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69화 (969/1,329)

12화. 동료의 힘 Ⅲ (2)

가장 큰 짐을 던 김지훈이 의국에서 오성민의 어머니를 기다렸다. 예전에는 거의 앉을 틈이 없었는데 가만히 앉아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역시 바빠야 다른 생각을 안 해.’

잠시 후, 낯익은 얼굴과 낯선 얼굴이 보였다.

오성민의 어머니 뒤로 수척한 얼굴이 보였다. 오성민의 동반자는 처음 보았지만 얼굴색만으로도 그간의 마음고생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분위기가 무거우면서도 왠지 서늘했다.

김지훈이 가벼운 기침을 터트렸다.

‘어머니 성함은 엄정남, 성민이 와이프는 박송임. 두 분이 심각한 갈등 관계에 있단 말이지? 에휴! 어렵다.’

“안녕하십니까? 어머니 수술을 맡게 된 김지훈입니다.”

“성민이한테 얘기 들었어요.”

엄정남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눈을 마주친 박송임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미 설명 들으셨겠지만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어머니 질환은 지방육종이라는 암으로 판단됩니다. 굉장히 드물어 치료법조차 정립되지 않았습니다.”

환자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수술은 다음과 같이 진행될 겁니다. 개복 후 이상 소견이 추가로 발견되거나 제거가 불가능할 경우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방육종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면 즉시 수술을 중단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미움받았던 며느리는 속이 없어 보일 정도로 눈물을 보였다. 오성민 역시 바닥만 응시하며 답답한 한숨을 감추지 못했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가족의 감정이 어떨지 떠오르며, 이왕이면 희망 섞인 방향으로 말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탓에 엄정남은 물론 박송임과 오성민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평소와 달리 지나치게 과민한 반응이었다.

순간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일종의 VIP 신드롬이다.

인간적으로 가까운 사이, 바짝 신경 써야 하는 관계에 매몰되면 객관보다 주관이 더 강하게 작용한다.

결국 적절한 치료가 아닌 과도하거나, 반대로 불편을 야기할 만한 일은 모두 피하게 된다.

결과가 좋을 수가 없다.

환자와 의사 모두가 피해를 입는다.

이럴수록 냉정해야 했다.

‘난 집도의다. 누구보다 객관적이어야 한다.’

김지훈이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설명을 이어 갔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수술 팀까지 말씀드렸으니까 동의하시면 다음 주 월요일에 수술하겠습니다. 수술 부위가 크고, 회복 시간이 길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간병해 주실 보호자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간호사나 의사가 모든 불편을 해결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간병인을 쓰면 될까요?”

며느리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안 될 일도 없지만 이때만큼은 주관을 배제할 수 없었다.

오성민이 마지막 기회를 잡길 바랐다. 아니, 어머니가 잡아야 하는 마지막 기회였다. 며느리를 인정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아들까지 잃을 상황이니 말이다.

알고 있을까?

십중팔구 모를 것이다.

아무리 독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행동을 뒤돌아보며 마음을 돌리려 애써야 하는 상황이었다.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가족만큼 환자를 이해하고,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잘 결정하십시오.”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지만 주제넘은 일이었다.

어차피 수술에 동의하면 수시로 얼굴 보며 신뢰를 쌓아야 한다. 이쯤에서 빠지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끼리 대화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오성민 선생, 오늘 오후 수술은 내가 들어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어머님과 잘 상의해서 결정해 줘.”

“그럴 필요 없어.”

“아니야. 신경 쓰지 마. 미국 의사들 수술법과 비교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래. 어머님, 가 보겠습니다. 수술 팀에 오성민 선생이 있어서 든든합니다.”

이준영 교수가 가족 수술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는 불문율을 깨트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오성민의 어머니도 알기를 바랐다.

더 이상의 뜻을 헤아리기 어려웠지만 해야 할 일에 몰두할 때였다. 지금 집중해야 할 부분은 오성민의 가정사가 아니라 집도의의 본분이었다.

‘일단 눈부터 풀어 볼까? 손을 풀 기회가 있을까?’

위이잉! 위이잉!

임시 귀국한 김지훈이 수술 방에 떴다.

떡하니 수술복을 입고 말이다.

마지막 기억처럼 수술실이 분주했다.

마침 이준영 교수의 수술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환자를 옮기던 손일석이 김지훈을 보자마자 흠칫 놀랐다.

“뭐야? 너 지금 수술 들어오겠다는 소리야? 누가 뭐래도 퍼스트는 나다. 퍼스트의 ‘퍼’ 자도 꺼내지 마.”

“누가 뭐래?”

이미 라파로는 항상 두 명이 수술한다는 정보 뺐다. 세컨이 필요 없다는 말이었지만 스승의 수술을 보는 것은 눈의 호사요, 배움의 길이었다.

슬그머니 세컨 자리에 섰다.

힐끗 눈길을 준 이준영 교수가 아무 말도 없이 수술을 진행했다.

처컥! 처컥! 나직한 기계음 소리 속에 3명의 써전이 수술에 몰두했다.

할 일이 없어 양손을 다 놀리며 화면만 보던 김지훈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스승의 수술은 언제나 감탄을 자아냈다.

손일석은 마치 간담도 파트 펠로우인 것처럼 숙달된 손을 보였다. 자칫 방심했다가는 자리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일석이 손이 확실히 달라졌네. 혈관 수술도 인정받았다고 들었는데, 정말 대단한 놈이야.’

어느새 수술이 끝났다.

이준영 교수는 평소와 똑같이 무뚝뚝한 얼굴로 수술실을 나갔고, 김진호 교수가 환자를 깨우며 소리 내 웃었다.

“김 교수, 임시 귀국이라고 하더니 얼굴 자주 본다. 월요일에 큰 수술 하나 한다며? 인턴 때부터 지금까지 일복 참 한결같다. 대단해.”

“아직 동의 못 받았습니다.”

“동의서 못 받아서 수술 못한 적 한 번도 없잖아. 오성민 선생이 동의하면 되는 일 아니야? 그 수술 내가 마취하는데 빨리 끝내 줘. 요즘 오래 걸리면 팔다리가 쑤신다.”

사정을 모르는 탓에 농담을 던졌다.

불현듯 반드시 필요한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칙적으로 말하면 오성민의 어머니도 수많은 수술 환자 중 한 명일 뿐이었다. 도리어 친구 어머니라는 사실을 잊는 것이 마땅했고, 실제로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처럼 수술실을 배회했다. 이왕이면 맛깔스러운 먹이를 찾아야 했고, 이내 다음 목표를 찾았다.

지동훈 교수의 위암 수술이었다.

첫 번째 수술이 꽤 까다로웠는지 이제야 두 번째 수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성민이가 없으면 퍼스트를 설 수 있지 않을까?’

언감생심이었다.

꾸벅 인사하는 순간 ‘퍼’ 자도 꺼내기 전에 오성민이 들어왔다. 아쉬우면서도 자신의 일에 충실한 모습에 일종의 안도감이 느껴졌다.

그럼 세컨이라도?

전공의 역시 일반외과 의사다.

차상수가 강력한 경계와 견제가 담긴 눈빛을 보냈다.

서슬 퍼런 기세에 재빨리 써드 자리를 가리켰다.

‘상수 저 자식도 치프 값을 하네. 눈에서 레이저 나오겠어. 알았다, 인마. 내 자리에 서마.’

지동훈 교수의 표정이 어색했다.

오성민을 보면 걱정되고 답답한 반면, 김지훈을 보면 그저 흐뭇한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이내 평상시 모습으로 돌아갔다. 수술을 앞두고 지나치게 심각할 이유가 없었다.

“오성민 선생, 동의서 받았어?”

“예, 받았습니다.”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상외로 빨리 받은 탓이었다.

“잘됐네. 김 교수, 우리 파트도 욕심내는 거야? 이럴 때 쉰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 없어.”

“와이프도 원주에 있고, 딱히 갈 곳이 없어서요.”

김지훈이 자리에 서며 오성민과 눈길을 주고받았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오직 확실하고 정확한 수술을 위해 달려야 할 때였다. 수술에 참가함으로써 이미 시작한 상태였다.

오성민도 김지훈의 행동을 이해했는지 고맙다는 눈빛을 보였다.

“자자! 수술 시작합시다. 김 교수, 써드 선다고 졸지 말고 확실하게 끌어.”

복부가 활짝 열렸다.

간, 위장, 대장, 소장, 쓸개가 차례로 보였다.

위암 조직 위치를 확인한 후 절제를 시작하는 지동훈 교수의 손길이 무척 차분했다.

오성민 역시 극심한 스트레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역할에 조금도 소홀하지 않았다.

몸속에 각인된 듯 감각이 돌아왔다.

슬슬 발동이 걸렸다.

강렬한 수술 욕심이 고개를 쳐들며 며칠 남지 않은 지방육종 수술이 상당한 긴장을 전했다.

내친김이었다.

마침 손일석이 당직이라 함께 밤을 보냈다.

결코 일복 만만치 않은 의사가 원조 일복을 만났다. 더구나 의욕 충만한 김지훈이 호시탐탐 퍼스트 자리를 노려 무사히 지나갈 도리가 없었다.

치열한 밤을 보낸 후에야 아침 해를 볼 수 있었다.

“어후! 힘들다. 보람찬 날도 하루 이틀이지, 어제는 아주 진을 다 뺐네. 그런데 넌 어째 쌩쌩하다. 체력이 좋아진 거야, 써드 서면서 틈틈이 잔 거야?”

“시차 적응이 아직 안 됐나 봐. 낮에 더 졸려.”

별게 다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어쨌든 눈이 벌게진 써전 두 명이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오성민 어머니가 입원한 병실로 들어서는 김지훈을 본 신현수가 피식 웃었다.

“경석이 형, 월요일 수술이 기대되지 않아요?”

“그건 둘째 치고, 수술 대비해야 한다고 당직 같이 서는 것도 모자라 오늘도 수술 들어간다더라. 정말 못 말릴 놈이야.”

“제수씨가 천사죠.”

“백번 동감이다.”

그렇게 목, 금이 흘렀다.

김지훈과 오성민에겐 매우 중요한 시간이었다.

***

엄정남이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들에게 들어 일반외과 근무가 힘든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어머니인 자신이 암으로 수술을 앞두고 있는데도 얼굴 보기 힘들었다.

아침 회진, 점심 식사, 저녁 회진 때 한 번씩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일과가 끝난 후에도 당직인 날은 눈이 시뻘게진 채로 아침에 나타났다.

‘잘 먹고 잘 사는 줄 알았는데.’

며느리는 아이까지 친정에 맡기고 수발을 들었다. 가슴에 못이 박힐 정도로 모진 소리를 퍼부었는데, 시어머니도 어머니라는 말을 하며 곁을 떠나지 않았다.

솔직히 병명을 들은 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나마 의사인 아들과 냉랭함 속에서도 곁을 떠나지 않는 며느리가 아니었으면 하루 종일 두려움에 벌벌 떨었을 것이다.

미안한 마음이 들 법도 했고, 아픈 몸을 의지할 곳이 어디인지 빤히 알면서도 까닭 모를 미움은 가시지 않았다.

그동안 깊게 파인 감정의 골에 불안과 공포가 더해졌는지도 몰랐다.

“넌 시어미가 차가운 물 싫어한다는 것도 몰라? 다시 떠 와.”

가시 돋친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며느리가 아픈 시어머니를 간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도 사라지지 않았다.

수술과 암이라는 병이 떠올라 겁에 질릴 때마다 더욱 심한 소리를 해 댔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보호자 침상에서 쪼그린 채 잠을 청하는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 이제껏 건강하게 잘 살아왔는데 이런 몹쓸 병에 걸린 것도 며느리 탓이라 생각했다.

‘네가 들어온 이후로 되는 일이 없어. 이제는 시어미인 나까지 잡아먹는구나.’

미움이 미움을 키우는 사이.

홀로 있을 때면 눈물을 펑펑 쏟고 있었다.

한평생 살 마주 댔던 남편도, 금이야 옥이야 키웠던 딸자식도 입원하던 날 얼굴 본 것이 다였다.

위안을 줄 사람이 필요했다.

보기도 힘든 아들과 의사들에게 매달렸다.

가장 헌신적인 사람을 앞에 두고 말이다.

김지훈이나 손일석이 환자가 어떤 상태인지 모를 리 없었다. 그중에서 암 환자의 불안과 공포는 특히 심하다.

다만 수없이 보아 왔어도 머릿속으로만 이해될 뿐 가슴으로 알기 힘든 일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어머니, 많이 불안하시죠?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있으니까 우릴 믿으세요. 며느님이 항상 곁에 있어서 다행입니다.”

“제수씨, 어머님이 불편 호소하시면 김 교수나 제게 말씀해 주세요.”

VIP 신드롬도 주의해야 했다.

불편한 관계를 알고 있다고 특별한 방법을 찾다 보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었다. 오성민의 아내에게 뜻하지 않은 심적 부담을 줄지도 몰랐다.

평소처럼 다른 환자와 똑같이 대하는 것이 마땅했다.

환자의 불안에 최대한 공감하고, 보호자에게 주의할 점을 상세히 설명해야 하는 의사의 자세를 견지했다.

환자에게 가장 큰 위안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가족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금요일 저녁, 최종 점검을 마친 후 김지훈과 손일석이 오성민과 따로 자리를 가졌다.

“성민아, 얘기 들었어. 많이 힘들지?”

“죽겠다. 너도 어머니가 와이프를 어떻게 대하는지 보고 있잖아. 일 있다고 간병 못한다는 딸은 매일 찾으면서, 와이프한테는 할 말 못할 말 다 하는 거 보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 수술 끝나고 퇴원하면 싹 정리할 생각이야.”

어릴 적 기억에 의지해 평생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타인보다 못한 관계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입맛이 썼다.

“그게 최선이라면 그렇게 해야지. 내년에 정말 펠로우 그만둘 거야?”

“서울에서 살면 어떤 식으로든 부딪치게 될 거야. 나 힘든 건 감수할 수 있지만, 와이프 눈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시간을 두고 몇 마디 더 나누었지만 오성민의 결심은 확고했다. 그동안 들인 노력과 시간이 아깝다는 말은 설득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제수씨도 알아?”

“얘기했어. 자기 때문이라고 도리어 미안해하더라. 그동안 와이프가 얼마나 애썼는지 알고 있으면서 보고만 있던 내가 가장 나쁜 놈이었어.”

답답하고 안타까웠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꽉 막힌 문을 열 유일한 열쇠는 오성민과 며느리가 아니라 바로 어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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