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96화 (996/1,329)

2화

수술 후 이 일째.

김지훈이 깊은 고민에 잠겼다.

복부 절개 창보다 옆구리에 박은 심지가 더 눈에 띌 정도로 절개 부위가 작았다. 움직이기도 힘든 개복 후와 달리 통증도 거의 호소하지 않았다. 반면 췌장이 절제된 수술 부위가 전하는 고통은 개복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안정이 더 필요할지, 개복 수술과 동일한 경과를 밟아야 할지 상당히 고민스러운 시점이었다. 기존 치료 일정을 그대로 반복한다면 굳이 복강경으로 시도할 이유가 없었다.

의사 욕심만 채운 수술에 불과해질 것이다.

환자에게도 안전하면서 큰 이득이 있어야 했다.

냉철함이 더욱 절실하게 요구됐다.

김지훈이 조건부 결정을 내렸다.

이혁원, 송진우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 소변 줄은 몰라도 코 줄을 빼기에는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바이탈 좋고, 드레인 양상도 괜찮다면 문제 될 것 없어. 췌장과 장을 연결한 것도 아니고, 장 자체를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일반 라파로와 뭐가 달라? 환자 상태에 집중하고, 췌장에 너무 겁먹지 말자.”

“그래도 불안합니다. 하루만 더 보시죠.”

김지훈이 살짝 눈가에 힘을 주었다.

“어디까지 주의해야 하고, 어디까지 안전할지 고민 많이 했다. 금식만으로도 위장에 가해지는 부담이 현저하게 적을 테고, 췌장 역시 마찬가지 효과를 내. 조기 운동이 회복에 엄청난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잖아. 그런 장점 때문에 라파로로 한 거 아냐?”

이혁원이 얼굴을 풀지 못했다.

불안을 풀어 주는 일 역시 집도한 의사의 몫이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도 아니었다.

“미국 의료가 무엇이든 표준이거나 옳을 수 없겠지만 수술 후 환자 치료 일정이 상당히 빨라. 단순히 비용 문제가 아니라 누적된 경험과 객관적으로 입증된 안정성 때문이야. 처음에는 나도 많이 놀랐지만 경험이 쌓이니까 미국 의료진 방침이 당연하게 보이더라. 사실 멀리 볼 필요도 없어. 우리가 환자를 언제 퇴원시키는지 라파로를 처음 시행했을 때와 지금을 비교해 봐.”

사오 일이 사흘로 당겨졌고, 심지어 원 포트로 수술받은 환자는 수술 다음 날 퇴원시키고 있다. 복강경이 대세가 되기 전에는 생각도 못한 단축이었다.

말이 길어졌다.

첫 번째 결정을 내려야 할 시간이었다.

허진아 환자를 찾았다.

정확한 상태 확인만이 실행의 열쇠였다.

개복해 췌장을 절제한 환자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상태가 좋아 보였다. 그러나 의사의 시각일 뿐 주렁주렁 매달린 온갖 줄로 두렵고 고통스럽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바이탈부터 드레인 양상까지 꼼꼼하게 전신 상태를 살핀 김지훈이 눈빛을 굳혔다.

‘이 정도면 결코 빠르지 않다. 손상을 최소화한 이상 코 줄은 회복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는다.’

자신과 확신을 갖고 치료를 이행할 때였다.

결정을 내렸다.

의사의 불안이 환자에게 전해지면 크게 증폭되기 마련이었다. 일말의 두려움까지 과감하게 내던진 김지훈이 편안한 미소를 머금었다.

“사모님, 경과가 좋습니다. 소변 줄, 코 줄 모두 빼 드릴 테니 화장실 직접 걸어가시고, 오후부터는 걷기 운동을 하셔야 합니다.”

허진아 환자가 깜짝 놀랐다.

“벌써요?”

“복강경으로 시도하는 이유를 수술 전에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기대하는 대로 회복되려면 사모님도 우리 말을 잘 따라 주셔야 합니다. 운동 잊지 마세요. 이혁원 선생, 코 줄 빼자.”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이혁원이나 송진우로서는 반대할 여지가 없었다.

상당한 불편과 고통을 전하는 코 줄이 빠지자 허진아가 진저리를 쳤다. 스스로 복강경을 선택할 정도로 의지가 강하고, 주관이 뚜렷한 성격인 만큼 운동도 자발적으로 시작할 것이다.

집도의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절대 간과하지 못할 사람인 오창도 교수의 우려와 불안이 대단했다. 반면 평생 믿고 의지해야 할 스승의 침묵은 무언의 긍정이었다.

‘보호자와 의사의 눈은 완전히 다르다. 철저하게 객관적 시각을 유지한다면 문제없을 것이다.’

결코 잘못된 결정이 아니었다.

수술 방으로 향하는 김지훈의 발걸음이 힘찼다.

원 포트의 의미도 새롭게 정리한 터였다.

수술을 준비하던 나종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지훈의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선생님, 좋은 일 있으십니까?”

“나쁠 것도 없지.”

갑자기 목소리를 확 낮췄다.

“종진아, 사실 어떻게든 원 포트 수술을 나누려 했을 때는 의욕이 조금 떨어졌었는데 이번 수술로 완전히 회복했다. 숙련도를 쌓는 데 이만한 방법도 없다는 확신이 들어.”

혹시 꾀려는 것일까?

은근슬쩍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던 나종진이 급격하게 생각을 바꿨다. 투 포트로 시작해 원 포트로 이어질 때까지 김지훈은 한결같은 열의를 보였다. 분명 전보다 더욱 의욕적으로 수술에 임하고 있었다.

선배의 변화는 후배에게 영향을 주기 마련이었다.

‘정말 즐거워하시네. 숙련도가 필요한 원 포트가 결국 더욱 노련한 써전을 만들어 낸다! 당연한 일인데 왜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들지?’

수술에 임하는 나종진의 자세가 달라졌다.

미세한 변화와 속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김지훈이 돌연 나종진을 거세게 밀어붙였다.

‘그래. 내가 원하던 눈빛이야.’

기본과 핵심적인 과정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수술을 주겠다는 명확한 신호였다.

마침 투 포트 수술 하나가 남았다.

일천하지만 경험이 있고, 전문의로서 부끄럽지 않을 실력을 갖추고자 최선을 다해 노력해 왔다. 또한 눈앞의 한 걸음을 무사히 떼야 다음 걸음이 쉬워지는 법이었다.

열띤 질문과 답이 오갔다.

김지훈이 어렵지 않게 결정을 내렸다.

“나종진 선생, 준비해.”

짧고 강한 말 한마디였다.

나종진이 눈가를 굳혔다.

“감사합니다.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무사히 훌륭하게 마쳤다. 그러나 비할 수 없는 안목을 지닌 김지훈이었고, 리틀 이준영이란 별명 아무 이유 없이 얻은 것이 아니었다.

기쁨은 잠시였다.

가까스로 화염방사기를 피했다.

고수의 눈에 보이는 미숙함이 원인이었다.

‘부족해. 내가 생각해도 정말 부족해.’

췌장 수술을 들어가지 못해 안달했던 나종진이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원 포트 수술에 선입견을 가졌었다. 양성 질환 전담 써전이란 말에 시각이 좁아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니, 쓸데없는 자존심이 이유였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야 했다.

아무리 간단한 수술이라도 확고한 의미를 갖고 참가해야 했다. 기본을 단단히 쌓기 위해 양성 질환 전담이란 말은 뇌리 속에서 철저하게 지워야 했다.

나종진이 치열한 고민 속에 마지막 수술까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뻑뻑해진 목을 돌리며 수술 가운을 벗던 김지훈이 때아니게 웃으며 나종진의 어깨를 툭 쳤다.

“나종진 선생, 좋다. 내가 다 즐겁다.”

“뭐가 말입니까?”

“수술 내내 나 잡아먹으려는 줄 알았어.”

나종진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나비효과일까?

허진아 환자가 의도치 않은 영향까지 주고 있었다.

***

수술 후 삼 일째.

오후 회진을 앞둔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목소리마저 살짝 상기됐다.

“벌써?”

허진아 환자는 강한 사람이었다.

위장관을 건드리지 않았다고 해도 췌장을 절제했는데 만 삼 일도 안 돼 방귀가 나올 줄은 몰랐다. 혈색은 물론 기분까지 무척 좋아 보여 진통제마저 거의 투여할 일이 없었다.

예상을 뛰어넘는 경과였다.

김지훈이 차트를 앞에 두고 이혁원, 송진우와 함께 상의를 거듭했다. 개복과 완전히 다른 상황이기에 이번 역시 섣불리 확정할 수 없었다.

또 한 번 조건부 결정을 내리고 병실을 찾았다.

환자 상태를 꼼꼼히 점검하고 확인했다.

모든 요소가 상당히 안정적으로 보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가능하겠어.’

눈가를 좁히며 모종의 결심을 내린 김지훈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오창도 교수가 들어왔다.

그 뒤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진충기 선생님?’

“오셨어요?”

짧은 놀람 속에 허진아가 몸을 일으키며 손님을 맞이했다. 큰 수술을 받은 환자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진충기 교수가 흠칫 놀랐다.

‘효과가 대단하네.’

김지훈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연락도 없이 웬일이십니까?”

“상당히 바쁘다고 들어서 일과 끝나는 시간에 맞춰 오려 했는데 회진이 늦으시네요. 회진 마친 후 잠깐 볼 수 있을까요?”

자료는 이미 다 준비됐다.

환자 앞에서 왈가왈부할 일도 아니었다.

“예. 그렇게 하시죠.”

“잠깐 나가 있을까요?”

“편한 대로 하십시오.”

진충기 교수의 눈길이 온통 김지훈의 입과 허진아 환자에게 쏠렸다. 편한지, 불편한지 몰라도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김지훈이 나직한 콧소리를 터트렸다.

‘나가 계시란 소린데.’

좋게 생각할 일이었다.

진충기 교수도 흔히 보는 방문자 중 한 명일 뿐이었다. 통상적으로 대하면 될 일이었고, 간담도와 복강경 수술의 고수인 이상 조언을 받을 수도 있었다.

환자에게 집중했다.

‘결정한 대로 하자.’

“환자분, 내일 아침부터 물을 드셔도 됩니다. 문제없으면 모레 미음부터 시작해서 다음 날 죽까지 올리겠습니다. 단, 불편한 점이 생기면 곧바로 말씀하셔야 합니다.”

“정말이요? 고맙습니다.”

허진아 환자 눈에 생기가 돌았다.

단순히 입으로 무엇이 들어가는 문제가 아니었다.

일상으로의 복귀가 그만큼 가까워졌단 의미였다.

불과 사흘 만이란 사실을 떠올리지도 못했다.

오창도 교수에겐 적잖이 당황스러운 결정이었다.

함께 우려할 법도 한 진충기 교수는 눈가에 깊은 주름을 만든 채 조용히 상황에 집중했다.

“김지훈 선생님, 췌장을 절제한 지 불과 사흘 지났습니다. 벌써 물을 먹어도 될까요?”

“사모님 회복 속도가 상당히 빠릅니다. 현재로서는 췌장액 유출 기미가 없고, 장 소리도 무척 좋아 진행해도 된다고 판단됩니다.”

오창도 교수가 김지훈의 눈을 보았다.

불안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결정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의외일 정도로 빠르게 진행시키고 있지만 신중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오히려 동료의 가족이기에 더욱 숙고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난 어떻게 했을까?’

물 한 모금마저 서서히 진행했을 것이 분명했다. 불안감의 표출이라 해도 가장 안전한 진행이란 사실은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잘못되면 라파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무리한 결정을 내렸다고 비난받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린 판단이었다.

환자와 하등 관계없는 문제 때문에 좌고우면할 김지훈도 아니었다.

전적으로 믿어야 했다.

오창도 교수가 수긍했다.

물을 먹기까지 하루도 안 남았다.

허진아 환자가 수술 후 나흘째부터 본격적인 회복 과정에 들어서게 됐다. 마지막 고비인 일주일 전후를 무사히 넘긴다면 퇴원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복강경 수술의 힘이었다.

오후 회진을 모두 마쳤다.

모든 환자가 무난히 회복되고 있었지만 정재복 환자는 이제야 외과적 치료 말미에 들어섰다. 지독히 느린 회복에도 합병증이 발생하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사실상 천운에 가까웠다.

‘후우! 다음 주에는 우리 과 치료를 모두 마치고, 내과로 보낼 수 있어야 하는데.’

마음의 짐이었다.

무력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동안 답답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김지훈이 고경아에게 양해를 구한 후 진충기 교수를 기다렸다. 마침 당직인 데다 이왕 주는 자료 철저하게 만들어 줄 시간이 필요해 한가할 틈이 없었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진충기 교수와 오창도 교수가 함께 들어왔다.

소속은 달라진 지 오래였지만 친분은 오히려 돈독해 보였다. 불미스러웠던 과거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를 진정으로 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지훈이 활짝 웃었다.

‘보기 좋네.’

“마침 두 분 다 잘 오셨습니다. 부탁하신 자료 다 준비했고, 집담회에서 나눠 드리겠지만 오창도 선생님도 미리 한 부 가져가시죠. 혁원이하고 진우 확실하게 죽여 주세요.”

죽이라니!

무슨 말인지 몰라 눈만 멀뚱거리는 진충기 교수의 모습에 오창도 교수도 모처럼 웃었다. 아내의 무난한 회복에 약간의 여유를 찾은 모양이었다.

“그런 게 있습니다. 참! 김지훈 선생님께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오 교수도 같이 들으면 좋겠어. 김지훈 선생님, 솔직히 오 교수에게 처음 얘기 들었을 때 라파로로 췌장 수술이 가능할지 반신반의했습니다. 수술 성공했을 때도 불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오늘 제수씨 상태를 보니까 생각이 확 달라지네요.”

“운이 좋았습니다.”

“운으로 할 수술이 아니죠. 개인적으로 욕심이 많이 납니다. 그래서 어려운 부탁 하나 더 드리려고 합니다.”

“어려운 부탁이요?”

H 병원의 핵심이자 알아주는 써전인 진충기 교수였다. 앞에서 끌고 가도 모자랄 판에 왜 이리 원하는 것이 많은지 모를 일이었다.

김지훈이 의아한 눈으로 다음 말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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