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95화 (995/1,329)

1화

진충기 교수였다.

악연으로 시작해 좋은 인연으로 이어졌지만 사적으로 통화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퇴근 때가 훌쩍 지난 시간에 전화라니 의아한 일이었다.

어쨌든 반가운 목소리였다.

“웬일이십니까?”

(귀국하셨다는 연락받았는데 이제야 전화했네요. 미안합니다. 별일 없으시죠?)

“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먼저 연락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선생님도 별일 없으셨죠?”

(병원 생활이 다 그렇죠. 다른 게 아니고 소식 들었습니다. 오자마자 원 포트 수술 도입하셨고, 오늘 오 교수 사모님 수술하셨다고요?)

김지훈이 고개를 까딱였다.

수술 끝난 지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진충기 교수 귀에까지 들어가다니 내부 상황을 무척 잘 아는 사람의 입이 분명했다.

친분 관계를 생각하면 누가 범인인지 빤했다.

‘스파이다! 오창도 선생님이 배신을?’

엉뚱한 생각에 하마터면 소리 내 웃을 뻔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평소 오 교수와 자주 연락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배워 오셨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제수씨와 제법 친해 선생님 얼굴도 볼 겸 곧 문병 갈 생각입니다.)

복강경을 이용한 췌장 절제를 두고 자신의 판단과 아내의 생각이 달랐다. 최초 시도에 내포된 위험성을 잘 알기에 고민이 많았을 오창도 교수였다.

상의할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젊은 시절 믿고 따랐던 선배, 진충기 교수만 한 적임자는 없었다. 한때의 서먹한 관계를 극복한 후 도리어 단단해졌기에 고민을 토로하며 나눴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한편으로 미안한 마음이 적지 않았다.

‘집도의인 내게 반대 의견을 피력할 수는 없으셨겠지. 스승님께 속마음을 털어놓기엔 상황이 너무 부담스럽고, 힘드셨을까? 어떤 이유든 그동안 선배로만 대한 것 같아 마음이 안 좋네.’

긴밀해도 모자랄 동료 의사 간의 관계가 형식적이라면 치료 역시 기계적으로 변한다. 환자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같은 파트 선배이기에 더욱 돈독해야 했다.

잊지 말아야 할 일이었다.

나직한 헛기침을 터트린 김지훈이 통화에 집중했다.

“그러셨군요. 언제든 오시죠. 겸사겸사 커피 한 잔 대접하겠습니다.”

(커피 좋죠. 수술은 잘 끝났습니까?)

“다행히 잘 끝났지만 아시다시피 췌장이 마음대로 되는 장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며칠 더 지켜봐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긍정인지, 다른 생각을 하는지 진충기 교수가 잠시 뜸을 들였다.

(결코 쉽지 않은 장기죠. 그래서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라파로를 이용한 췌장 절제는 국내 최초가 확실하고, 원 포트 수술도 상당히 획기적이라 저도 배웠으면 합니다. 수술 테이프를 얻을 수 있을까요?)

김지훈이 살짝 놀랐다.

진충기 교수처럼 야심 많고, 쟁쟁한 써전이 직접 전화해 배우고 싶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도 후배라 할 수 있는 의사에게 말이다.

신중하게 답해야 했다.

“췌장은 처음 시도한 탓에 다른 선생님들에게 보일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원 포트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흡합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수술 경험을 독점하기 위해 둘러대는 완곡한 거절이 아니었다.

솔직히 손일석의 우려도 뇌리를 스쳤다.

환자 치료에 관한 문제는 대단히 완고하면서도 보수적인 조직이 바로 의학계였다. 새로운 기술을 과감히 받아들이기보다 철저한 검증을 우선할 수밖에 없었다.

“경험이 더 필요한 데다 개복 성적과 객관적으로 비교할 데이터 자체가 없어 논란을 자초할 수도 있고요.”

(새로운 길을 가고자 하는 의사라면 피할 수 없는 문제 아닙니까? 비윤리적이거나 이론이 뒷받침되지 않는 허황된 방법이라면 모르지만 이번 수술은 경우가 다릅니다. 혹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면 부탁드리겠습니다.)

개인적 문제라!

진충기 교수가 말하는 바는 둘 중 하나였다.

처음부터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

감정적 앙금이 남아 있어 알려 주고 싶지 않거나, 섣불리 알려 주었다 도리어 논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아닌지 묻고 있었다.

김지훈이 실소를 머금었다.

“걱정하시는 문제는 없습니다. 오늘 첫 시도를 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외부에 알리기에 제 수준이 부족해 꺼리는 것뿐입니다. 사모님 회복도 장담하기엔 너무 이르고요.”

(이거 왜 이러십니까? 지나친 겸손도 예의가 아닙니다. 경쟁자, 경쟁 병원이 있어야 더 발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입장이 바뀌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선생님은 부탁 안 하셨을까요?)

절대 부인하지 못할 말이었다.

여전히 수술 욕심이 대단한 진충기 교수였다.

써전이면 응당 가질 수밖에 없는 개인적 야망까지 맞물려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절대 책망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적절한 자극이 될 수 있었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생각이 짧았어. 진충기 선생님이 자존심까지 버릴 줄은 정말 몰랐다.’

“내부적으로 정리할 것이 많아 시간이 필요합니다. 문병 오실 때 정리 잘해서 드릴 테니 연락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왕이면 원 포트 수술까지 확실하게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통화를 끝낸 김지훈이 눈가를 문질렀다.

단순히 진충기 교수 개인적 욕심에 따른 전화라 생각할 수만은 없었다. 개복보다 안전한지를 두고 논란이 일어나고도 남았다.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술이었다.

찬사와 감탄 이면에는 우려와 질시가 있을 것이다.

돌파구는 단 하나였다.

의학은 논리정연한 학문이다.

납득할 수 있는 적응증과 장단점을 확실하게 정립하지 못하면 공격에 시달릴 수도 있었다. 적용 가능한 케이스를 최대한 찾아 복강경을 이용한 수술을 연이어 성공하는 것뿐이었다.

행여 손가락질받아도 비난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었다.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면 애초에 시도하지 말았어야 할 수술법이거나 진정한 발전이 아닐 것이다.

김지훈이 불끈 주먹을 쥐었다.

‘분명한 이득과 의미가 있다. 췌장 병변 역시 라파로로 수술할 때 더욱 결과가 좋다는 사실을 반드시 증명해야 한다.’

성공하지 못하면 고민 자체가 무의미했다.

전제 조건은 당연히 실력이었다.

불현듯 원 포트 수술의 중요성이 다시금 떠올랐다.

비록 양성 질환에 국한되지만 상당한 숙련도와 노련미가 요구되는 수술법이었다. 이는 곧 보다 어려운 수술을 할 수 있는 발판이라는 의미였다.

한때 오창도 교수가 가능한 빨리 전담해 주기를 바랐지만 무산된 것이 도리어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일 알 수 없다더니, 라파로로 췌장 수술을 하고 나니까 내 시각도 바뀌네. 원 포트를 전담하게 된 것을 즐겁게 받아들이자.’

일이 적어지는 것도 아닌데 이상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자신이 하는 일에 강한 의미를 부여해야 힘이 나는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웃음을 터트리자 고경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충기 선생님하고 친하지도 않으면서 갑자기 실없는 웃음은 뭐예요? 수술 테이프 보여 달라는 게 그렇게 좋아요?”

“그만큼 내 실력을 인정한다는 소리 아닌가요?”

“지훈 씨가 좋다면 나도 좋지만, 다른 마음 품은 게 아니면 좋겠네요.”

한때 남편이 품었던 좋지 않은 감정이 아내에게는 아직 앙금처럼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매사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에 힘이 난 김지훈이 고경아의 손을 꼭 잡았다.

“하하하!”

공연한 웃음이 터졌다.

어느새 밤이 깊었다.

국내 최초 시도라는 단 한 건의 수술이 상당한 피로를 몰고 왔다. 희연이 곁에서 뒹굴뒹굴 구르며 허진아 환자 치료를 고민하던 김지훈의 고개가 정신없이 꺾였다.

생각해 보면 진짜 힘든 사람은 따로 있었다.

김지훈만큼 큰 부담을 느끼며 수술을 함께했다. 남편을 비롯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육아는 엄마의 손길이 반드시 필요한 법이었다.

그런 짐을 모두 짊어진 고경아가 오늘도 두툼한 책과 벗하며 잠을 잊었다. 우선순위는 있을지언정 일과 가정, 그리고 자신의 미래까지 무엇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딸깍!

꽤 늦은 시간에 불이 꺼졌다.

피로와 싸우면서도 어느 틈엔가 남편이 가져다준 주스 한 잔과 써전의 솜씨로 깎아 놓은 과일 한 접시가 있기에 웃을 수 있었다.

‘얇게도 잘 깎았네.’

키스는 덤!

***

허진아 환자, 수술 후 일 일째.

이십사 시간 지났다.

수술만큼 초조한 시간이 시작됐다.

회진을 앞둔 김지훈이 얼굴을 굳혔다.

불가항력이라 해도 써전의 실력 부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기간인 수술 후 사흘이 첫 고비이자 관건이었다. 누구도 가 보지 않은 길을 가는 탓인지 수술 전보다 오히려 심적 부담이 더 가중됐다.

수술 부위로 연결된 심지(드레인)에 묻어나는 체액의 양상이 가장 중요했다. 췌장 소화액 유출과 출혈이 의심되는 어떤 소견도 허락되지 않았다.

자칫 재수술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은근히 불안했다.

“송진우 선생, 검사 결과와 드레인 양상 어때?”

“드레인 깨끗하고, 특별한 문제는 없습니다.”

다행이었다.

의사보다 더욱 불안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두려움도 가시지 않았을 것이다.

허진아 환자를 찾았다.

“사모님, 많이 아프세요?”

“견딜 만해요. 수술은 잘된 거죠?”

“현재까지 순조롭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오늘은 안정을 취하세요.”

“상처 치료하실 때 여쭤보니까 이걸 사흘 이상 유지해야 한다고 하시던데, 목이 너무 갑갑하고 아프네요.”

코 줄을 가리켰다.

여자이기에 표현하기 힘들겠지만 소변 줄 또한 코 줄 이상으로 불편할 텐데 애써 웃으려 했다.

회복에 큰 도움이 되는 긍정적인 태도에 힘을 보태는 일 또한 의사의 책무였다.

김지훈이 편안한 미소를 머금었다.

“훨씬 더 힘든 수술도 잘 이겨 내시지 않았습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허진아 환자가 앉을 수 있도록 직접 침대 윗부분을 세운 김지훈이 한동안 환자의 호소에 귀를 기울였다.

결코 특별한 대우가 아니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달리 대하고 있다면 집도의도 확신하기 힘든 수술을 자원한 환자에 대한 예우일 것이다. 그마저 탓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실 회진을 도는 내내 김지훈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환자와 함께 웃고, 걱정하며 힘을 북돋는 것이야말로 스승에게 배운 가장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이었다.

회진을 끝낸 김지훈이 이준영 교수, 오창도 교수와 함께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스승과 선배의 경험이 무엇보다 소중했고, 절실한 시점이기도 했다.

“수술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원칙을 잊지 마.”

“합병증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발생한다면 최대한 조기에 발견해 빠르게 대처하겠습니다.”

오창도 교수가 극도로 말을 아꼈다.

얼굴에 감도는 긴장은 여전했다.

집도의가 불안을 유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평소와 똑같이 편안한 미소를 머금으며 인사를 한 김지훈이 본격적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원 포트 수술이 의외일 정도로 빠르게 입을 탔다.

덕분에 외래 환자 예약이 꽉 찼다.

양성 및 염증 정도가 원 포트 수술 적응의 관건이었다. 펠로우들도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초음파의 중요성을 십분 절감하기 시작했다.

‘배울 게 점점 더 많아지네.’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르는 시간이었다.

걸음을 빨리하고, 일과 중 찾아오는 쉬는 시간을 쪼개 아끼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틈에 바쁜 하루의 끝이 다가왔다.

오후 회진 말미에 오창도 교수를 다시 만났다.

불안은 가라앉지 않았다.

“김지훈 선생님, 괜찮겠습니까?”

간담췌 센터 부센터장이다.

환자 상태와 경과를 모를 수가 없었다.

초조함 때문일 것이다.

“췌장액 유출 여부는 며칠 더 지켜봐야 안심할 수 있겠지만 제가 기대했던 경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셨으면 합니다.”

물끄러미 김지훈을 보던 오창도 교수가 다소 의외의 말을 꺼냈다.

“최초 시도가 주는 부담과 압박이 이런 거였군요. 어떤 문제가 있을지 잘 알고 있는 수술도 모든 것이 불안한데 어떻게 극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지훈이 말없이 웃었다.

체력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정신력이긴 했다.

‘사실 저도 무척 불안합니다. 사모님이 퇴원해야 진짜 웃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난한 경과를 보이지만 허진아 환자는 한동안 아슬아슬한 줄 위를 걸어야 한다. 균형을 잃는 순간 속절없이 추락할 것이다.

속마음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더욱이 복강경으로 수술한 의미까지 찾아야 했다. 개복과 별다를 바가 없다면 써전의 허영과 욕심에 불과한 수술이 될 수도 있었다.

‘내일도 예정대로 진행할 수 있을까?’

은근히 불안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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