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유학 시 얻은 성과와 앞으로 추구하고 싶은 바를 차근차근 자세하게 설명했다.
제자는 주로 말했고, 스승은 주로 들었다.
“도와줄 일은?”
“한꺼번에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스승님 도움이 어마어마하게 필요합니다. 무조건 도와주십시오.”
“무조건?”
“스승님 위상에 걸맞은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이준영 교수의 입가가 살짝 말렸다.
비할 바 아니지만 능글능글 손일석화 되어 가는 모습이 밉지 않았다. 여유와 융통성은 제자의 앞날을 위해서 꼭 필요한 부분이었다.
‘건강하게 다녀와서 고맙다.’
“이사장님께 인사드렸어?”
“예. 드렸습니다.”
“특별한 말씀은?”
“일반적인 대화였는데 말미에 현수와 단둘이 할 말이 있을 거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상하게 신경 쓰이네요. 혹시 짐작되는 일이 있으십니까?”
“만나 보면 알겠지.”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한 번 입 닫으면 끝인 스승이었다. 그보다 존스 홉킨스 병원의 스카우트 제의가 궁금할 법도 하건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곁에 있을 것이라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의 선택을 전적으로 지지하기 때문이 분명했다.
어느새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났다.
짧은 질문, 긴 답으로 이어진 시간이었지만 스승과 제자의 대화가 이렇게 길었던 적이 없었다. 그래도 아쉽기만 한 김지훈에게 이준영 교수가 선물 하나를 툭 던졌다.
“가능한 일부터 시작하자.”
“바로 말입니까?”
“그렇게 하자며?”
김지훈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녁 어떠십니까?”
“경아에게 연락했어? 희연이는?”
“아! 지금 바로…….”
“이런 시간 흔치 않고, 나도 집에 연락하기엔 늦었다. 됐다. 가자.”
이준영 교수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로 퇴근했다.
한창 일해야 할 시기의 외과 의사에게는 가족과 오붓한 시간조차 때론 사치일 수 있었다.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라는 의미로 받아들인 김지훈이 재빨리 집으로 향했다.
스승의 조용한 응원 속에 하루가 저물었다.
인사해야 할 사람은 다 만났다.
친구는 또 다른 의미의 존재였다.
금요일 밤, 사인방이 모였다.
삼 년을 못 봤는데 술이 빠지면 섭섭하다.
간만에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였다.
그동안 손일석과 많이 어울렸는지 양주를 즐기는 신현수가 소주에 완벽히 적응했다.
원 샷! 원 샷! 원 샷!
“지훈아, 우리 중 가장 먼저 부교수가 됐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 거야. 초빙 얘기도 들었어. 이사장님과 나, 우리 외과 교실 모두 실망시키면 안 된다.”
술기운이 제법 섞였다.
“지훈이가 그럴 사람이냐? 하여튼 대단한 놈이야. 유학 가서도 일에 파묻혀 살았을 게 빤하고, 앞으로 뭐 할지나 들어 보자.”
“경석이 형, 장인어른께도 입을 다문 놈이에요. 비밀일 게 따로 있지. 어후! 궁금하지만 스스로 발설할 때까지 참아 준다. 하오문 문주 체면이 말이 아니네. 하나 무릇 대장부라면 그 정도 인내는 가져야 하는 법!”
사인방 모두 예전 그 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시간은 필연적 변화를 유발하지만 변하지 않는 부분도 많은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머리를 긁적였다.
“비밀이랄 것은 없어. 아직 우리 과나 병원 상황도 파악 못했고, 대단한 것도 아닌데 섣불리 말했다가 실없는 사람 될까 봐 그래.”
손일석의 눈이 쭉 찢어졌다.
“이준영 선생님께도?”
“음! 음!”
“알고 계신데 아침 티타임에 한마디도 안 하셨단 말이지? 그 스승에 그 제자 맞네. 간담췌 아닌 놈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지훈아, 이건 배신이다. 배신.”
“배신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오늘 말하려고 했어.”
김지훈이 나름의 계획을 꺼냈다.
신현수의 원 샷 소리에 초반부터 너무 달렸다.
게슴츠레한 눈, 점점 불콰해지는 얼굴에 진지한 목소리가 매몰됐다. 술 취한 중생들이 그러하듯 어느새 학창 시절, 전공의 시절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펠로우로 들어온 후배 이야기도 빠질 수 없는 안주였다.
“눈여겨보았던 자식들이 모두 간담췌를 선택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현수나 경석이 형 모두 펠로우가 있는데 홀홀단신인 난 뭐냐? 굳은 일까지 내가 다 한다. 완전히 새 됐어.”
“혈혈단신이겠지.”
“술 먹다 말고 맞춤법 지적이라니 아직 덜 취했구나? 내 잔 받고 위장관이나 잘하셔.”
즐거운 시간은 순식간에 간다.
어느새 간판 불이 하나둘 꺼지기 시작했다.
술집을 나섰다.
세월이 많이 흐르긴 흘렀다.
학창 시절부터 즐겨 찾았던 골뱅이 가게 문이 닫힌 지 오래였다. 문득 자식 같다며 챙겨 주던 주인아주머니가 그리웠다.
‘잘 계시겠지?’
신현수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지훈아, 이사장님께 말씀 들었지? 다음 주에 시간 한번 내자. 할 말이 있어.”
“뭔데?”
“술 취해 할 말이 아니야. 조심해 가.”
신현수의 눈빛이 의외로 또렷했다.
‘이 자식 술이 이렇게 셌었나?’
술기운을 넘어설 정도로 중요한 일인 모양이었다.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지만 지금 말이 오고 가 봐야 핵심을 놓칠 것이 분명했다.
재촉한다고 입을 열 신현수가 아니었고, 너무 늦었다. 더구나 김지훈 역시 혀가 꼬부라졌고, 발은 갈지자로 꼬였다.
술 취한 남편 좋아할 아내 없다.
필사의 의지와 초인적 자세 조절로 밤 고양이처럼 집으로 스며들었다.
“나 오늘 피곤하니까 코 골지 말고 조용히 소파에서 주무세요. 술 냄새 풍기면 알죠?”
걸렸다.
“네, 마님.”
침착하면서도 나직한 목소리가 더 무서웠다.
주말을 맞았다.
김지훈이 이준영 교수와 함께 허경발 선생님을 찾았다.
정정한 모습에 이유 모를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따스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일평생 일반외과에 몸 바쳐 온 대가의 말을 경청했다.
관통하는 말은 하나였다.
“김지훈 선생, 초심을 잃지 마세요.”
“항상 건강하십시오.”
스승님, 큰 스승님과 함께한 자리를 끝으로 바쁜 첫 주를 마무리했다. 생각 이상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 제법 피로가 쌓였지만 그 이상으로 뿌듯했다.
서로 아껴 주고, 아껴야 할 이들이 많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시간이었다.
아니다.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아버지다.
희연이가 차린 조그만 밥상 앞에 앉아 투명한 공깃밥을 먹은 후 때 아닌 공룡이 돼야 했다. 우워워워! 지치지 않는 희연이 앞에서 티라노사우루스 노릇 정말 하기 힘들었다.
남편이다.
일주일간 직장 생활과 육아를 병행한 마님의 어깨 정도는 주물러야 마땅했다. 엄마이기에 지난 일 년, 홀로 가정을 꾸리면서도 딸을 품에서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미안할 따름이었다.
일요일 밤, 상당히 피곤해졌다.
밤새 푹 잔 덕분에 시차 적응 완료했다.
***
드디어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삼 년 만에 맞는 출근이다.
김지훈의 가슴이 흥분으로 벌렁거렸다.
오늘부터 부부 모두 출근해야 한다.
아침 댓바람부터 부산했다.
칭얼대는 희연이 깨워 씻기고, 밥 먹이고, 옷 입히며 출근 준비까지 해야 하는 고경아는 아예 전쟁 중이었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머리 빗기는 일조차 서툴렀다. 게다가 출근 시간이 빨라 일찍 집을 나서야 했다.
“아침은 병원에서 해결할게요. 희연아, 아빠 간다.”
고사리 손을 흔들며 빠이빠이를 하는 희연이가 너무 예뻤다. 하루 종일 떨어져 있어야 하지만 매일 저녁마다, 매일 아침마다 볼 수 있기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저녁은 아닐 수도 있구나. 어쩌면 아침도?’
맞벌이의 고충 십분 느꼈고, 미안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지만 내심 즐겁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었다. 역시 사람은 일을 해야 힘이 나는 모양이었다.
출근을 서두른 덕에 일찍 병원에 도착했다.
개인 교수실부터 찾았다.
가운을 걸치던 김지훈의 시선이 책장으로 향했다.
의사 면허증.
전문의 자격증.
대한 의사 협회 정회원.
대한 외과 학회 학술이사.
대한 간담췌 학회 학술이사.
존스 홉킨스 병원 연수 인증서(Certification).
의학박사 김지훈.
대학병원 부교수.
간담췌 센터 부센터장.
살아온 날의 발자취이자 이력이었다.
그 끝에는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일반외과의 대가, 최고의 써전이 있을 것이다. 허울 속 명예가 아닌 진정한 의사로 살아간다면 말이다.
김지훈이 불끈 주먹을 쥐었다.
‘파이팅!’
힘찬 일과를 시작했다.
센터 직원들과 밝은 인사를 나눴다.
회진, 수술 준비로 부산한 동료들과 오늘도 변함없이 무뚝뚝한 스승을 보는 일까지 모두 즐거웠다. 그들이 있기에 김지훈의 오늘이 있을 것이다.
딸깍!
초침 소리가 유난했다.
오전 9시다.
김지훈이 진료실 의자에 앉았다.
곧바로 펠로우 일 년 차 송진우가 들어와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어엿한 전문의이지만 펠로우라는 또 다른 배움의 과정을 시작했다.
앞으로 일 년간 환자와 관련된 모든 업무를 함께할 것이라 들었다. 이 년 차부터 시작되는 독자적 수술과 외래 진료를 위한 일종의 수련 과정이었다.
김지훈이 물끄러미 송진우를 보며 물었다.
“송진우 선생, 군대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복무 중 사고가 나 무릎을 크게 다쳐 의가사제대 했습니다. 덕분에 환자 마음이 어떤지 알게 됐고, 펠로우도 이 년 빨리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래? 고생 많이 했겠다. 지금은 괜찮아?”
“무리한 운동만 피하면 됩니다. 일상생활에는 아무 지장 없습니다.”
한동안 무릎 얘기로 시간을 보냈다.
득인지 손해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정상 생활이 가능하다면 당장은 득일 것이다.
제법 시간이 지나도 진료실 문은 열릴 줄 몰랐다.
김지훈이 어색한 헛기침을 터트렸다.
뭔가 해야 하는데 눈만 멀뚱거려야 했다.
지난 삼 년의 공백이 상당히 컸다.
진료 대기 환자가 한 명도 없었다.
환자 예약 시간을 보니 열한 시 반에 딱 한 명 진료하고, 오후에도 달랑 두 명이었다. 일 없다고 넋 놓았다간 귀중한 시간만 죽이는 꼴이었다.
더구나 송진우가 옆에 있었다.
사실 환자 없다는 사실이 크게 문제 될 시기가 아니긴 했다. 부담을 느껴야 한다면 응당 김지훈 몫인데, 그놈의 얼굴은 예외 없이 발갛게 상기돼 있었다.
‘결혼까지 한 놈이 여전하네. 당차기론 하석이 따라갈 사람이 없는데 왜 저걸 못 고쳐 줄까? 이혁민 선생님이 너무 심하게 밀어붙여 얼굴 볼 시간도 없나?’
문득 유방, 갑상선 파트 펠로우인 오하석의 근황도 궁금했다. 교수로 키워 파트를 맡기려 한다는 소문이 김지훈 귀에 들어올 정도니 꽤나 힘들 것이 빤했다. 수술이 끝날 때마다 잘근잘근 도마 위에서 다져지는 중일 것이다.
덩달아 오만석까지.
‘중증 외상 환자 치료를 부르짖더니 아예 응급 의학과 펠로우로 갔단 말이지. 송동화 선생님은 잘 지내시나?’
어쨌든 후배 개인사이자 가정사다.
약점이라 여길 수 있는 일을 끄집어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더구나 일과 중 한가함은 좀처럼 맛보기 힘든 일이었다.
센터 상황을 더욱 자세히 알 기회였다.
송진우가 전문의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했다.
“송진우 선생, 앞으로 일 년 동안 내 환자 담당한다고? 잘 부탁한다.”
“이전 수련 체계가 변하지 않는 한 거의 확정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준영 선생님과 오창도 선생님께서 각각 이혁원 선생님, 나종진 선생님 지도 교수를 맡으셨습니다. 외래 환자와 수술이 많아 바쁘실 겁니다.”
다 아는 사실을 굳이 언급한 이유가 있었다.
자신에게 많은 기회를 달라는 일종의 압박이 분명했다.
김지훈이 짐짓 모른 체했다.
“펠로우 일 년 차하고 전공의 업무가 겹치는 부분이 많은데 전공의들은 주로 무슨 일을 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전공의 인원이 워낙 적어 펠로우가 사 년 차 역할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우리 과 인기가 하늘을 찔러도 부족할 판에 바닥을 뚫고 있네. 힘들지 않겠어?”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고. 전문의가 된 이후 집도는 얼마나 해 봤어? 무릎 치료하느라 거의 못했겠다.”
“일 년 빠른 것이 아니라 뒤처졌단 생각으로 최대한 준비하고 있습니다. 손의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나름의 노력도 많이 기울였습니다.”
발개진 얼굴과 달리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충만한 열의는 말할 것도 없었다.
송진우와 같은 후배를 본다는 것은 기쁨이자 강렬한 자극이었다. 덩달아 열정이 솟구쳐야 할 김지훈이 다소 무거운 눈빛으로 송진우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