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연이은 스카우트 제의는 몸값이나 다름없다.
혹시 근무 조건이 성에 차지 않는 것일까?
“전폭적 지원이요? 경제적인 문제를 말하는 겁니까?”
“개인적 대우가 아니라 외과에 대한 투자를 원합니다. 지금도 많은 환자들이 절실하게 요구하지만 미흡한 분야들이 꽤 있습니다. 다만 단단한 기반을 만드는 일이 반드시 선행돼야 하기 때문에 제반 조건을 충족시킨 후에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외과에 대한 투자라니, 대우를 더 해 달라는 말이 오히려 편할 것 같군요. 어떤 부분인지 모르지만 김 교수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일반외과 수가가 매우 낮다는 사실은 알고 있죠?”
“알고 있습니다.”
“수익이 보장돼야 투자할 수 있는 현실을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겁니다. 직원들의 협조 없이 개개인의 힘으로만 돌아가는 직장은 없습니다. 본원과 김 교수가 책임져야 하는 사람은 환자 말고도 무수하게 많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재원 문제 역시 중요한 사안이라는 사실 잘 알고 있습니다. 의료진만이 아니라 이사장님을 비롯해 병원 운영진까지 수긍할 수 있는 안을 만들겠습니다.”
“미국에서 의학만 배운 것이 아닌 모양이군요. 많이 변한 것 같으면서도 내가 알던 김지훈 선생 또한 고스란히 보입니다. 제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꿈을 펼치는 일은 일종의 도전이라고 봐요. 하기에 모든 면에서 현실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 무척 많을 겁니다.”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믿어도 됩니까?”
“함께하고 싶은 동료가 모두 이곳에 있습니다. 제 생각이 바뀔 이유가 없습니다.”
확고하고도 단호한 목소리로 자신의 의사를 피력했다.
신동철 이사장의 미소가 진해졌다.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사유가 있지 않는 한 자신의 의사를 쉽게 번복할 김지훈이 아니었다. 단, 부당한 일이 벌어진다면 가장 앞에 서 싸울 것이다.
‘갈수록 마음에 드네.’
“하하하! 대화가 잠시 샛길로 빠졌군요. 좋습니다. 삼 년 만에 봤는데 너무 심각한 대화를 나눴어요. 즐거운 얘기도 합시다. 부교수 임명 축하드리고, 개인 교수실이 곧바로 제공될 겁니다. 우리가 제시한 월급과 성과급 규정은 마음에 드십니까?”
“분에 넘치는 대우에 감사드립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입니다. 장사꾼이 아니라지만 장사를 해야 하는 게 내 입장이고요.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군요. 그리고 일간 현수와 자리를 가졌으면 합니다.”
“이미 자리 약속을 했습니다.”
“단둘이 해야 할 말이 있을 겁니다. 그건 그렇고, 유학 생활이 어땠는지 들어 봅시다. 즐거웠습니까?”
신동철 이사장 말마따나 처음부터 너무 심각한 대화를 나누었다. 한동안 미국 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얘기하며 편안한 자리를 즐겼다.
“얘기 잘 들었습니다. 하루빨리 새로운 기점이 될 정교수로 임명되길 바랍니다. 그럼 만나야 할 분들이 많을 텐데 일 보세요.”
이사장실을 나온 김지훈이 넥타이를 풀었다.
상당 시간 부담 없는 대화를 나눴고, 막판 정교수라는 말에 살짝 흥분도 했다. 반면 머릿속에만 있는 계획을 섣불리 내뱉었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었다.
‘상황 파악하면서 차근차근 준비해 나갈 일인데 너무 성급했어. 이게 다 제임스 때문이야. 깨끗하게 끝난 일을 두고 왜 또 전화를 해?’
김지훈이 애꿎은 제임스를 탓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현듯 대화 도중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단순하게 넘어갈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신현수와 단둘이 나눠야 할 말이 무엇일까?
궁금증이 무럭무럭 피어올랐지만 어차피 만나야 알 수 있는 일이고, 당장은 인사가 급했다.
병원 식구들을 찾았다.
교수들이 있을 수술실과 외래로 가는 동선을 따랐다.
병동, 중환자실을 차례로 들러 돌아왔음을 알렸다. 몇몇을 제외한 많은 이들이 낯설었지만 곧 서로를 충분히 알게 될 것이다.
리틀 이준영!
일복의 화신!
뒤통수에 따라붙은 속삭임과 왠지 흔들리는 것 같은 눈동자만으로도 확신하고 남았다. 삼 년이면 서당 개가 풍월을 읊는 세월이니 두고 볼 일이긴 했다.
근무 시작도 전에 응급실에서 한바탕 뿌듯하고 보람찬 난리를 쳤지만 말이다.
수술 방에 들렀다.
고경아와 눈인사를 나눈 후 수간호사를 만나 충분한 협조를 부탁했다. 모든 의료진이 미래의 계획에 중요한 존재지만 수술의 핵심 인력인 간호사 역할이 특히 중요했다.
“오시자마자 깜짝 놀랄 만한 수술을 시도하시네요. 환자 만족도가 정말 높아지겠어요. 고경아 선생과 열심히 준비할 테니 믿으세요.”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수술실에 들어가 볼까 살짝 고민됐지만 수술 팀 전체가 집중해도 모자란 곳이니만큼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다음 행선지로 향하려는 순간 불쑥 늦은 오후에나 수술이 있을 손일석이 보였다. 수술복이 땀에 젖은 것으로 보아 꽤 힘든 수술을 한 모양이었다.
“일석아, 수술 있었어?”
“혈관 대부분 언제나 오후 수술이지만 날 필요로 하는 환자가 있는데 어떻게 지켜보겠어? 우리 김 교수님이 어렵게, 아주 어렵게 살려 놓은 혈관 내가 간단히 마무리했다.”
자신감이 넘쳤다.
“김대성 선생님과?”
“물론 집도의는 김대성 선생님이지만 혈관은 이제 내 거야. 바야흐로 손일석의 시대지. 일복 충만한 김지훈이 오자마자 힘을 발휘했으니 내가 할 일도 더 많아지겠지? 그 전에 배운 거 빨리 풀어. 우리 좋게 가자. 힘쓰기 싫다.”
그놈의 넉살은 여전했지만 핵심은 따로 있었다.
지난 삼 년 김지훈만이 달린 것이 아니었다.
모두들 목표를 이루고자 부단히 노력했을 테고,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매김하고 있을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손일석은 친구나 손아래 동서이기 이전에 평생의 경쟁자였다. 자만하거나 나태해지면 매섭게 비판해 줄 스승이기도 했다.
‘이럴 때가 아니네. 빨리 인사하고,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을 더 해야겠어.’
김지훈이 휘리릭 사라졌다.
“친구! 어이! 친구, 어디 가? 같이 가.”
손일석도 덩달아 달렸다.
가족 다음으로 중요한 사람들이 남았다.
일반외과 선후배를 찾았다.
송재덕 교수, 이혁민 교수, 신기동 교수, 과장을 맡고 있는 박승준 교수, 지동훈 교수, 오창도 교수, 영원한 경쟁자이자 친구인 신현수, 이경석, 어김없이 얼굴 내민 손일석까지 모두들 격하게 환영했다.
“지훈이가 벌써 부교수구나. 부교수. 미국에서 뭐 배웠니? 뭐. 간만 배웠니? 그렇구나. 간만 배웠구나. 삼 년 동안 대장은 쳐다보지도 않았구나. 나쁜 놈! 준영이한테 주는 게 아니었어. 아니었어. 근데 존스 홉킨스가 우리 병원보다 더 마음에 드니? 아니지? 그래야 한다. 아암! 그래야지.”
뭔가 서늘했다.
하긴 신동철 이사장이 혼자 끙끙 앓고 있을 리 없었다. 분명 모두들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을 것이다. 금테 안경 너머로 번쩍이는 신현수의 눈빛도 예사롭지 않았다.
“전 선생님들이 계시는 여기가 훨씬 좋습니다. 하하하!”
“내가 아니라 준영이겠지. 준영이. 경석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큰일. 난 닭 대신 꿩을 잡았으니 됐다. 됐어.”
졸지에 닭 됐다.
이혁민 교수는 인사 내내 웃기만 했다.
“인사하러 왔다가 응급실 환자 보는 사람은 니밖에 없을 거다. 수술은 잘됐다고 하나?”
“일석이가 혈관 접합을 함께했으니까 가장 큰 문제는 해결된 것 같습니다. 나머지 부분은 아직 수술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새 보고 왔나? 일석이도, 니도 잘했다.”
정신없이 인사를 나눴다.
분명 일일이 찾아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한동안 송재덕 교수의 말만 귓가를 맴돌았다. 당분간 다른 듯하면서도 같은 소리를 수없이 들어야 할 것이다.
‘못 들으면 도리어 서운하겠지?’
누구 한 명 반갑지 않은 사람이 없었지만 간담췌 센터 식구들의 면면이 특히 궁금했다. 단독 건물은 아니지만 두 개 층을 쓰는 만큼 규모 또한 결코 적지 않았다.
센터장-이준영 교수.
부센터장-오창도 교수.
파트 펠로우-이혁원과 나종진, 송진우까지 모두 세 명이 올해 일 년 차 펠로우를 시작했다. 하나같이 뛰어나 후배들인 데다 전공의 시절 팽팽한 라이벌 관계였단 사실에 왠지 모를 웃음이 나왔다.
‘삼 년 차는 교수 자리가 없어 나갈 수밖에 없었고, 이 년 차는 병원 사정으로 아예 뽑질 않아 일 년 차만 셋이란 말이지? 그건 그렇다 쳐도 어떻게 이 자식들이 다 우리 파트를 택했을까? 진우는 또 뭐야? 군대 있어야 할 놈이 어떻게 들어왔지?’
의아한 가운데 가벼운 흥분이 다가왔다.
기존 전문의만 다섯 명이었다.
김지훈 자신을 더해 여섯이 됐다.
외래를 담당하는 간호사, 각종 검사를 맡은 방사선실과 검사실 직원까지 합하면 가히 작은 병원 하나를 방불케 하는 규모였다.
지난 시간 쏟은 이준영 교수의 노력과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역시 스승님이시네. 오창도 선생님과 함께 부센터장을 맡아야 한다니 더 노력해야겠어.’
동시에 강한 아쉬움이 다가왔다.
신기동 교수까지 참여했던 간 이식이 여의치 않아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상태였다. 장기 기증 부족과 더불어 고질적인 행정 문제가 단단히 발목 잡은 탓이었다.
‘간담췌 센터에서 이식이 빠지면 반쪽에 불과해진다. 반드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의료진 대비 환자 수가 상당히 많아 다들 바쁘게 움직였다. 방해만 될 상황이라 슬쩍 얼굴만 보인 후 재빨리 자리를 떴다.
“어? 선생님! 언제 오셨어요? 어디 가십니까?”
“지금은 바빠. 다음에 보자.”
반가움이 앞서 목소리를 높였던 이혁원이 김지훈을 쫓다 말고 피식 웃었다.
‘아버지 뵈러 가시는구나.’
김지훈이 옷매무새를 단정히 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이 남았다.
가족만큼 소중한 인연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격한 마음이 앞섰다.
교수실 문을 여는 손이 떨릴 정도였지만 거대한 체구, 묵직한 눈빛, 비교 불가의 카리스마를 뿜어 대는 스승은 결코 변할 사람이 아니었다.
살가운 말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돌아오는 월요일부터 진료 시작하고, 수술은 그다음 주부터 시작해. 월, 수, 금으로 잡았다.”
고경아와 희연이를 볼 때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으며 목소리까지 사근사근하게 변하지만 제자에겐 영원한 호랑이일 뿐이었다.
화염방사기를 장착한 호랑이 말이다.
“별일 없으셨습니까?”
“별일 없다.”
제자에게마저 무뚝뚝한 표정과 목소리는 평생 보아야 할 스승의 영원한 트레이드마크였다. 하지만 김지훈도 나이 먹었고, 적응한 지 오래였다.
“유학 잘 다녀왔고, 빠짐없이 인사드렸습니다.”
“다들 신경 썼는데 그래야지.”
“센터 규모가 정말 커졌습니다.”
“함께 노력한 덕이야.”
물꼬 트기 만만치 않았다.
다행히 스승과 나눠야 할 말이 많았다.
“큰 스승님께는 아직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왜?”
“스승님과 함께 뵈려고요.”
“언제?”
“주말 어떠십니까?”
고개만 끄덕였다.
삼 년 만에 봤는데 딱 대답만 하고 곧바로 침묵이라니 아쉽지 않으면 사람이 아닐 것이다. 볼멘소리가 절로 터지려는 순간 묵직한 목소리가 뇌리를 강타했다.
“김지훈, 부교수다. 후배를 경쟁자로 여기는 선배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자신을 뛰어넘는 후배를 키우는 것이 바로 선배가 할 일이다.”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제자를 인정하며 자신을 넘어서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가진 능력과 지식을 모두 전해 더 뛰어난 의사를 키우라는 당부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고생했다.”
김지훈이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야 듣고 싶은 말을 들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선물로 사 온 와이셔츠 두 벌과 캔 커피 하나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짧지 않은 시간 눈길을 준 이준영 교수가 커피 한 모금을 달게 마셨다.
“커피 마음에 드십니까?”
“예전 맛하고 똑같다.”
캔 커피일 뿐이었다.
당연히 같은 맛일 테지만 의미가 남달랐다.
스승과 제자가 오래전 음성으로 돌아갔다.
전공의 일 년 차였던 제자가 놀라운 속도로 성장해 벌써 부교수가 됐다. 단지 직위만 오른 것이 아니라 향후 일반외과 발전을 주도할 의사로 성장했다.
삶의 의미조차 잃었던 스승은 스스로 극복해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간담췌 파트는 모든 병원이 부러워할 정도로 큰 진전을 이뤘다.
숨 가쁠 정도로 최선을 다해 달려온 세월이었기에 많은 변화를 끌어낼 원동력이 될 수밖에 없었다.
1세대를 대표하는 허경발 큰 스승님.
2세대를 대표하며 현 일반외과를 주도하고 있는 스승.
그들의 뒤를 이어 3세대를 이끌어야 할 외과 의사의 선두에 김지훈이 섰다.
같은 마음, 같은 목표를 갖고 함께할 것이다.
커피 때문일까?
이준영 교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앞으로 계획은?”
기다렸다는 듯 김지훈의 말문이 활짝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