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동료의 힘 Ⅱ (1)
펠로우 수준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방팔방 떠들 일도 아니기에 신현수와 이경석에게 먼저 알렸다. 동기들끼리 모여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었지만 진전은 없었다.
“대충 눈치로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은 몰랐다. 일석아, 확실하게 결정한 것 같아?”
“말하는 투로 봐서는 그런 것 같아요. 신경 쓴다고 썼는데 가장 큰 원인이 집안일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공연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심적 부담이 컸고, 어머니와의 관계가 갈수록 악화되며 의욕마저 잃은 것이 분명했다.
결국 이혁민 교수와 지동훈 교수까지 알게 됐다.
‘어머니와 관련된 문제라! 이준영 선생님과는 차원이 다르지만 상황을 들어 보니 스트레스는 그에 못지않겠어. 힘들어도 이겨 내야 할 일이다.’
“오성민, 다들 자기 자신이 제일 힘들다고 느끼는 법이다.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면 힘들지 않은 사람도 없다. 네 자신과 가족의 삶을 지키려면 스스로 이겨 내는 수밖에 없어. 휴가라는 방법도 있으니까 원한다면 당분간 쉴 시간을 가져도 좋다.”
“오성민 선생,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지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 우리 같은 파트잖아. 오 선생과 평생 함께 일하고 싶다.”
오성민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디서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이 풀릴까?
집안일을 직장까지 끌어온 것도 모자라 걱정만 끼친다는 생각에 미안하고 창피할 뿐이었다.
반면 누구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처지라면 다들 다르지 않을 겁니다.’
한동안 설득 아닌 설득이 이어졌다.
좀처럼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는 모습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이경석이 콧등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후회할 선택은 하지 마. 내가 인턴 하다 성질 못 이기고 여러 번 때려치웠다는 걸 너도 알잖아?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창피해.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절대 같은 행동은 하지 못할 거야.”
오성민이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경석에겐 다시 꺼내기 싫은 기억이겠지만 직장 내 일과 성격이 완전히 다른 일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함께 걱정하고, 고민해 줘 고맙다는 미소만 머금었다.
오성민이 결국 입을 다물었다.
평소처럼 일하며 웃고 있었지만 펠로우를 그만두기로 한 결심은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당사자가 결정했고, 더 이상 언급하지 않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얼굴을 보았다.
오성민의 어머니가 병원에 들른 것이다.
표정이 안 좋아 일이 엄청 커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부터 들었지만 내원한 이유가 있었다.
만성적인 소화불량, 간 기능 저하, 복부 우상부의 지속적인 통증으로 검사를 받기 위해 내원한 것이다.
며느리를 지독하게 미워했지만 아들이 의사라는 사실은 인정한 모양이었다.
이것도 기회일지 몰랐다.
다들 시간 나는 대로 신경 썼다.
특히 손일석이 아들처럼 부지런히 쫓아다녔다.
“어머니, 일단 피검사부터 하고 계세요. 초음파 하셔야 할 때 성민이가 없으면 저나 경수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혈액검사 소견이 크게 나쁘진 않았다.
개인 병원 소견대로 간 기능 약화만 보였다.
초음파를 시행했다.
우측 간과 후복막에 걸친 지방 덩어리가 관찰됐다.
보기에 따라 예사로울 수도 있고, 문제가 될 것 같기도 했지만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는 소견이었다.
크기가 상당히 커 원칙대로 CT와 MRI를 예약했다.
‘거대 지방종인가?’
오성민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손일석과 김경수는 별문제 없을 거라며 기다려 보자는 말만 했다. 도리어 좋은 기회일 수 있다는 말을 건넸다.
“성민아, 검사받으러 우리 병원에 오신 거 보면 마음이 변하신 거 아닐까?”
“그랬으면 좋겠다.”
“이럴 때 제수씨가 함께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다.”
“그럴 상황은 절대 아니야.”
오성민도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병원을 그만두겠다고 결심한 이후 허구한 날 목소리를 높였다. 부모 자식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관계가 악화됐기에 단순하게 생각할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며칠 후 검사가 시행됐고, 외래 예약 날짜가 다가왔다.
모두들 신경 쓰면서도 일이 바빠 당일이 돼서야 기억해 냈다. 의외로 진료 시간이 꽤 길어졌고, 무슨 일인지 오성민이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오후 늦게야 결과를 받을 수 있었다.
내과 교수의 소견, 방사선과 교수의 판독지를 든 오성민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경수야, 도대체 이게 뭐지?”
“성민아!”
“일석이는?”
바쁜 일이 있는지 지난 며칠간 손일석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일이 끝나면 바로 퇴근했고, 오프 날 원주에 다녀왔다는 말까지 한 터였다.
“찾아볼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손일석이 신현수, 이경석과 함께 웃으며 들어왔다.
“깜짝 놀랄 일이 뭐야? 빨리 말해 봐.”
“형님, 조급하면 설익는 법입니다. 잠시 후 아시게 될 거니까 심호흡하시고 대기 타세요. 현수야, 너도.”
“나 퇴근까지 미뤘어. 별일 아니기만 해.”
기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다들 얼굴이 좋았다.
희희낙락 웃음을 멈추지 못하던 손일석이 살짝 놀라며 머리를 톡톡 쳤다.
“성민아, 얼굴이 왜 그래? 아! 어머님! 결과 나왔어?”
환자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손일석이 눈짓을 주고는 바로 CT와 MRI에 눈길을 주었다. 신현수와 이경석도 자연스럽게 다가가 함께 사진을 확인했다.
분명 이상 소견이 또렷하게 보이는데 정확한 진단명을 내리기 힘들었다. 초음파로 봤을 때와 보이는 양상이 상당히 다르게 보였다.
검사 결과지를 찾았다.
웃음기가 사라졌다.
생각지도 못한 질환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R/O Liposarcoma(지방육종 의증).
지방세포로 이루어진 암이다.
워낙 드물어 평생 한 번 보기도 힘든 질환이었다.
그 탓에 정확한 진단법은 물론 치료법이 어떻게 되는지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확실한 것은 이런 질환일수록 예후가 극히 나쁘다는 점이었다. 의증(의심되는 질환, 혹은 임시 진단)이라는 단어는 아무런 위안이 되질 못했다.
“현수야, 경석이 형, 어떻게 해야 하죠?”
오성민의 물음에 신현수가 눈가를 찡그렸다.
일단 진단이 확실한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맞는다면 자료부터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급한 대로 교과서부터 찾아 해당 질환을 찾았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 시간에 누굴까?
누군가 들어서는 순간 다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국에 있어야 할 김지훈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보며 여유롭게 손을 흔들었다.
“지훈아, 네가 어떻게?”
“경석이 형, 잘 지내셨죠? 다들 모여 있었네. 내가 올 줄 알았나?”
농담할 자리가 아니었다.
손일석이 오성민과 CT를 가리키며 재빨리 눈짓했다.
‘지훈아, 반갑다고 웃고 떠들 분위기가 아니야. 작전 완전히 실패야.’
반년이 넘도록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는데 오자마자 무슨 일인지 모를 일이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심각해?”
의국 분위기가 나쁜 탓이 아니라면 백 퍼센트 환자 때문일 것이다.
상당히 어려운 수술을 앞둔 환자일 것이라 지레짐작한 김지훈이 눈인사를 나누며 뷰박스 앞에 섰다.
‘너무 빨리 왔나? 반갑다는 소리 하나 없네. 환자 문제라 봐준다.’
깜짝 놀라게 한다고 임시 귀국을 비밀에 부쳤건만 반만 성공했다. 말도 못하고 눈만 껌벅이는 스승의 얼굴을 보며 내심 환호성을 질렀는데, 뜨뜻미지근한 동기들의 반응에 완전히 김샜다.
손일석이 꿋꿋하게 입 다문 효과가 전혀 없었다.
어쨌든 첫 번째는 환자다.
유학도 그래서 갔다.
눈 크게 뜨고 꼼꼼하게 살폈다.
김지훈의 안색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검사 결과지를 보기도 전에 진단명을 말했다.
“지방육종이네.”
거의 확정적이라는 어투였다.
오성민이 다급하게 물었다.
“지훈아, 확실해?”
“네 파트 환자야? 후복강에서 발생했고, 지방조직이 우측 간에 침범한 양상으로 봐선 확실해 보여. 이렇게 드문 질환을 미국에서 두 케이스나 보고 여기서도 보네.”
“정확한 진단은 어떻게 해?”
“개복해 조직 떼어 내서 확인하는 것 말고 뾰족한 진단법은 없어. 세포 타입에 따라 다르지만, 간 전이가 발생했다면 수술 이외에 다른 치료는 없는 경우로 보인다.”
오성민의 입술이 바짝 탔다.
“예후는?”
“좋다고 보기 어려워. 일단 완벽하게 제거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인데, 간은 둘째 치고 콩팥 혈관만이 아니라 주변 혈관까지 감싸서 가능할지 모르겠다.”
“정말 항암 치료나 방사선 치료도 의미 없는 거야?”
“나도 미국에서 거의 똑같은 환자 보며 찾아봤는데, 현재까지 발표된 논문이나 치료 성적을 보면 다른 치료는 도움이 안 돼. 수술에 집중하는 게 최선으로 보인다. 쯧! 하필이면 지방육종이냐.”
김지훈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결코 포기를 모르는 의사였기에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만큼 수술이 어렵고, 예후가 나쁘다는 말이었다.
반년 만의 귀국은 이미 사라졌다.
CT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수술만이 최선인데 가능할까?’
“일석아, 현수야, 이 부분 박리가 가능해 보여?”
오성민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모르기에 가장 객관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분명 일이 있어 일시 귀국했을 텐데 그마저 잊은 것 같았다.
손일석이 슬그머니 눈치를 주려 하자 오성민이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가장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의사는 김지훈뿐일지도 몰랐다.
동료이자 친구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모른다.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질환을 세 번째 본다.
즉, 수술에도 참가했다는 말이었다.
무엇보다 환자에 대한 김지훈의 열의와 실력을 인정하기 때문에 객관적 의견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지훈아, 가능하겠어?”
‘아무래도 우리 수준으로는 위험 부담이 너무 커. 최소한 선생님들 중 한 분이 집도를 맡으셔야 돼.’
“미안한 말이지만, 이준영 선생님이나 신기동 선생님께 부탁드리는 게 좋겠어. 두 분이 함께 수술하시면 최상이지만, 예약된 수술 환자 스케줄을 몽땅 다시 짜야 할 텐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잖아.”
“그 정도로 어려운 수술이야?”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유난히 조급해하는 느낌이었다.
‘성민이가 이렇게 급한 성격이 아닌데 이상하네.’
“너도 잘 알면서 왜 그래? 후복강 내 혈관 박리 자체가 어렵잖아. 게다가 이건 암이야. 정말 깨끗하게 제거하지 않으면 백 퍼센트 재발할 테고, 그땐……. 어쨌든 가급적 빨리 해야 하는 데다 하루 종일 걸릴 수술이야. 두 분 다 예약 많으실 테니까 빨리 부탁드려.”
말꼬리를 흐렸다.
재발하면 백 퍼센트 사망에 이른다는 의미였다.
오성민이 털썩 주저앉았다.
얼굴까지 창백해졌다.
진지함과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심상치 않은 얼굴에 김지훈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손일석을 보았다.
‘성민이 어머니야, 어머니!’
‘뭐? 그걸 이제 얘기하면 어떻게 해?’
당황스러운 정도가 아닌지 김지훈의 얼굴이 벌게졌다.
오성민은 의사이면서 보호자였다.
때론 감정적인 요소를 감안해야 보호자가 보다 쉽게 수긍하는 법이다.
객관적인 판단이라지만 아 다르고 어 다른 데다 친구 어머니인데 너무 비관적으로 말했다.
어색한 침묵과 함께 걱정이 앞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구 어머니가 하필이면 예후는 둘째 치고 수술마저 극히 어려운 암에 걸렸다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당혹스럽기만 했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후우! 성민아, 잘될 거야. 나도 이준영 선생님이나 신기동 선생님께 부탁드려 볼게.”
“아니야. 내가 말씀드려야지. 고맙다.”
오성민이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하필이면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집안일이 있어 귀국해 겸사겸사 얼굴 보고 인사도 할 겸 들렀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무슨 조화 속인지 모를 일이었다.
답답한 숨을 몰아쉬던 이경석이 물었다.
“넌 미국에 있어야 할 놈이 어떻게 된 거야?”
“처 할머님 팔순 잔치가 있어서 어렵게 시간 냈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요.”
“팔순 잔치? 손일석, 그럼 넌 알았다는 말이잖아?”
손일석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요새 성민이 얼굴도 안 좋고 해서 그냥 깜짝 놀라게 할 생각이었죠. 지훈이 보면 분위기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일부러 안 알린 건데 완전히 빗나갔네. 어머님이 저런 질환에 걸렸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얼굴이 안 좋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성민이한테 다른 일이 또 있어?”
상황을 전해 들은 김지훈이 인상을 썼다.
“그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 미리 말을 했어야지. 그것도 모르고 너무 비관적으로 말했잖아. 입장만 곤란해졌네.”
“뭐 좋은 얘기라고 말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유학 생활이나 그런 얘기 하는 게 더 효과가 좋을 것 같아서 그런 거야. 너 진지해지면 없던 고민도 생길 수 있어.”
누굴 탓할 일이 아니었다.
반갑기 짝이 없는 얼굴을 보았는데 분위기가 뒤숭숭하기 짝이 없었다.
오성민과 정을 떼다시피 생떼를 부리던 어머니가 지방육종이라는 치명적 암에 걸렸다니, 세상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김지훈이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반가운 재회 대신 답답하고 안타까운 소식부터 들었다.
얼마 남지 않은 기간이지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무슨 이유인지 고경아와 희연이 얼굴이 아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