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첫 시연 때 발생한 출혈로 김지훈의 집중력이 무섭도록 강하게 유지됐다. 기존과 다른 카메라 조작에 이혁원의 수술복이 흠뻑 젖었다.
참관하는 써전의 면면이 달라졌지만 열기와 긴장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갖가지 난관에 불안해했고, 40여 분 남짓의 수술 소요 시간에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혁원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렸다.
마지막 시연이 남았다.
수술도 시작하기 전에 나종진이 활활 불탔다.
수술 후 복기를 해야 하는 이혁원도 같은 운명에 처했다.
“단지 절개 창 하나 줄이는 수술법이 아니야. 집담회 때 내가 한 말과 슬라이드, 참관하며 본 모든 과정을 빠짐없이 기억해.”
마치 전공의를 대하는 것처럼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여 의아할 지경이었다.
까닭 없이 행동할 김지훈이 아니었다. 분명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강한 긴장 속에 세 번째 수술이 끝났다.
오전이 채 가기도 전이었다.
‘분명 김지훈 선생님도 경험이 거의 없다고 하셨는데 아무리 봐도 그렇게 보이질 않네. 경험의 기준이 다른가?’
송진우를 비롯해 수술을 본 모든 써전의 공통된 의문이었다. 시간만 조금 더 걸렸을 뿐 투 포트 수술을 할 때의 모습과 달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의문, 어떤 모습, 어떤 난관을 보였든 획기적인 진전임은 분명했다.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 더욱 강해졌다.
고경아의 눈에 뿌듯함이 가득했다.
“지훈 씨, 오늘 멋졌어요.”
“솔직히 실패할까 봐 조마조마했어요.”
“자신감이 넘치던데.”
“내가 그랬나? 하하하!”
기분 좋은 하루였지만 잊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스승의 가르침이 아니면 제자의 성공은 있을 수 없다. 성급하다 해도 응당 찾아 인사하는 것이 도리였다. 솔직히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다.
전공의 일 년 차처럼.
김지훈이 서둘러 이준영 교수를 찾았다.
“시간 되는 파트 펠로우 선생님들과 함께 지금 병동으로 올라오시래요.”
얼굴보자마자 들은 첫마디는 환자였다.
“수술한 환자 보자.”
다섯 명의 의사가 우르르 병실을 찾았다.
드르르륵!
드레싱 카 굴러가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수술은 김지훈이 했지만 이준영 교수는 간담췌 파트 주임 교수다. 서열 문화가 아니더라도 함께 회진을 돌면 주임 교수가 먼저 환자를 보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김지훈이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이준영 교수가 스윽 고개를 돌렸다.
‘뭐 해? 집도의가 환자를 봐야지.’
‘제가요?’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확실히 모든 면에서 다른 의사였다.
다소 어색한 헛기침을 하며 환자 앞에 선 김지훈이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환자분, 어떠세요? 많이 아프세요?”
“생각보다 훨씬 덜 아파요.”
수술받은 지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복강경 수술을 받았다고 해도 대부분 힘들어하기 마련이건만 혈색이 좋았고, 움직임도 훨씬 수월해 보였다.
“상처 치료하겠습니다.”
환자와 보호자의 눈이 쏠렸다.
달랑 배꼽을 덮은 거즈 한 장뿐이었다.
김지훈이 두 손가락으로 피부를 살짝 벌려 치료하고 손을 뗐다. 봉합한 실 끄트머리만 남기고 상처가 배꼽 속으로 사라졌다. 억지로 확인하지 않는 한 누구도 수술 자국을 볼 수 없을 것이다.
30세 여자 환자다.
수술 전 설명을 들었지만 실제 눈으로 보는 것은 감정적으로 다른 일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담낭을 떼어 내는 것보다 흉터가 더 신경 쓰였을 수도 있었다.
환하게 웃었다.
어머니로 보이는 보호자가 탄성을 내뱉었다.
“어머! 어머! 정말 안 보이네.”
“예정대로 수술이 끝나서 다행입니다.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내일 퇴원하셔도 좋습니다.”
“정말 내일 퇴원해도 되나요?”
“예. 퇴원하셔도 됩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웃음꽃이 만발했다.
다섯 의사 모두에게 음료수를 권하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흥분까지 보였다.
아무리 가벼운 질환이라도 전신 마취를 요하는 수술은 극도의 스트레스와 두려움을 준다. 조금도 다르지 않았을 환자 모녀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남은 두 환자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고 최고의 만족도를 보였다. 더할 나위 없는 신뢰가 담긴 눈빛은 의사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이준영 교수가 김지훈의 어깨를 두드렸다.
“수고했다.”
펠로우들의 눈빛이 번쩍번쩍 빛났다.
새삼 환자만이 줄 수 있는 가슴 뿌듯함을 진하게 느꼈다. 배워야 하는 이유였고, 평생 배우고자 하는 열망을 간직해야 하는 까닭이었다.
눈앞에 그런 의사가 둘이나 있었다.
동료이자 선배이자 스승이었다.
그들이 가진 순수한 욕망은 의사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덕목이었다. 김지훈이 말하는 최고의 써전, 이준영 교수가 말하는 진정한 의사가 되기 위한 길이었다.
김지훈이 훅 숨을 내쉬었다.
환자의 마음, 스승의 생각, 후배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것이 바로 머나먼 타국에서 삼 년 동안 유학 생활을 해야 했던 진정한 목적이자 의미였다.
흔히 말하는 성공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감정적 파도를 추슬렀다.
보아야 할 환자는 이들만이 아니었다.
가장 신경 써야 할 환자는 따로 있었다.
50세 남자 환자 정재복이었다.
“진우야, 환자 상태 어때?”
“역시 간경화가 문제입니다. 복수가 빠르게 차 회복이 무척 더딥니다. 드레인을 감싼 거즈가 서너 시간 만에 완전히 젖을 정도입니다.”
“감염 징후는 없어?”
“항생제를 삼중 요법으로 투여하고 있어 현재는 안정된 상태지만 언제 발생할지 몰라 걱정됩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급작스러운 간부전이 발생하면 어떤 방법으로도 생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유일한 해결책이 있었지만 당장은 실현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에 더욱 가슴이 답답했다.
환자를 찾았다.
까맣게 변한 얼굴과 앙상한 팔다리, 불쑥 솟아오른 복부가 유난히 눈에 밟혔다. 의사의 무력함보다 삶의 의지를 버리지 않는 환자, 희망을 꼭 붙들고 있는 보호자의 간절한 바람 때문일지도 몰랐다.
“환자분, 오늘은 어떠세요?”
“한결 좋습니다.”
항상 듣는 말이었다.
기뻐해야 할 일이건만 도리어 안타까울 뿐이었다.
“곧 퇴원하시게 될 겁니다. 식사 잘하시고, 마음 편히 가지세요.”
기껏 할 수 있는 말이 김지훈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말이었다. 회진 때마다 달려 나와 경과를 묻는 보호자를 볼 낯도 없었다.
오늘도 어김없었다.
“선생님, 우리 애 아빠 퇴원은 할 수 있는 거죠?”
나직한 한숨 소리만 들렸다.
어쩌면 희망 자체가 절망일 수도 있었다.
아내의 눈이 촉촉해졌다.
“어떻게 해야 하죠?”
“간 이식 말고는 대안이 없습니다만, 현재 상태로는 간 기증을 받는다고 해도 불가능합니다. 일단 회복이 먼저입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개 숙여 인사한 김지훈이 돌아섰다.
훅 아내의 울음이 터졌다.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는 활짝 웃는데 정작 훨씬 더 아프고 힘든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네.’
“진우야, 우리 병원에서 지난 삼 년 동안 뇌사자 장기 기증이 몇 건이나 있었는지 알아?”
“군복무에 치료 중일 때라 잘 모릅니다.”
“한 건뿐이더라.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사람은 많은데 기증은 턱없이 부족해. 이준영 선생님이나 신기동 선생님에게도 어쩔 수 없는 한계로 작용했을 거야. 그나마 기회를 얻는다고 해도 조건이 맞을까?”
“희박하겠죠.”
“답답하네.”
김지훈이 뻑뻑해진 목을 돌렸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무력감이었다.
한 명의 환자에게만 매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업무로 돌아가야 했다.
단 한 명의 환자를 제외하면 상당히 바쁘고 활기찬 한 주였다. 시연 모두 성공적으로 마쳤고, 아홉 명의 환자 전원이 수술 다음 날 퇴원했다.
오창도 교수는 물론 신현수, 이경석 모두 강한 집도 욕심을 보였다. 복강경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는 손일석까지 틈만 나면 기웃거렸을 정도니 불문가지의 일이었다.
모든 것이 바람직한데 원 포트 수술의 장점이 너무도 뚜렷하다는 것이 개인적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더욱이 새로운 수술법이 가져온 고민이 또 있었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손가락을 구부리다 말고 피식 웃었다.
‘열다섯 건이나 수술했는데 입원 환자가 달랑 네 명이라니, 원 포트 수술이 좋은 것만은 아니네. 누가 보면 하루 종일 노는 줄 알겠다.’
그나마 당직 때 수술한 환자가 아니었으면 퇴원 시기를 가늠하기 힘든 환자와 개복 수술을 받은 환자, 두 명만 남았을 것이다.
수북이 쌓인 차트가 부러웠다.
반의반의 반도 안 되는 두께에 민망할 지경이었다.
외래 환자는 어떨지 몰라도 다음 주 수술 예약 대부분 응급을 요하지 않는 양성 질환이기에 당분간 차트가 쌓일 일도 없을 것이다.
이런 일로 타인 시선을 의식하다니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야간 당직을 믿어야 하나?’
혀를 차던 김지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원 포트 수술 수련을 어떻게 진행해야 하지? 숙련도를 높일 교육밖에 답이 없다는 게 문제네. 오창도 선생님이 원 포트 수술 교육을 전담해 주면 좋겠는데 어떨까? 제길! 나도 동의하기 힘든 일이네.’
향후 간담췌 파트를 어떻게 꾸려야 할지 상당 부분 구상했다. 하지만 첫 단계에서 이미 수술 외적인 요소가 발목을 잡았다. 써전의 자존심이 걸린 일일 수도 있어 섣불리 토해 낼 수 없었다.
예상외로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반드시 가야 할 길이었다.
누군가 원 포트 수술 전담 써전이 돼 복강경 수술의 장점을 극대화시켜야 했다. 그것이 양성 질환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환자를 위한 최선의 길이었다.
혼자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간암을 비롯해 악성 질환을 주로 담당하고 있는 이준영 교수에겐 어울리지 않는 분야였다. 결국 오창도 교수와 김지훈 자신 중 한 명이 맡아야 할 일이었다.
오창도 교수에게 의중을 전했다.
“전담 써전을 육성시킬 사람이 필요합니다.”
“기존에 맡은 분야는 어떻게 합니까?”
“저도 그게 고민입니다. 병행할 수 있을지, 한동안 원 포트에만 전념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습니다.”
오창도 교수가 극도로 말을 아꼈다.
김지훈과는 입장이 또 달랐다.
단순히 배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숙련돼야 가르칠 수 있건만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자칫 기존 분야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었다.
입지나 위치가 흔들릴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해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갑갑한 한숨만 오고 갔다.
“시간을 두고 고민해 보죠.”
절충안도 될 수 없는 결론을 내렸다.
김지훈이 금요일 밤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후우! 후우!
‘좋은 방법이 없나?’
어떤 이도 대신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였다.
주말 집담회를 앞뒀다.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몸 하나로 모든 수술을 원하는 만큼 수술할 수는 없다. 김지훈 자신이 도입한 수술법이라 해서 반드시 그 길을 가야 한다는 법도 없었다.
능력 발휘는 적재적소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보다 중한 질환을 가진 환자 중에서도 상당수 복강경 수술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반면 제안자는 그 자체로 책임을 지어야 한다.
누구나 원하는 길이라면 모르지만 의견이 갈릴 수밖에 없는 일을 두고 달랑 의견 제시만 한다면 그보다 무책임한 행동은 없었다.
‘현수 말대로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늦을 수밖에 없다. 하루아침에 숙련도가 쌓일 수 없는 이상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 일단 제시하고, 함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먼저다. 적절한 방안이 나오지 않으면 그땐!’
마음을 정했다.
어떤 결론이 나든 흔쾌히 받아들이는 일만 남았다.
두 번째 주말 집담회는 더 큰 의미를 가질 것이다.
회의실 문을 힘차게 연 김지훈이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시연으로 인해 쏟아질 질문에 대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간담췌 파트 펠로우들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이들 중 원 포트 전문 써전이 나와야 했다.
삼 년 동안 자신의 분야에서 그들을 가르쳐야 할 오창도 교수는 물론 신현수, 이경석에게도 힐끗 눈길을 주었다.
‘일단 내 생각을 전하고 기다리자.’
이준영 교수에게 사전 동의를 받지 못한 점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기분 나빠 하거나 제안 자체를 막을 스승이 아니었다.
도리어 응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전공의 치프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주말 집담회를 시작하겠습니다.”
향후 행보가 걸린 자리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