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케이스는 넘치도록 충분할 테니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도 양성 질환 전담 써전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면 다시 반복해야 할 과정이었다.
자칫 무한 반복이 될 수도 있었다.
김지훈이 가진 능력과 실력을 고려한다면 이는 낭비가 분명했다. 그렇다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맡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은 선택과 타협의 연속이다.
때론 진심을 담은 말 한마디가 행동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로 말미암아 서로의 마음이 편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적어도 당분간은 말이다.
“장담하기 힘들지만 시간 나는 대로 원 포트 수술에 참가하겠습니다.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 빨리 쌓이면 좋겠네요.”
“그래 주시면 너무 고맙습니다만, 절대 부담 갖지 마십시오. 제 준비가 미흡한 탓에 벌어진 일을 선생님께서 수습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앞으로 양성 질환은 모두 제게 보내 주십시오. 저도 제대로 배우며 가르칠 생각입니다. 함께 고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창도 교수가 이제야 미소 지었다.
가식이 아닌 김지훈의 진심이었다.
복잡한 감정은 여전했지만 부담을 덜었다.
“나도 감사드립니다.”
“말 놓으셔야 되는데, 그 간단한 걸 참 못하시네요.”
“하하하! 지금이 편합니다.”
밝은 웃음이었다.
김지훈이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 주말 아무 대가 없이 타인에게 미룰 수 있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마음이 더욱 편해졌다. 긴 인생 중 몇 달 늦는다고 해서 큰 타격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열심히 달리다 보면 길이 보일 것이다.
‘언제 편하고 쉬운 적 있었나? 가자! 파이팅!’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준영 교수는 물론 오창도 교수까지 케이스가 된다 싶으면 환자를 보냈다. 같은 과에서 같은 과로 의뢰하는 기묘한 상황이었지만 원 포트 수술에 환자들도 기꺼이 동의했다.
환자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진료 날은 이틀뿐이었다.
필수적으로 초음파를 시행한 데다 펠로우들에게도 가르쳐야 했기 때문에 진료 시간이 무척 길었다.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움직여도 하루 여덟 명이 한계였다.
‘정신없이 뛰었는데 열 명도 못 보네. 내과가 보면 코웃음을 치겠다.’
오히려 수술 날이 한가해 시간이 남아돌았다.
간접 경험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시간 되는 펠로우들과 함께 수술 녹화 테이프를 보며 교육에 전념할 수 있는 귀중한 여유였다.
한가한 듯 바쁜 한 주가 이어졌다.
어느새 목요일이 왔다.
이번 주 마지막 진료 환자만 남았다.
약간의 틈을 얻은 김지훈이 즐거운 미소를 머금었다.
펠로우들의 관심이 기대 이상이었다.
이혁원이 월, 수, 금 수술에 펠로우 모두 골고루 들어갈 수 있도록 골머리를 싸맬 지경이었다. 양성 질환 전문 써전이 된다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바람직했다.
“종진아, 수술 하나가 남는데 이번에는 내가 먼저 들어갈 테니까 다음 주 남는 수술은 네가 들어가.”
“다음 주에 딱 맞아떨어지면 순서 연장이다.”
“그다음에 남으면 접니다. 같은 펠로우라는 사실 잊지 마십시오.”
“송진우 선생, 그럴 리가 있겠어?”
흐뭇한 눈으로 지켜보던 김지훈이 갸웃거렸다.
의문이 하나 생겼다.
‘이 자식들이 왜 내 앞에서 스케줄을 짜지?’
이혁원이 딱딱 손바닥을 쳤다.
“오케이! 합의 본 거다. 선생님, 다음 주 계획 다 짰습니다. 철저하게 준비하겠지만 저희가 원 포트만 들어갈 수 없다는 거 잘 아시죠? 그 점을 고려해 주십시오.”
“뭘 고려해?”
“설마 일 년 내내 퍼스트만 서라는 말씀이세요? 집도 경험도 없이 장래를 결정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빨리 주실수록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않을까요?”
“꼭 할 것처럼 말한다.”
“신중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써전의 순수한 욕심이었다.
응당 채워 줘야 하지만 순순히 동의하면 재미없다.
한계도 명확하고 말이다.
“걷지도 못하면서 뛸 생각부터 해? 투 포트부터 확실하게 마스터하셔. 이준영 선생님께 다섯 케이스 받으면 나도 준다.”
“선생님! 다른 사람도 아닌 이준영 선생님께 다섯 케이스라니요? 오창도 선생님이 주시는 케이스까지 포함하면 안 되겠습니까?”
“시끄러워. 시간 다 됐어. 이혁원 선생, 환자 보자. 뭐 해? 너희들은 일 없어?”
시계를 본 나종진과 송진우가 깜짝 놀라며 후다닥 뛰쳐나갔다. 이혁원이 환자 차트를 보는 척하며 투덜투덜 인상을 썼다.
‘확 때릴 수도 없고, 너희도 전문의라 이거지?’
눈길 한 번 주자 정색하며 차트에 집중했다.
36세 여자 환자, 허진아.
흔히 볼 수 있는 담석증 환자였다.
간호사가 이름을 호명했다.
자세를 잡으며 환자를 기다리던 김지훈과 이혁원이 벌떡 일어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창도 교수가 함께 들어온 것이다.
“아시는 분입니까?”
“제 와이프예요. 복통이 좀 심해서 동네 내과에서 초음파를 했는데 담석이 의심된다고 했답니다. 전부터 자주 소화불량을 호소했는데 무심코 지나쳤네요.”
오창도 교수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심적 부담이 가시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원 포트 수술의 효과를 보고도 투 포트를 시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물며 아내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입장이 입장인지라 김지훈에게 부탁해야 하는 상황이 애매하고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명색이 일반외과 의사인데 담석으로 인한 증상을 지나쳤으니 아내 볼 낯도 없을 것이다.
의사 가족의 비애였다.
대부분의 의사가 증상이 경미하거나 일반적인 경우 스스로 진단하며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기 일쑤였다. 가족도 마찬가지인 경우가 많았다.
다행히 담석으로 인한 증상이었고, 원 포트라는 새로운 수술법이 있기 망정이지 큰 병의 전조 증상이었으면 원망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어쨌든 가족을 치료하는 일은 일종의 금기였다.
김지훈이 웃으며 환자를 보았다.
“사모님, 김지훈입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검사 몇 가지 한 후 치료하시면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인상이 무척 좋은 여인이었다.
침착한 목소리, 예의 바른 자세가 몸에 밴 듯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선생님, 사모님은 제게 맡기시고 일 보시죠.”
“부탁합니다.”
진찰을 시작했다.
특이한 점은 없었다.
초음파 검사가 이어졌다.
“사모님, 내과에서 특별한 말은 없었습니까?”
“배에 가스가 차 몇몇 부분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담석 말고는 이상 없다고 하셨어요.”
아는 사람일수록 더욱 주의해야 한다.
잘해 준다며 질병을 두고 이것저것 고려하다 보면 놓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었다. 제법 흔히 발생해 VIP 신드롬이란 말이 있을 정도였다.
김지훈이 신중하게 복부 장기를 살폈다.
간, 비장, 콩팥 등등 모두 깨끗했다.
담낭과 담도를 확인했다.
‘담낭에 국한된 담석증이 맞고, 염증이 심하지 않아 원 포트 하기 딱 좋은 경우네. 다행이다.’
이왕 시행한 초음파였다.
복부 가스 때문에 못 본 장기는 아마도 췌장일 것이다. 조건이 허락되면 반드시 확인해 이상 유무를 가리는 것이 원칙이었다.
모니터를 따라 췌장이 하얀 음영으로 나타났다.
췌장관을 따라 신중하게 검사를 진행하던 김지훈이 돌연 눈가를 찡그렸다.
이혁원도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분명 췌장 내 종물인데 이게 뭐지?’
순간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3센티미터에 육박하는 종물이 보였다.
까만 음영으로 보아 일종의 낭종(물혹)이 분명했지만 발생 부위가 췌장이었다. 당장은 양성이라 해도 결국 악성으로 발전할 것이다.
‘경계가 깨끗하지 않고, 낭종 안에 물만 차 있는 상태도 아니다. 좋지 않다.’
김지훈이 침착하게 물었다.
“혹시 등이나 허리가 심하게 아프셨던 적은 없습니까?”
“없었어요.”
“소화불량이 심하지 않았습니까? 혹시 체중이 빠지진 않으셨나요?”
“가끔 소화가 안 됐을 뿐이에요. 왜 그러시죠?”
“결과는 오창도 선생님이 오신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혁원 선생, 빨리 연락해.”
환자의 불안이 느껴졌다.
차마 별일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오창도 교수가 들어왔다.
“김지훈 선생님, 무슨 일입니까?”
“선생님, 초음파를 보셔야겠습니다.”
췌장 내에 위치한 커다란 종물을 본 오창도 교수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김지훈과 진료실 밖으로 나온 후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점액성 낭종인가요?”
“가능성이 큽니다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정확한 위치가 어디죠?”
“다행히 두경(頭頸)부가 아니긴 한데 복부 대정맥에 바짝 인접한 부분에서 보입니다. 방사선과에 정식으로 초음파 의뢰하고 CT, 혈액 검사 시행하겠습니다.”
오창도 교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악성은 아니겠죠?”
“불안한 면이 있지만 낭종이 분명합니다. 만에 하나 조직 변성이 왔다고 해도 주변 장기를 침범한 흔적은 없어 보입니다.”
악성으로 진행됐다면 최악의 경우였다.
아무리 초기라 해도 췌장암의 예후는 예단하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수술 자체가 환자에겐 무척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무시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췌장 쪽이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증상으로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자책하지 마십시오.”
의사가 아닌 보호자였다.
후우! 무거운 한숨만 터졌다.
김지훈도 마음이 좋을 리 없었지만 동료 의사의 아내가 아니라 한 명의 환자로 보아야 했다. 감정에 휩쓸리면 불리한 일만 벌어질 뿐이었다.
“사모님이 많이 힘들어하실 테지만 솔직히 설명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선생님께서 직접 설명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선생님이 설명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전 보호자로서 듣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검사 결과가 모두 나오는 날에 맞춰 진료를 잡겠습니다. 그 전에 미리 결정하실 일이 있습니다.”
“뭘 결정해야 하죠?”
“수술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에게 사모님 수술을 맡기시겠습니까?”
대가 이준영 교수가 있다.
간담도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췌장이기에 가장 적임자라 할 수 있었다. 반면 김지훈 역시 삼 년간 최신 의료를 배워 돌아왔고, 조금도 녹슬지 않은 실력을 보여 주었다.
숱한 경험에서 비롯된 관록을 겸비한 대가.
최신 의료를 습득한 젊은 의사.
수술은 경험의 영역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비교할 수 있어도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하지만 김지훈이 어떤 의사인지, 어떤 실력을 가졌는지 너무 잘 알기에 도리어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며칠 시간이 필요합니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과 사모님 모두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 같아도 이준영 선생님께 부탁드릴 겁니다.”
“그렇겠죠.”
힘 하나 없는 목소리였다.
“이준영 선생님 앞으로 진료 잡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도 수술에 참가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준영 교수와 김지훈은 최고의 수술진이었다.
유일한 위안이었다.
환자를 다시 찾았다.
솔직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허진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담석 수술도 겁이 날 지경인데 난데없이 췌장의 혹이라니 충격이란 말조차 부족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확실한가요?”
“물혹이 발생한 것은 확실합니다. 검사 결과가 나오는 대로 수술하셔야 합니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오창도 교수 역시 아내의 손을 잡은 채 입을 열지 못했다. 췌장 병변이 얼마나 치료하기 어려운지 잘 알기에 일이 손에 잡힐 상황이 아니었다.
“선생님, 오늘은 일찍 퇴근하시죠.”
남은 진료를 대신한 김지훈도 착잡하기만 해 집중하기 쉽지 않았다.
금요일, 토요일.
외과 분위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주말 집담회마저 이른 시간에 끝났다.
일요일.
김지훈이 이상하리만치 애틋하게 보이는 고경아와 희연이에게 최선을 다했다.
잠깐의 휴식이 찾아올 때마다 책과 논문을 뒤지기 시작했다.
췌장 몸통에 발생한 점액성 낭종.
결국 암으로 변하기에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질환이었다. 췌장 두경부 수술보다 위험도가 낮다고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수술이었다.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가장 안전하고, 이상적일까? 무엇이 최선일까?’
김지훈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주말마다 왜 이리 심각한 일이 터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환자이자 동료의 가족을 위한 일이기에 더욱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큰 손상을 주지 않고 안전하게 절제할 방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