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84화 (984/1,329)

10화

고민이나 망설임조차 없었다.

“네 앞으로 스케줄 잡아.”

“알겠습니다. 일단 라파로로 동의받겠습니다.”

송진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환자를 넘기신 것도 그렇고, 당연히 라파로로 수술할 케이스인데 일단이라는 건 또 뭐지? 환자가 동의했다고 해도 집도의를 바꾸는 일인데, 두 분 다 너무 쉽게 결정하시네.’

의문을 풀 시간은 없었다.

일복의 문이 서서히 열리고 있음은 확실했다.

월요일 세 건.

수요일 세 건.

어느새 여섯 건의 수술이 예약됐다.

불행히도 모두 다음 주 수술이었다.

이혁원의 요청이 단 한마디로 결정됐건만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송진우가 촉각을 곤두세웠다. 내심 현행대로 유지되기를 바라며 한 가닥 기대를 걸었다.

“선생님, 이준영 선생님께서 허락하셨습니까?”

“오창도 선생님도 동의하셨다고 하니까 곧바로 하락하시네. 내 수술 전담 대신 교수님들 수술에 모두 들어갈 수 있으니까 네겐 더 좋은 기회야. 열심히 해.”

송진우가 입맛을 다셨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김지훈 바라기로 일하는 것이 훨씬 좋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학교 수업과 일대일 과외 중 어느 쪽이 실력을 더 향상시킬지 빤한 일이 아닌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김지훈은 기필코 넘고 싶은 써전이기에 최대한 노력하는 길밖에 없었다.

대학병원에 남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하기에 복강경이든 개복이든, 심지어 초음파까지 모든 것을 다시 배운다는 마음가짐으로 일해야 했다.

때마침 중환자실 환자가 일반 병동으로 올라가 더욱 강한 긴장을 요했다. 겉으로 보이는 순조로운 회복이 언제 깨질지 모를 일이었다.

슬슬 바빠지기 시작했다.

김지훈이 다음 주 금요일로 예정된 세 건의 예약 수술을 추가로 잡았다. 도합 아홉 건이니 수술을 시작하는 첫 주치고는 상당히 준수한 결과였다.

송진우가 콧등을 찡그렸다.

‘모두 단순하고 기본적인 케이스만 잡으셨네. 예전처럼 돌아갔으면 수술을 받았을지도 모르고, 안 주신다고 해도 퍼스트만 최소 아홉 번인데 아쉽다.’

속이 쓰릴 정도였다.

이혁원과 나종진의 요청이 새삼 뼈아팠다.

머리와 가슴 어느 쪽으로 보아도 불만스러웠다.

이번 주만 해도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달린 것을 빤히 알기에 욕심이 과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후! 어후!”

차마 욕은 못하고 가슴만 두드렸다. 아쉬움 때문인지 수술 욕심이 더욱 커져 가슴까지 답답해지려는 그때 무심코 지나친 면이 보였다.

하나같이 단순 양성 질환이었다.

모두 복강경 말고 다른 방법은 생각할 이유도 없다는 사실은 차치하고, 오자마자 담낭 농양을 수술한 써전인데 꼭 쉬운 케이스만 의도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손을 풀어야 하는 상황도 아니고 뭐지?”

중얼거리던 송진우가 고개를 흔들었다.

우연일 것이다.

공연히 예민해져 하등 의미 없는 일에 신경 쓰이는 것이라 여겼다. 이준영 교수가 환자를 넘긴 일도 김지훈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곧 오후 회진을 돌 시간이었다.

단 한 명뿐인 환자의 상태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김지훈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빤했다. 까딱 이런 일 반복되면 눈 밖에 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 전에 타 죽겠지.’

서둘러 일어서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밖이 막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고경철입니다. 42세…….)

“알았어. 바로 내려갈게.”

노티(Notify)도 제대로 듣지 않은 송진우가 마치 전공의처럼 부리나케 응급실로 향했다.

이상하게 얼굴이 좋았다.

오늘은 목요일.

일과가 채 끝나기도 전에 환자가 왔다.

김지훈의 첫 당직 날이었다.

당직이라 해서 반드시 수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해당 과 환자가 다수 내원해도 단순 치료나 투약만으로 충분한 경우가 많았다. 일반외과의 경우 다소 다르다 해도 수술 여부는 복불복이라 할 수 있었다.

어디나 예외가 있지만 말이다.

송진우에게 환자 노티를 받은 김지훈이 옷걸이에 걸린 가운을 입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작 나흘째 근무 중인데 이틀이나 늦게 퇴근하게 생겼다.

아내와 딸에게 미안했다.

멀리 있을 때는 볼 방법이 아예 없어 그나마 덜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도 많이 달랐다. 놀아 주기 힘들다 해도 가족과의 오붓한 시간은 알콩달콩 행복 그 자체였다.

전설처럼 회자되는 일복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었길 간절히 바랐다. 개인적인 욕심만이 아니라 그만큼 아픈 사람도 줄었다는 의미일 테니 말이다.

후다닥!

김지훈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비장 파열이라고?”

“사고 발생 후 세 시간 만에 내원했습니다. 바이탈은 크게 흔들리지 않는 상태입니다만 급격하게 나빠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차트와 검사 결과를 확인한 김지훈이 곧바로 보호자를 만났다. 비장 절제가 불가피하다는 말과 함께 검사에 발견되지 않은 손상 가능성 및 수술 중 혹은 후에 발생할 합병증까지 모두 설명했다.

내내 진지한 눈빛 하나가 더 붙었다.

‘자식! 결국 우리 과를 택했구나. 혁원이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부담 갖지 말고 네 할 일만 잘하면 돼.’

김지훈 눈에는 아직도 학생처럼 보이는 처남이자 일반외과 전공의 일 년 차인 고경철이었다. 보다 많이 가르쳐 주기를 바라는 장인어른의 은근한 압박, 평소 등 두들기며 격려를 아끼지 않는 손일석이 떠올랐지만 공은 공이고 사는 사였다. 특별한 대접이나 과도한 관심은 오히려 해가 될 것이 빤했다.

“고경철, 빨리 수술 준비해.”

“예, 선생님.”

즉시 수술 준비가 시작됐다.

빠릿빠릿 제 할 일을 했다.

짧고 강한 어조로 오더를 내린 김지훈이 흐뭇하고 왠지 기특한 마음을 숨기며 수술 방으로 향했다. 수술과 마취에 필요한 서류 작성, 추가 설명 등은 이제 송진우와 고경철의 몫이었다.

외상 환자에겐 시간이 생명이었다.

상당 시간 지체됐다.

환자, 보호자, 의사 누구에게도 선택은 없었다.

“선생님, 꼭 살려 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수술 방으로 올라간 김지훈이 고경아를 찾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

일과가 끝나기도 전에 응급 수술을 들어가야 하는 남편을 보는 눈이 곱지만은 않았다.

어쩔 것인가!

일반외과가 그런 과인 것을.

유난한 일복을 타고난 것을.

그런 놈인지 충분히 알고 결혼한 것을.

그 모습조차 사랑하는 것을.

“경아 씨, 희연이 자기 전에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직장 동료와 아내의 입장은 많이 달랐다.

마음과 달리 고운 말 나올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요?”

“그거야 당연히……. 하! 하! 하! 당신 동생 경철이가 수술 들어오는데……. 하! 하! 하!”

처남 들먹였다가 눈총만 더 받았다.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니었다.

첫 당직 첫 수술이 시작됐다.

환자 바이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드르르륵!

간이침대 바퀴 소리가 요란했다.

수술 팀과 마취과가 빠르게 움직였다.

띠띠띠띠띠띠!

환자의 심장이 헐떡였다.

“시작하셔도 됩니다.”

“시작합니다. 메스!”

시뻘건 피가 배 속에 가득했다.

김지훈의 손이 무섭도록 빨라졌다.

비장 동맥을 정확하게 묶고 잘랐다.

어느 틈엔가 쩍쩍 갈라져 깨진 비장을 제거했다.

출혈이 멈춘 육신이 안정을 찾았다.

불과 한 시간 반 만에 배를 닫기 시작했다.

퍼스트든 세컨을 서든 그간의 노력이 담겨 있기 마련이었다. 급박하게 돌아간 수술 내내 송진우와 고경철의 손을 보는 김지훈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송진우 선생, 마무리해.”

고경철의 타이(Tie:매듭짓기) 실력까지 확인했다.

‘진우는 말할 것도 없고, 경철이도 노력 많이 했네.’

평생 이어질 인연이었다.

차근차근 두고 볼 일이었다.

무사히 깨어나는 환자를 보는 순간 불현듯 누군가 떠올랐다. 아끼는 후배였고, 일반외과 전문의가 된 이후 남들은 힘들어 가지 않는 길이었지만 스스로 간절히 원했던 길을 택한 의사였다.

“송진우 선생, 오만석 선생이 안 보이네?”

“사흘마다 이십사 시간 풀(Full) 당직인데 오늘은 쉬는 날일 겁니다. 중증 외상 환자가 떠 손이 모자라면 오프라도 달려오긴 합니다.”

“그때도 당직이 아니어서 늦었었구나.”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꼬박 하루 동안 당직 서면 무척 힘들 텐데 여전하네. 오늘은 응급실이 한가했으면 좋겠다. 경철이 손을 확실하게 보려면 아뻬 정도는 떠도 괜찮겠지.’

바람대로 응급실은 전체적으로 한가했다.

딱 한 과를 빼고 말이다.

비장 절제 환자를 병동으로 옮기기 무섭게 응급실 인턴의 노티가 이어졌다.

아뻬가 떴다.

수술이 필요한 환자를 절대 지켜보지 않는 김지훈이었기에 즉시 수술 방으로 향했다. 복강경으로 시행하기에 조건이 맞지 않았고, 전공의 교육은 절대적 의무였다.

“고경철, 퍼스트 서.”

수술은 무난하게 끝났지만 고경철에게는 휴게실 행사가 남았다. 단 십 분 사이에 잘근잘근 다져진 후 처절하게 불태워졌다.

“수처, 타이는 기본 중의 기본이야. 다음번에도 똑같으면 내 수술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마. 송진우 선생, 책임지고 확실하게 교육시켜.”

송진우의 눈가에 주름이 잔뜩 잡혔다.

고경철의 험난한 미래가 빤히 보였다.

장인어른도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리어 좋아하며 더 혼낼지도 몰랐다.

한 줌 재로 변했던 고경철이 채 정신을 수습하기도 전에 또 한 명의 환자가 왔다.

김지훈 일복 사라지지 않았다.

탈장이 떴다.

대부분 도수 정복으로 끝나지만 하필이면 복벽 사이로 삐져나온 장이 복원되지 않는 교액(Stragulation) 탈장이었다. 장 괴사가 의심돼 응급 수술을 시행했다.

장 절제가 불가피했다.

김지훈의 손은 빠르면서도 섬세했다.

송진우는 나무랄 데 없이 척척 호흡을 맞췄다.

재로 변했던 고경철이 눈을 부릅뜨고 세컨의 역할을 다했다. 물론 마무리 봉합이 끝난 후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았다. 노련함까지 갖춘 김지훈의 눈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기본기를 놓칠 리 없었다.

화르륵!

잠시 뜸할 법도 하건만 또 아뻬가 왔다.

김지훈이 고민에 잠겼다.

상당히 초기에 온 데다 젊고, 바짝 마른 남자 환자였다. 전형적인 복강경 적용 환자였고, 몇 차례 경험이 있는 송진우가 준비돼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전공의가 아닌 전문의다.’

김지훈의 눈 또한 매의 눈이었다.

어떤 실수도 사전에 잡아낼 수 있었다.

“송진우 선생, 라파로 준비해.”

“예. 준비하겠습니다.”

힘차게 대답하던 송진우가 흠칫 놀랐다.

김지훈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퍼스트를 서라는 말이 아니었다.

“제가 집도합니까?”

“자신 없어?”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목소리 높아진 송진우의 얼굴이 발개졌다.

복강경이라지만 수없이 봤고, 어떤 방식이든 수술 전 과정이 손과 머리에 박힌 아뻬였다. 또한 단순한 생각으로 수술을 줄 김지훈이 아니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수술이기에 오히려 환자를 대하는 집도의의 마음가짐과 실력을 모두 보려 할 것이다.

띠! 띠! 띠!

심장박동 소리가 안정적이었다.

“수술 시작하셔도 됩니다.”

연이은 수술에도 마취과는 우호적이었다.

송진우를 좋게 보는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해.”

“감사합니다.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송진우의 눈빛이 더없이 진지했다.

수술 부위를 정확하게 잡고 있는 모니터를 보며 길고 작은 기구를 조작했다. 동맥을 잡고, 아뻬를 자르는 과정이 비교적 안전하고 정확했다.

긴장이 감돌던 김지훈의 눈가에 여유가 묻었다.

익숙하지도, 빠르지도 않았지만 일천한 집도 경험을 생각하면 흡족하기 짝이 없었다. 역시 송진우는 탄탄한 기본기를 갖추고 있었다.

“컷!”

두 개의 작은 절개창을 봉합했다.

환자도 잘 깨어났다.

송진우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땀에 젖은 수술 모자를 본 김지훈이 미소 지으며 송진우의 어깨를 툭 쳤다. 한창 수술하고 안달 났을 고경철의 부러운 눈빛이 바짝 따라붙었다.

회복실을 떠나 병실로 이송될 때까지 함께 환자 곁을 지키던 김지훈이 짧고 강한 기침을 터트렸다.

송진우가 집도를 했다.

언젠가 노련한 의사 대신 가르쳐야 할 후배를 퍼스트로 세우고 수술해야 한다. 그때는 고스란히 모든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전문의 실력이 부족하면 문제 정도가 아니라 최악이다.’

“송진우 선생, 나 좀 보자.”

고경철이 얼떨결에 휴게실로 따라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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