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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983화 (983/1,329)

9화

고경아와 희연이 얼굴이 밤하늘 속을 휙휙 날았다.

후다닥!

당직도 아니면서 첫날부터 늦게 퇴근한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머리로는 이해하겠지만 가슴이 부글부글 끓을 것이다. 더구나 수술 방 정보는 고경아의 손아귀에 있었다.

“끝난 지 두 시간이 지났네요. 두 시간! 두 시간이네.”

왜 오늘따라 다들 말을 반복할까?

아이에게는 이해마저 불가능했다.

“아빠, 나 자야 되는데 왜 지금 와?”

늦은 저녁을 라면으로 때웠다.

끓여 준 게 어딘가!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에 허둥거리던 김지훈이 갑자기 말을 잃었다. 작은 방 책상 위에 책 몇 권이 펼쳐져 있었다. 간호학 관련 책이었다.

‘내년에 간호학과 설립한다고 했나?’

고경아 또한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건만 도움은커녕 방해를 하고 있는 꼴이었다. 가장 힘들고, 많은 시간을 요하는 육아조차 함께하지 못했다.

미안할 뿐이었다.

가정에 더욱 충실해지는 것만이 답이었다.

김지훈이 수술 방에서보다 더 많은 땀을 흘렸다.

다음 날 아침 해는 어김없이 떠올랐다.

회진 직전이었다.

송재덕 교수가 너스레를 떨었다.

“김 교수, 어제 당직이었니? 당직?”

“아니었습니다.”

“근데 밤에 수술했어? 큰일 난다. 큰일 나. 그러고 살려면 마누라하고 자식한데 정말 잘해야 된다. 정말. 그나저나 간경화 환잔데 살겠니? 살겠어? 살려야 한다. 유학까지 다녀왔는데 살려야지. 아암! 그래야지. 경석아, 현수야, 내 말이 맞지? 그치?”

이경석과 신현수가 따라 웃었다.

“예. 살려야죠. 김 교수 일복 어디 안 갔네요.”

“이제 수술 하나 했는데 일복이라고 할 수 있겠니? 아니다. 아직 시작도 안 한 거야. 김 교수, 나 원장이다. 원장. 돈 많이 벌어 줘야 창피 안 당한다. 일하자. 수술하자. 근데 그 환자 다리는 살았니?”

“출근하다 들었는데 경과가 좋답니다.”

“잘됐다. 잘됐어. 오자마자 다리는 살리고, 담낭은 떼어 버리고 잘한다. 잘해. 경석아, 가자. 우리도 열심히 일하자. 열심히. 그치? 내 말이 맞지?”

혼이 나갈 것 같은 반복과 부산한 일과는 전과 같았지만, 동기 모두 외래 혹은 수술 방으로 향하는 걸음에 여유가 있었다.

나이와 직위가 달라졌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말 몇 마디 나누는 사이 아침 회진이 끝났다.

중환자실을 나온 송진우가 방향을 잃었다.

김지훈 앞으로 예약된 외래 진료와 수술이 단 한 건도 없는 날이었다. 그렇다고 일 피해 다니며 하루 종일 빈둥거릴 김지훈이 아니었다.

“송진우 선생, 일 없어?”

“선생님이 없으시면 저도 없습니다.”

“뭐 할 건데?”

송진우의 눈가에 살짝 즐거운 주름이 잡혔다.

동시에 발간 기가 맴돌았다.

“커피 한 잔 어떠십니까?”

“커피? 하긴 이렇게 한가한 날이 앞으로 얼마나 되겠어. 좋다. 내 방으로 가자.”

조예가 깊지 못한 자들에겐 대중적인 맛이 최고다.

믹스냐, 블랙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캔 커피 두 개 사 들고 김지훈의 연구실에서 자리를 이어 갔다. 유학 다녀온 직후라 해도 다 큰 남자 둘이 신변잡기로 이틀이나 대화를 나눌 일은 없었다.

송진우가 슬쩍 의자를 당겨 앉았다.

“선생님, 앞으로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실 겁니까? 유학을 일 년 연장하신 이유가 있지 않으십니까?”

“생각한 부분이 몇 개 있는데 현실적인 면을 고려하다 보니까 의외로 머릿속이 복잡해. 이준영 선생님하고 충분히 상의해야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도 미리 알면 안 되는 일입니까? 이혁원 선생님과 나종진 선생님도 무척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김지훈이 살짝 놀랐다.

보면 볼수록 발개지는 얼굴만큼이나 수동적인 면이 강했던 예전의 송진우가 아니었다. 대단히 적극적인 자세로 생각의 공유를 요구하고 있었다.

교수가 되고자 하는 목표였다.

같은 연차지만 스스럼없이 선배들을 거론하는 것으로 보아 정당한 경쟁을 통해 이기고자 하는 라이벌 의식을 견지하고 있었다.

불현듯 당찬 오하석이 겹쳐 보였다.

김지훈이 손사래를 쳤다.

“비밀이랄 것은 없어. 설익은 생각, 섣부른 판단을 내뱉을 수는 없잖아? 유학 전후로 병원과 우리 과 상황도 많이 달라졌고 말이야.”

“우리 과 상황이 변하다니요? 전공의 부족이야 유학 가시기 전부터 있었던 일이 아닙니까?”

“지금 내 앞에 있는 의사는 전공의가 아닌데도 삼 년 동안 함께해야 돼. 핵심은 진우, 네가 전문의를 딴 펠로우라는 거야. 최종 목적이 다르잖아.”

송진우가 눈가를 굳혔다.

펠로우는 많고, 교수 자리는 적었다.

더구나 간담췌는 펠로우 인원이 많은 것도 모자라 경쟁 상대가 전공의 시절 최고라 불렸던 선배들이었다. 뼈 빠지게 일해도 교수가 될 확률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지원할 때부터 불안한 미래였다. 하지만 김지훈이 이미 자신들의 고민을 함께하고 있다면 간담췌 파트 교수 전체의 고민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좌고우면하지 않는 교수들이었다.

목표를 이룰 길은 간단했다.

‘편법을 쓰면 망한다. 교수님들 눈에 잘 보일 방법만 생각하다간 도리어 눈에서 벗어난다. 묵묵히 내가 가야 할 길을 가는 것만이 최선이다.’

문득 김지훈의 방이 눈에 들어왔다.

면허증, 자격증, 위촉장, 수료증, 인증서가 책장 한 칸을 빼곡하게 채웠다. 색 바랜 의학 교과서부터 최근 발행된 학회지까지 상당한 분량의 책은 결코 장식용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살아온 발자취이자 노력이었다.

홀짝홀짝 커피를 마시며 나누는 긴밀한 대화와 함께 선배의 길을 가고자 하는 후배에게 강력한 자극이 되고도 남았다.

오전 내내 자리를 가졌다.

어떤 방향을 추구할지 듣지 못했지만 송진우에겐 수술이나 강의 이상으로 귀중한 시간이었다. 교수실을 나설 때 김지훈이 던진 마지막 한마디가 의외로 강렬하게 남았다.

“송진우 선생, 불행히도 의사에게 지름길은 없어. 기본이 부족하면 위로 올라갈수록 티가 더 나기 마련이더라. 하긴 송진우처럼 일하면 누구도 말 못하긴 하지. 변한 모습도 좋고. 야! 말만 했는데 어째 배가 더 고프네. 밥 먹으러 가자.”

중환자실에 들른 후 식당으로 향했다.

환자 상태가 나쁘지 않아 발걸음이 가벼웠다.

어깨를 나란히 하던 송진우가 밝게 웃었다.

‘변한 모습이 좋다는 말은 고지식한 면을 털어 내고 능동적으로 행동하란 말씀이겠지? 하석이와 똑같은 생각을 하신다는 건 반드시 고쳐야 한다는 의미다.’

문득 김지훈과의 수술이 더욱 기대됐다.

욕심 많은 선배들이 있는데 뜻대로 될까?

송진우가 식판 가득 밥을 담았다.

최근에 같은 수술이라도 어떤 각오와 자세로 임하느냐에 따라 얻는 것이 천차만별이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꼈다. 그런 의미에서 김지훈이 지도 교수라는 사실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곧 무지막지하게 몰려들 환자와 줄줄이 이어질 수술은 써전으로서 갖춰야 할 소양과 실력을 크게 증진시켜 줄 것이라 믿었다.

몸은 엄청 힘들 테지만 말이다.

‘달리 생각하면 김지훈 선생님 수술과 외래만이 아니라 당직까지 모두 내가 독점하는 꼴이네.’

송진우의 웃음이 진해졌다.

행운 정도가 아니었다.

뒤처지지 않고 따라가기만 해도 평균 이상은 될 것이다. 노력 여하에 따라 스스로 삼은 목표에 한 발 더 가까워질 것이 분명했다.

은근한 흥분에 힘차게 밥 한 술 뜨려는 순간 낯익은 얼굴이 우르르 몰려왔다.

이혁원과 나종진이었다.

곧바로 달려와 김지훈 앞자리에 앉았다.

이혁원은 외래, 나종진은 수술을 들어가야 하는 날이었다. 시간 내기 쉽지 않았을 텐데 동시에 나타나다니 의아한 일이었다.

김지훈이 밥을 뜨다 말고 물었다.

“밥 먹으러 온 거야? 할 말이 있어서 온 거야?”

펠로우 두 명의 시선이 일제히 송진우에게 머물다 사라졌다. 나종진이 미안하다는 듯 어깨를 툭 치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상당히 의미심장했다.

이혁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외래, 수술, 당직 배치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준영 선생님과 오창도 선생님만 계실 때는 현 방식이 별문제가 없었습니다만, 지금은 여러 면에서 무리가 따를 것 같습니다.”

“무리라니?”

“각자 교수님을 정해 전담하게 되면 송진우 선생에게 가해지는 하중이 너무 커지지 않을까요? 편중되는 면까지 있어 펠로우 과정에도 부합되지 않습니다. 특히 기존 방식을 유지하면 삼 년 중 이 년은 아예 선생님과 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문제가 있겠네. 그래서?”

“종진이와 제 주관하에 파트 업무를 배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주 단위로 돌아가면 편중되거나 한 사람에게 과도한 일이 주어지지 않을 겁니다.”

송진우가 다급히 튀어나왔다.

“이혁원 선생님, 전 무리가 된다 해도 괜찮습니다.”

“송진우 선생, 함께 상의하지 못해서 미안한데 우리가 안 괜찮아. 전공의도 아니고 전문의인데 퇴근도 하고, 자기 시간도 가져야지. 종진아, 안 그래?”

“그럼. 당연한 일이지.”

나종진이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상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어느 교수 밑에서 일하든 몸 편할 일은 없었다.

반면 아직은 간담췌 소속 모든 교수에게 배워야 할 때였다. 특정 분야 혹은 특정 교수에게 배운다고 해서 득이 될 일도 아니었다.

어쨌든 의도한 바를 알기에 동의했지만 한 가지 걸리는 일이 있었다.

“업무 배분을 누가 주관할지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이준영 교수님께…….”

“부족하지만 제가 펠로우 장을 맡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먼저 확실하게 동의해 주셔야 합니다. 그게 순서일 것 같습니다.”

“흐음! 그래도 순서가 뒤바뀐 것 같은데, 오창도 선생님은 동의하셨어?”

“이미 알고 계십니다. 동의하셨습니다.”

작전 다 짜고 왔다.

이준영 교수와 김지훈의 관계는 공공연한 일이었다. 오창도 교수가 동의한 이상 김지훈만 허락한다면 거의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김지훈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펠로우 세 명의 눈이 번쩍였다.

각기 다른 의미가 담겨 있었다.

설령 반대한다고 해도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더구나 이 대 일이다.

‘진우야, 이건 양보의 문제가 아니다. 펠로우 다수의 뜻이니까 따라야 해.’

“좋아. 이준영 선생님께 내가 말씀드릴게. 그럼 이번 주는 누가 나하고 당직 서는 거야?”

흔쾌히 승낙했다.

입 꾹 다문 송진우 얼굴이 활활 불타올랐다.

“이번 주까지는 송진우 선생이 서는 것이 맞죠. 송진우 선생, 우리 의견에 동의하지?”

마치 선심 쓰는 것처럼 이혁원이 송진우의 어깨를 툭 쳤다. 모두 만족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송진우는 고민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죽을 때까지 전공의 때 서열을 무시 못하는 과가 바로 일반외과였다. 같은 위치라 해도 수련 내내 하늘같았던 선배들의 결정이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펠로우로 대학병원 생활을 끝낼 생각이 없는 간담췌 파트 분위기상 기회의 독식은 불가능했다. 졸지에 행운을 나눠야 했지만 이런 동료들이 없다면 행운 자체가 무의미할 것이다.

치열한 경쟁을 각오하고 시작한 펠로우였다.

“예. 동의합니다.”

이로써 뜻이 모아졌다.

쇠뿔은 단숨에 뽑아야 후회가 없는 법이다.

김지훈이 곧바로 이준영 교수를 찾았다.

“오창도 선생과 네가 동의했으면 됐다.”

딱 한마디로 누군가의 불타는 눈물에도 불구하고 상황 종결됐다. 전공의 내내 고생했건만 펠로우 돼서도 일 많아지는 것이 뭐 그리 좋은지 모를 일이었다.

‘군의관 때 놀아도 너무 논 거야. 틀림없어.’

병역 면제자의 확신이었다.

김지훈이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근무 시작 불과 이틀도 안 돼 후배들에게 강력한 압박을 받았다. 기대에 부응하려면 반드시 바빠져야 했다. 다행히 수술 없는 첫 주기에 매일 외래를 열어 놓았다.

마침 수요일에는 예약 환자가 있었다.

나름 분주히 움직였다.

어김없이 시행하는 초음파에서 뭔가 확신을 가진 송진우가 눈을 빛냈다.

기본으로 검사한다면 분명 의미가 있다는 말이었다. 김지훈의 시간을 독점하지 못하는 이상 더욱 강한 집중력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나마 없는 진료마저 끝났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이준영 교수였다.

벌떡 일어나 전화를 받은 김지훈이 부리나케 이준영 교수의 진료실로 향했다.

“부르셨습니까?”

“환자 두 명 있다.”

“알겠습니다.”

당연하다는 듯 환자 진료를 시작한 김지훈이 자세한 문진과 진찰은 물론 초음파까지 모두 시행했다. 단순 담낭 질환이기에 특별한 문제가 없었지만 김지훈과 이준영 교수가 제법 긴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생각지도 못한 결정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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