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삶이 주는 기쁨 Ⅰ (2)
부우우웅! 부우우웅!
SM520의 나직한 울음 속에 원주로 향했다.
타자마자 몇 마디 나누기도 전에 손일석이 곯아떨어졌다. 김지훈도 졸리긴 마찬가지였지만 고경아와 희연이를 생각하며 액셀에서 발을 떼지 않았다.
‘뭐? 반짝반짝? 자식이 관리 잘한다고 하더니 먼지만 뽀얗게 앉았네. 주말 오프 때 세차라도 하지. 얼씨구! 이러다 대자로 뻗어 자겠다.’
투덜투덜 불평 속에 무사히 원주에 도착했다.
언제나 화목한 집안이었다.
모두들 나름의 문제가 없을 리 없건만 가족 모두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까닭이었다.
불현듯 오성민의 어머니 얼굴이 떠오르며 까닭 모를 한숨이 터졌다.
행복감도 잠시.
아빠를 찾는 희연이의 보드라운 뺨도 잠시.
장모님의 정성 가득한 손맛도 잠시.
최근 야근이 잦았던 손위 동서 서정호까지 사위 3명이 술 몇 잔에 줄줄이 뻗었다.
결국 여자들만의 리그가 벌어졌고, 고성문은 희연이를 안고 맞장구치기 바빴다.
삶의 지혜이자 생존 본능일 것이다.
그렇게 토요일 밤을 보낸 후 서울로 돌아왔다.
갈 때는 둘이었지만 올 때는 넷이었다.
희연이가 엄마 아빠 없이도 잘 놀아 안심이 됐지만 한편으로 무척 서운했다. 이러다 미국 갈 때 울며불며 보챌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시간이 촉박했다.
오성민 어머니부터 봐야 했다.
최종 점검도 다시 한 번 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정훈철 부부와의 약속까지 잡혔다.
손일석과 부지런히 병원을 누빈 후 간신히 시간을 맞췄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처럼 정훈철과 한수임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첫 만남 때보다 주름살이 늘긴 했지만 말이다.
‘조금 있으면 10년이네.’
“김 교수, 내 순위가 이것밖에 안 돼? 꼴찌네, 꼴찌. 너무 서운하다. 잘 지냈지?”
“그렇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삼촌, 미국 생활은 어때요?”
“여기나 거기나 똑같아. 우리 승희, 이젠 숙녀네.”
고등학생이 된 승희의 볼이 수줍은 듯 빨갛게 물들었다.
간간이 봤는데 얼굴 잊지 않은 것도 모자라 삼촌이라 불러 너무 기뻤다.
“승희야, 나도 지훈이처럼 삼촌이라고 불러 줘. 솔직히 김 교수보다 내가 더 네 인생에 실속이 있을 거야. 김 교수하고 친해 봐야 일만 늘어.”
승희가 손일석의 말에 새침을 떨었다.
아주 바람직하고 좋은 현상이었다.
“너무 보고 싶은데 희연이는 왜 안 데리고 왔어요?”
“할아버지 때문에 데리고 올 수가 없었어요. 경아 씨도 병원 식구들과 인사해야 하는데, 안 데리고 오는 게 낫겠더라고요.”
“형수님, 역시 미국 물 먹은 놈은 다르죠? 애들, 노약자는 면회를 삼간다는 보호자 면회 규정을 칼같이 지키네요. 우리나라도 이런 건 빨리빨리 배워야 하는데.”
“좋은 건 배워야지.”
다음 날 지장이 없는 선에서 술자리를 이어 갔다.
부부들이 주고받는 수다로 자리가 떠들썩했다.
밤이 늦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정신없이 주말을 보냈지만 더없이 행복했다.
문득 병원 쪽으로 눈길이 갔다.
오성민의 어머니는 이런 행복을 꿈꾸지 않을까?
이제 곧 지방육종을 제거할 시간이 다가온다.
수술부터 완벽하게 해내야 할 것이다.
진득한 긴장이 시나브로 다가왔다.
***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고경아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수술 준비에 여념이 없던 수술실이 난리 났다.
“경아야, 온 지 며칠 됐다면서 왜 이제 왔어?”
“선생님, 애는 잘 크죠? 얼굴이 좋네요.”
가뜩이나 대인 관계가 원만했던 고경아였고, 오래간만에 얼굴 봤으니 할 말 많을 것이다.
손은 손대로 입은 입대로 바쁜 간호사들을 보며 슬그머니 빠져나와 병실로 향했다.
수술 팀이 모두 모였다.
김지훈-이준영-손일석-오성민-오하석.
모두들 긴장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한결같은 표정을 가진 한 명은 예외다.
엄정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중심 정맥을 뚫고 들어간 굵은 수액 줄.
하루 정도 유지해야 한다는 소변 줄.
숨이 막힐 것처럼 코와 목을 갑갑하게 하는 코 줄.
동의서에 적힌 사망이란 글귀까지 떠올랐는지 불안과 두려움이 한층 강해졌다.
“어머님, 우릴 믿으시고 마음 편히 가지세요.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조직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진단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양성이라고 나오면 바로 중단하게 될 겁니다.”
모두들 바라는 일이었지만 가능성이 너무 희박했다.
엄정남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오성민과 박송임의 안색도 무겁기만 했다.
“부탁드릴게요.”
떨리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수술실로 향했다.
외래로 향하던 이준영 교수가 눈길을 주었다.
“검사 나갈 때 연락해.”
“예. 한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수술실이다.
고경아가 수간호사와 함께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연수하며 모은 자료를 앞에 두고 있었다. 병원 및 간호 체계에 많은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힐끗 눈길 주고 옷부터 갈아입었다.
전과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임시 귀국해 하는 수술, 스승들의 전폭적인 신뢰하에 시행하는 수술, 오성민의 복잡한 가정사를 풀지도 모르는 수술이었다.
여러모로 부담이 컸다.
결코 쉽지 않은 수술이었지만 최고의 수술 팀과 함께하기에 무사히 마칠 것이라 믿었다.
‘지방육종을 완벽하게 제거하지 못하면 의미를 둘 수 없는 수술이다. 성민이 어머니라는 사실을 떠나 반드시 해내야 한다.’
상당한 부담과 압박감 때문인지 마취 준비를 하는 김진호 교수와 마취과 간호사들의 진지함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어느새 시곗바늘이 9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수술 방 유리문이 열렸다.
박송임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어머니, 수술 잘 끝날 거예요. 마음 편히 가지세요. 선생님, 부탁드립니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오성민과 오하석이 엄정남이 누운 간이침대를 옮겼다.
수술대 위로 옮겨지기 직전까지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있던 엄정남의 어깨가 눈에 보일 정도로 떨렸다.
서늘한 수술실 공기, 차갑게 빛나는 무영등 불빛, 한 번도 보지 못한 기계들, 주렁주렁 매달린 각종 줄까지 모두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보이는 반응이었지만 아들인 오성민의 마음은 똑같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미워해도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다.
수술만 하면 삶이 보장되는 질환도 아니다.
인연을 끊겠다는 결심까지 했는데 속이 어떨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박송임의 속은 까맣게 죽어 썩어 문드러진 지 오래일 것이다.
“어머니, 잘될 거예요.”
“성민아!”
엄정남이 감정적 동요를 보이자 김진호 교수가 재빨리 눈짓했다. 마취는 단순히 재우는 일이 아니기에 절대적으로 피해야 할 일이었다.
간호사가 바이탈을 확인했다.
띠띠띠띠띠띠띠띠!
우우우웅! 우우우웅!
전자식 혈압계가 엄정남의 팔뚝을 조였다.
“혈압 140/80, 심박동 110회입니다.”
환자의 불안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환자분, 걱정하지 마시고 천천히 심호흡하세요. 마취 시작하겠습니다.”
정맥 마취제가 투여됐다.
엄정남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똑똑 떨어지는 수액을 따라 근이완제까지 주입됐다.
스스로 호흡할 능력까지 잃었다.
인공호흡기를 통해 산소 가득한 공기 속 호흡 마취제가 폐로 스며들었다.
이제부터 의료진이 환자의 생명을 유지해야 한다.
5분 간격으로 환자의 바이탈을 점검해야 하는 마취과 의사들의 긴장이 수술 내내 지속될 것이다.
수술용 덧 가운을 입던 김지훈과 손일석이 훅 숨을 내뱉었다. 마취에 이어 복부 소독까지 끝난 모습에 불쑥 다가온 긴장감을 긴 숨으로 풀었다.
모든 의료진이 감정을 버리고 철저하게 이성을 유지해야 할 시간이었다. 특히 수술 팀은 확실한 손과 정확한 판단력을 유지해야 한다.
수술 팀 모두 자리에 섰다.
냉정한 써전이었던 오성민의 눈빛이 떨렸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절대적으로 피할 일이었다.
‘성민아, 넌 지금 아들이 아니라 써전이야. 나 역시 친구 어머니가 아니라 한 명의 환자를 수술할 뿐이다.’
‘후우! 생각보다 쉽지 않네.’
잠시 어머니의 육신을 바라보던 오성민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수술 내내 유지해야 할 써전의 자세와 눈빛을 되찾았다.
이로써 수술 팀 전체가 준비됐다.
김지훈이 시선을 교환한 후 입을 열었다.
“마취과, 수술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예. 시작하세요.”
“감사합니다. 수술 시작합니다. 메스!”
무영등 불빛을 받은 날카로운 메스가 예리한 빛을 뿌렸다.
명치부터 배꼽 하방까지 복부를 길게 갈랐다.
60이 넘은 여인의 피부는 약했고, 지방층과 근육까지 열자 절개선을 따라 빨간 피가 줄줄이 흘러나왔다.
“보비! 수처! 타이!”
적절하게 지혈하고 복막을 잡았다.
얇고 투명한 막이 쉽게 절개됐다.
“리트랙터!”
오성민과 오하석이 복벽을 잡아끌었다.
근이완제를 써도 사람의 근육은 힘만 빠질 뿐 쉽게 늘어나지 않는다. 경험 없는 사람은 배가 찢어질지 모른다는 걱정을 할 정도로 상당한 힘이 필요하다.
오성민의 손에 눈길을 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육신이라는 사실에 영향을 받을까 우려했지만 써전임을 잊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수술이 시작되자 더욱 냉정한 눈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복부가 활짝 열렸다.
내부 장기가 한눈에 보였다.
위, 대장, 소장은 깨끗했다.
각 장기를 연결하는 장간막 등의 조직 역시 정상적 소견을 보였다.
대부분 지방으로 이뤄진 조직이라 지방육종 병발 여부가 걱정이었는데 천만다행이었다.
“일석아, 깨끗하지?”
“눈에 보이는 매스(Mass)는 없어 보여.”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간과 후복막에 국한돼 정말 다행이다.’
마지막 남은 장기인 간을 확인했다.
검사상 우측 간 하부에 침범 소견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간을 제쳤다.
CT 소견이 틀렸기를 바랐건만, 후복막과 이어진 지방조직이 눈에 들어왔다.
언뜻 지방 덩어리처럼 보이지만 암 세포가 들어 있다면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종양으로 돌변한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정확한 진단이었다.
지방육종의 특성상 한 곳에서만 조직을 떼면 악성인지 양성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정상 지방 세포와 암 세포가 뒤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계획한 대로 간과 후복막에 인접한 부위에서 각각 두 곳씩 떼어 내 검사합시다.”
복부 가장 하부에 위치한 데다 십이지장과 대장이 가로막고 있어 소량의 조직 채취도 쉽지 않은 부위였다. 전반적으로 암이 침범했다면 출혈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암 세포가 퍼지지 않도록 최소한의 손상만 가해야 했다.
이제는 상당히 노련해진 김지훈이었다.
최고의 써전이 되기 위한 노력을 멈춘 적도 없었다.
손일석과 오성민 역시 수많은 경험을 쌓았다.
오하석도 결코 자신의 일에 게으른 적이 없는 전공의였다.
조심스럽고도 정확하게 조직을 떼어 냈다.
빠른 수처와 타이가 진행됐다.
1년 차가 제때 들어왔다.
“최대한 빨리 결과 알려 줘.”
발소리를 죽인 채 달렸다.
희미해진 기억이지만 모두가 경험한 일이었다.
상념도 잠시 초조한 시간이 이어졌다.
비록 배를 열었지만 양성이 나오는 것이 최상이었다.
반면 악성이면 광범위 절제를 해야 한다. 수술 팀 모두에게 지독히 힘든 시간이 이어질 것이다.
째깍! 째깍!
오성민의 입이 바짝 말라 오기 시작했다.
김지훈은 눈을 감은 채 수술 과정을 상기했다.
스승이 함께한다고 해도 집도의는 김지훈 자신이다.
더욱이 모든 수술이 그렇긴 해도 특히 주의해야 할 과정이 많은 수술이었다.
어디 한 부분이라도 실수한다면 아무리 사소해도 치명적인 결과를 야기할 수 있었다.
‘양성이길 바라지만 가능성이 너무 떨어진다. 침착하게 진행하자.’
단단히 각오했다.
양성이 나올 일말의 가능성을 잊지 않았다.
삐그덕!
수술실 문이 열리자 모두를 고개를 돌렸다.
1년 차가 아니라 이준영 교수였다.
“검사 결과는?”
“아직 안 나왔습니다.”
거구의 의사가 조용히 수술실 한구석을 지켰다.
평소라면 수술에 관한 말, 혹은 환자에 관한 말들이 오고 갔겠지만 오직 침묵만이 흘렀다.
띠! 띠! 띠! 띠! 띠!
규칙적인 기계음만이 정적을 깼다.
삐그덕!
드디어 1년 차가 결과를 가져왔다.
오성민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희망적인 말이 나오기만을 바랐다.
“네 곳 다 포지티브(Positive)입니다.”
검사를 시행한 조직 모두 악성이었다.
답답한 탄식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