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동료의 힘 Ⅰ (1)
이준영 교수의 오랜 회상이 끝을 보였다.
은근히 가슴이 떨려 왔다.
아직도 그 목소리, 그 떨림, 그 가슴 시린 먹먹함을 잊을 수 없었다.
스승님!
시간이 지날수록 김지훈에게 처음 들었던 그 말이 오히려 더욱 생생하게 귓가와 뇌리를 맴돌았다.
‘호랑이 같았던 스승님도 그러셨을까?’
이후로도 굴곡진 일이 많았다.
서울 병원에 다시 근무하게 됐을 때는 솔직히 잠 한숨 자지 못했다. 설렘과 기대보다 능력에 대한 불안이 밀물처럼 한꺼번에 몰아닥쳤다.
모두가 선후배인 일반외과 내부에선 큰 문제가 없었다. 금경태의 못마땅한 눈길은 당연하게 받아들였지만 다른 과 교수들의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은 큰 부담이었다.
그때 그런 시각을 깰 기회가 찾아왔다.
운이 좋았다는 말도 맞을 것이다.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복강경은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기회이자 10년 세월을 만회할 전기였다.
밤을 잊고 노력했다.
눈이 아프도록 수술 테이프를 보고 또 봤고, 기구 손잡이가 닳도록 연습했다.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제자에게 반드시 전해야 할 수술법이란 생각으로 떨쳐 냈다.
그로부터 몇 년의 세월이 정신없이 흘렀다.
결국 모든 것을 이겨 냈다.
자신과 김지훈 모두 있어야 할 자리에 우뚝 섰다.
돌이켜 보면 어둠 후에 더욱 밝은 빛을 보았는데 왠지 슬픈 영화를 본 후처럼 아련한 느낌이 다가왔다. 때론 가슴 벅참이 도리어 시리게 느껴질 때도 있는 모양이었다.
‘나도 나이를 먹긴 먹은 모양이구나.’
실로 기대하지 못한 삶이 펼쳐졌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이준영 교수가 눈빛을 굳혔다.
‘고맙지 않은 사람이 없다. 내가 진 빚을 언제 갚을 수 있을까? 스승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돼야 하는데 잘하고 있는 걸까?’
어렵고 어렵게 온 자리인 만큼 더욱 최선을 다해야 했다. 반드시 가족과 동료, 그리고 제자들에게 결코 소홀함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세상 속 수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
세상 사람 모두 자신만의 삶과 고민이 있다.
몸은 고돼도 누구보다 즐겁게 살 것 같은 손일석 역시 남모를 고민이 있었다.
고경희와 열심히 노력했지만 가족 모두 기다리는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지훈이 이 자식은 손만 잡아도 애가 생길 것 같아서 무섭다고 했는데, 왜 우린 안 되지? 경희나 나나 아무 문제도 없고, 다른 이유도 찾을 수 없다면 그것은 분명!’
무시무시한 일복 때문이 분명했다.
오프 때마다 병든 닭처럼 비실비실 힘을 못 쓰니 역사를 이뤄도 성과는 없을 수밖에 없었다.
고경희 말을 떠올리며 한숨만 푹푹 쉬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 그렇지. 원인 없는 결과는 없지. 인삼에 녹용이라도 먹어야 하나? 어디 탓할 곳도 없고. 이런 건 정말 밀리면 안 되는데.’
이유가 뭐가 됐든 부부에겐 큰 고민거리다.
때론 자신들은 물론 가족 모두에게 걱정과 근심을 넘어 스트레스를 안겨 줄 수 있는 문제였다.
김경수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님과 연관된 돈 문제로 가끔 골치를 썩었다.
마음이야 당장 해결하고 싶지만 펠로우 월급은 밥 먹고 살기 빠듯한 쥐꼬리에 불과했다.
의사면 당연히 돈 많이 버는 줄 아는 주변 시선이 여간 부담이 아니었다.
“일석아, 개업했으면 쉽게 갚았을까?”
“경수야, 개업은 맨손으로 해? 대출받아야 했을 텐데, 그 돈은 누가 공짜로 주냐? 하오문이 비영리 단체만 아니었으면 당장 융통해 줬을 텐데 나도 개털이다. 미안하다.”
“그래도 돈은 더 벌 수 있잖아?”
“잘되는 병원만 보면 떼부자 되는 거 시간문제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망하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 이자 갚느라 헉헉대면서 은행 좋은 일만 할 수도 있어. 세상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렇듯 누구나 걱정이 있다.
“성민이는 뭐가 걱정이야? 어떤 때 보면 땅바닥 꺼질까 봐 겁나.”
“가족 문젠데, 나도 정확하게 아는 건 없어.”
경중을 가릴 일이 아니지만 굳이 따지자면 오성민의 고민이 가장 컸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기에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손일석은 물론 교수들까지 오성민을 보며 가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최근에 와 이혁민 교수와 박승준 교수의 근심이 커졌는지 당부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손일석 선생, 김경수 선생, 정말 별일 없나?”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얼굴이 어두울 때가 많다. 대충 지나가지 말고 신경 바짝 써라. 알았나?”
교수의 관심은 좋은 일이지만 그만큼 문제가 클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손일석과 김경수에겐 평생 함께해야 할 동료의 일이기도 했다.
‘술 한잔할 때 넌지시 물어봐야겠다. 경수는 뭔가 아는 눈친데, 왜 속 시원하게 말을 안 하지?’
오지랖이 아무리 넓어도, 친구의 일일지라도 당사자가 원치 않으면 기다리는 것이 좋을 때가 있는 법이었다. 더구나 가족과 관계된 일이라면 특히 조심해야 한다.
어쨌든 손일석의 일과에 새로운 일이 추가됐다.
하오문주의 촉으로 쉬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하루하루 평소와 다르지 않은 나날이 흘렀다.
어느새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송진우와 강병옥이 4년 동안의 근무를 마치고 전문의 시험 준비에 들어간 지 벌써 3개월이 됐다.
치프가 된 차상수와 3년 차 오하석이 의국을 훌륭하게 이끌었다.
해마다 반복되는 일이었고, 펠로우 생활도 딱히 변할 것이 없었다. 변화가 있다면 김지훈의 유학 생활이었지만 실상 변화라고 하기도 힘들었다.
제 버릇 개 못 주고 있었다.
(일석아, 죽겠다.)
“그러게 왜 미국까지 가서 응급실 근무를 자청해? 일 못해서 죽은 귀신이 붙었냐? 우리 나이에 사서 고생하는 놈은 너밖에 없을 거다.”
(힘들어도 여러모로 배우는 게 많아. 가끔 총상 환자가 오는데, 환자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중증 외상 환자 치료를 배우기 너무 좋은 환경이야. 시스템이 비교가 안 돼.)
“그럼 죽는 소리 하지 말고 열심히 하셔. 안 그래도 만석이가 전문의 시험 끝나는 대로 펠로우 로비한다고 난리도 아니더라. 너 돌아오면 꿍짝이 맞겠다.”
(만석이? 구미에 있을 텐데 네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하오문주가 누군지 잊었어? 미국 물 먹더니 한국 일은 깜빡깜빡하는구나. 참! 요새도 손잡고 자냐?”
(이 자식이 갑자기 무슨 소리야?)
“둘째 소식 없냐고?”
(경아 씨도 일이 산더미에 희연이 하나로도 감당이 안 되는데 어떻게 만들어? 조용하다 싶으면 말썽 부리는 거야. 화분 흙을 파먹지 않나, 식용유 엎어 놓고 미끄럼을 타지 않나, 아주 죽겠다. 한국 돌아가서나 생각해 봐야지.)
“애 키우는 게 다 그렇지, 뭐.”
(애도 없는 놈이.)
아픈 데 콕 찔렸다.
발끈하려던 손일석이 쩝쩝 입맛을 다셨다.
신현수의 말에 따르면 응급실 근무 역시 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김지훈이 인정받았고, 유학생 신분에도 불구하고 입지를 다지고 있다는 말이었다.
‘응급실은 우리보다 더 힘들 수도 있다는데 자원을 해? 미친놈이지만 능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네. 벌써부터 칠지도 휘두르는 스승님 얼굴이 떠오르네.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너 그러다 짱박는 거 아니야?”
(유학 비용을 병원에서 대는데 어떻게 짱박아? 돈이 아니더라도 죽을 짓은 하고 싶지 않다.)
“이준영 선생님이 죽이지는 않을 텐데.”
(헛소리 그만하고 불편 없으시도록 신경 바짝 써. 만일 미흡하다 싶으면 알지?)
손일석이 허공에 대고 삿대질을 해 댔다.
‘자식이 조교수라고 아주 대놓고 유세를 부리네. 김지훈, 그냥 미국 시민 되어라. 그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끊어, 인마.”
솔직히 여러모로 부러운 일이었다.
다들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별일 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오성민이 떠올랐다. 얼핏 들은 말이 있었고, 하오문주의 민감한 촉이 단서를 잡아냈다.
‘모든 일이 제대로 굴러가는데 성민이 얼굴은 펴지질 않네. 어떤 문제보다 가족 간의 일이 해결하기 어렵다더니 딱 그 꼴이구나. 갈등이라! 어렵다, 어려워.’
별일 없기를 바랐건만 오성민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기본 일과는 변하지 않는다.
오늘도 어김없이 집담회가 시작됐다.
3명의 펠로우가 주역이 된 지 오래였고, 역시 다르지 않았다. 한 시간 내내 뜨겁고, 차갑고, 묵직하고, 냉정한 지적이 이어졌다.
손일석이 혀를 빼물었다.
“야! 다들 정말 한결같으시네. 어떻게 전공의 때나 지금이나 눈빛 하나 달라진 게 없어요. 박승준 선생님하고 지동훈 선생님도 요주의 인물이야. 점점 닮아 가고 있어. 초록은 동색이라 이건가?”
신현수가 피식 웃었다.
“이제 펠로우 시작했어. 앞으로 3년은 더 타야지.”
“3년? 악담을 해라.”
“악담이 아니라 현실이야.”
“현수 말이 맞아. 유학 가기 전까지 살벌하게 타는 지훈이 똑똑히 봤으면서 왜 이래?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여. 그래야 속 편하다.”
“강호의 법도가 그렇다는 것을 알고 들어왔으니까 군말하지 않고 따라야겠죠. 하지만 파릇파릇했던 우리 1년 차들마저 공력이 쌓여 노릇노릇 익어 가기 시작하는데 아직도 이 지경이라니, 볼 낯짝이 없어서 그래요.”
웃음이 터졌다.
“하루 이틀 일이냐? 우리 낯짝은 이미 다 닳았다.”
이경석의 말에 손일석이 입을 삐죽거렸다.
“그 얼굴 닳았어야 그게 그거지. 형수님이 천사 아니었으면 장가나 갔을지 몰라.”
“뭐? 이 자식이…….”
손일석이 태연하게 화제를 돌렸다.
“형님, 진실은 아픈 법입니다. 성민아, 근데 너 오늘따라 얼굴이 왜 그래? 유독 심하게 탔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오성민이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오성민 선생님, 안 들리세요?”
“응? 나 불렀어? 왜?”
“어허! 충격이 상당히 컸네, 컸어. 위명이 쟁쟁한 칼잡이 오성민 대협에게 뭐가 그렇게 충격적이었을까? 오늘 집담회 상황을 다시 복기해야 하는 건가?”
쓸데없는 소리 나오기 시작하자 다들 혀를 차며 일어났다. 구시렁구시렁 들려오는 말에 다들 웃음을 머금었다.
피곤이 잔뜩 내려앉았건만 유쾌함을 잃지 않는 손일석 덕에 치열한 한 주, 살벌한 집담회가 더욱 의미가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단둘만 남았다.
손일석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성민아, 혹시 집안일 때문에 그래?”
오성민이 흠칫 놀랐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았어?”
“전에 맥주 한잔하면서 했던 말 기억 안 나? 그날 이후 얼굴이 더 안 좋아 보여서 이 형이 잠도 제대로 못 잤다. 꾹꾹 감추지 말고 속 시원하게 털어놓는 게 건강에 좋을 거야.”
스치듯 한 말을 손일석은 잊지 않았다.
잘 시간도 없이 바쁜 와중에 동기에게 신경 썼다는 사실에 오성민이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힘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루 이틀에 해결될 일이 아니라서 걱정이야.”
“고부간의 갈등이라! 어머니하고 와이프 관계가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고 들었지만 잘될 거야. 제수씨만큼 이해심 많은 여자도 없잖아.”
“그래서 더 문제야.”
오성민에겐 극심한 스트레스였다.
이유가 뭐가 됐든 고부간 갈등이 심해지면 남자 역시 무척 힘들어진다.
아들과 남편 중 하나만을 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며느리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드신다고 해도 애까지 낳았는데 마음 좀 돌리시지. 성민이 닦달한다고 자식만 잡는 꼴이지 해결이 되나?’
손일석이 오성민의 어깨를 툭 치며 캔 커피 하나를 내밀었다. 달달한 맛 덕분인지 오성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실렸다.
“얼굴 그만 구기고 주말에 제수씨하고 콧바람이나 쐬어. 밤바다에 소주 한 잔이면 스트레스 싹 날아가지 않을까?”
“나 당직이다. 바꿔 줄래?”
“하하하! 그렇구나. 마이 프렌드가 원한다면야 바꿔 줄 수도 있지만, 그게 그러니까…….”
“너도 제수씨 눈치 많이 보이지?”
손일석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연애할 때는 분명 주도권을 잡았던 것 같은데 결혼 후 어느 틈엔가 고경희가 칼자루를 잡고 있었다.
툭하면 당직이다 뭐다 해서 얼굴 보기 힘든 판이니 고분고분 따라야 가정이 평화로운 법이다.
더구나 아직 별을 못 땄다.
그만큼 주말 오프가 소중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좋지 않은 일이 터지면 연이어 터지는 것처럼 보인다.
병원도 다르지 않았고, 하필이면 일반외과 위장관 파트가 그 한복판에 섰다.
“선생님, 전주에 수술하고 열 지속되던 환자 원인 찾았습니다. 절개창 감염입니다.”
“노티받았어. 어제저녁에 직접 확인했는데 고름집까지 잡힌 걸 왜 몰랐을까? 사람 몸 참 어렵다.”
창상 감염은 수술 후 일주일 전후에서 가장 흔히 발생하는 합병증이다. 절개창에 국한된 일이기에 쉽게 발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때론 노련한 써전도 놓치기 쉬운 합병증이기도 했다.
환자와 보호자에게 열이 난 원인을 설명하는 지동훈 교수를 보던 오성민이 콧등을 찡그렸다.
드레싱은 전공의가 담당하지만 위장관 파트 펠로우로서 함께 수술한 이상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다른 문제가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일단 실밥 다 뜯고 상처를 벌려 놔야 합니다. 깨끗해지는 대로 다시 봉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사소하다 할지라도 합병증이 발생한 이상 좋아할 환자나 보호자는 없다. 지동훈 교수를 보는 눈길이 곱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오성민도 고개 숙여 사과했다.
백번 말해야 소용없다.
성의를 갖고 열심히 치료해 빨리 퇴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행여 다른 환자에게도 문제가 있는지 꼼꼼하게 확인한 지 하루도 되지 않아 문제가 연거푸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