습니다. 혹시 또 이런 일이 생기면 끝까지 확실하게 연락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허허허! 뭘 그렇게까지. 괜찮다. 괜찮아. 사람 살다 보면 별일 다 생기는 법이다. 나이 들면 콩알만 한 일에 서운하기도 하고 말이야. 근데 너한테서 왜 일석이가 보이니? 일석이가.”

누가 소환됐든 분위기 좋아졌다.

가끔, 아주 가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던지는 송재덕 교수였다. 하지만 애정과 관심이 없다면 서운할 일도 없다는 사실을 김지훈은 잘 알고 있었다.

스승 이상으로 배울 점이 많은 교수였다.

‘이래서 제가 선생님을 무척 존경합니다. 저도 후배들에 대한 관심 끝까지 놓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허진아 환자의 빠른 회복이 더해져 퇴근길이 더욱 가벼워졌다.

***

사막 한가운데 오아시스 같은 주말이다.

모처럼 가족 나들이를 다녀왔다.

중간중간 당직에게 연락해 허진아 환자의 상태를 물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일요일 오후, 집에 도착하기 직전 병원에 들러 환자를 찾았다.

곁에 오창도 교수가 있는 데다 평소 쉴 시간이 거의 없는 외과 의사 생활 빤히 아는 허진아 환자가 꽤 놀랐다.

“어머! 어쩐 일이세요? 당직도 아니시잖아요.”

“지나가는 길에 들렀습니다. 식사 후 불편하신 점은 없으세요? 잠깐 드레인을 확인하겠습니다.”

꼼꼼하게 살펴 문제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김지훈이 안도하며 오창도 교수를 보았다.

“선생님이 계셔서 마음이 놓입니다. 감사합니다.”

“마음이 놓인다면서 왜 왔어요?”

겸연쩍은 농이었다.

“하! 하! 하! 집도의의 의무라는 게 있지 않나요?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가족 나들이도 못 가고 어제오늘 계속 왔을 겁니다.”

“그랬겠죠. 요즘 많은 걸 배웁니다. 오늘 밤은 걱정 말고 푹 주무세요. 내일 드레인 제거를 기대해 봅니다.”

오창도 교수의 얼굴이 무척 편안해졌다.

개복했다면 아직도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을 테고, 최소 이 주 이상 입원해야 했을 것이다. 편안한 가운데 불과 일주일 만에 퇴원을 바라볼 수 있다니 의사인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집담회 후 가진 자리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오창도 교수가 이제야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진충기 선생님 요청을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책임을 회피할 사람도 아니지만 그보다 이번 수술 역시 성공할 것이란 생각이 강하게 드네요. 환자에게 김지훈 선생님을 만난 일 이상의 행운은 없을 겁니다.”

과분한 칭찬이었다.

긁적긁적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김지훈이 꾸벅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왔다. 겸사겸사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정재복 환자를 만난 후 집으로 향했다.

자신감과 무력감이 교차했다.

모든 이를 살릴 수 없지만 적어도 길이 있다면 부딪치는 것이 의사의 의무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후우! 간경화를 해결할 방법은 하나뿐인데 당장은 길이 보이지 않네. 내과로 전과되면 마음이라도 편해지려나?’

때론 머릿속 지우개가 필요한지도 몰랐다.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허진아 환자의 드레인 제거를 하루 미뤘다.

불과 일주일도 안 돼 췌장액 유출을 가장 먼저 알리는 통로이자, 치료에도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을 제거하기에는 너무 빨랐다.

“하루만 더 지켜보겠습니다.”

환자의 아쉬움과 불안을 뒤로했다.

오전 내내 이어진 수술을 끝내고 한숨 돌리던 김지훈이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김지훈의 얼굴이 점점 심각해졌다.

윤석진이었다.

“만성 췌장염 환자라고?”

(특별한 약이 없는 데다 최근에 통증이 너무 심해져 데메롤 아니고는 조절이 안 돼. 의존성이 강력하게 의심되는 상황이야. 이러다 펜타닐까지 사용할지도 모르겠다.)

데메롤과 펜타닐!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였다.

아니, 마약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내성과 중독이 우려될 정도로 의존도가 심해졌다면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는 만성 췌장염의 내과 치료가 벽에 부딪쳤다는 말이었다.

외과 치료인 수술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결코 쉬운 수술이 아니었다.

불행히도 많은 경우에서 만족할 만한 수술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런 이유로 대부분 수술을 기피하지만 한계에 몰렸다면 달리 선택할 길이 없는 질환이기도 했다.

‘석진이 말대로라면 수술 이외에 방법이 없다는 말이다. 혼자 결정했을 리도 없다. 내과 교수님들의 판단을 믿고 고민하지 말자.’

흔치 않지만 경험이 있기에 가급적 빠르게 스케줄을 잡아도 무방했다.

문제는 윤석진의 요구였다.

“라파로로 해 달라고? 석진아,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이제 딱 한 번 라파로로 췌장 종물만 제거했어. 만성 췌장염은 췌장을 절개한 후 장을 이어야 해. 너무 위험한 시도야.”

(나도 모르는 건 아니야. 하지만 환자가 개복을 너무 두려워해. 솔직히 개복 후 통증 때문에 도리어 데메롤 사용이 늘었다는 보고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너도 잘 알잖아.)

조작 자체가 위험한 장기기 때문에 적당히 열 수 없는 수술이었다. 실제로 시야가 환하게 열릴 정도로 크게 열어 통증이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우리도 그런 단점 때문에 피하고 싶은 수술이야.”

(라파로로 하면 다르지 않을까? 수술 후 통증 대부분 수술 부위가 아니라 배를 크게 열었기 때문 아닌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직 무리야.”

(부탁할게. 이준영 선생님과 상의 좀 해 봐. 환자에겐 검토만 할 수 있다고 충분하게 설명할 테니까 시도할 생각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바로 연락 줘.)

“알았어.”

김지훈이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진충기의 요청도 내심 상당히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경우가 다르다지만 개복 시에도 까다롭기 짝이 없는 췌장 공장 문합술을 복강경으로 해 달라니, 상상만으로 얼굴이 찡그려질 정도였다.

‘장을 연결한 부위가 새면 단순 복막염으로 끝나지 않는다. 정교함이 생명인데 경험조차 없는 상황에서 기구로 전해지는 감각만 믿고 진행할 수 있을까? 더구나 개복보다 시야가 좋을 수가 없다.’

불길한 생각만 들었다.

췌장 조작은 단 한 번뿐인 경험이었고, 그나마 절제로 끝났다. 머릿속을 정리하며 몇 번을 고민해 봐도 자신감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생기지 않았다.

한편으로 끈적끈적 미련 같은 것이 달라붙었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와서 그렇지 이것이 기회라면 절호의 기회다. 실패한다고 해도 정말 귀한 경험이 될 수밖에 없어. 하지만 욕심 부리다 환자 상태를 더 악화시킬 수 있는데 어쩌지?’

복강경으로 성공한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실패하면 애초 개복한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이 발목을 잡았다. 적절하고 빠르게 대처하지 못하면 기대했던 효과는커녕 환자를 악순환에 빠트릴 수 있었다.

반면 췌장과 장을 연결하는 과정은 최종 목표인 췌장 암 수술을 위해서 반드시 익혀야 할 술기이기도 했다. 이런 수술은 결코 흔하지 않기에 하늘이 준 기회나 다름없었다.

성패 여부를 떠나 대단한 자산을 얻을 것이다.

장단점이 너무 뚜렷했다.

딜레마였다.

단점만이 머릿속을 감돌았다.

실패하는 순간 통증은 통증대로 남고, 마약성 진통제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 이미 망가진 환자의 삶이 완전히 피폐해질 수도 있었다.

두려운 일이었다.

고민만 할 일이 아니었다.

맨땅에 머리 박으면 깨질 일만 남는다.

원칙은 언제 어디서나 유효했다.

윤석진에게 전화했다.

(벌써 결정한 거야?)

“그럴 리가 있어? 갑자기 전화해서 순서도 잊었다. 환자 차트하고 검사 결과 보내 줘. 뭘 알아야 결정하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야?”

(이번에 수술한 환자 무난하게 회복돼서 곧 퇴원 가능하다는 말 듣고 나도 마음만 앞섰네. 바로 보낼게.)

“오후 수술 다섯 시쯤 끝나니까 여섯 시 이후에 내 교수실로 보내 줘.”

(와우! 내 교수실! 부럽다.)

남 속도 모르고 부러워하는 모습에 헛웃음이 터졌다.

하긴 의사도 직업이고, 병원 또한 사람 사는 사회니 조그만 특혜마저 부럽긴 할 것이다. 올라가고자 하는 마음 또한 발전의 원동력임이 분명했다.

꼬르륵!

길어진 통화와 고민에 점심을 굶었다.

고경아의 의아한 눈초리를 뒤로한 김지훈이 빵과 우유로 허겁지겁 배를 채운 뒤 오후 수술을 시작했다.

김지훈의 눈빛이 변했다.

‘아무리 쉬운 수술이라도 기본이 없으면 어려워진다. 기본이 더욱 탄탄해야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다. 오늘 수술 역시 췌장과 소장을 이을 수 있는 실력의 발판이다.’

“보비! 수처! 타이! 컷!”

삐이이이이!

투 포트는 당연한 일이었고, 최근 급격하게 환자가 늘은 원 포트까지 고도로 숙련된 손을 보였다.

이혁원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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