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김지훈이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듣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송진우 선생, 조직 박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라파로만이 아니라 개복 수술도 제대로 할 수 없어. 염증이 심했으면 오늘처럼 끝날 수 있었을까?”
조곤조곤 침착한 말투 속 도마 위에 올린 분위기?
“부족한 점 잘 알고 있습니다.”
“곧 송진우 선생 이름으로 책임지고 집도해야 하는 날이 와. 그때도 쉬운 케이스만 선택할 거야?”
왠지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이기도 했다.
송진우가 입을 열지 못했다.
김지훈의 눈가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오늘 수술에 절대 만족하지 마. 믿는다.”
믿는다!
묵직한 한 방이었다.
수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왠지 모를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눈치 보며 듣고만 있던 고경철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역시 우리 매형은 리틀 이준영이었어!’
오늘 드디어 매형이 아닌 써전을 보았다.
냉철한 신현수, 넉넉함 속에 핵심을 잊지 않는 이경석, 누구보다 친근한 면을 가졌지만 양손에 비수를 들고 있는 손일석보다 더 무서운 의사가 분명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내리 수술 네 개를 했는데 모자란 모양이었다. 못다 한 일을 마친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에 누우려는 순간 또 바람이 불었다.
응급실 인턴의 한탄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요샌 약이 좋아서 궤양으로 위가 뚫린 환자는 정말 보기 힘들지 않은가요?”
“나도 처음이야.”
“근데 왜 술 때문에 천공이 발생한 복막염 환자가 제 눈에 보이죠?”
“오창도 선생님을 능가하는 일복의 화신! 소문으로 들었던 전설이 사실이었어. 넌 근무 교대하지만 난 계속 일한다. 십 분도 못 잤어. 빨리 수술 준비하자.”
다섯 번째 수술이 치열하게 진행됐다.
엎친 데 덮친다고, 위에 난 구멍이 커 단순 봉합이 아닌 위절제술을 시행했다. 수술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던 송진우마저 피로에 짓눌렸다.
이준영 교수 못지않은 화력을 가진 화염방사기에 연거푸 맞아 마침내 한 줌 재로 변했던 고경철의 운명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마무리는 세컨의 참여가 필연적이다.
“고경철, 넌 바이탈을 다루는 일반외과 전공의야. 똑바로 하자.”
학생 실습 때부터 꾸준히 연습해 온 수처와 타이라는 기본기를 두고 연거푸 세 방을 맞은 고경철이 처절하게 나가떨어졌다.
‘내가 매형을 몰라도 너무 몰랐구나.’
응급실, 수술실, 휴게실을 차례로 들락날락하는 사이 날이 환히 밝았다.
수술 팀에겐 다음 날 아닌 다음 날이 시작됐다.
펠로우 일 년 차, 전공의 일 년 차의 눈가에 까만 반달이 내려앉았다. 수술 준비와 수술 후 치료에서 벗어나 상당한 부담을 덜은 김지훈도 때깔이 좋지는 못했다.
‘아! 피곤하다. 밤새 수술하고도 팔팔 뛰어다닐 나이는 지났나 보다.’
회진을 앞둔 이혁민 교수와 신기동 교수가 웃었다.
“신 교수, 김지훈이 첫 당직부터 작정했다.”
“건수 보니까 꼴딱 샜겠어.”
“송진우하고 경철이 저노마들 많이 피곤할 텐데 방방 뛰어다니는 걸 보니 부럽네.”
“젊은 걸 어떻게 이겨? 김지훈 온 이후로 오 교수 수술도 늘었던데, 이러다 병실 모자라는 거 아냐?”
“이사장님하고 우리 원장님 입 찢어지시겠다. 간담췌 센터도 더 바빠질 테니 곧 유학에 들인 돈 회수하고도 남지 않겠나. 하하하!”
“집담회 때 라파로 발표한다고 했지? 오늘 밤은 쉴 테니 누렇게 뜨진 않겠네.”
대화가 오고 가는 사이 일차 회진을 마친 펠로우와 전공의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하석아, 가자.”
“예, 선생님.”
유방, 갑상선 파트 펠로우 오하석이 평생 고수할 것 같은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앞장섰다. 힐끗 송진우를 보며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뻬라지만 라파로를 벌써 주시다니, 김지훈 선생님이 우리 신랑을 좋아하시나?’
바삐 움직여야 할 평일 아침이었다.
본격적인 회진이 시작됐다.
“손일석, 가자.”
“선생님, 우리도 칼바람 무지하게 날리는데 혈관 센터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제가 한번 작업해 볼까요?”
신기동 교수의 눈이 찢어졌다.
이준영 교수를 비롯해 당시 간담도 센터의 전폭적 협조 속에서도 활성화되지 못한 간 이식 센터의 아픔이 되살아난 모양이었다.
“그게 환자가 많아야지 작업한다고 되는 일이야? 부교수 되려면 정신 바짝 차리고 열심히 해. 이준영 선생님 앞에서 나도 좀 웃어 보자.”
손일석이 입맛을 다셨다.
“그냥 웃으시면 되는데.”
“뭐라고?”
“아… 아닙니다. 그냥 열심히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 스승님. 내 인생 최고의 라이벌이 눈앞에 있는데 자만할 틈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나저나 내일 보따리 하나 푼단 말이지? 자식! 나까지 기대하게 만드는 걸 보니 사람 궁금하게 하는 재주는 확실하게 배웠네.’
슬쩍 눈길을 돌렸다.
“진우야, 어제 라파로 받았다며? 김 교수가 조용히 넘어가진 않았을 텐데 뭐 힘든 일 없었어? 내 말대로 혈관 파트 했으면 얼마나 좋니.”
“눈독 들이지 마라.”
어느 틈에 김지훈이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아! 깜짝이야. 언제 왔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회진이나 돌아. 송진우 선생, 우리도 가자.”
여전히 시도 때도 상관하지 않고 얼굴 벌게지는 송진우가 부리나케 앞장서 첫 번째 병실 문을 열었다. 때깔 좋지 못한 김지훈이 신기동 교수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바로 뒤따랐다.
휘리릭!
뭐가 그리 바쁜지 발이 보이지 않았다.
이동은 빠르게!
환자는 천천히 세심하게!
이준영 교수와 회진을 돌며 바짝 긴장한 이혁원, 고경철은 김지훈의 옛 모습이었다. 간간이 웃음을 터트리는 오창도 교수와 나종진은 의외로 잘 맞아 보였다.
활기찬 아침의 시작이었다.
김지훈이 어깨를 쫙 폈다.
역시 의사의 힘은 환자에게서 나오는 법이다.
입원 환자가 여섯이었다.
다음 주 예약 수술은 아홉 건이었다.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늘 수 있다.
백날 유학을 다녀와도 환자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헛짓거리를 했거나 허세에 불과할 뿐이었다. 이 추세로 쭉 나아가며 배워 온 것을 적용시키는 일만 남았다.
바쁜 하루였지만 틈은 있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주말 집담회 때 발표할 내용은 간담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술자리에서 언급한 것이 다였기에 미리 논의할 필요가 있었다.
김지훈, 신현수, 손일석, 이경석.
사인방이 짬을 내 머리를 맞댔다.
김지훈이 내민 자료를 진지하게 확인했다.
이경석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내일 집담회 때 이 내용을 발표한단 말이지?”
“이준영 선생님께서 자리를 마련해 주실 겁니다. 경석이 형, 보기에 따라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라파로로 수술 가능한 양성 질환의 접근 방식을 달리해야 할 수도 있어요.”
“구체적으로 보니까 쉽지 않다는 생각이 더 드는데 별거 아닐 수가 있나! 지훈아, 이거 시연이 필요하지 않겠어? 현수야, 네 생각은 어때?”
“나도 동의해요. 말로 듣는 것과 퍼스트라도 실제 수술에 참가하는 건 비교조차 할 수 없잖아요. 지훈아, 간담췌 파트에 미안하지만 시연 결정되면 퍼스트 부탁한다.”
“김 교수, 나도 퍼스트 부탁해.”
김지훈이 기분 좋게 웃었다.
어떤 면에서는 수술 방법의 단순한 제안이었다.
그럼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여 고마웠다.
또한 강력한 자극이었다.
교수임에도, 주로 적용되는 파트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퍼스트를 서고자 하는 열정이 살짝 희미해졌던 강렬한 라이벌 의식을 자극했다.
“경석이 형, 펠로우들이 참가할 시연은 이미 환자까지 결정됐어요. 오창도 선생님까지 부탁하셔서 빡빡하네요. 퍼스트 문제는 이준영 선생님과 상의해 볼게요.”
“결정됐다고? 언제야?”
“다음 주 내내.”
순간 모두 말을 잃었다.
근무 시작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그만큼 착실하게 계획하고 준비했다는 의미였다. 금요일이 돼서야 시연 일정을 밝힌 이유는 완벽한 준비가 이뤄지길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렵지만 확실히 변했어. 예전의 지훈이가 아니야.’
더불어 이준영 교수의 지원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정이었다. 분명 오창도 교수도 적극적으로 밀었을 것이다. 그들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운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슬며시 눈을 흘기던 손일석이 혀를 찼다.
“에이! 내가 여기 왜 있는 거야? 김 교수, 혈관에 대해 배운 거 없어? 라파로는 우리와 상관관계가 좁쌀만치도 없잖아. 나 소외시키지 말고 보다 건설적인 방향으로 나가면 안 될까?”
“내 한계가 여기까지라 건설적이 될 수가 없네. 심심하면 너 혼자 놀든지.”
“어허! 드디어 이빨을 드러내시겠다, 이거지? 이런 식으로 가장 강력한 라이벌을 죽이려 드는 건 강호의 도의가 아니다.”
“현수하고 경석이 형을 두고 네가 가장 강력하다고?”
“어허! 어디서 망발을 하시나. 부교수는 김지훈이 먼저 됐지만 과장은 내가 먼저 된다. 그 순간 니들은 다 아웃이야. 피의 숙청이 벌어지는 거지. 그러니까 지금부터 잘 보여. 같이 상의할 수 있는 분야도 신경 써 개발하고.”
신현수가 안경을 고쳐 썼다.
“시간 없어. 농담 그만하고 집중해.”
“농담 아닌데. 아니라고. 말 아직 안 끝났는데 어딜 보는 거야? 내 말 안 들려?”
그러거나 말거나 다들 자료에 눈을 박았다.
복강경을 적용할 수 없는 혈관 파트의 주력, 손일석도 어느새 눈을 빛내고 있었다. 언제 어느 수술에서 도움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아는 게 힘이지. 다들 긴장 풀지 마. 내가 파트를 바꿀 수도 있어.”
“잘됐네. 내일 슬라이드 돌리면서 우리 파트 펠로우로 지원하는 건 어떤지 곰곰이 생각해 봐.”
“펠로우? 유학 가서 없던 말발까지 배워 왔네. 에휴! 그리고 전공의 놔두고 왜 나야? 경철이가 할 일이잖아.”
“일 년 차보다 한가해 보여서.”
“그래. 니 당직 날 환자 많아서 좋겠다.”
구시렁구시렁, 구시렁구시렁 입은 쉬지 않았다.
학교 졸업하고, 전공의 수련을 마친 지 지나도 한참 지났다. 다들 나이 제법 먹었건만 넷만의 자리에서 머리 맞대면 이경석까지 예전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친구이자 동료일 것이다.
많은 대화가 오갔다.
신현수의 예리함은 변하지 않았다.
“지훈아, 수술할 환자 모두 직접 초음파를 했다고 들었는데 적절한 케이스인지 확인하려는 목적이었어?”
“이 수술법은 급성이든 만성이든 염증이 심할 경우 잘못 시도하면 오히려 개복 가능성이 높아.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하는 써전이 염증 정도를 반드시 확인해야 정확한 결정을 내릴 수 있어. 다른 목적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다른 목적?”
“라파로가 곧 간담췌는 아니잖아. 여러모로 유용할 거야.”
틀린 말이 아니었다.
다만 이 자리에서 논의할 내용이 아니었다.
시연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며 자리를 끝냈다.
신현수가 조용히 할 말이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아직 남은 게 있나?”
“내일 집담회 끝나고 시간 좀 내.”
“무슨 일인데?”
“간단히 나눌 수 있는 내용이 아니야. 네 교수실로 갈 테니까 경석이 형, 일석이에게도 말하지 마.”
“이런 은밀함은 좋지 않은데.”
“당분간 그럴 수밖에 없어. 이해해 줘.”
단둘이 상의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일이 없었지만 단연코 이런 적은 없었다. 신동철 이사장에게 들은 말도 있고, 매사 진지한 신현수였기에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내일이면 알겠지.’
발표 준비에 집중할 때였다.
너털웃음, 화염방사기, 도마, 칠지도를 보유한 교수들이 있는 한 결코 방심할 수 없었다. 시연에 참가하게 될 펠로우들의 열띤 관심도 십분 고려해야 했다.
희연이의 끈질긴 방해 속에서 시연에 참가하는 고경아와 함께 자료에 집중해야 했다. 칭얼대다 잠든 어린 딸의 천사 같은 얼굴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예뻐 죽을 지경이었다.
‘이래서 자식 키우나 보네.’
평온 속 치열한 시간이 이어졌다.
토요일 오전, 주말 집담회를 앞뒀다.
김지훈이 가벼운 숨을 내뱉었다.
두려움에 가까운 전공의들의 긴장이 느껴졌다.
전문의지만 절대 날카로운 지적을 피할 수 없는 펠로우들도 한 주 동안 시행하고, 참가한 수술을 검토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을 교육하고 훈련시켜야 할 교수진, 특히 허리를 담당하고 있는 박승준 이하 젊은 교수들은 진지한 눈빛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단 한 가지를 빼고 변한 것은 없었다.
전공의 일 년 차로 처음 참석한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십수 년이 훌쩍 넘었다. 맨 앞자리에 앉아 집중 포화를 맞다 한 단계 한 단계 보다 안전한 뒷자리로 옮겨 어느새 등 뒤에 스승들만 남았다.
이제 후배를 향한 논리와 비수, 뜨거운 불길 속 격려와 응원은 김지훈 세대의 몫이었다. 일반외과 지원자가 줄어드는 상황과 맞물려 더욱 강한 책임감이 요구됐다.
상념 속, 귀국 후 첫 주말 집담회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