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62화 (962/1,329)

9화. 미소 짓게 만드는 사람 Ⅱ (1)

이번 주도 어김없었다.

‘또 무슨 회의를?’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있는 일이지만 도통 적응이 되질 않았다.

진료 부장으로서 당연히 모든 의료진이 최적의 조건하에 일할 수 있도록 일조해야 하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사실 송재덕 교수 탓이 컸다.

덕분이라고 해야 하나?

무슨 생각인지 진료 영역 부분 이외의 일까지 꼭꼭 상의하고자 해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남들 다 퇴근하고도 남을 시간에 박승준 교수와 지동훈 교수가 함께 왔으니 오늘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어제 과장 회의에 올라온 안건이 여럿 있습니다. 선생님들과 상의 후 내부 논의를 거쳐 확정하겠습니다.”

박승준 교수의 말 중 안건 소리만 들렸다.

명색이 진료 부장인데 어쩌겠는가?

마음속 부담감을 떨쳐 내고 회의에 집중했다.

“그게 말이야. 현실적으로 힘든 감이 있어. 아무리 뜻이 좋아도 뭐든 돈이 있어야 굴러가는 법이잖아. 재단과 상의하지 않으면 힘들다, 힘들어.”

“원장님께서 힘써 주시면 되지 않을까요?”

“이럴 때만 원장이구나, 원장.”

지동훈 교수가 몸을 기울이며 나직하게 말했다.

“원장님, 저번에도 응급실 문제 깨끗하게 해결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원장님 아니었으면 아직도 고생했을 겁니다.”

“어? 지 교수, 그런 일이 있었어? 원장님, 설마 지 교수하고 저 차별하시는 겁니까?”

송재덕 교수가 손사래를 쳤다.

“지 교수, 무슨 말이야? 난 모르겠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박 과장, 과장 정도 되면 원장한테 기대지 말고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거 아냐? 그래야 과장이다, 과장.”

결국 질 일을 두고 언제나 줄다리기를 하는 송재덕 교수, 결국 들어줄 것을 알지만 언제나 원장님 찾으며 부탁하는 박승준 교수와 지동훈 교수.

오늘따라 무척 정겨워 보였다.

사적인 자리도 아닌데 의아한 일이었다.

‘지훈이 때문인가? 너 아니었으면 이런 일도 경험하지 못했겠지.’

박승준 교수와 지동훈 교수도 달리 보였다.

정말 훌륭한 선후배였다.

선배를 믿고 끝까지 기다리며 원칙에 입각한 조언을 아끼지 않은 후배, 자존심과 야망을 접고 후배의 말에 귀 기울여 도리어 더욱 좋은 결과를 얻은 선배의 모습은 귀감이 되고도 남았다.

한때는 이방인이었지만 이젠 식구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쩌면 김지훈과 자신의 입장과 관계도 그럴지 몰랐다.

“이 교수, 자기도 그렇게 생각해? 왜 말이 없어? 왜? 그런 거야? 정말 그런 거야?”

잠깐 딴생각에 정신이 팔려 못 들었다.

당연히 묵묵부답이다.

“에후! 전공의 때부터 시작해서 도대체 몇 년이야? 그놈의 입 참 한결같다. 이 교수, 입에 본드칠 그만하고 말 좀 하자, 말 좀. 이런 말 하는 나도 지친다, 지쳐.”

혀를 차며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결같은 사람은 이준영 자신만이 아니었다.

문득 모두에게 고마웠다.

얼굴 벌게질 일이었지만 자리를 끝내고 일어서는 교수들에게 마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박 교수, 지 교수, 고맙다.”

뚱딴지같은 말에 모두들 눈만 멀뚱거렸다.

“뭐가 고마워? 뭐가?”

“그냥 다 고맙습니다.”

송재덕 교수의 눈이 찢어졌다.

“혹시 내가 말 좀 하라고 해서 억지로 하는 말은 아니지? 박 과장, 서쪽이 어느 쪽이야? 오늘 해가 어디로 떴어? 서쪽에서 떴나? 그런가? 어쨌든 우리한테 고마워하는 건 맞다. 확실하게 맞아. 박 교수, 지 교수, 가자.”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모두의 가슴이 포근해졌다.

이유도 모르지만 이준영 교수의 말이기에 왠지 실없는 웃음까지 흘렸다.

교수실을 나선 송재덕 교수가 씨익 웃었다.

“박 교수, 우리 이 교수 부원장 해도 잘할 것 같지 않아? 돈 문제 관련되면 내가 꼭 함께 가서 말하고 있어. 꿍얼거리긴 해도 항상 따라와. 웃기지? 그치?”

“이준영 선생님이요?”

“그럼 누구겠어? 작은 이 교수하고도 호흡이 정말 잘 맞는다. 꼭 자기들 보는 것 같아. 좋다, 좋아.”

무슨 말이 오가는지도 모른 채 이준영 교수의 입가에 미소가 한가득 걸렸다.

‘지훈아, 네게 해야 할 말인지도 모르겠다.’

음성 병원의 그 며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

살다 살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전공의 처음 봤다.

100일 당직 기간이라지만 판판이 논다고 해도 음성 병원에서는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

물론 지금은 조금 생각이 바뀌었지만 반박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10명 언저리에 불과했던 입원 환자가 불과 한 달도 안 돼 50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과장의 무성의함에도 불구하고 응급실로 내원한 환자 중 입원이 필요한 환자는 거의 다 잡았다는 말이었다.

덩달아 외래도 바빠지고 있었다.

무슨 소문이 났는지 예전에는 타 지역 병원으로 갔을 환자들까지 꾸역꾸역 진료실 앞 복도를 메우기 시작했다. 툭하면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었다.

당연히 수술이 늘었다.

수술이 늘면 기대도 늘기 마련이다.

특히 김지훈처럼 열정이 하늘을 뚫는 전공의는 감당하지 못할 기대를 품곤 한다.

아니나 다를까, 과장인 자신을 보는 눈이 날이 갈수록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음성 병원의 한계를 빤히 알 때가 됐건만 항상 목마른 김지훈이었다.

퍼스트를 세우며 몇 마디 무뚝뚝하게 툭툭 던지면 대단한 지식을 얻기라도 한 것처럼 생기가 돌았다.

생기가 넘치다 못해, 얼굴 볼 때마다 마치 모이 달라는 새끼 새처럼 목을 뺀 채 무언가를 바랐다.

때 이른 집도 욕심을 내비치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절대 만족하지도 않았다.

‘이것 참! 희한한 놈이네. 몇 가지 가르쳤다고 해도 서울 병원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데 무슨 열의가 이렇게 강해?’

은연중 웃음이 나오고, 은근히 되살아나던 열의가 시나브로 불이 붙는 느낌이었다.

보다 보다 이렇게 일복 터지는 의사도 처음 봤다.

명색이 대학 병원 부속이지만 작은 병원이다. 배후 도시도 읍에 불과한 음성이고, 그동안 쌓은 평판도 변변치 않아 응급실이 무척 한가했었다.

불과 한 달 만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3명의 인턴이 파견됐지만 대응하기 힘들어 직원까지 늘려야 할 상황이었다.

물론 김지훈 혼자 이룬 일이 아니라 의료진 모두의 힘이겠지만, 강력한 동기 혹은 시발점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나도 일복 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너만큼은 아니다. 손도 일복도 모두 타고났구나.’

여기까지면 그저 놀라고 말 일일 수도 있었다.

아마도 조금의 열의 정도는 더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운명이라는 놈은 김지훈과 자신의 관계를 평생 묶어 둘 생각인 모양이었다.

아직도 그날이 어제처럼 생생했다.

왜애애애앵! 왜애애애앵!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예전과 달리 툭하면 들려왔지만 아직도 가슴이 섬뜩한 소리였다.

다행스럽게 김지훈이 온 이후에도 치명적인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환자는 오지 않았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여겼다.

솔직히 그래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띠띠띠띠띠띠!

혈압, 호흡, 맥박 모든 것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간 바이탈이 이처럼 요동치는 환자는 필요한 처치만 한 후에 예외 없이 전원시켰다.

급하다는 이유로 어디가 어떻게 손상됐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고 보낸 적도 있었다.

김지훈에겐 절대 통하지 않을 일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인턴들과 함께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의료진 역시 부족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모든 조치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간절함이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전원시키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턱턱 막혔다.

CT를 보는 순간 식은땀이 맺혔다.

혈복강 환자였다.

그것도 비장 파열 환자였다.

수술이 결정되기도 전에 와락 겁부터 났다.

어머니의 얼굴과 함께 의식 저편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두려움과 악몽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김지훈의 눈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일반외과 의사라는 사실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뇌리를 자극했다.

‘해야만 해. 난 할 수 있어.’

수없이 외쳤다.

의미 없는 바람일 뿐이었다.

수술 시작부터 참담했다.

심장이 불 방망이질을 했다.

달달 손이 떨리다 못해 굳어 갔다.

배 속을 가득 메운 피를 보는 순간 어머니 얼굴이 떠오르며 두려움이 모든 것을 침식했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졌고, 머릿속은 얽히고설킨 실타래처럼 복잡한 감정에 매몰당했다.

일반외과 의사라는 사람이 수술을 진행할 수 없었다. 자신을 믿고 있었던 후배와 간호사들 모두 속았다고 비난하는 것 같았다.

두려움이 점점 심해지는 찰나 김지훈의 눈을 보았다.

분명 과장인 자신을 철석처럼 믿고 있었다. 환자를 살려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 속에 평소와 다른 자신의 모습과 반응을 걱정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진행해야 했다.

이미 배를 열었다.

동맥이 뿜고 있는 피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도저히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

과장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될 말이 터져 나왔다.

“김지훈, 동맥 잡아.”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환자를 경험마저 일천한 전공의 1년 차에게 맡긴 것이다.

절망과 함께 수치감마저 다가왔다.

그러나 여전히 몸도 마음도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까지 김지훈에게 수술을 맡겨야 했다.

천운처럼 아뻬나 탈장에서조차 퍼스트밖에 서지 못한 1년 차가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자신의 말을 따라 침착하게 움직이는 손은 실로 대단했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마취에서 깨어나는 것도 채 보지 못하고 쓰러지듯 휴게실로 달려갔다.

일반외과 의사로서의 존재 가치를 잃은 스스로의 모습에 눈물만 나왔다.

온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겁기만 했다.

간신히 기력을 찾아 회복실을 찾았다.

환자는 무사히 회복됐다.

김지훈이 이제야 훅훅 숨을 몰아쉬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굴까지 창백해진 자신을 보며 어디가 아픈지 걱정하는 눈빛을 도저히 마주할 수 없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는 걸까? 저렇게 열의 넘치고, 열심히 일하는 후배를 두고 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그 순간만큼은 부끄러움이 두려움을 압도했다.

더 이상 지금과 같은 식으로 살 수 없었다.

밤을 새워 가며 고민했다.

스승의 말을 수없이 떠올리고 되새겼다.

‘위험은 현실이지만 두려움은 네 선택일 뿐이다.’

이제야 스승의 말속에 담긴 뜻을 알 것 같았다.

그날 밤, 마치 한 번의 기회를 더 주는 것처럼 한 명의 환자가 왔다.

어쩌면 누구도 갈 수 없는 곳에서 자신을 보며 애간장을 태웠을 어머니의 눈물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17군데 자상을 입었다.

목부터 복부까지 잔인하게 찔렸다.

더 이상 환자의 생사를 외면할 수 없었다.

언제 어디서 두려움을 떨쳐 냈는지 모르지만 복부와 흉부를 모두 열었다. 쇄골까지 잘라 줄줄 피를 내뿜는 혈관을 잡았다.

수술복이 흠뻑 젖을 정도로 피가 난무했다.

환자는 수술 내내 생사의 경계를 오갔다.

그런 환자를 단둘이 수술했다.

10년을 묵힌 손인데 어떻게 수술했는지 당시에도 지금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본능처럼 커다란 두 손에 옛 실력이 박혀 있었던 것인지, 스승의 가르침대로 기본에 충실했던 덕인지, 알게 모르게 쌓였던 수많은 경험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수술이 끝남과 동시에 아침 해가 찬란한 빛을 뿌렸다.

봄날의 따스함과 펄떡이는 생기를 먹은 것처럼 환자가 의식을 회복했다.

그 순간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직전에 흘렸던 눈물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멈추지 않았다.

무려 10년 만에 일반외과 의사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 시작이라고 해도, 착각일지 몰라도 먹먹한 가슴이 진정되질 않았다.

김지훈과 환자로 인해 마음의 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들이야말로 삶의 스승이자 은인이었다.

그날 이후 모든 생활과 사고가 변했다.

과장으로서, 일반외과 선배로서 김지훈을 가르쳤다.

무뚝뚝한 성격에서 나오는 말이 고울 리 없건만, 김지훈은 삐질삐질 땀을 흘리면서도 좋다고 웃었다.

그런 후배가 너무 예쁘고 대견했다.

덕분에 자신을 더욱 다그칠 수 있었다.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일까지 했다.

‘부끄럽지 않은 의사가 되려고 무척 노력했었지. 원장님이 의국비라고 주신 50만 원에 내 돈 50만 원을 보탰는데 지훈이는 알았을까? 알았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썼는지는 알고 있었다.

제 입으로만, 제 주머니로만 들어간 돈은 단 한 푼도 없었다. 적지 않은 돈이기에 욕심을 낼 만도 했지만 의국비가 무엇인지 잘 아는 듯 후배, 선배, 동료들과 함께 사용했다.

예쁜 놈은 뭔 짓을 해도 예쁘게 보인다더니, 딱 그 짝이 났다. 도대체 이런 전공의가 어디 있다고 음성에 보냈는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이혁민과 신상민 교수에게 전화를 하고 말았다.

다들 깜짝 놀라며 안부부터 물었다. 지난 며칠 동안의 변화는 낯부끄러워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목적은 김지훈의 신상뿐이었다.

역시 금경태와 엮인 것이 분명했다.

이혁민이 정확한 이유를 대지 않고 얼버무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불행히도 김지훈은 인턴 때 금경태의 이권과 관련된 일을 건드렸고, 모르긴 몰라도 재단에 잘 보이기 위해 신현수를 챙기는 와중에 피해를 본 것이 틀림없었다.

“잘 지켜 줘.”

인연이라고 해야 3개월뿐인데 이혁민 교수에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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