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눈앞의 의사가 전공의와 입장이 확연히 다른 펠로우이자 전문의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일반외과 상황이 급변하고 있었다.
전공의 부족은 유학 전부터 발생한 일이었고, 조금씩 악화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보다 점점 일반화되고 있는 복강경 수술이 상당한 변화를 촉발시켰다.
환자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면 도태되거나 외면받기 십상이었다. 대학병원에 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업이나 취직을 위해서도 복강경 수술을 적정 수준 이상으로 익혀야 했다.
개업은 가능해도 아뻬, 탈장, 양성 담낭 질환 등을 복강경으로 수술하지 못하면 써전으로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 이유로 펠로우 과정이 필수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혁원부터 시작해 송진우까지 단순히 시대의 변화를 따르는 것일까?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그럴 후배들이 아니었다.
각자 확고한 목적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갈수록 좁아지는 문이었다.
동기인 사인방처럼 원하는 사람 모두 대학병원에 남아 교수가 되는 일은 극히 드문 경우였다. 아예 불가능한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당장 자격이 넘치고도 남을 이혁원과 나종진마저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송진우 또한 결코 놓칠 수 없는 인재임이 분명했다.
강한 어조로 후배 양성을 당부한 스승 역시 같은 걱정을 한 것이 분명했다.
김지훈은 더더욱 다를 수 없었다.
일신의 영달과 개인적 성취만을 위해 유학을 다녀온 것이 아니었다. 최고의 써전은 결코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목표라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
‘다들 더 큰 꿈을 갖고 있을 텐데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룰 수 있을까? 형이 최선을 다하마. 우리 모두 열심히 하면 너희만이 아니라 많은 후배들에게도 길이 열릴 거야.’
길은 멀리 있지 않았다.
가슴속에 품은 꿈을 현실로 이루면 충분한 자격을 갖춘 동료, 후배들과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발 한 발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남았다.
섣불리 토해 낼 생각이 아니었다.
송진우와 센터 운영과 전반적인 수술 상황에 관한 대화를 나누며 차근차근 생각과 현실의 간격을 파악했다.
한동안 귀를 기울이던 김지훈이 갑자기 탁탁 손뼉을 치며 일어섰다.
송충이는 솔잎을, 외과 의사는 수술을 먹고 산다.
첫 환자 진료까지 시간도 제법 많이 남았다.
“송진우 선생, 수술 방 올라가자.”
송진우의 눈이 반짝였다.
천생 써전이었다.
김지훈도 눈을 반짝였다.
오창도 교수 진료실 앞이 환자로 북적였다.
나종진은 뭐가 그리 바쁜지 꾸벅 인사를 하고는 부리나케 검사실로 향했다.
은근히 가슴 떨리는 광경이었다.
특별한 인연은 차치하고, 둘 다 부센터장이자 서로에게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다.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 있는 강한 자극이었다.
‘오창도 선생님, 파이팅입니다. 진충기 선생님도 제자리에 안주하지 않았겠지?’
김지훈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수술 방에 도착했다.
스케줄 표를 확인한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이준영 교수의 메이저 수술과 영원한 라이벌 신현수의 복강경 수술에 눈길이 꽂혔다.
누가 보아도 갈 곳은 정해졌다.
의아하게도 이혁원과 함께 수술 중인 이준영 교수 수술실을 지나쳤다. 간암 수술인 데다 처남이자 전공의 일 년 차인 고경철이 세컨이었고, 고경아가 전담 간호사로 참여하고 있는데 말이다.
발이 멈춘 곳은 신현수가 복강경을 이용한 탈장 수술을 시행 중인 방이었다. 잠시 참관하다 나갈 줄 알았건만 끝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내심 이준영 교수의 간암 수술에 신경이 가 있던 송진우가 눈만 껌벅거렸다.
‘탈장 수술에 뭔가 다른 면이 있나? 설마 신현수 선생님 실력을 확인하시는 건 아니겠지?’
그런 눈치만은 아니었다.
마치 복강경 수술을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모니터를 보며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상당한 경험을 가진 탈장 수술을 두고 말이다.
무사히 수술이 끝났다.
대략 한 시간 정도 걸렸다.
신현수가 이제야 고개를 돌렸다.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참관했다.
누구나 그렇듯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 유학을 다녀온 동기기에 솔직한 평가와 참관 이유를 듣고 싶은 마음이었다.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김 교수, 무슨 일 있어?”
“환자가 없어서. 수술 잘 봤다.”
사실상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김지훈이 달랑 몇 마디 하고 수술실을 나갔다. 알쏭달쏭한 반응에 신현수가 헛기침만 터트렸다.
‘이준영 선생님 수술을 놔두고 내 수술을 참관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야. 술자리에서 탈장 얘기는 없었는데 특별한 거라도 배워 왔나?’
송진우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심심하다고 무작정 참관하실 선생님이 아닌데 뭘까? 그나저나 참관 내내 눈이 번쩍번쩍하시던데, 내 수술을 보면 뭐라고 하실까? 어후! 생각만으로도 춥다.’
후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잰걸음을 놀린 김지훈이 다음 수술실로 들어갔다.
역시 참새는 참새였다.
방앗간을 지나칠 리 없었다.
시간이 허락할 때까지 이준영 교수의 간암 수술을 참관했다. 활짝 열린 배 사이로 신중하게 움직이는 손을 보며 진짜 원하는 것을 눈앞에 둔 듯 초롱초롱 눈을 반짝였다.
퍼스트인 이혁원과 수간호사 바로 아래 직급인 책임 간호사로서 간담췌 수술 팀의 일원인 고경아는 물론,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고경철과 신참 간호사에게도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마치 수술 팀 전체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처럼 보였다. 써전 두 명이 중간에 들어와 나갈 생각을 안 하건만 이준영 교수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보비! 수처! 컷!”
나직한 소리 속에 간이 절제됐다.
‘언제 봐도 스승님의 수술은 예술이야. 간암 수술의 대가의 손을 보는 것이 복이라면 굉장히 큰 복이겠지?’
김지훈이 힐끗 시계를 보았다.
어느새 진료 예약 시간이 다가왔다.
반응 없는 스승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는 후다닥 외래로 향하던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송진우 선생, 역시 기본 중의 기본인 개복 수술을 잘해야 라파로도 잘할 수 있겠지? 라파로 역시 충실한 기본기가 필요하고 말이야.”
“열심히 하겠습니다.”
“다른 파트 수술도 눈여겨봐야 할 거야.”
원론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무엇보다 이준영 교수 이상으로 기본을 강조했던 김지훈이었다. 지난 시절 아무리 관계가 좋았어도 허투루 들었다간 치도곤을 당하고도 남았다.
펠로우 일 년 차인 데다 자신의 지도 교수기에 수술을 줄 사람은 오직 김지훈뿐이었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국물도 없을 것이다.
각오를 다진 듯 송진우의 얼굴이 뻘게졌다.
“믿는다.”
으스스한 미소를 던진 김지훈의 입꼬리가 쫙 말렸다.
더할 수 없는 즐거움을 앞뒀다.
드디어 귀국 후 첫 환자를 볼 시간이 왔다.
42세 남자 환자.
담낭 용종으로 개인 병원을 경유해 내원한 환자였다.
거의 모든 사람이 몸속에 혹이 있다면 아무리 작아도 겁을 집어먹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담낭 용종은 그리 흔하게 볼 수 있는 질환이 아니었다. 반면 양성이 확실하다면 의사에겐 고민조차 필요치 않은 질환이었다.
침착하게 검사 결과를 확인한 김지훈이 첫 진료를 시작했다. 송진우가 한마디 말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김지훈과 환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환자 목소리가 떨렸다.
“담낭만 떼어 내면 괜찮은 겁니까?”
꽤 겁먹은 얼굴이었다.
신중하게 초음파, CT, 간 기능 검사 결과지 등을 확인한 김지훈이 편안한 미소를 머금었다.
“제거 후 조직검사 결과를 봐야 안심할 수 있습니다만, 가져오신 검사지로 보면 양성으로 보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혹시 아침 식사 하셨습니까?”
“걱정돼서 물도 제대로 못 먹었습니다.”
“마침 잘됐네요. 일단 초음파만 재시행해 몇몇 부분을 확인한 후 수술 일정을 잡겠습니다.”
“초음파를 또 해야 합니까?”
“검사 특성상 가져오신 사진만으로는 세세한 문제를 알 수 없습니다. 별문제 없겠지만 집도의 입장에서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송진우 선생, 초음파 준비해.”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당연히 방사선과에 의뢰할 것이라 여겼던 송진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김지훈이 태연하게 진료실 밖을 가리켰다.
“센터 내 초음파실로 안내해.”
이준영 교수의 지시로 방사선과에서 쓰던 초음파 기기를 얻어 구비했지만 이러저런 이유로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수술만으로도 바쁜 외과 의사가 초음파 검사까지 할 여력이 거의 없는 탓이 컸다.
송진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차피 방사선과에서 또 해야 할 텐데 이중 검사 아닌가? 그보다 초음파가 간단히 배울 수 있는 검사 방법이 아닌데 언제 배우셨지? 설마 미국에서?’
의문 속에 환자가 초음파실 침대에 누웠다.
검사가 시작됐다.
김지훈의 손이 능숙하게 움직였다.
간, 담낭, 담도는 물론 췌장, 콩팥, 비장까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들으라는 듯 자신의 소견을 중얼거리며 검사를 끝냈다.
유명무실했던 장비가 간만에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담낭 용종 이외에 특별한 소견은 없습니다. 크기가 5밀리미터 정도라 담낭만 제거하면 되겠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 어떠십니까? 토요일 일찍 입원하셔야 하지만 가장 빠른 날입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일정 잡겠습니다. 입원 당일 방사선과에서 초음파를 다시 하게 될 겁니다. 최종 확인이라 보시면 되고, 오늘 초음파 비용은 안 내셔도 됩니다.”
무료 검사라!
누가 했든 검사를 한 이상 청구할 수 있지만 이중 검사는 과잉 진료였다. 한 푼이 아까운 병원 입장에선 아쉽겠지만 당연한 결정이었다.
늦은 시간 탓에 곧바로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 환자 두 명의 진료가 이어졌다.
증상이 가벼워 응급을 요하지 않았지만 담석에 의한 담낭염 소견을 보여 두 환자 모두 수술을 요했다. 이번 역시 김지훈이 직접 초음파를 시행했다.
비용은 청구하지 않았다.
방사선과 초음파 역시 예약했다.
송진우로서는 여러모로 의아한 일이었다.
“선생님, 언제 초음파를 배우셨습니까?”
“미국에서.”
“방사선과가 있는데 굳이 직접 초음파를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따로 배워야 할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있는 장비 놀리면 뭐 해?”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입니까?”
김지훈이 웃었다.
“의과 의사는 수술만 잘하면 된다는 소리 많이 들었을 거야. 당연히 가장 중요한 요소지. 하지만 실력이라는 말이 단지 손기술만을 말할까? 수술에 도움이 되고, 환자에게 불리하지 않다면 어떤 방식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야.”
“앞으로 쭉 시행하실 생각입니까?”
“따라가기 어렵겠지만 방사선과 선생과 비슷한 실력을 가지면 더 좋겠지. 시간이 허락되는 한 시행하다 보면 유용한 날이 올 거야.”
송진우가 콧등을 찡그렸다.
방사선과 전문의가 공연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초음파는 판독만 하면 되는 CT, MRI와 달리 경험이 무척 중요했다. 외과 의사의 업무를 다하면서 들여야 할 시간과 노력 대비 그만한 효과를 얻기 어려운 분야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를 빤히 알 김지훈의 선택이라면 분명 다른 이유가 있어야 했다. 다른 과 영역을 침범할 정도로 아주 구체적인 목적 말이다.
오늘처럼 한가한 날은 앞으로 일주일뿐이었다.
기회 될 때 김지훈의 생각을 알아야 했다.
잘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보다 많이 배우고자 함이었다. 그런 과정 속에 인정받는다면 원하는 바에 한 발 더 가까워질 것이다.
더욱이 전공의 때와 비교조차 힘들 정도로 더욱 치열해진 경쟁을 이겨 내야 했다. 상대가 누구나 인정하고도 남는 이혁원과 나종진이니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삼 년 후 누군가는 남고, 누군가는 떠나야 한다. 하석이 말대로 정당하게 경쟁하는 이상 절대 양보할 일이 아니다. 김지훈 선생님이 하려는 일을 알고 미리 준비하면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다.’
노력해 온 사람의 시간은 생각의 깊이나 범위를 놀라울 정도로 바꾼다. 지키고, 존중해야 할 가족이 생기면 성격 또한 일정 부분 바뀌기 마련이었다.
여전히 경쟁이란 말 자체가 익숙하지 않을 송진우의 혈색이 이번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이젠 능동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야 할 때였다.
김지훈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위해 작심하고 입을 열려는 순간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따르르르릉!
전화는 언제든 올 수 있다.
“예. 김지훈입니다.”
(지훈아, 나 석진이야. 근무 시작했다며?)
김지훈과 동기인 윤석진은 내과 소화기 파트 조교수였다. 간담췌 부분을 맡고 있어 앞으로 각별한 협력이 요구되는 사이였다.
“석진이? 먼저 연락했어야 하는데 미안하다.”
(뭐가 미안해. 시간 되면 환자 한 명 봐줘.)
“환자? 무슨 환잔데?”
(시간 되는구나. 일단 병동으로 와. 부탁한다.)
이 시간에 컨설트도 아니고 직접 연락했다면?
김지훈과 송진우가 동시에 시계를 보았다.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