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67화 (967/1,329)

11화. 동료의 힘 Ⅱ (2)

두런두런 대화가 이어졌다.

아직도 CT와 MRI가 걸려 있었다.

간간이 유학 생활에 대한 말이 나왔지만 대부분 지방육종의 치료와 수술에 관한 내용이었다.

다들 김지훈의 말을 들으며 은연중 같은 생각을 했다.

‘미국 의사들도 보기 힘든 질환인데 수술까지 들어갔어? 응급실 근무까지 자청하고, 유학 가서도 똑같이 사는구나.’

신현수가 모처럼 입을 열었다.

‘역시 대단한 놈이야. 유학 간 보람이 넘치네.’

“선생님들께 인사는 드린 거지?”

“그럼. 오자마자 다 인사드렸다.”

“빈손은 아니겠지?”

역시 현실적이고 예리한 놈이다.

설마 선물 따위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자료와 기구까지 잔뜩 가져왔어. 선생님들이 먼저 검토하고 나시면 조만간 숙제 듬뿍 주실 거다.”

“기대할게. 오늘 시간 돼? 제수씨는 어디 있어?”

“시간이야 많지. 같이 오려고 했는데 희연이가 밤낮을 못 가리는 데다 낯을 보통 가리는 게 아니라서 와이프는 원주에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도 소용없더라.”

“얼굴 익히기 전에 갔으니까 당연하겠지. 성민이 일은 하루 이틀 내에 해결될 일이 아니고, 너도 왔는데 술이나 한잔하자.”

기분이 날까?

손일석이 딱딱 손뼉을 쳤다.

“신 교수가 간만에 마음에 드는 소리 하네. 이런 분위기에서는 답도 안 나오고, 그동안 모두들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받았는데 기분 좀 전환하자. 성민이 문제도 술 먹다 좋은 생각 날지 누가 알겠어?”

평생 아픈 사람만 보고 사는 직업이다. 타인의 고통에 무덤덤할 수 없지만 일상 자체까지 매몰될 수 없는 일이었다. 오성민의 거취 문제 역시 누가 등 떠밀어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직인 김경수만 남고 모두 저녁 겸 술자리를 가졌다.

술기운에 흥이 조금 붙다 말고 지방육종이 또 거론됐다. 의사로서 갖는 당연한 관심이었다. 상당한 난이도와 위험성에 덩달아 김지훈의 경험과 미국 의료에 관한 일까지 입에 오르내렸다.

궁금한 일이 많았지만 경과는 간단했다.

일반외과 및 응급실에서 정식 근무 하기 위해 무지무지 노력했다. 다행히 원하는 바를 일부 이뤘고, 학술적인 부분과 새로운 기술 및 경향까지 배워야 해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미국 의료는 돈이 죽이고, 돈이 살리는 것 같아. 부러운 점이 너무 많은데 돈이 없으면 따라 할 수가 없는 것들이야.”

뭐 그런 얘기였다.

결과적으로 김지훈은 미국에서도 유감없이 일복을 발휘했고, 피곤을 몸에 달고 다닌다는 말이었다.

“우리 지훈이는 노력 빼면 시체, 체력 빼면 보통 인간이지. 에휴! 난 인간적인 게 좋은데. 현수야, 안 그래?”

“나도 그게 좋아.”

“어색해. 우리 신 교수님이 좋다니까 왠지 어색해.”

“내가 너 시비 걸 줄 알았어. 손 펠로우, 내일 보자. 지훈아, 언제 떠나? 온 김에 며칠 있다 가도 괜찮지 않아?”

“열흘 후 출발 예정이야. 온 김에 선생님들과 식사도 해야 되고, 장인어른이 빨리 가면 알아서 하라고 노발대발하신다.”

손일석이 씁쓸하게 웃었다.

“희연이 얼굴 익힐 때까지 절대 가면 안 된다는 장인어른이 계신데, 손자 얼굴도 안 보는 어머니는 또 뭐냐? 세상 참 우습다.”

또다시 오성민에 대한 말이 오고 갔다.

어머니의 행동에 동의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수술을 요하는 환자가 친구 어머니다. 당연히 신경 써 최선을 다해야 했다.

수술과 전혀 관계없을 김지훈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 때문인지 한참 대화가 오고 가던 자리 말미에 신현수가 뜻밖의 말을 했다.

김지훈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내가 직접 이준영 선생님께 집도를 부탁드리라고?”

“어차피 우리 중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질환이고, 성민이도 네가 나선다면 좋아할 것 같아. 유학 중인 친구까지 신경 쓴다는 말이 성민이 어머니 귀에 들어가면 마음이 조금 변하실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나서도 되나? 생각 좀 해 보자.”

병원에 적을 두고 있지만 정식 근무 중이 아니다. 어차피 환자와 접촉도 없을 테고, 부탁은 오성민과 수술 팀이 직접 하는 것이 사리에 맞았다.

개인적인 친분이나 관계에 기댈 일도 아니었다.

의외로 난감했다.

고민하는 김지훈을 보던 손일석이 피식 웃었다.

“성격은 다르지만 그놈의 일복 여전하네. 잠시 귀국했다고 인사하러 와서 환자 때문에 고민하는 놈 흔치는 않을 거야.”

“일석아, 놔둬. 다 타고난 팔자 아니겠어? 휴가 때도 환자 때문에 놀다 말고 병원 온 적이 있잖아. 어쨌든 지훈이 일복 덕에 우리가 편할 수도 있다는 생각 안 들어?”

“형 말도 일리가 있네요. 저 자식이 몰고 다녔던 환자를 우리가 다 봐야 했다고 생각하면? 흐음! 공평하게 나눈다고 해도 끔찍하네.”

그사이 고민이 끝났다.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것이다.

내일 일과가 끝난 후 자리를 갖기로 하고, 술자리를 마무리했다.

막판에 거칠게 돌린 맥주 몇 잔으로 김지훈의 임시 귀국을 환영했다.

“지훈아, 내일 저녁에 보자. 네 얼굴 보니까 어째 성민이 일도, 어머님 수술도 잘 풀릴 것 같다.”

원래 하룻밤 자고 원주로 갈 생각이었는데 꼼짝없이 하루 더 머물게 생겼다.

단, 혼자 결정 못한다.

반드시 주인마님의 허락을 득해야 한다.

“경아 씨, 나예요.”

구구절절 상황을 설명했다.

좀처럼 엄마 품에서 떨어지지 않는 희연이 때문에 약간은 곤란해할 줄 알았는데 깔끔한 답이 돌아왔다.

(No Problem.)

희연이가 며칠도 안 돼 할아버지 품에 안겨 재롱을 부린 덕이었다.

간만에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던 딸자식을 부모에게 맡기고 형제들과 보내는 하루하루가 꽤 홀가분하고 즐거울 것이다.

역시 피는 못 속인다.

역시 깔끔하게 대답했다.

“Thank you, sir.”

“야! 영어 좀 하네. 발음이 달라졌어. 우리 지훈이가 유학 가더니 달라졌어요.”

“여기까지가 다야. 지들끼리 정신없이 말하면 몇 마디 못 알아들어. 희연이가 더 잘할지도 몰라, 인마.”

언니 찾아 원주로 간 고경희의 빈자리를 김지훈이 꿰찼다. 남자 두 놈이 멀건이 앉아 대화만 나눌 리 만무했다.

맥주 앞에 놓고 그간의 소회를 풀었다.

손일석의 눈이 서서히 초점을 잃었다.

시차 적응이 안 된 김지훈은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

형세가 완전히 뒤바뀌어 김지훈은 떠들고, 손일석은 졸다 깨다를 반복했다.

그렇게 임시 귀국 후 첫 병원 방문 날이 저물어 갔다.

어째 뭔가 크게 빠진 듯했다.

‘왜 이렇게 찝찝하지? 성민이하고 어머니 때문인가? 스승님께서 수술을 하시면 가장 확실하게 끝나겠지만 수술 시간을 빨리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내가 집도의라면 어떻게 접근했을까?’

낮에 보았던 검사 결과를 떠올렸다.

후복강에서 발생해 주변 혈관을 침범했다.

암에도 불구하고 이때까지는 별다른 증상이 없어 대부분의 환자들이 무심코 지나치기 마련이었다.

설혹 병원에 내원했다고 해도 필요한 검사를 권할 수 있는 시기도 아니었다.

간을 침범했을 때 증상이 보다 심해졌을 것이다. 그래야 소화불량, 간 기능 이상, 가벼운 복부 통증 정도에 불과했을 테니, 어쩌면 오성민의 어머니는 자식이 의사인 덕을 본 것일지도 몰랐다.

‘빠르다고 할 수 없지만 늦은 경우도 아닌데, 손쓰기 힘들 정도로 퍼지는 병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성민이 어머니도 무엇인가 불편한 느낌이 지속돼 가족에게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이 빙빙 돌며 머릿속이 뒤엉켰다.

‘성민이가 그만둘 생각을 한단 말이지? 능력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붙어 있으려고 애쓰는데 유능한 써전은 가족 일로 그런 생각까지 하다니 단단히 꼬였네. 주변에서 설득한다고 될 일일까?’

이래저래 싱숭생숭했다.

***

다음 날 점심 무렵 병원으로 향했다.

어제 인사하지 못한 응급실, 중환자실, 수술실, 병동을 차례로 돌았다.

다들 깜짝 놀랐고, 차상수와 오하석이 특히 반가워했다.

“상수가 치프 되고, 하석이가 2인자가 되는 날도 오네. 인턴 때 뭣도 모르고 뛰어다니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세월 빠르다.”

“선생님, 유학 가신 지 6개월밖에 안 됐어요.”

“그런가? 하석아, 진우는 잘 지내지?”

그렇다는 듯 단발머리가 찰랑찰랑 흔들렸다.

송진우나 강병옥이나 시험 준비에 바쁠 시간이었다. 더구나 막판이었다. 밤늦게 잠깐 얼굴 보기로 하고, 일과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안면이 있는 사람과 마주칠 때마다 무척 반가워했다. 은근히 기분 좋은 일이었고, 마치 다른 세상 사람처럼 혼자 빈둥거리는 것이 어색하기도 했다.

다행히 겨울 해는 짧았다.

어느새 연구실 불을 밝혀야 했다.

오성민까지 하나둘 모였다.

마지막으로 거구의 의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화로는 농담까지 서슴없이 했지만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제자였다. 이준영 교수의 눈길만으로도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오성민 파트 교수인 이혁민 교수와 지동훈 교수는 물론 송재덕 교수까지 함께했다. 이미 인사를 한 탓도 있겠지만 반가움보다 진지함과 무거움이 감돌았다.

이준영 교수의 안색이 유난히 딱딱했다.

예전 기억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오성민, 네 얘기 들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치료하는 동안 의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가족과 함께 네 길을 가야 어머님과의 관계도 회복될 거다.’

“오성민, 환자 상태 설명해.”

말투는 변함이 없었다.

오성민이 다소 당황했다.

“예? 선생님, 그게…….”

통상의 환자가 아니다.

다른 환자와는 모든 경우가 달라 의사로서 객관적으로 설명하기 무척 힘든 입장일 수밖에 없었다.

이혁민 교수가 눈가를 굳혔다.

“오성민, 어머니가 아니라 환자다. 우리는 지금 어머니의 질환이 안타까워 모인 것이 아니라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결정하기 위해 모였다. 시작해라.”

가장 정 많은 송재덕 교수마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눈가에 주름을 만든 채 주저하던 오성민이 일어나 어머니의 검사 결과를 하나하나 설명했다.

진지하게 귀 기울이던 이준영 교수가 질문했다.

“치료 방법은?”

“김지훈 교수의 말을 듣고, 어젯밤 자료를 모두 확인한 결과 광범위 절제 이외에 다른 치료는 없었습니다. 진행이 느리다고 해도 이미 간까지 침범한 이상 빠른 수술이 필요합니다.”

이미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오늘 모인 이유도 질환에 대한 스터디와 준비만이 아니라 사실상 수술 팀 및 날짜를 정하기 위함이었다.

집도를 부탁한 오성민이 초조한 눈으로 이준영 교수를 보았다.

미리 부탁을 했지만 급하지 않은 환자는 없었다. 개인적인 친분에 기대는 일을 엄하게 금하는 교수들이기도 했다.

결국 둘 중의 하나였다.

스케줄에 따라 수술 날짜를 잡는다.

상당히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아니면 오성민이 처한 상황을 감안해 예외를 둔다.

이미 부모와 연을 끊을 각오를 했고, 병원마저 떠나기로 했지만 솔직히 기대가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어쩌면 수술을 계기로 누군가는 상대를 이해하고, 용서를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잠시 침묵을 지키던 이준영 교수가 교수들과 눈빛을 교환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하자 마지막으로 김지훈에게 눈길을 주었다.

“김지훈, 출국 날짜가 언제야?”

“다음 주 토요일입니다. 왜 그러십니까?”

고개만 끄덕였다.

“오성민, 수술 날짜는 다음 주 월요일이다. 마취과와 이미 얘기 됐으니까 차질 없도록 확실하게 준비해.”

역시 제자를 아끼는 교수들이었다.

예외적인 배려였고, 당연히 다른 환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예비로 남겨 두는 수술실을 떠올린 것은 김지훈만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월요일이면 선생님 진료 날 아닙니까? 수술 팀은 어떻게 구성하실 생각이십니까?”

“집도의가 결정할 일이다.”

물론 그렇다.

문제는 집도를 누가 하는지였다.

결코 후배인 오성민의 사정을 외면하지 않을 사람이기에 다들 이준영 교수가 집도할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가타부타 말도 없이 시선을 돌렸다.

이혁민 교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성민, 김지훈이 승낙한다면 집도를 맡길 생각이다. 김지훈, 가능하겠나?”

모두들 깜짝 놀랐다.

김지훈 역시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입도 열지 못했다.

순간 여러 생각이 오갔지만 한마디가 뇌리에 콱 박혔다. 바로 ‘승낙’이라는 말이었다. 제자로서 생각하기 힘든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김지훈, 가능한지 물었다. 집안 행사는 끝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설마 출국 준비 때문에 시간이 안 되나?”

“그건 아닙니다만, 전 임시로 귀국했습니다. 그리고 수술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선생님들 중에 한 분이…….”

“임시 귀국이어도 넌 우리 병원 소속이니까 아무 문제 없다. 수술 역시 경험 많은 의사가 하는 것이 마땅해. 교수라고 모든 수술을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적절한 능력을 갖춘 의사가 해야 돼.”

스승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미 충분히 상의했을 테고, 김지훈이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결정한 후일 것이다.

그러나 애초부터 가장 적임자는 이준영 교수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준영 교수가 쓰윽 눈길을 주었다.

“유학 공연히 보낸 거 아니야. 우리도 보지 못한 지방육종 환자를 봤고, 수술에 참여했다면 네가 가장 적임자다.”

변함없는 믿음, 아니 더욱 강해진 신뢰였다.

그러나 섣불리 대답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직도 용암처럼 펄펄 끓는 수술 욕심을 버리고 냉정하게 생각해야 할 때였다.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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