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97화 (997/1,329)

3화

진충기 교수가 한 박자 뜸을 들였다.

꺼내기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악성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췌장 종물 환자 한 명이 내 앞으로 예약됐습니다. 우연이겠지만 몸통에 발생했더군요. 라파로로 수술하고 싶습니다.”

김지훈이 내심 놀랐다.

수술 성공을 듣자마자 곧바로 시도할 생각을 하다니 역시 진충기 교수였다. 또한 한 사람이라도 더 성공하면 그만큼 유용한 정보를 축적할 수 있었다.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도움 될 일은 모두 했다.

‘입으로 직접 듣길 원하시나?’

단순하게 받아들이던 김지훈이 돌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 마디 말보다 수술 테이프를 보는 것이 훨씬 유익할 텐데 목소리 톤이 뭔가 미묘했다.

김지훈이 물었다.

“제가 추가로 도울 일이라도 있습니까?”

“환자가 동의한다면 집도를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원 포트 수술 시연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순간 침묵이 흘렀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놀랍기보다 멍했다.

천하의 진충기 교수가 이렇게까지 자존심을 굽히고 집도와 시연을 부탁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사람 완전히 변했다고 치부할 일이 아니었다.

강력한 협조 속에 경쟁하자는 의중일까?

진심으로 인정했기 때문일까?

의도가 무엇이든 김지훈에게 감당하기 힘든 부담이었다. 절대 단순하게 생각하거나 우쭐대며 결정할 사안이 아니었다.

“원 포트는 모르지만 췌장 절제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성공 여부도 확실하지 않고, 무엇보다 제 환자가 아닙니다. 문제가 생긴다면 자칫 선생님께 모든 책임이 집중될 수도 있습니다.”

“충분히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겠지만 퍼스트로 참가하는 이상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습니다. 선생님에게도 절대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솔직히 개복 시에도 합병증이 빈발하지 않습니까? 그 이전에 실패할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네요.”

대답이 궁했다.

생각지도 못한 신뢰까지 내비쳤지만 선뜻 동의하지 못할 일임은 분명했다.

‘심하게 당황스럽네. 다른 병원 환자를 집도해도 되는 걸까? 수술 전에 만나 충분한 동의를 구한다면 가능할 것 같지만 췌장 종물이다. 무리한 일일 수밖에 없어.’

고민을 거듭하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당직 날이니 용건은 빤했다.

(이혁원입니다. 아뻬 환자 한 명 있습니다.)

“아뻬? 지금 손님이 계시니까 급하지 않으면 삼십 분만 기다려 달라고 양해 구해 줘.”

(알겠습니다.)

진충기 교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펠로우들이 있을 텐데 아뻬도 직접 하십니까?”

“개복해야 되면 전공의에게 주는 경우가 많고, 라파로 적응이 되면 가급적 펠로우에게 모두 줄 예정이라서 환자를 직접 봐야 합니다. 환자 안 보고 퍼스트를 설 수도 없고요.”

“당직 때마다 매번 그러십니까?”

“서열상 당연한 일 아닙니까?”

도리어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충기 교수가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펠로우도 전문의고, 순서대로라면 결코 낮지 않을 텐데 맡겨도 되지 않습니까?”

병원마다, 의사마다 다르게 대처한다.

누가 옳다고 할 수 없는 일인 데다 김지훈의 나름의 원칙일 뿐이었다.

너무 심각한 반응이었다.

“오창도 선생님도 일일이 나오시는데 꾀 부렸다간 바로 쫓겨납니다. 하하하!”

가벼운 농담으로 잠깐 분위기를 풀었지만 고민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당장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데다 겸사 응급실 환자 핑계로 다시 연락할 날짜를 잡았다.

“제 결정보다 환자 의향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충분한 대화를 통해 어느 정도 동의를 얻으신 후 전화 주십시오.”

병원을 나서던 진충기 교수가 힐끗 응급실을 보았다. 땀 흘리며 진지하게 환자를 보는 김지훈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저렇게 열심히 하니 뛰어날 수밖에 없겠지. 오 교수만큼 일복 많다고 들었는데 몸이 버텨 줄까?’

그렇다.

일복 여전했다.

응급실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써전에겐 복일지 몰랐다.

나종진의 속마음을 들은 데다 정규 수술로 잡힌 복강경을 받았다는 사실에 자극받은 이혁원이 불타는 열의를 보였다. 김지훈마저 진충기 교수에게 모종의 자극을 받았는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쳤던 진충기 선생님이 집도 부탁을 하다니, 라파로를 떠나 날 인정하기 때문이다. 열심히 하자. 주어진 수술에 최선을 다하자. 하지만 전문의에겐 충분한 기회를 줘야 한다.’

특별한 인연으로 이어져 친할수록, 특별한 인연인 가족일수록 더욱 엄격해야 만사가 매끄러운 법이다.

연이어지는 수술을 차례로 집도한 이혁원이 쾌재를 부르다 말고 처절하게 산화했다. 고경철이 당근처럼 주어진 퍼스트 몇 번 선 후 톡톡히 대가를 치렀다.

물론 채찍은 이혁원이 들었다.

“너 이래서 언제 집도할래? 아뻬가 우스워 보여? 기본을 지키란 말이야. 기본을!”

아버지나 김지훈에게는 한참 미치지 못했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화력 선보였다.

충격파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

힘 너무 썼다.

밤새 퍼스트와 세컨을 번갈아 서며 병원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김지훈의 눈가가 까매졌다. 마음만은 전공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희연이와 고경아에게 미안하면서도 행복했다.

***

초조한 하루하루가 흘렀다.

허진아 환자가 물, 미음에 이어 죽을 먹기 시작하면서 수술 팀 전체가 고삐를 더욱 바짝 조였다.

‘진짜 고비는 앞으로 남은 사흘이다.’

췌장 역시 소화기관이기에 본격적으로 음식을 섭취하면 췌장액 분비가 크게 늘게 된다. 따라서 절제 면에 노출된 췌장관을 통해 소화액 유출 가능성이 점점 높아진다.

혈액 검사를 통해 매일 췌장 효소 수치 변동을 체크했다. 특히 유출된 췌장액이 흘러나올 통로인 드레인에 묻어나는 체액 양상 변화에 주의를 기울였다.

“효소 치 정상 범위고, 드레인 깨끗합니다.”

이혁원과 송진우가 수시로 확인했고, 김지훈 역시 회진 때마다 드레인 냄새까지 맡아 보며 확인을 거듭했다.

우려와 달리 허진아 환자는 놀라운 의지와 회복을 보였다. 틈만 나면 복도를 거닐며 운동에 전념했고, 감정적 기복을 떨치려는지 경쾌한 음악까지 들었다.

“선생님, 저 괜찮은 거죠?”

“이삼 일 정도 더 경과를 봐야 하지만 현재까지 검사 결과는 무척 좋습니다. 무엇보다 사모님의 노력 덕분입니다.”

“수술을 잘해 주신 덕분이죠.”

허진아 환자의 웃음이 한결 밝아졌다.

김지훈도 미소로 화답했지만 긴장의 끈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만에 하나 합병증이 발생할 경우 조기에 대처해야 그나마 빠르게 회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수술에 참가했다면 누구도 피하지 못할 긴장이건만 펠로우에겐 살벌한 시간까지 남았다.

공포의 주말 집담회가 시작됐다.

한 주 동안 시행한 수술을 정리하는 일이 만만치 않듯 집담회 역시 거대한 벽이었다. 이론을 배우고 익히며 상기하는 과정이기에 누구 한 명 진지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전공의가 일 차 타깃이다.

가뜩이나 인원도 적은데 펠로우까지 예리한 질문을 쏟아 냈다. 공력이라 할 것도 없는 경험뿐인 일 년 차에겐 무척 힘든 시간이었다.

“고경철 선생, 수요일에 시행한 탈장…….”

김지훈의 입마저 열렸다.

불과 일이십 분 만에 식은땀으로 푹 절었다.

이 차 타깃인 펠로우의 행복한 시간은 그만큼 짧았다.

전문의라고 봐주는 교수는 절대 기대할 수 없었다. 오히려 더욱 깊이 있고, 실전적인 질문으로 궁지에 몰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그동안 잠잠했던 김지훈이 연이어 가세해 가히 폭풍이 휘몰아쳤다.

헉헉헉! 헉!

헛바람 터지고, 식은땀 줄줄 흘렸다.

전공의들 앞에서 체면이 말이 아니었지만 불행히도 이혁원과 송진우에겐 시작에 불과했다.

복강경을 이용한 췌장 절제!

국내 최초 시도임이 분명했고, 그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치료 과정을 맡았다. 교수들의 열정을 활활 불 지피기에 한 점 부족함이 없었다.

“이혁원 선생, 개복 때와 상당히 다를 텐데 절제 중 가장 주의해야 할 일이 뭐니? 퍼스트 섰으면 제일 잘 알아야 하잖아? 그치? 내 말이 맞지?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봐. 궁금해 죽겠다. 궁금해 죽겠어.”

“절단면 처리는 어떻게 했나? 수처할 때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나? 개복과 비교해서 환자분 회복은 어떤지 자세하게 설명해 봐라.”

집도의가 가장 잘 알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김지훈 선생님!’

‘오늘따라 왜 이래? 수술 후에 다 설명해 준 내용이니까 제대로 대답해.’

비겁하게도 김지훈이 쏙 빠졌다.

이혁원이 쩔쩔매다 조곤조곤 다져졌다.

“송진우 선생, 혈관 처리는 어떻게 했어? 수처와 클립 중 어떤 방식이 더 유리해?”

첫 질문부터 얼굴 벌게졌다.

비수가 난무하는 가운데 화염방사기를 장착한 이준영 교수가 마지막을 장식했다.

“최대 관건이 됐을 대정맥과 인접한 부분 처리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 봐.”

아는 만큼, 본 만큼 설명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신현수, 이경석, 손일석까지 가세했다.

전문의 두 명이 처절하게 무너졌다.

피바람이 불 대로 분 후에야 김지훈이 나섰다.

“관심을 갖고 많은 질문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술 및 경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고경철 선생, 자료 나눠 드리고 슬라이드 틀어.”

왜 이제야!

이혁원과 송진우가 피눈물을 흘렸다.

슬라이드 불빛만 남은 가운데 김지훈의 목소리가 똑똑히 전해졌다. 자세한 설명이 끝난 뒤 예리한 질문과 충실한 답변이 이어졌다.

과연 부교수였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심지어 스승의 화염방사기마저 잠재웠다.

천하의 교수들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김지훈의 공력이 어마어마하게 늘은 것도 사실이었다. 덕분에 최초의 시도를 두고 더욱 감탄하고 말았다. 한편으로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제자에 대한 애정과 격려도 잊지 않았다.

“이만 마치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박승준 교수의 마무리로 여느 때보다 치열하고 격렬했던 집담회를 마쳤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진저리를 떠는 이혁원과 송진우를 보던 고경철이 김지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우리 매형이 이 정도였구나.’

전혀 상황에 맞지 않지만 일신우일신이란 말이 떠오를 정도로 나날이 새롭게 보였다.

그저 멍할 뿐이었다.

이제 힘들었던 일주일을 마무리할 때였다.

모두들 서두르는 모습에 김지훈이 재빨리 박승준 교수에게 다가갔다.

“과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특별한 일이라도 있어?”

“예. 선생님들과 따로 자리를 가졌으면 합니다.”

갑작스러운 요청이었지만 매사 경우 밝은 김지훈이었다. 혼자 결정할 수 없고, 반드시 상의가 필요한 일이 있다는 말이었다.

박승준 교수가 교수들에게 자리를 요청했다.

김지훈까지 모두 열한 명이 모였다.

“오래간만에 커피 한잔하시죠.”

손일석과 함께 부지런히 커피를 내왔다.

고소한 커피 향기 속에 교수 열 명의 눈길이 한곳으로 쏠렸다. 커피 타임이야 자주 있지만 흔치 않은 요청이기에 더더욱 궁금한 눈초리였다.

김지훈이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진충기 선생님이 다녀갔습니다.”

췌장에 발생한 종물의 집도 요청과 원 포트 시연에 대해 설명했다. 이후 추가 연락을 받지 못했지만 최소 시연 요청을 철회하진 않을 것이다.

“타 병원에서의 시연이기 때문에 과장님과 선생님들의 승낙이 있어야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집도 문제가 마음에 걸립니다.”

놀라지 않는 교수가 없었다.

타 병원의 요청을 받아 최신 기술이나 동향을 소개하는 시연은 집도 당사자에게 크나큰 명예였다. 하지만 어느 집단이나 그렇듯 자존심이 걸린 초빙 자체가 극히 드물었고, 있다 해도 누구나 인정하는 대가에 국한된 일이었다.

김지훈은 이제 중견의 문턱에 섰다.

진충기는 여전히 야심만만했고, 자존감마저 강했다. 하물며 선후배를 중시하는 의료계에서 김지훈보다 연배까지 높아 누구도 쉽게 떠올릴 수 없는 요청이었다.

초빙한 사람이나 받은 사람이나 놀라울 따름이었다.

‘역시 김지훈 선생이야. 진충기 선생에게도 그런 면이 있었나? 자존심을 완전히 굽히다니 굉장한 자극이네. 어쨌든 우리 병원 위상까지 올릴 수 있는 기회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박승준 교수가 입을 열었다.

“김지훈 선생, 스케줄 조정만 잘한다면 시연은 문제없지 않을까? 진충기 선생이 직접 요청한 이상 책임 문제도 어느 정도 해소될 테고, 집도 자체를 부담스러워할 일만은 아닌 것 같아. 이준영 선생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동의해.”

숨도 쉬지 않고 허락했다.

‘이럴 때는 한 박자 쉬시면서 원장님 눈치도 좀 보셔야 하는데 너무 노골적이셨어.’

손일석이 내심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중차대한 일을 두고 스승과 사전에 상의하지 않았을 김지훈이 아니었다. 문제는 이준영 교수는 직진밖에 모르고, 다른 교수들에겐 금시초문이라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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