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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994화 (994/1,329)

20화

멈출 이유가 되지 않았다.

허진아 환자가 보인 신뢰의 눈빛, 오창도 교수의 절박한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속 불안과 두려움을 버렸다.

그동안 쌓은 경험과 감각을 믿었다.

김지훈이 단호하게 말했다.

“예상했던 일일 뿐이다. 계속 진행하자. 보비!”

수술 팀의 긴장이 솟구쳤다.

삐이이이이!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두부처럼 부드러운 췌장 조직이 잘렸다.

수처하는 손에 극도의 신중함이 실렸다.

타이를 하는 내내 눈빛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불과 1센티미터 밑에 위치한 대동맥에 도달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미세한 출혈 부위, 잘린 췌장을 묶은 매듭이 하나둘 늘어났다.

김지훈의 이마가 땀으로 젖었다.

살얼음판이나 다름없었다.

기구로 전해지는 감촉이 달라졌다.

극도로 주의해야 한다는 신호였다.

‘여기서 실수하면 대정맥을 찌른다. 천천히. 신중하게.’

김지훈의 손이 현저하게 느려졌다.

췌장 조직을 턱없이 작게 자르고 처리했다.

수술 팀 누구도 의문을 갖지 않았다.

드디어 완연하게 다른 조직이 보였다.

췌장 아래 위치한 복부 대동맥이었다.

이제 췌장과 대동맥 사이를 박리해야 한다.

정확한 경계를 따라간다면 수처와 타이가 거의 필요 없는 부분이었다. 단 집도의의 실력이 받쳐 주지 못한다면 치명적 손상이 발생할 것이다.

“모스키토!”

고경아가 처음으로 박리용 기구인 모스키토를 건넸다.

김지훈은 멈추지 않았다.

덧 가운 속 수술복은 이미 땀으로 푹 젖었지만 감각을 이어 가야 했다.

“경계면 보이도록 카메라 바짝 접근시켜. 이혁원 선생은 박리된 췌장 들어 올려 시야 확보해. 둘 다 내가 조작하는 기구와 주변 조직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

사각! 사각!

모스키토의 가느다란 끝이 췌장과 대동맥 사이를 파고들었다. 낭종 크기가 3센티미터에 이를 때까지 반복된 염증으로 상당히 단단해진 상태였다.

박리하기 결코 쉽지 않았다.

후복막과 대정맥 자체에 존재하는 혈관이 툭툭 끊어져 나갔다. 수처가 불가능한 부위기에 새빨간 피가 조직을 적실 때마다 보비를 사용했다.

가느다란 혈관을 작은 기구 끝으로 잡았다.

확대된 영상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보비!”

타닥! 탁!

혈관 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하얀 연기가 사라지며 출혈 여부를 확인할 때까지 조금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까만 피딱지가 들러붙은 대정맥은 섬뜩함 그 자체였다.

사각! 사각!

두 개의 기구를 잡고 박리하는 김지훈은 모니터에 눈을 박은 채 오직 기구를 통해 전해지는 감각에만 집중했다. 강한 저항이 있는 곳은 약하고 신중하게 박리했고, 약한 부위는 과감하게 전진했다.

대정맥과 분리된 췌장을 밀어 올리며 시야를 확보하는 이혁원은 극도의 긴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과한 힘을 가하는 순간 경계면이 찢어지고도 남았다.

카메라를 조작하는 송진우도 다르지 않았다.

집도의, 퍼스트의 기구와 충돌을 피하며 수술 부위를 정확하게 잡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담낭이나 담도를 수술할 때와 비교조차 하기 힘들었다.

오직 성공해야 한다는 일념하에 세 명의 써전은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서서히 대정맥이 드러났다.

전신이 땀으로 젖어 가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 경계면을 박리했다.

인체 혈관 중 가장 크고 굵은 대정맥 끝이 마침내 췌장과 떨어졌다. 점점이 맺힌 출혈 반점과 보비로 지진 흔적만 남았을 뿐이었다.

“후우!”

또 하나의 고비를 넘었을 뿐이었다.

아직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장 큰 고비를 넘겼지만 남은 부분 모두 후복막에 묻혀 있어 지금까지와 다른 어려움이 남아 있었다. 그 시간 내내 낭종이 터지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해야 했다.

김지훈이 다시 CT를 확인했다.

“이혁원 선생, 4센티미터 정도 더 박리해야 낭종이 숨은 부위가 완전히 떨어져 나오겠지?”

“그 정도는 박리해야 안전할 것 같습니다.”

“전보다 수월하다고 해도 후복막이야. 출혈에 특히 유의해야 하는 점 잊지 마. 송진우 선생, 수술 시야 더 깊어진다. 지금처럼 잘 확보해 줘.”

김지훈이 슬쩍 고경아를 보았다.

누구 한 명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고경아 또한 묵묵히 자신의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덕에 지금까지 실수를 하지 않았다.

“예정대로라면 한 시간 반 정도 더 소요될 겁니다. 끝까지 집중합시다.”

수술 팀의 기운을 북돋은 김지훈이 힘차게 기구를 잡았다. 수술 시작한 지 세 시간이 훌쩍 넘었지만 췌장 두경부암 수술인 휘플에 비하면 오랜 시간은 아니었다.

최초의 시도가 만만할 리도 없었다.

“모스키토! 보비! 수처! 타이! 컷!”

후복막 박리가 이어졌다.

수많은 위험 구조물이 숨어 있지만 상당한 경험을 쌓은 부위였다. 세심하면서도 과감한 손 아래 써전들의 실력까지 더해졌다.

김지훈의 손이 빨라졌다.

복강경 수술의 최대 강점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과정이었다. 몇 배로 확대된 수술 부위는 더욱 정확한 조작을 가능하게 했고, 손상은 미미했다.

물론 양성 질환이라는 점이 가장 큰 요인이었지만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이점이었다. 또한 사용할 수 있는 기구가 많아지면 그만큼 수월해진다.

“이리게이션! 석션!”

식염수로 씻어 낸 부위가 선명하게 보였다.

박리 후 보비, 수처, 타이를 이용해 출혈을 잡아 가는 사이 췌장 몸통이 후복막에서 떨어져 나왔다.

불과 이삼 센티미터 정도 남았다.

해부학적 명칭상 꼬리 부분이라 칭하지만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부위였다.

김지훈이 호흡을 골랐다.

드디어 끝이 보인다는 생각에 살짝 흥분이 다가온 것이다. 한순간의 방심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잘 알기에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사각! 사각!

조금씩 떨어져 나오던 췌장이 마침내 후복막과 완전히 분리됐다. 새빨간 피가 흘러나왔지만 능숙하게 출혈 부위를 잡아 해결했다.

아직 안심할 때가 아니었다.

췌장 절단면을 확실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필히 소화 효소가 유출된다. 절제된 췌장을 몇 겹의 거즈로 잘 감싼 후 마무리에 들어갔다.

출혈부터 확인했다.

미세한 출혈만이 관찰됐다.

보비나 수처 처리가 도리어 손해될 수준이었다.

가장 중요한 소화액 유출 여부가 남았다.

깨끗한 거즈를 몇 번이고 절단면에 대 맑은 액체가 묻지 않는지 철저하게 점검했다. 췌장관을 묶은 매듭이 잘 유지되고 있는지는 필수였다.

“어때? 괜찮아 보여?”

“소화액이 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혈을 위해 사용하는 끈적끈적한 젤과 그물망 모양의 지혈대로 절단면을 막았다. 약제가 스며들어 가며 혈관은 물론 췌장관까지 막을 것이다.

후복막을 깨끗이 씻은 후 이중 구조로 된 굵은 드레인(심지)을 박았다. 통상 두 개를 넣지만 만족할 정도로 깔끔해 하나만으로 충분하다고 판단됐다.

“췌장 빼냅시다. 메스!”

배꼽 위 기존 절개 창을 살짝 더 열어 췌장을 배 밖으로 빼냈다.

복강 내를 최종 확인했다.

“거즈 카운트 맞습니까?”

“맞습니다.”

“출혈량이 어느 정도 됩니까?”

“풀(Full)로 젖은 거즈가 열 장이 채 안 되니까 구십 씨씨 정도로 보여요.”

한 장당 십 씨씨 정도 본다.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췌장 두경부암 수술의 경우 평균 오백에서 육백 씨씨 정도 출혈이 발생한다. 훨씬 작은 수술이라 해도 개복 시 최소 백오십 씨씨 이상 출혈한다고 봐야 했다.

무려 40퍼센트 가까운 출혈 감소였다.

단지 양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만큼 손상이 적었다는 의미였다.

복강경을 고집한 최대 이유이자 목표였다.

‘후우! 됐어.’

흥분을 가라앉힌 김지훈이 절개 창 봉합을 시작했다.

1센티미터도 안 되는 절개 창 세 개.

췌장을 빼내느라 조금 더 크게 난 절개 창 하나.

굵은 드레인이 박힌 상처 하나.

도합 다섯 곳이었지만 개복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확대된 영상하에 작은 기구를 이용한 수술 부위 역시 손상 정도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컷!”

마지막 피부 봉합사가 잘렸다.

찌이이이익! 찌이이이익!

어느새 인공호흡기를 분리한 윤서연이 튜브와 입 안에 찬 가래를 제거했다. 마취에서 깨기 시작한 허진아 환자가 몸부림을 쳤다.

“끄으으으응!”

“환자분, 눈 떠 보세요. 환자분.”

가볍게 가슴 부위를 두드리자 눈을 떴다.

회복도 무척 빨랐다.

“환자분 옮기셔도 됩니다.”

수술 내내 극도의 긴장에 빠졌던 수술 팀의 어깨가 이제야 확 풀어졌다.

덧 가운까지 땀으로 젖었다.

성인 손가락 두 개 크기에 불과한 췌장 몸통과 꼬리 부분을 절제하는 일이 이토록 어려울지 몰랐다. 하지만 비교할 수 없는 보상을 받았다.

복강경을 이용한 최초의 췌장 수술을 성공했다.

써전의 도전이자 환자와의 약속을 지켰다.

중간에 자리를 비웠다 다시 들어온 송재덕 교수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야! 잘했다. 잘했어. 지훈이, 혁원이, 진우가 고생한 보람이 있구나. 있어. 초조해서 수술실 근처에도 못 온 오 교수도 이제 마음 푹 놓겠어. 그치? 그렇지? 지훈아, 퇴원은 언제 하니? 언제?”

성공했다고 해도 췌장 수술이다.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았다.

우물쭈물 입을 열지 못하던 김지훈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선배 의사들의 지도와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결코 얻지 못했을 성과였다.

송재덕 교수가 혀를 찼다.

“지훈아, 지금 누구에게 인사하는 거니? 날 보기나 한 거니? 날? 준영아, 넌 어떻게 생각하니?”

묵묵히 마지막 과정을 함께한 이준영 교수가 다가와 김지훈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수고했다. 오 교수 만나 봐.”

“감사합니다.”

김지훈이 훅 숨을 몰아쉬며 수술실을 나갔다.

마스크로 가려진 스승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오창도 교수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수술 잘 끝났습니까?”

“무사히 끝났습니다. 지금 회복실에 계시니까 들어가 보시죠.”

마취가 완전히 풀리지도 않은 허진아가 남편의 손을 놓지 않았다. 눈시울이 붉어진 오창도 교수 역시 수술 경과가 무척 궁금할 텐데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아내와 남편이었다.

바이탈이 안정되고, 어느 정도 의식이 또렷해질 때까지 자리를 지키던 오창도 교수가 김지훈에게 인사하고 함께 병실로 향했다.

“고맙습니다.”

김지훈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환자만이 아니라 오창도 교수의 동의가 없었다면 시도하지 못했을 수술이었다. 설령 실패했다고 해도 다음 환자를 위한 소중한 경험이 분명했다.

‘감사해야 할 사람은 접니다.’

이제야 김지훈이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라파로를 이용해 췌장 병변을 제거했다.

최초의 시도라는 사실보다 또 다른 치료와 수술법의 지평을 열었다는 사실에 벅찬 가슴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수술 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함께한 수술 팀 모두 고맙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들의 치열한 고민과 땀방울이 없었다면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허진아 환자를 찾았다.

잠에 빠져 있었다.

코 줄, 소변량, 드레인을 통해 나오는 체액 양상을 꼼꼼히 확인한 후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왔다.

환자가 무사히 퇴원하는 날 이번 수술의 성공을 자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것이란 강한 확신이 다가왔다.

두근두근!

이상스레 뛰는 가슴을 안고 일과를 이어 갔다.

수술 방, 병동, 외래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힐끗 눈길을 주었다. 얼핏 들리는 췌장, 복강경이란 말속에 감탄과 놀라움이 서려 있었다.

교수들을 비롯해 동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다만 췌장 수술의 특성상 말을 아끼고 있었다. 별 탈 없다면 일이 주 내에 퇴원하겠지만 합병증이 발생하면 기약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소리 없이 분주히 움직일 상황이었다.

“경아 씨, 수술 테이프 잘 보관해요.”

“수술 끝나자마자 복사본 만든다고 신현수 선생님이 가져가셨으니까 내일 꼭 찾아야 할 거예요.”

“현수가?”

“이경석 선생님하고 손일석 선생님도 같이 오셨어요. 제부는 라파로하고 상관도 없으면서 먼저 보겠다고 왜 싸우는지 몰라요.”

김지훈이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서 평생 라이벌이다.

모처럼 함께 퇴근하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김지훈이 어깨를 들썩였다.

우우우우웅!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김지훈의 눈이 동그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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