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미소 짓게 만드는 사람 Ⅱ (2)
어쩌면 금경태에 대한 적대감이나 피해 의식이 남아 있었을 수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땐 다른 방법이 없었어.’
때문인지 무엇이든 해 주고 싶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는 생각에 최고의 일반외과 의사가 되기를 바랐다.
할 수 있는 일은 치열하게 가르치고, 음성 병원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알고 가는 것이었다.
무엇부터 해야 할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김지훈은 이미 자격을 갖췄다.
스스로 원한 일도, 1년 차가 배워야 할 과정도 아니었지만 비장 절제까지 한 전공의였다. 경험마저 일천한 전공의가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게 해냈다.
첫 번째 결과물은 집도였다.
수술 시작 전 과정을 들으며 살벌하게 태웠다.
조금이라도 어설픈 말이 나오면 사정없이 처음부터 반복하게 했다. 김지훈이 힘들어하면 할수록 알아야 할 사항들을 철저하게 상기시켰다.
물론 평소처럼 말 몇 마디면 충분했다.
김지훈의 손에 정식으로 메스를 쥐여 주었다.
대학 병원 근무 시절, 하루가 멀다 하고 넘겼던 메스였다. 10년 만의 일인지, 아니면 김지훈이라는 전공의 때문인지 몰라도 왜 그리 기대가 컸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제 시작인 전공의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타고난 손이었어. 그때 이미 지훈이 손에서 스승님 손과 내 손이 보였다는 건 착각이었을까?’
흐뭇함 혹은 감탄과 별개로 1년 차 첫 수술을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전공의는 없다. 제아무리 퍼스트를 많이 섰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다른 과정이기 때문이었다.
김지훈도 마찬가지였지만 분명 달랐다.
40분 만에 끝낸 것도 놀라웠지만 그동안 지적했던 과정을 거의 대부분 기억하며 지키려 애쓰고 있었다.
첫 집도에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고, 그럴 수밖에 없음에도 절대 겸손을 잃지 않았다.
까마득한 후배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자랑스러움도 잠시, 의외의 생각이 발목을 잡았다.
금경태는 욕심이 많은 정도가 아니다.
여전히 이준영 자신을 경계하고 있을 것이다.
예상외로 뛰어난 놈을 음성에 보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다. 자신의 인맥으로 만들지 않으면 버리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할 가능성이 높았다.
어떤 경우라고 해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 아팠다.
결국 집도식도 해 주지 못했다. 그것도 모자라 입국식 때 집도했다는 말조차 꺼내지 말라고 하는 순간 가슴이 턱턱 막혔다.
‘지훈이는 이유를 몰랐을까?’
이제 전공 수련을 시작했다지만 20대 중반이다.
우수한 성적으로 인턴을 마친 전공의의 권리인 픽스턴도 못했다.
더욱이 첫 근무를 수련 자체가 불가능한 음성으로 내려온 이상 자신이 처한 상황에 상당한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확실한 이유를 알고 싶었을 텐데 김지훈은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말을 따랐다.
‘왜 나나 이 교수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을까? 긍정적인 성격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했던 걸까?’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기필코 이겨 낼 것이라 믿었기에 도리어 더욱 안쓰럽고 가여웠다.
문득 스승님도 자신을 그렇게 봤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음성 병원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스승님은 결코 제자를 포기하지 않고 있음을 느꼈다.
빛바랜 메스!
오랜 시간 메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온갖 상념이 스쳤지만 마지막까지 남은 생각은 스승과 제자였다.
허경발 교수가 이준영을 제자로 삼았듯 이준영도 김지훈을 제자로 삼고 싶었다.
왜 그리 욕심이 나던지!
스스로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당시에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때는 평생 음성을 떠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만약 지금도 음성에 있었다면 지훈이는 날 어떻게 생각했을까?’
김지훈과의 만남은 운명이 확실했다.
며칠 후, 혈복강 환자가 왔다.
역시 비장 파열 환자였다.
이준영의 두려움을 알 리 없는 김지훈이 당연하게 수술을 준비했다.
배를 여는 그 순간까지도 두려움에 몸을 떨었지만 결국 두 번째 비장 절제술을 스스로 해냈다.
마침내 10년간 온몸과 정신을 옭매었던 고치를 완벽하게 뚫고 나오는 순간이었다.
비로소 스스로 어둠 속에 갇혀 질책하던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마저 괴로워하기보다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툭하면 꾸었던 악몽도 누구나 꿀 수 있는 꿈으로 바뀌었다.
끊어진 동맥을 확실하게 타이 하고 있었다.
김지훈이란 이름을 가진 후배 덕분이었다.
세상이 변했다.
은근히 살아나던 열정과 열의가 샘솟았다.
수술하고 싶다는 열망과 10년의 공백이 주는 두려움이 매일 매 순간 어지럽게 뒤섞였다.
전공의 때 이상으로 노력해야 했다.
한편으로 김지훈을 가르치는 재미에 푹 빠졌다.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은 아니어도 몇 개씩 더 알아 가는 모습, 결코 자만하지 않는 모습,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흡족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 집도식을 한 놈인데 수술을 더 주어도 될까? 너무 이른 시기라 혹 자만에 빠지지 않을까?’
깊은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아뻬에 이어 1년 차는 손도 못 댈 탈장 수술까지 주었다. 수술 내내 말이 아니라 무뚝뚝함으로 긴장을 전했고, 훌륭하게 해냈다.
겸손은 몸에 밴 것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더럭 끝을 알 수 없는 욕심이 났다.
모든 것을 전하고 싶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며 3개월만 더 함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강해졌다.
심지어 수술 환자가 적다는 사실에 몸까지 달아 남몰래 응급실을 기웃거린 적도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아이들처럼 조바심을 냈었던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는 놈이었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김지훈에 대한 욕심이 도를 넘었다.
어느 날 문득 우습게도 김지훈이 자신을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소리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얼굴 화끈거릴 생각이었고, 하릴없는 기대에 불과했지만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세상에 머리 똑똑하고, 실력 좋고, 일 열심히 하는 사람 의외로 많다.
편법 쓰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 제 나이나 능력에 맞는 대우를 받는다면 그렇게 보아도 좋았다.
물론 뜻대로 원칙대로 되지 않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보지만, 그래서 사람 사는 세상일지도 모른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타적인 사람, 이기적인 사람이 모두 한데 뒤섞여 사니 말이다.
어쨌든 무엇보다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마음가짐일 것이다.
김지훈은 그 덕목을 갖추고 있었다.
장애우들이 몸담고 있는 사랑원 환자에게서 비롯된 일이었다.
모든 환자에게 관심이 필요하지만 장애를 가진 환자는 몇 배의 노력과 정성이 요구된다.
터진 아뻬라 수술도 쉽지 않았다.
장애로 인해 회복마저 순탄치 않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정신지체라 의료진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다. 사랑원에 배정한 일반 병실은 수술 환자를 치료할 여건이 되지도 않았다.
1인실이나 중환자실이라면 어느 정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사랑원은 비용을 댈 능력이 없었다.
워낙 돈이 많이 드는 상황이라 진료비에 관한 부분은 병원장의 결정이 필요했다.
그때 김지훈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제 방을 임시로 개조해 병실로 쓰면 어떻겠습니까?”
모두 깜짝 놀랐다.
매일매일 환자와 사투를 벌이는 의사의 유일한 안식처를 뺏는 일이라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지훈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뿐만이 아니었다.
마치 중환자실 환자처럼 2주 동안 환자에게 매달렸다. 시도 때도 없는 호소와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환자를 치료하며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세상에! 세상에 저런 선생님이 없어. 어쩌면 좋아.”
오지랖 넓은 아주머니, 영훈이 어머니의 말이 아니더라도 소문이 퍼지기 마련이었다.
이준영에겐 놀랍거나 감탄할 일만이 아니었다.
스승이 바랐던 의사, 자신이 추구했던 의사의 싹을 보이는 전공의가 눈앞에 있었다. 강렬한 자극을 넘어 시시때때로 끝 모를 욕심이 치솟았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3개월의 짧은 인연은 더 이상 이어지기 힘들었다. 설령 이어진다고 해도 간헐적인 만남일 뿐일 것이다. 그때 서로에게 반가운 사람으로 마주할 수만 있어도 다행이었다.
‘생각만으로도 꽤 섭섭했었어.’
어느새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일복 넘치는 놈답게 막판까지 복막염 환자가 왔고, 고민은 길지 않았다. 김지훈을 1년 차 전공의가 아니라 제자라 여겼는지도 몰랐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대단한 손이었어. 부족한 이론 때문에 혁민이에게 구미에서 100일 당직 더 시키라고 부탁했는데, 지훈이는 그 사실을 알았을까?’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지만 스승의 입장에 서서 한 부탁이었다. 그 마음을 알아주고, 훌륭한 써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메스 두 개를 전했다.
빛바랜 메스!
반짝반짝 빛나는 메스!
김지훈이 탄 버스가 사라지고도 한참 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3개월에 불과한 시간이었는데 무슨 놈의 정이 그리 많이 쌓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독한 아쉬움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란 생각에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스승과 제자라!’
부족함이 더 큰 사람이었다.
김지훈이란 그릇을 채우기 힘든 입장이었다.
과욕일 뿐이란 생각을 안고 돌아왔을 때 김지훈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비로소 알았다.
따스한 햇살이 토요일 오후의 한가로움을 울적하게 달래 주고 있었다. 진료실 책상에 와이셔츠 두 벌과 한 통의 편지가 놓여 있었다.
편지를 펴는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말미에 적힌 세 글자만 보였다.
스승님!
언젠가 김지훈이 타 준 믹스 커피가 왜 그리 고소하고, 따스했는지 이제야 알았다.
다시는 터질 일 없을 줄 알았던 눈물샘이 요동쳤다.
대학 병원 복귀는 힘들더라도 서울로 돌아오라는 이혁민의 제안, 천안 병원 과장을 맡고 있던 송재덕의 성화에도 음성 병원을 지켜야 했다.
제자가 한 말이 있기에.
그날 이후 더 큰 변화가 찾아왔다.
우스운 일이지만 세상 밖으로 나갈 용기를 얻었다.
경주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했다.
10년 만이었다.
문득 스승과 함께 수술 중 담도 조영술을 발표하며 들었던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가 떠올랐지만 관심은 온통 한 사람에게 쏠렸다.
지나는 길이라는 핑계로 구미 병원에 들렀다.
이혁민과 함께 김지훈의 손을 보았다.
“선생님, 때 이른 말이지만 저노마 손에서 선생님 손이 보입니다. 음성 병원에서 가르치신 덕분일까요?”
그 당시엔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가슴속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뛰고 있었다. 따스한 말 한마디 건네야 했건만 무심한 눈길로 대신했다.
한 가지 의문을 품은 채.
‘지훈이가 올까?’
제자는 자신의 말을 지켰다.
1년 차에겐 무엇보다 소중하고 귀중했을 첫 휴가 때 찾아와 배움을 청했다. 두 눈 속에서 누구에게도 볼 수 없는 마음과 열정을 보았다.
우연히 전화를 한 이혁민에게 김지훈이 와 있음을 알렸다. 무뚝뚝하게 별일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뜨거운 것이 꿈틀거렸다. 그때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스승과 제자가 됐음을 실감했다.
허경발 교수와 이준영.
이준영과 김지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스승은 스승일 수밖에 없고, 제자는 제자일 수밖에 없었다.
살가운 말 한마디 오가지 않아도 언제나 가슴 설레게 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못난 스승이 될 수 없었다.
음성을 떠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능력을 갖춘 일반외과 의사가 돼야 했다.
10년 전 대학 병원 주축이었던 이준영으로 돌아가야 했다.
최선을 다했다.
단 한 명의 환자도 보내지 않으려 기를 썼다.
날이 갈수록 환자가 늘었다.
그만큼 수술 횟수가 늘고 종류가 다양해졌지만, 대학 병원과의 비교는 말 자체가 되질 않았다.
음성 병원 일반외과가 3개월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고 해도 확실하고도 명백한 한계가 존재했다.
만에 하나 함께 일할 기회가 또 생기면 김지훈은 예전의 김지훈이 아닐 것이 빤했다. 전공의조차 가르치지 못한다면 스승이라 말할 자격조차 없었다.
촉탁의든 외래 교수든 좋았다.
대학 병원이든 아니든 합법적으로 수술이 가능한 병원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방법이 없을 줄 알았는데 너무 많은 신세를 졌어.’
송재덕 교수와 이혁민 교수에게 부탁하자 발 벗고 나섰다. 자신의 일처럼 병원을 물색하며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에게 연락했다.
바람이 이루어졌다.
시간 나는 대로 수술에 참가했다.
때론 참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는 10년의 공백을 메우기 부족했다. 응급실 근무까지 자청해 마치 전공의 1년 차처럼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돌아가기 위해.
스승과 제자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도록.
그리고 마침내 들었다.
“준영아, 고맙다. 잘했다. 네가 있는 자리는 중요하지 않아. 네가 있어야 할 자리에 섰다는 것이 중요하다. 고맙다.”
스승의 목소리가 떨렸다.
김지훈을 만난 이후 어둠 속 10년 세월에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툭하면 쏟아졌다.
대가라 불린 의사, 결코 늙지 않을 것 같았던 호랑이처럼 무서웠던 의사의 눈가도 벌겋게 물들었다.
“여보! 고마워요. 혁원이도 언젠간 이해할 거예요.”
잘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고, 오랜 세월 가슴에 못을 박았건만 고맙다는 말뿐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두 발로 꿋꿋이 설 수 있었다.
새로운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