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91화 (991/1,329)

17화

무척 바쁜 한 주였다.

외래와 수술이 궤도에 접어든 상태에서 오창도 교수의 심적 부담을 고려한 이준영 교수가 외래 진료까지 일부 변경시킨 탓이었다.

김지훈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췌장 종물 수술은 개복하에 시행한다는 당연한 일을 두고 말이다.

‘개복이 최선일까? 오창도 선생님 가족이라는 사실에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닐까?’

허진아 환자의 검사가 순차적으로 진행됐다.

초음파 검사 소견은 다르지 않았다.

혈액 검사상 흔히 동반되는 췌장염은 의심되지 않았고, 암 지표도 정상 수치였다.

CT가 관건이었다.

다행히 주변 장기나 조직의 변성이나 침투 양상은 관찰되지 않았다. 하지만 낭종 내 내용물이 깨끗하지 못해 일말의 불안 요소가 남았다.

간담췌 파트가 모두 모였다.

췌장의 점액 낭종으로 최종 진단을 내렸다.

빠른 절제만이 유일한 치료였다.

특별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추가 치료도 필요 없을 것이다. 단 수술 후 조직 검사에서 양성이 나와야 안심할 수 있었다.

이준영 교수가 오창도 교수를 보았다.

“오 교수, 아내 되시는 분 상태는 어때?”

“이제야 안정을 찾았습니다.”

“집도의는 결정했나?”

막 입을 열려는 순간 김지훈이 발언을 청했다.

‘지금이 아니면 말할 기회조차 없다.’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봐.”

“췌장 수술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수술 중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주변 조직 손상입니다. 복잡한 해부학적 구조와 수술 난이도에 따른 문제지만 개복에 따른 필연적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몸통에 국한된 낭종이라는 사실에 주목했으면 합니다.”

“그래서?”

“절제 후 소장을 이어 붙일 필요가 없다면 라파로로 가능하지 않을까요?”

다들 깜짝 놀랐다.

충분한 시야가 확보되는 개복을 해도 췌장 자체가 갖는 위험성 때문에 합병증에 시달릴 확률이 높았다. 그런 장기의 병변을 복강경으로 수술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준영 교수마저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너무 위험하지 않겠어?”

“시야만 제대로 확보한다면 모니터를 통해 수술 부위를 확대해 볼 수 있고, 사용하는 기구 자체가 작아 도리어 유리할 수 있습니다.”

이준영 교수가 CT를 가리켰다.

“대정맥과의 간격이 1센티미터에 불과해. 췌장을 통과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간문맥과도 상당히 가까워. 박리 중 손상을 입히면 개복할 시간마저 허락되지 않을 수 있어.”

“개복으로 전환할 때의 위험성은 인정합니다만, 개복한다고 해서 줄어들 위험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라파로로 성공한다면 환자분 회복 시간까지 크게 단축될 겁니다. 삶의 질도 당연히 좋아지고요.”

복강경의 이점을 모르는 의사는 없었다.

모든 수술의 관건은 위험의 최소화였다.

문제는 개복보다 안전하다고 할 수 없는 수술인 데다 경험을 가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김지훈의 눈치로 보아 미국에서조차 시도된 적이 없는 수술이 분명했다.

격론이 벌어졌다.

김지훈은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CT를 보며 구체적인 접근 방식, 췌장 절단 방법, 수술 후 처리까지 설명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췌장 몸통에 국한된 이상 수술 과정의 90퍼센트 이상이 박리입니다. 성공 여부는 철저히 숙련도에 달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숙련도라!”

이준영 교수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며칠을 두고 고민한다고 해도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누구보다 김지훈을 잘 알지만 써전의 도전인지, 확신을 가진 제안인지조차 판단하기 힘들었다.

반면 김지훈은 모든 의료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확신에 찬 자신감을 내비쳤다. 동료 의사의 의견을 절대 무시하지 않을 제자기에 성공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도 없었다.

오창도 교수의 의견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수술 선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오 교수, 어떻게 생각해?”

“너무 불안합니다. 김지훈 선생님, 혹시 어떤 위험이 있는지 잘 아는 동료의 가족이기 때문에 제안하는 것은 아닙니까?”

오창도 교수는 누구보다 수술 위험성을 잘 아는 노련한 써전이었다. 일단 수술에 동의하면 치명적 합병증이 발생해도 책임을 묻기 어려운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점을 염두에 둔 제안이 아닌지 묻고 있었다.

김지훈이 미간을 좁혔다.

오해를 살 만도 했다.

게다가 원 포트 수술 교육에 이어 췌장 종물 수술까지 모두 오창도 교수와 관련됐다. 난감함의 연속이었지만 유학 때부터 생각해 온 수술이었고, 의사로서 함께한 자리였다.

자신감을 갖고 답해야 했다.

“아닙니다. 전부터 생각했던 수술입니다. 같은 질환을 가진 분이 왔다면 역시 똑같은 제안을 했을 겁니다. 써전의 욕심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만 환자에게도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창도 교수의 눈빛이 흐려졌다.

최초라는 말 자체가 위험한 시도란 의미였다.

원 포트 수술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안전을 담보하는 익숙함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이준영 선생님께서 집도를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김지훈 선생님, 제안은 고맙게 생각하겠습니다.”

고민할 여지도 없다는 듯, 복강경은 췌장 수술의 위험성만 증가시킬 것이란 확신을 가진 듯 다들 곧바로 개복에 동의했다.

김지훈도 무작정 밀어붙일 수술이 아니었다.

이준영 교수와 보호자인 오창도 교수의 선택과 결정을 따라야 했다. 다만 한 번의 반대로 포기한다면 앞으로 췌장 병변의 복강경 시도는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당위성과 목표를 말해야 할 때였다.

“오창도 선생님의 결정 당연합니다. 의료 쪽에 지식이 없는 보호자도 위험성에 대해 들으면 쉽게 동의하지 못하겠죠. 하지만 전 지금도 췌장 병변의 라파로 수술 가능성이 충분하며, 환자에게 유리하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언제 또 시도하거나 제안할 수 있을지 모르건만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제 최종 목표는 두경부 암까지 라파로로 시행하는 것입니다.”

“휘플(Whipple)을 라파로로?”

일반외과 영역에서 가장 고난도의 수술을 복강경으로 하겠다니 가히 경악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김지훈은 눈 하나 깜작이지 않았다.

그만큼 확신을 갖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습니다. 실제 시도한다면 논란이 많겠지만 도전할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말이 나온 이상 이번 기회에 준비는 해 보고 싶습니다.”

“준비라니?”

“선생님들과 함께 라파로를 이용한 췌장 낭종 수술을 논의하고 싶습니다. 오창도 선생님께서 부담을 느끼신다면 사모님 수술이 끝난 후 진행하겠습니다.”

이준영 교수가 고개를 저었다.

“오창도 선생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냉정한 써전이다. 걱정할 일 아니다. 이론적으로라도 설명 가능해야 차후 환자와 보호자를 납득시킬 수 있겠지. 논의는 진행해.”

“알겠습니다.”

내친김이었다.

머릿속에서만 맴돌았던 수술이었지만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이미 생각해 두었다.

“이혁원 선생, 위장관 쪽 라파로 수술 테이프가 필요하니까 신현수 선생에게 부탁해 최대한 많이 확보해. 나종진 선생은 담도 수술 테이프 확보하고, 송진우 선생은 췌장 수술에 대한 자료 준비해.”

“개복 수술을 말하시는 겁니까?”

“접근 방식의 차이일 뿐 과정은 다를 바 없잖아. 개복 수술을 완벽하게 숙지하지 못하면 라파로는 아예 불가능해. 그리고 사모님 수술은 준비 안 할 생각이야?”

갑자기 떠올라 제안한 수술법이 아니었다.

일사천리 나오는 말에 이준영 교수와 오창도 교수가 살짝 놀랐다.

펠로우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허진아 환자는 이준영 교수 주관하에 개복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리고 자리를 끝냈다. 아쉬운 마음이 가시지 않은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쉽네. 완벽하게 준비해 다음에는 환자, 보호자만이 아니라 스승님 이하 모든 교수님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기회는 또 올 것이다.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잡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했다. 이제 한동안 쉴 시간은 없어질 것이다.

췌장 병변을 복강경으로 수술하자고 제안했다.

외과 의국 전체가 술렁였지만 기대와 놀라움보다 불안한 기색이 더 역력했다. 써전이라면 누구나 췌장을 겁내니 당연한 일이었다.

신현수마저 우려를 드러냈다.

하기에 열정, 자신감, 지식, 간접적 경험, 철저한 준비까지 모든 요소가 요구됐다. 이틀에 한 번 논의하기로 했고, 이준영 교수와 오창도 교수까지 참석해 부담이 가중됐다.

퇴근 후에도 시간을 쪼개야 했다.

의료진의 의문과 불안부터 불식시켜야 했다.

“위장관 라파로는 왜 봐야 합니까?”

“췌장의 위치를 생각해. 위, 대장, 비장 사이로 접근해야 하는 데다 박리 중 대정맥만 주의해야 할까? 주변에 위치한 혈관 모두 위험 요소야.”

“몸통에 위치한 종물의 경우 담도 쪽은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해도 근접한 이상 역시 주의해야겠군요.”

“그렇지. 위장관 라파로 수술을 보며 췌장으로 접근하는 방법부터 고민해 보자.”

연습도 실전처럼 해야 실력이 느는 법이었다.

이론적 토대를 쌓아 가는 동시에 다른 교수의 복강경 수술에도 최대한 참가했다. 췌장으로 접근한 방식 결정에 큰 도움이 되고도 남았다.

슬슬 열기가 진해지기 시작했다.

치열한 일상이 이어지는 가운데 허진아 환자의 수술 일정이 정해졌다.

일주일 남았다.

마치 복강경 수술이 예정된 것처럼 김지훈은 열정을 불태웠다. 많은 의견이 모이며 예측되는 문제의 해결책까지 제시되기 시작했다.

김지훈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몸은 점점 힘들어졌고, 실제 수술을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수술을 준비하고 있다. 파트 전문의들이 보이는 열정이 강한 의욕까지 불러온 덕이었다.

어느새 사흘 앞으로 수술이 다가왔다.

허진아 환자에게 상세한 설명을 구해야 할 때였다. 동료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떠나 불안이 극심해질 시기기에 의료진의 자신감이 필수였다.

김지훈이 제시한 뜻밖의 제안 때문인지 이준영 교수까지 수술 전 마지막 준비에 참가했다. 오창도 교수에겐 빠질 수 없는 자리였다.

퍼스트로 참가하게 될 김지훈이 발표를 시작했다.

적지 않은 경험이 있는 개복 수술이었다.

순조롭게 진행됐다.

“마지막으로 수술 팀 구성은 제가 퍼스트를 서고, 세컨은 송진우 선생이 서기로 했습니다. 문제없이 진행될 것으로 사료됩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준영 교수가 의외의 말을 꺼냈다.

“김지훈 선생, 라파로로 한다는 가정하에 방금 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최종 과정 발표해 봐.”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이미 준비됐다.

김지훈이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포 포트로 진행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됩니다. 구체적으로 설명드리면…….”

예행도 아닌 가상 연습이었지만 무척 상세하고 꼼꼼하게 수술 계획을 설명했다. 실제 수술 준비가 아니라는 사실에 부담을 덜어 분위기도 무겁지 않았다.

그간 기울인 노력과 땀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

오창도 교수가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대정맥이나 간문맥은 출혈량이 동맥 못지않은데 혈관을 건드렸을 때 문제없이 개복으로 전환할 수 있겠습니까?”

가장 우려되는 부분이었다.

“현재로서는 손상 즉시 라파로를 고집하지 말고 곧바로 전환하는 것이 최선으로 보입니다. 시간상 개복할 여유는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됩니다.”

최초 시도라는 사실 자체가 집도의 욕심을 유발할 수 있었다. 수술이 갖는 위험만큼 주의해야 할 일이었다.

이준영 교수가 첨언했다.

“절대 욕심내지 말아야 하는 부분이야.”

“명심하겠습니다.”

많은 질문이 오간 후에 발표가 끝났다.

“수고했다. 이만 끝내자.”

제자의 제안에 가장 신경 쓰고, 마음 졸였을 이준영 교수도 흡족한 모양이었다.

목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오창도 교수가 김지훈을 찾았다. 다소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몇 번이나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김지훈 선생님, 이준영 선생님과 함께 와이프를 만나 줄 수 없을까요?”

“사모님을요?”

시간이 문제일 뿐 어차피 수술 설명을 하기 위해 만나야 할 허진아 환자였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주저하며, 또 뜸을 들였다.

오창도 교수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일반외과 의사란 이유로 와이프 생각을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결정할 일이 아니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우려가 무척 크지만 와이프는 그렇지 않습니다. 라파로 얘기를 듣고 내심 많이 기대하는 눈치입니다. 장단점은 물론 위험성까지 제대로 설명해 줘야 할 것 같습니다.”

김지훈이 멈칫 눈만 말똥거렸다.

의사인 남편이 반대하는데 환자가 복강경 수술을 원한다니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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