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삼 년 만에 귀국했다.
작년 초 예정됐던 귀국을 일 년 더 미뤘다. 유학을 마친 아내와 어린 딸을 먼저 보내야 했지만 박사 과정이 걸려 연장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박사 학위는 핑계 중 하나였을지도 몰랐다. 상당 부분 개인적 욕심에서 비롯된 일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하기에 머나먼 타국에 온 목적을 잊지 않았다.
일 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학문적 성취를 얻었고, 외과가 지향해야 할 미래에 대한 비전을 하나하나 밝혔다. 가족의 희생, 병원의 양해, 선후배의 지원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족에겐 더욱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고경아의 붉어진 눈가, 용케 아빠 얼굴 잊지 않고 달려와 안기는 희연이는 기쁨이자 행복이었다. 서로의 온기 속에 담긴 사랑에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우리 희연이 많이 컸네. 경아 씨, 고생했어요.”
“지훈 씨도 고생했어요. 아쉽겠지만 병원 문제는 깔끔하게 정리하고 온 거죠?”
“그럼요. 박사 학위도 땄고, 무엇보다 이젠 혼자 못 삽니다. 향수병이라는 게 가족이 없어서 생기는 모양이에요. 난 고경아 없으면 괴로워지는 인생이 분명해.”
김지훈이 손을 꼭 잡으며 진저리까지 떨자 고경아가 눈을 흘겼다.
“말로는 뭘 못할까? 이사장님, 이준영 선생님 만나면 말씀 잘 드려요. 다른 선생님들도 지훈 씨 흔들릴까 봐 꽤 신경 쓰시는 눈치예요.”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병원 생활은 어때요? 함께 공부한 분들은 다 잘 계시고요?”
“다들 각자 파트에서 책임 간호사로 일하고 있어요. 내년을 목표로 간호대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김지훈이 반색했다.
“우와! 그럼 우리 경아 씨도 교수님이 되는 건가요?”
“수 선생님들이 계시는데 가 봐야 알죠. 시간 강사만 되어도 감지덕지고요.”
“수간호사 선생들이 있었네. 이건 내 손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안타깝네요. 경아 씨라면 자격이 충분하고도 넘치니까 걱정 말아요.”
일 년 동안 전화 통화만 했다.
그간 못다 한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자신을 아는 사람들 모두 물심양면으로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는 말도 들었다.
감사할 뿐이었다.
당연히 먼저 찾아 인사부터 하는 것이 도리였다.
지난 시간 헛되이 소비하지 않았다.
인연이 닿아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준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일주일 후 곧바로 근무를 시작해 준비해야 할 것이 꽤 되는 데다 시차 적응까지 만만치 않아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다.
까닭에 무척 바쁜 한 주를 보냈다.
고향부터 찾았다.
평생 그리울 테지만 이젠 담담하게 마주할 수 있는 이들에게 국화 두 송이와 알싸한 소주로 인사를 대신했다. 머나먼 곳 어디선가 아들, 며느리, 손녀를 보며 미소 짓는 것 같았다.
‘아들! 잘 살아 줘서 정말 고맙다.’
살아 계셨다면 그리 말하며 고경아와 희연이를 꼭 안아 주었을 것이다.
먹먹한 가슴을 안고 원주로 출발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속도를 올린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액셀과 브레이크 반응, 창을 통해 들어오는 엔진 소리부터 승차감까지 예리한 감각으로 점검했다.
‘경아 씨는 거의 운전할 일이 없었을 테고, 일석이가 관리 잘해 줬네. 자식!’
자기 차처럼 아꼈을 것이다.
애마, SM5가 씽씽 잘 달려 주었다.
고성문, 최문옥 여사는 부모님이었다.
가족 모두 식구와 다름없었다.
소소한 선물에 환한 웃음을 보였고, 가족의 품이 얼마나 따스한지 새삼 깨닫게 해 주었다. 가끔, 아주 가끔 일반외과 선배로 변신한 장인어른의 매서운 눈초리에 등골이 서늘하긴 했다.
‘뭐 배웠어? 뜸들이지 말고 보따리부터 열어 봐.’
무언의 압박이었다.
다행히 사위에겐 한없이 너그럽지만 장인어른을 꽉 쥐고 사는 장모님의 철벽 방어 덕분에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늦은 시간 원주를 찾은 손위 동서 서정호 검사, 손아래 동서이자 혈관 파트 주역으로 자리 잡은 친구 손일석을 비롯해 다음 날 만난 친형 같은 정훈철까지 모두 특별하고도 각별한 인연이었다.
서로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개인적 인연을 떠나 유학이 아니었다면 자주 볼 일이 없었겠지만 이젠 상당히 중요해진 사람을 찾을 차례였다. 의사 본연의 길만 고집하면 현실의 벽을 깨기 어렵다는 사실을 자각한 덕이 컸다.
바로 신동철 이사장이다.
친구 아버지라는 인연을 떠나 직장 내 최고 결정권자였다. 밥값 톡톡히 해야 한다는 책임감, 유학 말미에 받은 제의,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로 인해 내심 부담까지 느끼던 참이었다.
‘이사장님 결정이 아니었으면 유학 연장은 꿈도 못 꿨겠지? 오히려 도움이 되면 됐지, 자주 뵙고 얼굴 익혀서 나쁠 일 없어.’
상당히 바쁜 자리인 줄 알고 있었지만 중요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무슨 회의와 약속이 그리 많은지 간신히 면담 시간을 잡았다.
인상 나빠 좋을 일 없었다.
반짝반짝 구두 광내고, 하얀 와이셔츠에 잘 어울리는 넥타이까지 복장 단단히 챙겼다. 물론 고경아가 미리 챙겨 주지 않았으면 십중팔구 엉망이었을 것이다.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빨리 병원에 도착했다.
밖에서 보는 풍경은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왠지 무척 정겨웠다.
남다른 감회에 젖은 탓인지 응급실에 절로 눈이 갔다.
오전 11시경이었다.
가장 한가할 때였고, 겸사겸사 들러 눈도장 찍으면 귀국 인사 시간도 아낄 수 있었다.
‘아는 사람이 있으려나?’
응급실 문을 열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처치실이 전쟁통이었다.
“인턴 선생, 비지에이(aBGA:동맥혈 가스 분석) 결과 안 나왔어? 뭐 해? 빨리 갖고 와. 간호사, 수액 더 갖고 오고, 혈액 신청해요. 응급의학과 선생님께 연락됐어요?”
“최대한 빨리 오신대요.”
우르르!
인턴부터 간호사까지 정신없이 뛰었다.
아는 얼굴 하나 보이지 않아 어색한 표정을 짓던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처치실 커튼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바이탈이 걸린 환자가 분명했다.
‘이 시간이면 전공의들만 있을 텐데 어느 과 환자지? 바이탈은 잡히고 있는 건가?’
일반외과 본능이 작동했다.
희미하게 들리는 심박동 소리도 심상치 않았다.
김지훈이 잰걸음을 놀려 처치실로 다가갔다.
수액을 교체하던 간호사가 급히 앞을 가로막았다.
“보호자분이세요? 지금 치료 중이니까 밖에서……. 어머! 김지훈 선생님?”
“무슨 환자예요?”
공사장 건물 이 층에서 떨어진 환자였다.
무엇에 짓눌렸는지 몰라도 우측 무릎 윗부분이 반쯤 잘렸다. 지혈대와 거즈로 압박 중이었지만 절단면을 따라 뚝뚝 피가 떨어졌다.
바닥은 이미 시뻘건 피로 흥건했다.
치명적인 상황이었다.
띠띠띠띠띠!
심장은 헐떡였고, 창백한 안색에 이마는 식은땀으로 젖었다. 차가운 팔다리와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는 소변은 저혈량성 쇼크가 상당히 진행됐음을 알려 주었다.
‘동맥 손상이다.’
사고 시간이 꽤 지난 후 끊어진 동맥을 찾는 것은 웬만한 경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중증 손상이었다. 더구나 사지말단 동맥과 비교할 수도 없는 혈류량을 가진 대퇴 동맥이 분명했다.
정형외과 교수는 없었다.
당직 전공의가 필사적으로 매달렸지만 경험 부족한 정형외과 소속이 분명했다. 바이탈까지 크게 흔들리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띠띠띠띠띠!
심장박동이 더 빨라졌다.
혈압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혈압 90/70, 맥박 130회예요.”
“일반외과에도 연락해요. 빨리!”
간호사와 전공의 목소리가 절박했다.
생명이 경각에 달렸다.
단시간에 다량의 수액과 혈액을 투여할 적절한 혈관조차 확보하지 못했다. 수련 방향이 다른 정형외과 전공의를 탓할 수도 없었다.
경험 풍부한 써전이 필요했다.
두고 볼 상황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양복을 벗으며 소리쳤다.
“정형외과 선생, 일반외과 김지훈이야. 꽉 눌러. 간호사, 쇄골 하 정맥 카테터(Catheter) 준비해요.”
빠르게 우측 쇄골 하 정맥을 잡았다.
굵은 라인을 통해 보다 심장에 가까운 혈관으로 수액과 혈액이 급속히 투여됐다.
“인턴 선생, 꽉 짜. 정형외과 선생, 손상 부위 보자.”
반쯤 잘린 다리를 꽁꽁 싸맨 붕대를 풀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절단면이 너덜너덜했다.
욱여넣은 거즈는 핏덩이와 다를 바 없었다.
근육은 물론 동맥, 정맥, 신경을 구분하기도 힘들었다.
지혈대를 풀자 시뻘건 피가 쭉쭉 솟구쳤다.
압박을 멈출 수 없었다.
출혈이 지속되면 저혈량성 쇼크로 사망할 것이다.
환자를 살릴 길은 오직 끊어진 동맥을 찾아 묶는 것뿐이었다. 주어진 시간마저 얼마 없었다. 빠른 시간 내에 해결하지 못하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대퇴 동맥이 끊어졌다. 근육을 구분해 동맥 위치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출혈 부위에 집중해야 한다.’
유학 중 경험했던 총상 환자를 떠올렸다.
집중력을 잃으면 환자를 잃는다.
김지훈이 긴장을 끌어 올렸다.
“정형외과 선생, 내가 신호하면 빠르게 풀고, 다시 압박해. 켈리(Kelly:수술용 집게)! 풀어!”
주루룩!
범위를 좁혔다.
“풀어! 압박!”
다시 한 번 범위를 좁혔다.
‘이 부근이 확실해. 근육 위축을 따라 동맥도 조직 깊숙이 끌려 들어갔다. 얼마나 될까?’
갈기갈기 거칠게 잘린 근육을 제쳤다.
1센티미터, 3센티미터, 5센티미터.
보이지 않았다.
‘잘못 판단했나?’
“풀어!”
주루룩!
시뻘건 피가 순식간에 시야를 가렸지만 분명 끊어진 동맥 부위에 접근하고 있었다.
띠띠띠띠띠!
헐떡이는 심장박동 소리가 절박하게 들렸다.
허락된 시간이 거의 없었다.
1분이 남았을지, 10분이 남았을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김지훈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오직 자신의 손에 환자의 생명이 달렸다는 사실만 기억했다. 끊어진 동맥을 빠르고 정확하게 잡아 묶어야만 살릴 수 있었다.
“리트랙터(Retracter:끌개) 걸어!”
허벅지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는 지혈대에 가까워질 정도로 깊게 파고들었다.
피에 물든 거즈가 바닥에 수북이 쌓였다.
눈앞에 나타나야 할 동맥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 때보다 침착한 접근이 필요하건만 초조함으로 와이셔츠가 땀으로 젖어 들어갔다.
피에 젖어 미끌미끌해진 기구를 정확히 조작하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너덜너덜한 근육을 제치고 또 제쳤다.
‘다른 부위를 찾을 여유가 없다. 분명 여기 있다.’
불안이 극에 달하는 찰나 눈에 익은 구조물이 보였다. 동그랗게 입을 벌리고 있는 혈관은 반드시 끊어진 대퇴 동맥이어야 했다.
“혈관 잡는다. 움직이지 마.”
따르륵!
혈관을 잡았다.
“풀어!”
절단면을 따라 피가 흘러나왔지만 펌핑(Pumping)처럼 솟구치던 출혈이 사라졌다.
마침내 끊어진 대퇴 동맥을 잡았다.
김지훈이 이를 악물었다.
끝이 아니었다.
바이탈이 돌아와야 했다.
“인턴 선생, 수액 풀로 틀고 혈액 짜.”
김지훈과 전공의까지 가세했다.
혈액 팩을 짜는 두 손이 하얗게 변했다.
째깍! 째깍!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수술보다 더한 긴장이 감돌았다.
수액 1,000cc와 혈액 두 팩이 급속히 투여됐다.
띠띠띠! 띠띠! 띠! 띠! 띠!
숨 가쁘게 뛰던 심장박동이 점차 느려졌다.
서서히 혈압이 오르기 시작했다.
바짝 말랐던 소변이 한 방울 떨어졌다.
김지훈이 훅 숨을 내쉬었다.
고비를 넘겼다 해도 바이탈만 잡았을 뿐이었다.
확실하게 안정시키지 못해 재차 쇼크가 발생한다면 어떤 의사가 와도 되돌릴 수 없었다.
비지에이, 일반 혈액 검사를 비롯해 흉부 사진까지 모조리 다시 체크해 크게 깨진 항상성을 교정하고, 부족한 요소를 보충했다.
일반외과 의사가 할 수 있는 모든 처치를 다 했다. 그러나 근본적 처치가 빠르게 이어지지 않는다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허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정형외과 교수는 아직 내려오지 않았다.
외과 중 가장 많은 외래 환자를 보고, 그만큼 수술이 밀려 있는 과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순간 짜증이 솟구쳤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