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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973화 (973/1,329)

14화. 삶이 주는 기쁨 Ⅱ (2)

툭!

우측 간 하부 구획 일부가 완전히 떨어져 나왔다.

이내 후복막 속에 묻혔던 지방육종과 연결된 부분까지 빠르게 제거됐다.

김지훈이 양 손바닥이 모자랄 정도로 커다란 덩어리로 절제된 암 조직을 배 밖으로 꺼냈다.

앙 블락(En Bloc) 수술법의 전형이었다.

주변 조직 손상과 인위적 전이를 막기 위해 과도한 조작을 피하며 한 덩어리로 광범위하게 절제해야 하는 암 수술의 원칙을 완벽하게 지킨 것이다.

“전이 여부, 남은 조직이 있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하겠습니다.”

수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손일석이 콧등을 찡그렸다.

수술 초반에 참가한 후 중간중간 화장실 다녀온 것 말고는 꼬박 7시간 동안 참관만 했다. 수술 팀보다 훨씬 불편한 자세에서 수술을 보아야 하기 때문에 온몸이 뻐근하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웬만한 열정이 아니고는 고역과 다름없었다.

정작 얼굴을 찡그린 까닭은 따로 있었다.

바로 김지훈과 이준영 교수였다.

자만이 아닌 자신감이 넘쳤다.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고 정교한 손으로 완벽하게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6개월, 아니 그 이상 한 팀으로 수술한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수술에 몰입한 모습은 가히 아름다울 정도였다.

자신도 이렇게 집중하고 있는지 돌아봤을 정도였다.

‘기본을 철저하게 지켜 왔고, 지켰기 때문일까?’

결과는 지금 막 떨어져 나온 지방육종과 간 일부였다. 깔끔하게 절제된 모양만으로도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고, 광범위 절제라는 목표를 확실하게 달성했음을 알 수 있었다.

최고의 수술 팀!

딱 그 말 이외에는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김지훈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이준영 교수가 막 덧 가운을 벗고 있었다.

녹색 수술복은 물론 하얀 덧 가운까지 땀과 복부를 세척한 물에 젖어 있었다. 땀을 머금어 모자 색이 변한 것도 처음 보았다.

7시간 동안 이어진 수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전에 없이 편안해 보였다.

무뚝뚝함으로도 채 가리지 못한 김지훈에 대한 신뢰와 뿌듯함이 가득했다.

‘난 스승님께 저런 신뢰를 드린 적이 있을까?’

손일석이 다시 퍼스트 자리에 섰다.

수술 부위를 꼼꼼하게 확인한 김지훈이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복부를 닫기 시작했다.

후복막을 건드리고 간까지 절제했건만, 출혈마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준영 선생님의 실력일까? 아니야. 최고의 수술 팀이라고 해도 결국 집도의의 실력이 가장 중요해.’

가슴 서늘한 자극이었다.

김지훈을 오성민의 어머니 수술 집도의로 결정한 교수들의 판단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어머니와 절연까지 각오한 오성민도 어느 정도 마음의 짐을 벗었을 것이다.

낯익은 말투가 들렸다.

“끝났니? 끝났구나. 일석이 네가 퍼스트 섰니? 손발이 착착 맞는구나. 잘했다, 잘했어. 성민아, 아주 깔끔하게 다 떨어져 나왔으니까 마음 푹 놓자. 다들 9시간 동안 고생했다. 고생했어.”

작은 키 때문에 까치발을 하고 수술을 보던 송재덕 교수가 구석에 놓인 지방육종 덩어리로 눈길을 돌렸다. 이준영 교수 못지않은 감탄과 뿌듯함이 가득했다.

김지훈 최고의 라이벌이 지나칠 리 없었다.

이미 중간에 틈틈이 수술 과정을 지켜보았던 신현수가 이경석과 함께 들어왔다. 별다른 말이 없었지만 차가운 은색 안경테 너머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한 발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또 드네. 유학을 다시 가야 하나?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하는 것이 답이겠지?’

어느새 복부 봉합이 끝났다.

“컷! 모두 수고했어요. 성민아, 우린 아무래도 병원 나오는 시간이 걸리니까 어머님 불편 없으시도록 오더는 아예 네가 내.”

“고생했어. 고맙다.”

“고생이랄 게 있나. 오하석, 힘들었어?”

“아니요. 저도 이런 수술 한 번 해 보고 싶어요.”

“지금처럼 노력하면 충분해. 김진호 선생님, 마취과 간호사, 수고하셨습니다.”

김진호 교수가 좋다며 웃음을 터트렸다.

“야! 10시간 걸린다더니 1시간 줄였네. 덕분에 팔다리 덜 아프겠다.”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미국에서 본 케이스보다 힘들었는데 더 빨리 끝나다니, 역시 스승님의 손은 예술이야.’

한편으로 문득 마음먹기에 따라 똑같은 일이 즐거울 수도, 힘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8시간 걸린다는 수술이 9시간 걸렸다면 김진호 교수가 웃었을까?

마취에서 깨어나는 엄정남을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변함없는 태도로 시어머니 병간호를 하는 박송임은 대단한 인내심을 가졌거나, 의외로 긍정적인 사람일지도 몰랐다.

뻐근한 목과 어깨를 휘휘 돌리며 덧 가운을 벗은 김지훈이 송재덕 교수와 함께 나직한 대화를 나누었다.

신현수, 이경석도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보아 수술 과정과 결과에 대해 말하는 모양이었다.

마치 바둑 둔 후 복기하는 사람처럼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엄정남을 회복실로 옮긴 후 다급하게 달려온 손일석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래, 그래. 그 부분은 항상 힘들어. 대장 수술할 때도 비슷한 경우가 많아. 지훈아, 경석이랑 현수랑 모두 대장 하자, 대장. 경석아? 너도 좋지? 좋다, 좋아.”

지금 대장이 입에 달고 다니던 그 대장일까?

송재덕 교수만이 알 일이었다.

혼자 빠지면 왠지 서운한 법이다.

“저는요?”

“넌 펠로우잖아, 펠로우. 성민이 어머니 잘 깨셨어? 하석이한테 맡기고 온 거야? 그런 거야?”

손일석이 재빨리 사라졌다.

그렇게 9시간에 걸친 지방육종 수술이 끝났다.

홀로 남은 김지훈이 훅 숨을 내뱉었다.

6개월 이상의 공백,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수술이 아니라는 사실, 혹은 오성민 때문인지 오늘따라 수술 후 다가오는 감정이 복잡 미묘했다.

특히 오성민에겐 써전에게 다가오는 느낌 이상의 의미가 있을지도 몰랐다.

‘성민아, 병원은 떠나지 말길 바라. 제수씨도 결코 원하지 않을 것 같다.’

김지훈의 바람이기도 했다.

감정 선의 끝은 역시 스승이었다.

‘내가 수술을 한 건지, 퍼스트를 선 건지 알 수가 없네. 대가의 손? 스승님의 손? 어느 쪽일까?’

제자에겐 대단한 의미가 있는 수술이었다. 실력 이상의 그 무엇인가가 7시간 내내 흘렀던 것 같았다. 동작 하나, 표정 하나까지 닮아 가며 모든 것을 배우고 싶었다.

자신이 이준영 바라기라는 말을 듣는 것처럼 멋 훗날 누군가 김지훈 바라기라는 말을 들을까?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순간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지훈 씨, 힘들었죠?”

고경아가 주스 하나를 내밀었다.

힘들 때마다 곁을 지켜 주는 아내의 존재는 행복이었다. 남편 역시 그래야 했고, 고경아 바라기라는 말까지 들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고마워요. 미안한데 오늘 먼저 들어가요.”

“환자분 잘 회복되실 거예요. 참! 목요일 저녁까지만이에요. 희연이 데리러 가야죠.”

희연이 소리에 미안했다.

많은 부분을 함께하며 나누려 했지만, 엄마이자 아내의 역할과 힘은 대단하다는 말 이외에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미안해요.”

“갑자기 뭐가 미안해요?”

“그냥 다 미안해요. 난 정말 행운아야.”

고경아가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김지훈의 마음을 알고도 남을 것이다.

***

수술 당일.

가습기 분무가 안개처럼 엄정남을 감쌌다.

바이탈이 약간 불안했지만 견디기 힘든 통증 때문일 것이다. 무통 주사를 통해 끊임없이 진통제가 투여되고 있지만 큰 수술 후 발생하는 통증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특별히 호소하시는 문제는 없었어?”

복잡한 표정을 지은 채 자리를 지키던 오성민이 고개를 저었다.

박송임은 엄정남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고 있었다.

“어머니, 힘드시죠? 불편하시면 언제든 오성민 선생에게 말씀하세요. 상처 치료하겠습니다.”

엄정남이 간신히 눈을 떴다.

절개 창은 문제를 일으킬 시점이 아니었다.

수술 부위와 연결된 드레인이 관건이었다.

거즈를 떼어 내 확인했다.

광범위 수술로 인해 발생한 노란 체액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거즈 몇 장에서 검붉은 피가 관찰됐지만 간 절제를 감안하면 당연히 보일 소견이었다.

“괜찮네. 성민아, 내일 오후까지 절대 안정 취해야 하니까 소변 줄하고 코 줄은 그때 빼자. 오늘 밤에 변동 있으면 바로 연락 줘.”

“별일 없겠지.”

통증이 더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드레싱을 한 후 엄정남의 손을 잡아 주었다. 아들의 손으로 착각했는지 손에 힘이 꽉 들어 있었다.

‘며느님 손을 이렇게 잡으셔야 합니다.’

“어머니, 조금만 참으세요. 제수씨, 고생하세요.”

오성민과 박송임이 밤새 곁을 지킬 테지만 수술 후 3일간이 가장 불안한 시기다. 그만큼 보호자도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성민아, 제수씨 말고 간호할 사람 없어?”

“있기야 있지, 왜 없겠어? 다른 집 딸은 엄마라면 사족을 못 쓴다고 하던데…….”

답답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수술과 질환만 아니었으면 친구 어머니이기에 도리어 한바탕 쏴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지켜보는 사람의 심정이 그럴진대 당사자는 어떨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어머니 이상으로 신경 써. 잘못하면 난리 나겠다. 너라도 잘해.”

“미안해 죽겠어. 나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빨리 퇴원해서 얼굴 안 봤으면 좋겠다.”

수술이 갈등을 해소할 기회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악화되고 있었다. 정도는 다르지만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말이 유난히 다가오기도 했다.

집으로 향하는 내내 발걸음이 무거웠다.

‘지금쯤이면 성민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눈치로도 알 것 같은데, 정도껏 하시지. 대단한 양반이라고 해야 하나?’

손일석과 수술 과정을 복기하는 동안 다시 의사로 돌아왔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불안감이 가시질 않았다.

‘금요일에 미국으로 갈 준비를 해야 하니까 화, 수, 목 3일밖에 없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괜찮겠지?’

집도의 부담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암 조직을 모두 제거했다는 것만이 위안이었다. 육체적 건강만이 아니라 마음의 건강까지 찾길 간절히 바랐다.

참으로 긴 하루였다.

수술 후 1일째.

수술을 들어가지 않는 한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고경아는 뒤늦게 병원을 찾은 탓에 인사해야 할 사람이 많아 하루 종일 얼굴 보기 힘들었다.

‘남은 시간도 얼마 없는데 잘됐다.’

틈나는 대로 엄정남을 찾았다.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는 데다 낮에는 오성민이 지킬 수도 없어 박송임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들를 때마다 며느리의 힘을 빌리고 있건만 박송임의 힘없는 미소는 여전했다.

얼굴 보기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나마 바이탈이 점점 안정되고, 수술 부위도 문제없어 소변 줄과 코 줄을 뺄 수 있었다.

“한결 편해지실 겁니다. 다만 빠른 회복을 위해서 운동이 필요합니다. 화장실 직접 가셔야 하고, 내일부터 단 10분이라도 복도를 걸으세요.”

“수술은 잘된 거죠?”

“예. 확실하게 제거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수술 전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박송임에게 의존해야 할 것이다.

비록 안 좋은 일에서 비롯된 상황이지만, 얼마나 아끼고 사랑해야 할 존재인지 지금이라도 알길 바랐다.

‘어쩌면 알면서 이러시는 걸지도.’

“제수씨, 가 보겠습니다. 낮에는 제게 연락하세요.”

“고맙습니다.”

병실을 나가며 힐끗 엄정남을 보았다.

눈을 감은 채 끙끙 소리만 내고 있었다.

수시로 들르며 드레싱까지 직접 했다.

주렁주렁 매달려 불편을 야기했던 줄이 없다고 해도 몸을 움직이기조차 힘든 시간이었다.

눈을 꼭 감은 채 치료를 받던 엄정남이 끝나고 나면 꼭 손을 잡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통해 불안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의사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모습이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제수씨, 어떠셨어요?”

“많이 아프신지 말씀을 거의 안 하세요.”

“소변은 보셨어요?”

“화장실에 한 번 다녀오셨어요.”

절대 스스로 갈 처지가 아니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박송임의 눈가에 맺힌 주름이 말해 주고 있었다. 하기에 주의할 점을 모두 박송임에게 설명했다.

“심지를 둘러싼 거즈가 흘러내리면 도리어 감염 통로가 될 수 있으니까 복대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제는 일어나 앉는 것부터 시작해서 내일은 운동을 시작해야 합니다. 회복이 늦으면 합병증이 생길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지니까 잊지 마세요.”

모든 일이 박송임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엄정남도 똑똑히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매번 같은 얼굴을 보아야 했다.

수술 후 첫 번째 날일 뿐인데 너무 많은 기대를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반면 그동안의 일과 입원 시부터 생각하면 늦어도 한참 늦었다.

어쩌면 열쇠는 엄정남이 아니라 박송임이 쥐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어떤 문을 열든 비난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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