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열띤 질문과 답변을 듣던 김지훈이 웃고 말았다.
희한한 일이었다.
박승준 교수와 이경석은 너털웃음과 반복만 없을 뿐 송재덕 교수와 비슷했다. 이혁민 교수의 뒤를 이은 지동훈 교수와 신현수는 놀랍도록 논리적이었다.
능글능글 선후배와 가장 인간적으로 친한 손일석에게서 신기동 교수의 비수가 느껴지다니 정말 의외였다. 오창도 교수의 열정 속 뜨거운 열기는 신기할 지경이었다.
‘어쩜 다들 저렇게 선생님들을 따라갈까? 그래서 우리 과가 특별한 분란 없이 지내는지도 모르겠다.’
전공의 일 년 차 고경철을 시작으로 펠로우 장을 맡은 이혁원까지 후줄근해진 후에야 평화가 찾아왔다. 그 속에서 무엇을 얻을지는 온전히 각자의 몫이었다.
김지훈이 발표할 차례가 됐다.
손일석이 슬라이드를 준비하며 자료를 돌렸다.
“오늘 말씀드릴 내용은 최신 라파로 수술법입니다. 최초로 시도한 미국 의료진도 경험이 거의 없을 정도지만 라파로로 수술 가능한 양성 질환에 대단히 유용한 방법일 것이라 확신합니다. 다음 슬라이드.”
찰칵!
“바로 원 포트 수술입니다.”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단 하나의 구멍만 뚫어 카메라와 기구까지 최소 세 개 이상을 집어넣어 수술하다니 여러모로 상상하기 어려운 수술법이었다.
“구십 년대 초중반 라파로가 처음 도입된 이후 포 포트, 쓰리 포트에 이어 투 포트까지 발전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기술의 발전, 의료진의 노력만이 아니라 결정적으로 환자에게 유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원 포트의 장점은 새삼 강조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수술 준비부터 과정을 보시겠습니다. 다음 슬라이드.”
찰칵! 찰칵!
복강경 수술이 파트를 가리지 않고 시행되는 상황이었다. 한 장의 슬라이드가 넘어갈 때마다 모든 구성원의 관심이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절개 창 하나가 줄어드는 수술이 아니었다. 세 개에서 두 개로 주는 것과 두 개에서 한 개로 주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환자의 만족도는 극대화될 것이다.
반면 수술 난이도를 절대 간과할 수 없었다.
하나둘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슬라이드가 넘어갔다.
단편적인 수술 사진이 주는 제한된 정보에 쉽지 않은지 얼굴을 찡그렸다. 상당한 실력을 지닌 데다 사전에 자료까지 본 신현수와 이경석마저 갑갑한 기색을 보였다.
이를 간과할 이준영 교수가 아니었다.
“김 교수, 원 포트 수술의 단점은?”
“다들 느끼셨겠지만 숙련되지 않은 써전에겐 무척 어려운 수술법입니다. 양성 질환에만 적용되는 한계를 떠나, 미숙하다면 라파로가 주는 모든 이점이 사라질 수밖에 없어 숙련도 자체가 매우 심각한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해결 방안은 있어?”
“생각한 바는 있지만 미국에서도 이제 시작한 수술입니다. 저 역시 익숙하지 않긴 마찬가지입니다. 다음 주 시연을 한 후에야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문제를 극복하는 일은 혁신 혹은 최초로 시도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어려움이자 과제였다. 김지훈 역시 경험이 많지 않아 힘든 숙제를 앞둔 꼴이었다.
많은 일이 이런 방식으로 발전했다.
발표자나 듣는 사람이나 기죽을 일 아니었다.
실패를 두려워하면 성공도 있을 수 없었다.
김지훈이 목소리를 높였다.
“질문받겠습니다.”
신현수가 손을 들었다.
“담낭 질환을 예로 드셨는데 숙련된 써전이라면 아뻬나 탈장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위장관이나 대장 쪽 양성 질환에 적용 가능성은 없습니까?”
실제 수술하는 모습조차 보지 못했지만 원 포트 수술 역시 기존 방식처럼 다양한 확장 가능성이 있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지난밤 이미 깊게 고민한 눈치였다.
‘역시 신현수답다.’
“아뻬는 집도의 위치와 해부학적 구조상 접근이 대단히 까다로워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반면 탈장의 경우 현재 방식으로는 어렵지만 접근 경로를 바꾼다면 가능하다고 판단됩니다. 추후 말씀드리겠습니다. 위장관 쪽은 상당한 경험이 쌓여도 극히 제한적인 질환에서만 적용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본 적이 없어 많은 질문이 나올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반드시 보고 싶은 수술법이었다. 참석자 모두 다음 주 내내 진행될 시연을 무척 기대했다.
이준영 교수와 오창도 교수의 몇몇 질문을 끝으로 발표를 마쳤다. 길어진 집담회로 일이 밀린 탓에 다들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송재덕 교수가 기분 좋게 웃었다.
“허허허! 유학 보낸 보람이 있다. 보람이. 이 교수, 좋으면 좋다고 웃어도 돼. 억지로 참지 마. 얼굴 찌그러진다. 얼굴. 근데 시연 때 자기도 집도하나?”
“퍼스트 예약했습니다.”
순간 앞질러 가던 교수들과 펠로우들이 멈칫거렸다.
대가의 겸손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그래. 내가 이래서 이 교수를 좋아하면서도 존경한다니까. 간담췌 파트 모두 열심히 할 수밖에 없잖아. 함께 일하려면 힘들겠다. 힘들겠어. 내가 파트 다른 선배인 게 정말 다행이야. 정말. 혁원아, 종진아, 왜들 뛰니? 천천히 하자. 천천히. 시간 많다. 오늘 토요일이다. 토요일.”
반어법에 속으면 대가를 치른다.
휘리릭!
펠로우들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고경철이 송진우를 잽싸게 따라붙었다.
“김지훈 선생님 정말 대단하시네요.”
“넌 처남이면서 이제야 알았어?”
“처남이라고 특별히 챙겨 줄 분도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고, 집담회 분위기 살벌해서 힘들어 죽겠어요.”
송진우가 코웃음을 쳤다.
“오늘은 운 좋은 줄 알아.”
“왜요?”
“몰라도 정말 모르네. 너 김지훈 선생님 수술을 다섯 건이나 들어왔는데 발표 때문에 살았다는 생각 안 들어? 김지훈 선생님이 가세했으면 넌 이미 죽었어.”
“아! 휴게실!”
“정신 바짝 차려.”
송진우가 부르르 어깨를 떨며 걸음을 재촉했다.
고경철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시간.
김지훈과 신현수가 단둘만의 자리를 가졌다.
“무슨 일이야?”
“지훈아, 병원에 관한 소문 들었지?”
실없는 소리 할 신현수가 아니었다.
따로 자리를 가져야 할 만큼 중요한 소문이 무엇일까?
오며 가며 들은 말은 많았다.
의료 쪽 문제가 아니라면 행정적 문제일 테고, 진위를 떠나 사소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번뜩 떠오른 말이 있었다.
“혹시 네 번째 부속 병원을 말하는 거야? 얼핏 들으니까 다들 긴가민가하던데 사실이었어?”
“최근 부지 매입이 끝났고, 곧 백오십 병상 규모로 일 단계 공사가 시작될 거야. 최종적으로 오백 병상 이상의 대형 병원이 목표야.”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서울, 천안 병원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재단 전체가 총력을 기울여 추진하는 야심찬 확장안이 분명했다.
김지훈이 휘파람을 불었다.
“예산이 어마어마하겠네. 그래서 이사장님이 심각하게 돈 문제를 언급하셨구나. 어디에 세우는데?”
“경기 서부야. 근처에 대형 병원이 없고, 향후 발전 가능성도 높은 도시라 적절한 때 들어간 것 같아. 구미하고는 입지를 비교할 수도 없어.”
“잘됐네.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말해? 말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까지 은밀하게 할 얘기는 아니잖아?”
신현수가 안경을 고쳐 썼다.
냉철한 눈빛이 더욱 예리해졌다.
“신규 병원 외과 교실 구성 때문에 보자고 했어. 신규 충원도 필요하겠지만 과장을 비롯해 일부 보직은 서울 병원 기존 교수진에서 맡는 수밖에 없어.”
귀가 번쩍 뜨일 말이었다.
기존 교수진의 병원 간 이동으로 발생하는 공백을 메워야 한다면 신규 충원과 다름없었다. 교수 자리가 최소 대여섯 개 이상 늘어난다는 말이니 펠로우들에게 큰 기회가 될 것이다.
반색하던 김지훈이 돌연 눈가를 찡그렸다.
신규 충원이 문제가 아니었다.
“현수야, 같은 서울도 아니고 다른 도시라면 아예 이사를 가야 할 수도 있어. 과장과 일부 보직을 준다고 해서 자리도 안 잡힌 병원에 좋다고 갈 사람이 있을까?”
“쉽지 않겠지. 게다가 이사장님은 젊은 의사들이 주축이 되길 바라셔. 원장단 구성과 별개로 박승준 선생님 위로는 제안 자체를 하지 않을 거야.”
“그럼 지동훈 선생님, 오창도 선생님과 우리밖에 안 남잖아? 몇 명이나 가야 하는데?”
“최소 세 명.”
여섯 명의 대상 교수 중 절반이라니 헛바람이 터질 일이었다. 인원을 떠나 근무 지역 문제는 대단히 민감해 자칫 다른 병원으로 이직할 수도 있었다. 더구나 같은 대학병원이라 해도 대형 병원에서 중소 병원으로 옮겨 가는 꼴이었다.
“생각만 해도 갑갑한데 누가 갈까?”
신현수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허리를 숙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설마 나도?’
김지훈이 귀를 세웠다.
“나를 포함해 셋이니까 기존 교수 중에서 둘만 더 가면 돼. 펠로우 중에 교수로 선발되는 인원이 있겠지만 신규 충원 시 근무 조건일 테니까 고민할 일이 아닌 것 같고.”
“현수 너도 간다고?”
“내가 가야 수월하지 않겠어?”
김지훈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라움을 넘어 답답할 지경이었다.
크게 당황하는 모습을 본 신현수가 태연하게 안경을 닦았다. 무척 진지하거나 감정 동요를 보이고 싶지 않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어떤 식으로 처리해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하나 있어. 투석을 위한 신장 센터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혈관 파트를 책임질 사람이 필요해. 이 문제는 네 도움이 특히 더 필요해.”
신생 병원이라도 대학병원이기에 더욱 구색을 맞춰야 할 것이다. 일반적 관점에서 접근하면 구미 병원의 한계를 또다시 맛볼 수도 있었다.
관건은 인원이 풍부한 다른 파트와 달리 혈관은 누가 가야 할지 특정됐단 말이었다.
“일석이까지? 나도 대상자겠지만 정말 곤란한 말이네.”
“왜? 너도 부담스러워?”
“그럼 괜찮겠어? 너무 갑작스러운 말이라서 그렇지 예외로 해 달라는 말은 아니야. 다만 솔직히 말해 나도 그렇고, 경석이 형이나 일석이 누구도 좋다고 하진 않을 거야.”
“누가 가야 할지 최대한 고민한 후 열심히 설득해야지. 대신 가장 빠른 나이에 과장과 응급실장이 될 수 있는 기회기도 해. 장기적으로 보면 오백 병상이 넘는 대형 병원의 부원장, 원장이 되는 지름길인데 불리한 선택이라고 할 수도 없어.”
대단히 솔깃하고 달콤한 당근이었다.
대가, 최고의 써전을 목표로 삼는다고 해서 일평생 평교수로 근무해도 좋다는 의사는 없을 것이다.
인간인 이상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오백 병상 이상의 대형 병원으로 키운다는 전제가 성립돼야 한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초반에 근무하는 의사들에겐 상당한 제약과 부담이 가해질 것이다.
김지훈도 고민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과중한 업무는 감당할 수 있다. 하지만 차근차근 진행시켜야 할 계획들이 모두 어그러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손일석은 손아래 동서고, 고경아는 서울 병원 수술 방의 주역이었다.
생각만으로도 심난했다.
한편으로 나쁜 쪽만 바라볼 일이 아니었다.
“과장으로 누굴 생각하는데?”
“일단 난 아니야.”
“그래? 진료 말고도 할 일이 무척 많을 텐데, 너 말고 적당한 사람이 있을까? 신현수답지 않다. 에휴!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구나. 누군가는 가야 하지만 누구도 선뜻 동의하지 못할 문제잖아. 가족과 상의도 해야 하고 말이야.”
신현수가 웃었다.
“넌 고민할 필요 없어. 간담췌 센터와 라파로 부분을 이끌어야 하고, 서울 병원 이외에 대안이 없는 이상 대상자가 아니야. 대신 내가 누군가에게 부탁할 때 함께 설득해 줘.”
김지훈이 오히려 입을 열지 못했다.
기분이 묘했다.
평생 함께 갈 것이라 믿었는데, 일이 년 내에 근무 병원이 달라진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까닭 모를 미안함에 가슴이 답답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도리어 엄청 미안할 텐데 가지도 않는 사람이 무슨 설득을 해?”
“네가 가장 신뢰받는 써전이기 때문이야. 개인적 일이 아닌 공적인 일로 생각해. 사실 널 제외한 이유는 서울 병원 발전 계획 때문이니까 부담 가질 이유도 없어.”
“무슨 계획?”
“이준영 선생님이 얼마나 더 지금처럼 근무하실 수 있을까? 간담췌 센터와 라파로 부분을 이어받아 책임지고 발전시킬 의사가 필요해.”
김지훈이 손사래를 쳤다.
“무슨 소리야? 은퇴하시려면 아직 멀었어. 은퇴 후에도 이삼 년은 더 근무하시는 게 관례잖아?”
“지금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적절해. 이사장님을 비롯해 재단의 뜻이니까 따라. 아마 이준영 선생님이 가장 기뻐하실걸? 시연 때 퍼스트를 자청하신 이유를 생각해 봐. 대가의 욕심이 아니라 제자 때문이란 생각 안 들어?”
“후우! 생각 좀 하자. 센터 문제는 한참 후 일이고, 신생 병원 교수진도 일이 년이나 남은 일인데 너무 빠르게 밀어붙이는 거 아니야?”
신현수의 눈이 번쩍였다.
“김지훈, 많이 변한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 봤나?”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네 번째 브랜치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기존 서울 병원 간담췌 파트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손 놓고 새로 필요한 교수 모두 충원되기만 기다릴 거야? 네가 책임지고 운영하기 위해 능력과 실력을 갖춘 써전을 직접 선발해야 되지 않겠어? 일이 년도 짧을 수 있어. 제대로 준비한다면 재단 누구도 결코 반대하지 못할 거야.”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꾸준히 준비하고 계획했지만 먼 미래라 여겼던 일이 신현수의 입을 통해 현실화될 줄은 몰랐다.
삼 년이란 세월 누구에게도 짧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