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68화 (968/1,329)

12화. 동료의 힘 Ⅲ (1)

머릿속이 팽이처럼 팽팽 돌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대안이 없다면 모르지만 스승의 손이라는 너무도 훌륭한 대안이 있기에 처한 상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내가 집도를 한다면 다음 주 내내 원주에 갈 수가 없다는 말이네. 장인어른은 몰라도 경아 씨가 허락할까? 그보다 성민이 어머니인데 내가 수술해도 괜찮은 걸까?’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가 하나 남았다.

“만일 제가 집도한다면 오성민 선생과 어머님 의사가 가장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가장 중요한 문제야. 단, 난 누가 참여를 해도 최고의 수술 팀이라 믿는다.”

확고한 신뢰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얼굴을 펴지 못했다.

VIP 신드롬이란 말이 있듯, 밀접한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을 수술한다.

그 자체로 큰 부담이 되기 때문이었다.

주저하는 기색에 송재덕 교수가 깔끔하게 정리했다.

“지훈이가 승낙하면 집도의로서 수술 팀 정하고, 성민이는 가족과 함께 수술 여부를 결정하면 되는 일이다. 이 교수 말대로 집도는 교수가 아니라 의사가 하는 거야. 가장 적임자가 누구인지는 우리 눈이 가장 정확하지 않겠니?”

특유의 말투가 사라졌다.

그만큼 심사숙고했다는 말이었다.

오성민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지훈이가 어머니 수술을? 분명 내가 있다고 특별한 대접을 기대하며 오셨을 텐데 허락하실까? 어떤 병인지 아시게 되면 더욱 교수님들에게 매달릴 텐데 가능할까?’

수술과 집도의 선택은 환자의 당연한 권리였다.

그러나 교수들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 여러 걱정이 앞섰지만 어머니는 몰라도 자신은 김지훈을 믿고, 어떤 실력을 가졌는지 잘 알기에 동의할 수 있었다.

“집도의와 수술 팀이 확실하게 결정되면 가족과 상의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김지훈의 대답만 남았기에 별말 없을 줄 알았던 이준영 교수가 오성민에게 눈길을 주며 입을 열었다.

지난날의 아픈 경험이 수많은 생각을 하게 했고, 오성민이 처한 상황 역시 예사롭게 넘길 수 없었다. 의사이자 자식이라는 사실을 십분 고려해야 했다.

“오성민, 어머님과 가족 동의는 너 혼자 직접 받아. 집도의가 결정할 일이지만 너도 수술에 참가했으면 좋겠다. 단, 세컨이나 써드로.”

오성민이 흠칫 놀랐다.

아무리 관계가 악화됐어도 부모와 자식 간이다.

치료하기 어려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수술의 위험성과 그에 따른 합병증까지 설명해야 한다. 심지어 사망까지 말이다.

냉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저 혼자 받으라는 말씀이십니까?”

“힘들겠지만 어머니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오성민 너야. 의사로서, 자식으로서 어떤 일이 생겨도 후회하지 않기를 바란다. 어머니 또한 가장 신뢰하는 의사가 바로 너일 거다.”

‘난 이미 어머니를 잃었지만, 어머니와 넌 서로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

더 이상 말은 없었지만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누구든 죽음과 맞닥트리면 가족부터 떠올리게 된다. 자식의 말에서 삶을 보고, 자식의 손으로 삶을 구한다면 마음이 변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수술도 그런 이유로 참가하길 바랐지만 혈육이기 때문에 퍼스트조차 금하는 것이 마땅했다.

만에 하나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때 자식의 입장에 서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것이 빤하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절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성민이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래. 후회할 일은 하지 말자. 병원을 떠나도, 인연을 끊고 살아도 어머니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

“알겠습니다.”

이제 김지훈에게 공이 넘어갔다.

임시 귀국만 아니었다면 당장 수술 준비에 들어갔을 것이다. 처한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고경아에게 반드시 말하고 결정해야 할 일이었다.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가 전화했다.

반응은 빤했다.

의사가 한두 명도 아닌 데다 임시로 귀국한 사람이 수술한다는 소리를 하고 앉았으니 한숨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욱이 김지훈의 성격과 일반외과 분위기를 고려하면 달랑 수술만 하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떠나기 전까지 환자에게 매달릴 것이 빤했다.

교수들의 신뢰가 고마우면서도 원망스러울 것이다.

단순히 수술 한 건이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기에 어쩔 수 없이 오성민의 상황까지 말했다.

가급적 긍정적인 말이 나오길 기대했건만 가장 답하기 어려운 말이 터졌다.

(지훈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여러모로 난감하네요.”

(나하고 희연이 말고도 난감한 이유가 많은 모양이네. 결국 수술하고 싶다는 말이네요. 아휴! 못 살아. 병원 돈으로 간 유학과 연수만 아니었으면 당장 안 된다고 했을 텐데 말도 못하겠고, 지훈 씨 뜻대로 해요.)

“성민이 어머님만 아니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예요. 나도 정말 답답하고 경아 씨 볼 낯이 없어요. 스승님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결정을 하셨는지 모르겠네. 미리 말씀이라도 하시든지.”

(정말 아무 소리도 못 들었어요?)

“힌트라도 주셨으면 이렇게 갑자기 전화하지도 않았죠. 그동안 통화할 때는 안 그러셨는데, 어떻게 더 무뚝뚝해지시는지 모르겠어요.”

묘한 콧소리가 터졌다.

(아이고! 내가 못 살아. 이준영 선생님도 말만 잘하시면서 왜 지훈 씨한테는 그렇게 무뚝뚝하신지 모르겠어요. 지금 병원 전화죠? 휴대폰이나 확인해요.)

휴대폰?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휴대폰 화면이 까맸다.

완전히 죽었다.

어젯밤 술자리에 오성민 일까지 겹쳐 잘 자라는 전화할 시간을 놓쳤고, 오늘도 이리저리 인사한다고 바빠 충전조차 하지 못했다.

“배터리가 없네. 근데 휴대폰은 왜요?”

(이준영 선생님, 이혁민 선생님, 송재덕 선생님하고 어젯밤에 통화했어요. 수술 말씀하시면서 얼마나 미안해하셨는지 알아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어젯밤에요?”

(지훈 씨하고 연락이 안 돼서 밤늦게 원주에 전화하셨잖아요. 그 시간에 도대체 뭐 하고 있던 거예요? 나 몰래 나쁜 짓 하고 다니는 거 아니에요? 믿어도 돼요?)

아뿔싸!

‘어쩐지 무작정 밀어붙일 스승님이 아니신데 치고 들어오신다 했다. 그럼 경아 씨가?’

“괜찮다고 그런 거예요?”

(난 절대 안 괜찮죠. 아빠가 옆에서 얼마나 눈총을 주던지 어쩔 수 없었어요. 좋은 방향으로 결정해요. 참! 다행히 희연이가 나 없어도 엄마 아빠 품에서 잘 놀아서 이번 주에 경희랑 서울로 올라갈 거니까 주말에 데리러 와요. 어떻게든 시간 내요.)

결국 김지훈만 빼고 모두 입을 맞췄다는 말이었다.

뭔가 소외된 느낌이었지만 정말 다행이었다.

꺼진 휴대폰만 원망할 처지였다.

가장 큰 걱정을 덜자 오성민의 대답 여부와 함께 수술 걱정이 앞섰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면서도 머릿속 그림을 따라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준영 교수가 시치미를 딱 떼고 있었다.

“결정했어?”

“예. 오성민 선생 결정만 남았습니다.”

“알았다. 오성민, 내일 중으로 결정해서 알려 줘. 김지훈, 집도와 별개로 어떻게 수술해야 할지 네 의견을 말해 봐.”

역시 환자에 관한 문제는 틈을 줄 스승이 아니지만,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면 정말 곤란하다.

하지만 김지훈이 누군가!

지난밤부터 오늘까지 검사 결과를 상기하며 나름 수술 방법을 생각했다.

그때 신기동 교수가 뒤늦게 얼굴을 보였다.

‘어후! 살벌한 선생님들은 다 모이셨네.’

얼굴을 굳힌 김지훈이 수술 계획을 설명했다.

답답함이 싹 사라졌다.

눈에서 생기가 돌았다.

검사 결과를 가리키는 손에 진지함이 뚝뚝 묻어났다.

촉박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두 번의 직접적 경험과 다른 수술을 통해 쌓은 경험이 어우러지며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이준영 교수의 입가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설명이 모두 끝나자 송재덕 교수가 김지훈과 오성민을 번갈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성민아, 우리도 저렇게 준비하지 못했을 거야. 네가 집도의를 신뢰해야 어머니도 신뢰하는 법이다. 믿고 맡기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다. 반드시 그럴 거다.”

오성민이 남몰래 콧등을 찡그렸다.

누가 집도를 하는지 때문이 아니었다.

‘역시 김지훈이네. 이런 상황에서도 신경 써 줘서 고맙다.’

광범위 절제가 필요한 것은 알지만 김지훈은 그 이상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커질 수 있는 수술에 걱정이 앞섰고, 그 때문에 어머니가 젊은 의사의 집도를 동의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지훈이라면 믿을 수 있어. 설득은 내 몫이고, 마지막으로 자식 도리를 한다고 생각하자.’

“저도 어머님께 확실하게 설명하고 동의받겠습니다.”

“그래, 그래. 의사는 그래야 된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신기동 교수의 눈이 번쩍였다.

“유학 보낸 보람이 있네. 오성민, 나 같아도 지훈이에게 수술을 부탁하겠다. 잘될 거야.”

김지훈의 눈도 반짝였다.

신기동 교수가 대놓고 칭찬을 하다니, 해가 서쪽에서 뜬 모양이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스승인 이준영 교수의 반응이었다.

기대와 달리 책상 한 번 턱 치고 일어났다.

손이 커서 그런지 소리도 상당히 컸다.

“어떤 결정이 나든 그 전까지 최선을 다해 준비해. 송재덕 선생님, 가시죠.”

줄줄이 일어선 교수들이 눈길을 주고는 각자 퇴근을 서둘렀다. 신현수, 이경석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조용히 자리를 비웠다.

김지훈과 펠로우만 남았다.

“성민아, 집도의 문제는 부담 갖지 마. 선생님들이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만일 어머님이 반대하시면 바로 수술해 주실 거야.”

“그렇겠지. 하지만 나도 네가 어머니 수술해 줬으면 좋겠다. 부탁 하나 하자.”

“무슨 부탁?”

“아직 병명이 무엇인지 말씀도 안 드렸지만 내일 우리 과로 입원하실 거야. 내가 먼저 설명하고 동의받겠지만, 네가 한 번 더 설명해 주면 좋겠어. 아무래도 난 자세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다.”

그럴 것이다.

집도의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불과 5일 후에 수술인 데다 오성민이 동의한 이상 수술 팀부터 정해야 했다.

모두들 빤히 알고 있는 수순이기에 김지훈을 보고 있었다.

다들 기대하는 눈치였다.

다시없을 큰 경험이 될 수술이기도 했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입을 열었다.

“퍼스트는 이준영 선생님, 세컨은 성민이. 써드는 상수나 하석이로 구성하는 게 좋겠어.”

“이준영 선생님? 진료하시는 날이야.”

“핵심 과정만 부탁드릴 생각이야. 그날 오는 환자는 오창도 선생님에게 부탁하면 될 것 같아. 상황 알면 환자들도 이해해 주실 거라 믿어.”

“만일 안 된다고 하시면?”

“어차피 열고 닫을 때 퍼스트가 또 한 명 있어야 하고, 모두 함께 수술하고 싶지만 부위를 생각하면 일석이가 가장 적당할 것 같다. 일석아, 가능하겠지?”

손일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수술은 대타라도 좋고, 볼 수만 있어도 좋다.’

“혈관 파트 열심히 했어. 성민아, 내가 퍼스트를 서도 되겠지? 최선을 다할게.”

“난 집도의 결정을 따를 뿐이야.”

이로써 수술 팀까지 결정됐다.

물론 절반의 결정이었고, 아직 철저한 준비와 함께 오성민 어머니의 동의가 남았다.

흔히 경험이 적다고 생각될 수밖에 없는 젊은 집도의와 수술 팀, 쟁쟁한 교수들의 존재, 가족 내부의 불화까지 어쩌면 동의서가 가장 큰 난관일지도 몰랐다.

여러 고민 속에 하룻밤이 지났다.

오성민의 어머니가 예정대로 입원 수속을 밟았다.

차트 겉에 쓰인 주치의, 김지훈이란 이름이 새삼스러웠다. 아직은 환자를 만날 시간이 아니었고,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수술 중인 스승의 휴식 시간을 기다렸다.

단둘이 자리한 데다 주저할 일이 아니기에 머뭇거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요청했다.

“스승님, 퍼스트를 서 주십시오.”

“뭐? 퍼스트? 자신 없어?”

“항상 자신감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이번 수술은 스승님과 반드시 함께해야 합니다. 핵심 과정만 도와주십시오.”

“왜?”

이유는 많았다.

간을 건드리니 대가 소리를 듣는 의사와 함께 수술하고 싶다는 욕심, 오성민 어머니의 냉담한 반응을 사전에 피하고 싶은 마음, 행여 있을지 모를 불상사에 대비하고자 하는 생각까지.

그러나 그 모든 사유를 덮고도 남는 이유가 있었다.

답은 간단명료했다.

“제 스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무뚝뚝함을 깨려던 이준영 교수가 입을 다물었다.

출국하면 일 년 반 후에나 얼굴을 본다.

제자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사실 속마음이 다르지도 않았다.

“내 진료일이다.”

“오창도 선생님께 이미 부탁드렸습니다.”

거미줄 단단히 쳤다.

진료 예약한 환자에게 미안한 일이었지만 다행히 재진 환자 위주였다.

핵심 과정만이라고 해도 시간이 꽤 걸릴 테지만 어차피 환자에게 양해를 구하는 일에는 차이가 없었다. 오창도 역시 입지를 다졌기에 큰 문제도 없을 것이다.

‘사실 나도 네 손을 보고 싶었다.’

“고민해 보자.”

허락한 것과 다름없었다.

김지훈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예정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아직 승낙…….”

“가 보겠습니다.”

중간에 말 뚝 자르고 후다닥 빠져나갔다.

“이 자식이 이젠.”

이준영 교수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김지훈의 행동이 괘씸하기보다 흐뭇했다.

어느 틈엔가 제자와 함께하는 수술을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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