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무척 익숙했다.
“김지훈 선생?”
“김대성 선생님!”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 말을 잇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수술을 했는지 머리는 떡진 채였다.
이제야 시간을 낸 모양이었다.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지훈을 볼 시간과 장소가 아니었다.
살짝 놀란 눈을 뒤로하고 빠르게 환자 상태를 설명했다. 다른 처치가 필요한지 물으려는 순간 덧 가운을 걸친 의사 한 명이 부리나케 들어왔다.
덩치가 산만 했다.
“오만석?”
“김지훈 선생님? 선생님이 여기 왜…….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환자부터 보겠습니다.”
전공의 시절 그토록 원했던 목표를 이루지 못했지만 응급실 담당 전문의가 분명했다. 때문에 이 상황이 더욱 당황스러울 것이다.
상당히 당혹스러운 눈으로 꾸벅 인사를 하고는 곧바로 환자 상태와 손상 정도를 확인했다. 동맥을 잡았다고 해도 반쯤 잘린 다리는 그대로였다. 대퇴 동맥을 잡은 켈리도 간신히 고정시킨 상태였다.
인사를 나눌 상황이 아니었다.
함께 환자를 살핀 김대성 교수가 김지훈을 보았다.
“대퇴 동맥 절단은 손상 직후 곧바로 와도 치명적인데 김지훈 선생 덕에 환자 살았다. 고맙다.”
말과 달리 김대성 교수의 얼굴이 좋지 못했다.
정형외과의 목적은 생명만이 아니다.
오만석도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선생님, 접합은 안 됩니까?”
“다행히 골절이 없어 어떻게든 이어만 주면 다리는 살릴 수 있어. 정맥과 신경 접합은 다소 늦어도 되지만 동맥 일부분이 소실된 것이 문제야. 혈관 대체술을 시행하기도 전에 하지 조직이 모두 죽겠지.”
종아리와 발 피부가 창백했다.
온기라고는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혈류가 끊어진 지 상당 시간 지나 이미 미세 괴사가 진행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김지훈이 눈을 번쩍였다.
수술 방으로 옮겨지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환자에게 주어진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바이탈이 안정된 이상 의사는 추가 시간을 얻었다.
“김대성 선생님, 지금이라도 혈류를 회복시키면 살릴 수 있습니까?”
“백 퍼센트 장담할 수는 없지만 지금 연결할 수 있다면 가능성은 충분해. 동맥이 소실돼 혈관을 이을 수 없는 상황인데 무슨 방법이라도 있어?”
“동맥을 묶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네요. 총상 환자 치료 중 본 것이 있습니다. 간호사, 수술 세트 준비해요. 오만석 선생, 도와줘.”
수술복으로 갈아입을 여유가 없었다.
김지훈이 소독된 덧 가운을 입고 환자 앞에 앉았다.
흔들린 바이탈을 잡느라 소독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동맥을 만져야 한다. 균이라도 침투하면 패혈증을 피할 수 없었다.
손상 부위를 철저히 소독했다.
“오만석 선생, 켈리로 잡은 부분에서 1센티미터 정도 더 노출시켜야 돼. 신중하게 접근하자. 김대성 선생님, 바이탈 부탁드립니다. 리트랙터!”
모든 의료진의 눈길이 쏠렸다.
손실된 부분은 몇 센티미터에 불과했겠지만 조직이 수축되며 동맥을 끌고 들어갔다. 혈관 대체술이 아니면 동맥과 동맥을 이어 줄 간격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신중하게 손을 뻗었다.
종아리로 이어지는 동맥부터 찾았다.
동맥이 끊어졌으니 피가 나올 리 없었다.
때문에 너덜너덜해져 정확히 구분하기 힘든 구조물 사이에 숨은 동맥을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더구나 일반외과 영역에서 흔히 접하는 부위도 아니었다.
무조건 시간을 아껴야 했다.
김대성 교수의 도움을 받았다.
“맞아. 지금 보이는 게 동맥 맞아.”
따르륵!
잘린 대퇴 동맥 말단을 확보했다.
끊어진 동맥과 동맥 간격을 잰 김지훈이 멸균 상태의 수액 줄을 넉넉히 잘랐다.
“수액 줄로 동맥을 대신할 겁니다. 동맥보다 가늘어 혈류가 충분하지 않겠지만 다시 이어 줄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오만석 선생, 지혈대로 압박한 부위 근처에서 동맥과 수액 줄을 묶어야 돼. 시야가 좋지 않은 데다 놓치면 강한 혈류 때문에 다시 잡기 힘들어.”
“굵기 차이가 많이 나고, 수액 줄 표면이 미끄러워 타이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오만석은 김지훈이 신뢰하고도 남는 전공의였고, 이젠 어엿한 전문의였다.
결코 실수는 없을 것이다.
김지훈이 켈리로 잡은 대퇴 동맥 상부를 조심스럽게 박리했다. 켈리까지 시야를 가려 가뜩이나 나쁜 시야가 더욱 좁아졌다.
심장박동을 따라 혈관이 꿈틀거렸다.
혈압이 안정됐다는 의미였지만 박리 중 손상을 주거나 수액 줄과 단단히 연결하지 못하면 심각한 출혈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 한 번의 위기가 닥친다면 결코 환자를 구할 수 없을 것이다.
극도의 긴장 속에 대퇴 동맥을 1센티미터 정도 노출시켰다. 근육 출혈을 막기 위해 유지시킨 지혈대의 강한 압력으로 더 이상 박리는 허락되지 않았다.
“혈관 겸자!”
최대한 동맥을 확보한 김지훈이 혈관용 포셉으로 잘린 동맥 끄트머리를 잡았다.
“오만석 선생, 내 신호에 따라 정확하게 겸자를 풀고 닫아야 해. 빨라도, 늦어도 안 돼.”
수액 줄을 들어 조심스럽게 노출된 동맥 속으로 밀어 넣었다. 겸자로 막힌 부분이 느껴지는 순간 김지훈이 포셉을 꽉 잡으며 소리쳤다.
“풀어!”
따각!
시뻘건 피가 펌핑하듯 사방으로 쭉쭉 쏟아졌다. 얼굴에 튀는 피조차 아랑곳하지 않은 김지훈이 빠르게 수액 줄을 밀어 넣었다.
“잡아!”
따르륵!
“타이(Tie:매듭짓기)!”
오만석이 좁은 시야 속에 수액 줄이 삽입된 동맥을 이중 삼중으로 단단히 묶었다. 헐거우면 피가 새고, 지나치게 힘을 줘 수액 줄까지 조여지면 혈류가 부족해진다.
김지훈이 혈관 겸자를 풀고 닫기를 반복하며 적절한지 확인했다.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피를 빼고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쓸데없는 걱정을 했네.’
종아리 쪽 동맥에 수액 줄 반대 부분을 끼웠다.
공기를 뺀 후 단단히 매듭지었다.
이제 확인만 남았다.
겸자를 풀었다.
투명한 수액 줄을 따라 빨간 피가 흘렀다.
안정된 혈압이 강한 혈류를 일으켰다.
정맥을 따라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창백했던 하지 피부에 서서히 색이 돌아왔다.
확실하게 동맥을 연결했고, 늦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굵은 정맥을 동맥과 동일하게 처리하고, 최대한 소독을 시행했다. 많은 혈관이 잘리고 끊어졌지만 주 동맥을 살린 이상 우측 다리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환자가 격렬한 고통을 호소했다.
통증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좋은 징조였다.
목숨을 건져도 불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의 힘찬 몸부림이었다.
이제 응급실에서 가능한 모든 치료는 끝났다.
김지훈이 긴장으로 뻑뻑해진 목을 돌렸다.
오만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방법이 있었네요. 왜 생각도 못했을까?”
“나도 번뜩 생각났던 방법이야.”
“선생님이요? 미국에서 보셨다고…….”
“응? 그랬나? 신경 쓰지 마. 그냥 그렇다는 말이지, 뭐. 김대성 선생님, 환자 잘 부탁드립니다.”
간단하지만 생각하기 힘들었던 의외의 방법에 놀랐던 김대성 교수가 활짝 웃었다.
‘인턴 때부터 내내 놀라게 하더니 여전하네.’
“김지훈 선생, 잘 왔어. 고맙다. 내가 책임지고 이 환자 다리 살린다.”
잠시 후 환자가 수술 방으로 올라갔다.
부디 온전한 몸으로 퇴원하기를 바랐다.
김지훈이 이제야 덧 가운을 벗었다.
반갑기도 하고, 처치 과정 전반도 궁금해 곁을 지키던 오만석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피로 물든 덧 가운 속은 더 벌겋게 젖어 있었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휴우! 환자 생각하는 마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으시네.’
“선생님, 인사하러 오신 것 같은데 옷부터 갈아입으시죠. 집에 다시 갔다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화들짝 놀랐다.
으악! 큰일 났다.
하얀 와이셔츠가 온통 벌겋게 물들었다.
바지는 축축했고, 피 묻은 구두는 광택을 잃었다.
핏자국은 세탁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온전한 옷은 벗어 놓은 양복 상의뿐이었다.
결정적으로 이사장과의 약속 시간마저 지났다.
“전화번호가……. 전화번호가……. 어후! 안 되겠다. 만석아, 미안한데 이사장님실에 전화해서 삼십 분 정도 늦는다고 말 좀 해 줘.”
“이사장님실이요?”
“비서분한테 죄송하다고 꼭 전해 줘.”
오만석과 대화를 나눌 틈이 없었다.
“선생님, 세수는 하고 가시죠.”
“세수? 어휴! 얼굴에도 묻었어? 세면대가 어디 있지?”
그나마 멀쩡한 양복 상의로 핏자국을 최대한 가린 김지훈이 정신없이 집으로 달렸다.
‘차 갖고 올걸.’
우다다다다다!
***
김지훈이 이사장실 앞에 섰다.
겉만 번지르르할 뿐 속은 땀투성이였다.
‘삼 년 만에 뵙는데 여러모로 곤란하네.’
똑! 똑! 똑!
“김지훈입니다.”
“들어와요.”
신동철 이사장이 의자를 가리켰다.
피는 못 속인다.
약속 시간 어겼다는 사실에 화가 났는지 얼굴에 웃음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죄송할 일은 애초에 하지 말아야죠.”
“불가피한 일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구구절절 변명을 하다 보면 자칫 애초 환자를 봤어야 할 오만석과 김대성 교수에게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었다. 게다가 전화 한 통 없이 약속 시간을 어겼으니 사유가 어찌 됐든 실례는 실례였다.
이유를 들으려는 듯 잠시 시간을 주던 신동철 이사장이 돌연 크게 웃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들었습니다. 응급실 환자 한 명 살렸다고요. 오히려 내가 고마운데 뭘 그리 고민합니까? 설마 내가 응급실 선생들을 탓하겠어요? 머리는 감고 왔어도 됐는데 불편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필이면 정형외과 전공의만 있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해 옷만 갈아입고 왔습니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알던 김지훈 선생 그대로군. 그래도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은 반드시 짚어야지.’
“시차 적응이 만만치 않을 텐데 피곤하지 않습니까?”
“솔직히 조금 멍합니다만 괜찮습니다. 이사장님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주부터 근무를 시작한다고요?”
“예. 최대한 빨리 적응하겠습니다.”
환영 인사는 짧았다.
대화가 무르익기도 전에 신동철 이사장의 부드러웠던 눈이 다시 냉철하게 변했다. 신현수가 공적인 일에 집중할 때 보이는 눈빛과 똑같았다.
‘인사로 끝날 분위기가 아니네. 경아 씨 말대로 역시 그 문제를 꺼내시겠지?’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본원 근무를 확실하게 결정한 겁니까? 몇 년 근무한 후 떠날 가능성은 없습니까? 유학 지원을 빌미로 김지훈 선생을 묶어 두고 싶지 않습니다.”
유학 전 수차례 받았던 스카우트 제의를 정중히 고사한 김지훈이었다. 그 이유를 모를 리 없건만 이직 여부를 묻고 있었다.
“개인적 목적으로 간 유학이 아니었습니다.”
매서워 보이는 눈빛이 풀어지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죠. 며칠 전 Dr. james에게 존스 홉킨스 병원 정식 스태프로 초빙하고 싶다는 연락이 또 왔어요. 조건도 훌륭하더군요. 우리 병원과 계약상 문제가 없다면 김 교수를 설득해 달라는 도움을 청할 정도니 당연히 보다 깊은 말을 나눴겠지요. 이성적으로 판단한 겁니까?”
김지훈이 가볍게 숨을 가다듬었다.
유학 내내 엄청나게 노력했다.
힘든 생활만은 아니었다.
새로운 시각과 앞선 지식에 열정에 불타올랐다.
결국 인종, 출신, 국적에 따른 차별을 모두 이겨 내고 실력을 인정받았다. 유학 연장이 결정되자 위협을 느낀 기존 의사들이 노골적으로 견제할 정도였다.
다행히 외과 책임자인 Dr. james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아낌없이 공유했고, 유학 말미에 이르자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파격적인 대우를 제시했다.
짜릿한 순간이었다.
개인적으로 무척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스승, 동료와 함께 꿈을 이루고 싶은 열망이 앞섰다. 또한 거취 문제는 유학을 보내 준 병원, 의료진과 맺은 신뢰와 직결된 사안이었다.
확실하게 결론짓는 것이 마땅했다.
“저도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며칠 고민하긴 했지만 애초에 유학을 떠난 목적을 잊지 않았습니다. 제가 있어야 할 곳은 미국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입니다. 제 의사는 변함없습니다.”
“혹시 고경아 간호사와의 동반 유학과 비용, 혹은 도의? 이런 부담 때문이라면 언제든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부담을 느끼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누구나 같은 심정일 겁니다. 그보다 앞으로 부담을 더 드려야 하기 때문에 제 거취는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이사장님의 전폭적인 지원을 바라고 있습니다.”
신동철 이사장의 눈이 동그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