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신현수는 철저한 계획하에 수많은 문제를 반드시 극복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였다. 김지훈이 발전했듯 동료와 친구 모두 미래를 위해 투자한 시간이었다.
“네 번째 분원 설립과 서울 병원 센터 확장을 위해 지금부터 철저히 준비해라?”
“이제야 말이 통하네. 이준영 선생님도 십분 동의하실 거야. 나도 너와 다른 병원에서 근무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것이 병원과 우리 과의 발전을 위한 길이기 때문에 가는 거야. 너도 같은 생각이길 바라.”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진지하게 말하다 말고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버지가 넌 남기고, 난 가란 말을 할 때 정말 서운하더라. 아들보다 김지훈이 더 믿음직스러우신 모양이야.”
“그럴 리가 있어? 네 번째 병원을 번듯하게 만들 적임자가 신현수라고 믿으시는 거지. 솔직히 그럴 나이도 됐고.”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능력 있다고 자랑하는 거야?”
“엄연한 사실이잖아. 오늘 나눈 말은 당분간 비밀이다. 제수씨에게도 말하면 안 돼.”
농담 속 진실이었고,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신현수였다. 무엇을 말하는지도 명백했지만 다소 혼란스러운 가운데 자리를 끝냈다.
김지훈이 홀로 남아 고민에 잠겼다.
‘일석이!’
신현수가 원하는 바는 명확했다.
첫째, 스승인 이준영 교수의 뒤를 이어 간담췌 센터 확장과 발전을 책임져라.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시기가 문제일 뿐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최고의 써전이 되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달리면 저절로 이뤄질 일이기도 했다.
둘째, 네 번째 분원 설립에 필요한 인재 선발을 적극적으로 도와달라. 특히 예민할 수밖에 없는 혈관 파트 교수 문제를 신경 써 관철시켜 달라.
‘현수, 일석이, 그리고 또 한 명. 제길! 분원이 생기는 건 정말 좋은 일인데 우리 과나 내게는 최악이네.’
골치 아프기보다 답답한 일이었다.
제법 긴 시간 교수실에 머물던 김지훈이 병동으로 올라가 월요일 수술 예정인 환자 세 명을 만났다.
“흉터가 안 남는다고요?”
“안 남는 게 아니라 억지로 찾지 않는 한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말씀드린 방식으로 무사히 끝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환자와 보호자 모두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사람 몸에 칼 한번 댄 적 없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수술에 대한 부담이 적지 않았지만 주말 내내 신현수의 말이 더 신경 쓰였다. 예정된 시연이 아니었으면 끙끙 앓았을 것이다. 아무리 중요할지라도 이런 종류의 비밀은 원치도, 환영할 일도 아니었다.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시연 날의 긴장이 은근히 다가왔다.
회진 직후 수술 방으로 내려가 고경아와 함께 수술 기구부터 점검했다. 이준영 교수가 일정까지 조정하며 퍼스트를 자청한 탓에 오직 시연에만 집중했다.
‘첫 시연만큼은 절대 실패하면 안 된다.’
주말 내내 받은 스트레스가 도리어 사라졌다.
역시 수술과 환자는 훌륭한 약이었다.
드르르륵!
각 과 환자가 속속 수술실로 옮겨졌다.
“선생님, 환자 들어왔습니다.”
운 좋게도 두 번째 시연 퍼스트를 서게 된 이혁원의 목소리가 살짝 상기돼 있었다. 고경아와 함께 준비실을 나서던 김지훈이 후다닥 잰걸음을 놀렸다.
희끗 거대한 덩치, 스승의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병원장이 아니더라도 참석했을 송재덕 교수를 비롯해 복강경 수술에 관심 있는 외과의들이 진지한 대화를 나누며 수술이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띠! 띠! 띠!
규칙적인 심박동 소리가 울렸다.
이준영 교수와 마주 선 김지훈이 호흡을 골랐다.
유학 후 첫 성과를 보이는 자리였다.
한 자릿수에 불과한 경험이었기에 국내 최초로 원 포트 수술 도입한 의사를 떠나 김지훈 자신도 끊임없이 노력해 정착시켜야 하는 막중한 의무까지 짊어졌다.
시연에 참석한 모든 이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마취과 교수의 목소리가 짧은 상념을 깼다.
“수술 시작하셔도 됩니다.”
김지훈이 이준영 교수를 보았다.
무뚝뚝한 표정 속에 신뢰가 가득했다.
성공과 실패에 연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는 격려, 대가로 불리면서도 제자에게 최신 수술을 배우고자 하는 겸허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고경아는 침착했다.
건네야 할 수술 기구를 가지런히 정렬하며 반드시 성공할 것이란 응원을 보냈다. 지난 이 주 동안 틈날 때마다 수술 과정을 논의한 이상 실수는 없을 것이다.
‘배운 대로 평소와 다름없이.’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메스!”
은색 메스가 무영등 불빛에 반짝였다.
처컥! 처컥!
공기가 주입되며 30세 젊은 여자 환자의 배가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삐이이이이!
긴장된 침묵 속에 복부 압력이 적정 수준에 도달했다는 날카로운 신호가 울렸다.
김지훈이 배꼽 직상부를 깊게 절개했다.
“15밀리미터 트로카!”
투 포트 수술에서 쓰는 트로카보다 절반 이상 굵었지만 추가 절개창은 필요하지 않았다.
원 포트 수술은 협소한 기구 조작 각도와 제한된 허용 범위, 다른 수술과 반대되는 집도의 위치 등등 모든 요소가 수술을 어렵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경험해 보지 못한 써전에겐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수술한다는 말이 과장된 표현이 아닐 정도였다. 때문에 병변 염증 소견이 무척 중요했다.
집도의의 예측을 넘어섰다면 애초 투 포트로 시행하는 것이 안전했고, 환자에게도 유리했다.
김지훈이 마른침을 삼켰다.
카메라부터 넣었다.
담낭 주변부가 크게 확대됐다.
‘이 정도면 초음파 소견과 다르지 않다.’
김지훈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수술실을 채운 참석자들의 귀가 활짝 열렸다.
“담낭 주변 염증이 심하지 않습니다. 숙련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원 포트 수술이 가능한 환자로 판단됩니다. 예정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기구 두 개를 추가로 삽입했다.
단 하나의 작은 통로를 빽빽하게 채운 기구로 모든 조작을 해야 했다. 집도의와 퍼스트의 손이 엉키기 십상이었지만 최고의 써전들이었다.
이준영 교수가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움직여 수술 시야를 확보했다. 기구끼리 충돌하면 최악의 결과를 낳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김지훈은 참관 의사들마저 어색하게 느끼는 자리에서 기구를 조작했다. 고도의 집중력을 요했지만 시연의 의미 또한 잊지 말아야 했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다.
“현재 각도에서는 간과 담낭을 기존 방식대로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적정한 압력을 유지하며 최대한 담낭을 끌어당겨 절개 면을 노출시켜야 합니다. 양성 질환임에도 염증 정도를 강조한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김지훈이 담낭을 잡아끌었다.
팽팽하게 늘어난 조직에 다들 숨을 죽였다.
“보비!”
삐이이이이!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생소한 각도에서 박리가 시작됐다.
개복 수술조차 써전의 어색함 혹은 생소함은 미숙함의 다른 말이었고, 치명적인 결과를 야기할 수 있었다. 가늘고 긴 복강경 기구가 담낭 벽을 치고 나갈 때마다 긴장이 고조됐다.
김지훈은 신중했다.
이준영 교수 역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사악! 사악!
담낭이 떨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혈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했지만 김지훈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처리했다. 어떤 실수도 없이 진행됐고, 마침내 동맥 근처에 도달했다.
수술 부위가 깊어졌다.
“모스키토! 보비!”
박리를 진행하던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완전히 손에 익지 않은 술기에 작은 동맥 분지 하나를 끊어 먹고 말았다. 투 포트였다면 절대 놓치지 않을 눈에 빤히 보이는 혈관이었는데도 말이다.
출혈 부위를 넓게 잡을 수 있는 클립으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다. 꾸물대다간 자칫 피로 물들어 담낭 동맥을 찾지 못할 수도 있었다.
“수처(봉합)!”
이준영 교수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무수하게 반복되고, 기본 중의 기본이지만 접근 각도가 적당하지 않으면 개복 중에도 어려운 것이 봉합이었다. 모든 요소가 제한된 원 포트 수술이기에 얼마나 어려울지 직감하고도 남았다.
더구나 동맥 근처였다.
허용할 수 없는 손상이 유발되면 투 포트가 아니라 개복으로 전환해야 할 수도 있었다. 안 하느니보다 못한 수술이 되는 것이다.
환자에겐 청천벽력의 결과였다.
김지훈이 신중하게 봉합을 시도했다.
확실히 어려웠다.
익숙한 방향으로 접근하려는 시도는 출혈을 악화시킬 뿐이었다. 어색함을 이기려 이리저리 기구를 조작하는 사이 주변이 뻘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끙!”
누군가 답답한 신음을 터트렸다.
김지훈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포기할 수 없었다.
짧지만 분명 시간이 남아 있었다.
‘절대 손에 익은 방식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 침착하자. 출혈 하나에 개복할 수는 없다.’
몸을 돌렸다.
손과 팔의 위치까지 모두 바꿨다.
모든 감각을 눈과 손에 집중시켰다.
마침내 원하는 부위에 바늘이 들어갔다.
타이조차 쉽지 않았지만 빠르게 해냈다.
“석션!”
주변 조직을 적신 피를 제거했다.
째깍! 째깍!
더 이상 출혈은 없었다.
“클립!”
안도의 한숨 속에 동맥을 잡았다.
한결 넓어진 시야 속에 담낭 관까지 해결했다.
드디어 담낭이 완전히 떨어져 나왔다.
남은 과정은 마무리에 불과했다.
배꼽 직상부의 절개창을 봉합했다.
마지막 실을 끊는 순간 마치 절개 면이 아예 없었던 것처럼 수술 상처가 배꼽을 따라 감쪽같이 사라졌다.
원 포트 수술의 최대 강점이었다.
“와!”
나직한 감탄사가 터졌다.
불과 40분 만에 첫 시연이 끝났다.
“수고했다.”
항상 제자에게 들었던 말을 스승이 먼저 전했다.
김지훈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준영 교수의 말이 여운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반드시 들려야 할 목소리도 어김없이 들렸다.
“잘했다. 잘했어. 환자가 너무 좋아하겠다. 깜짝 놀라겠다. 아프지만 않으면 수술 안 했다고 하겠어. 돈 안 내고 가면 어떡하지? 큰일이다. 큰일. 혁원아, 그치? 내 말이 맞지? 단단히 배워라. 단단히.”
“예, 선생님.”
“김 교수, 환자는 언제 퇴원하니? 언제?”
“절개 창 하나 차이에 경험도 적긴 하지만 회복 속도가 상당히 빨랐습니다. 문제없다면 내일 퇴원해도 됩니다.”
“투 포트보다 최소 하루가 더 빠르구나. 좋다. 좋아. 환자는 돈 덜 내서 좋고, 병원은 침대 팍팍 돌아가서 좋네. 유학 보낸 보람이 있다. 있어.”
수술실을 채운 써전들이 다채로운 눈빛을 보였다.
집도 기회가 거의 없다는 유학 중 미국 유명 병원의 기존 의사에게도 최신 수술일 원 포트 수술을 했다. 생각 이상으로 어려워 보이는 수술을 김지훈은 무난히 해냈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실력이었다.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이유일 것이다.
단순히 최신 수술법을 소개한 시연이 아니었다.
삼 년 동안 흘렸을 피땀이 얼마일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목표가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였다.
흥분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이제 첫 보따리를 풀었을 뿐이었다.
남은 여덟 건의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쳐야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인정받기보다 확실한 치료법으로 널리 알리고, 정립시킬 수 있길 바랐다.
다음 수술 퍼스트는 이혁원이었다.
대가도 어색함을 지우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노련미가 떨어지는 써전에겐 더욱 까다로운 수술이 분명했다. 수술 내내 미묘한 어려움이 가중되면 만회하지 못할 실수를 유발시킬 수 있었다.
끔찍한 일이었다.
김지훈이 슬쩍 눈짓을 했다.
열띤 자리를 가졌다.
간만에 전문의가 아닌 선후배로 마주했다.
“시야 확보를 어떤 각도로 해야 안전하겠어? 이준영 선생님이 어떤 식으로 접근했는지 기억나? 반드시 기억해야 돼. 원 포트에서 실수하면 개복 확률이 훨씬 높아진다는 것을 잊지 마.”
대가와 펠로우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화염방사기를 불렀다.
이혁원의 뺨이 발갛게 상기됐다.
퍼스트를 서는 모든 펠로우들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수요일에 자리를 부탁한 오창도 교수마저 피해 가지 못할 수 있었다. 물론 불길의 강도는 현저히 다를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두 번째 시연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