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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961화 (961/1,329)

8화. 미소 짓게 만드는 사람 Ⅰ (2)

토요일이다.

인턴 내내 농땡이로 시간을 죽이지 않았다면 피곤에 절어 하루라도 더 쉬고 싶을 시기였다. 그런데 이틀이나 먼저 내려와 응급실 근무를 시작한 것이다.

반갑기보다 웃긴 놈이라고 생각했다.

평소보다 더 무뚝뚝한 말을 던진 것도 모자라 잘 왔다는 소리조차 하지 않았다.

‘응급실 환자래야 죄다 다른 과 환자에다 우리 과 환자는 거의 없다는 말을 들었을 텐데, 뭐 하려고 일찍 내려왔어?’

어쨌든 성실한 면이 있다는 말이었지만 지켜볼 일이었다.

사실 새로운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잠깐 동했을 뿐 여전히 가르칠 마음은 없었고, 음성 병원은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하긴 내가 가르칠 자격이나 있을지 모르겠네.’

3개월 잘 지내고 돌아가면 다시 볼 일도 없었다.

주말은 예상대로 굴러갔다.

전화 한 통 울리지 않았다.

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단 한 명도 오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어차피 조금이라도 심각한 환자였거나 시간이 맞지 않았다면 알아서 다른 병원으로 보냈을 테니 편하게 지냈을 것이다.

무료한 시간을 억지로 보내는 사이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한때 제집처럼 드나들었던 응급실은 쳐다보지도 않고 병동으로 올라갔다.

이틀 만에야 처음 얼굴을 보았다.

미안한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허우대는 멀쩡했다.

‘주말 동안 잘 쉬었나 보군.’

꾸벅 굽혔던 고개를 드는 순간 흠칫 놀랄 뻔했다.

몰골이 장난 아니었다.

밤을 꼬박 샌 놈처럼 두 눈이 시뻘겠다. 머리는 착 달라붙어 기름을 바른 것 같았고, 회진이 아니라 잠부터 필요해 보일 정도로 온몸에 피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 와중에 대단한 기대라도 하는 양 눈빛만은 반짝였다. 때문인지 제법 큰 키에 인상이 무척 좋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았다.

어쨌든 환자도 없는 병원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하긴 이런 얼굴을 본 지 10년이 넘었으니 어색할 만도 했다.

‘잠 안 자고 뭐 한 거야?’

의심스러운 눈초리와 마주친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눈초리 때문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의사나 환자가 초면에 보이는 반응이었다. 타고난 거구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고, 이젠 적응된 지 오래였다.

1년 차답게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음성에 내려온 이후 더 무뚝뚝해졌는데 잘된 일이었다. 말 많이 오가야 공연한 부담도 모자라 신경 쓸 일만 많아질 것이다.

일찍 온 만큼 열심히 일했을까?

아니면 숨어서 놀았을까?

이제 인턴 마친 전공의가 입원이나 제대로 시켰을지 모를 일이었다.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고, 솔직히 입원 환자가 많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왠지 모아 놓은 환자 차트가 꽤 쌓였다 싶었다.

순간 헛기침을 터트릴 뻔했다.

평소엔 많아야 두세 명에 불과했는데 무려 8명이나 입원시켰다. 물론 일반외과 환자는 단 한 명도 없었지만 시뻘게진 두 눈이 이해가 되긴 했다.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쓸데없이 밤샌 것이 아니었어? 네게 도움도 되질 않을 환자들인데 헛수고를 했어. 하여튼 귀찮게 됐네.’

내심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며 차트를 확인하던 중 한 환자의 진단명에 눈길이 확 꽂혔다. 얼굴이 대략 10센티미터 정도 찢어진 환자였다.

‘이놈 뭐지? 나중에 문제 생기면 어쩌려고 겁도 없이 성형외과 환자를 건드린 거야?’

까딱하면 병원 시끄러워질 환자였다.

수습은 전공의가 아니라 과장의 몫이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며 짜증이 나려는 순간 나머지 환자 차트가 눈에 들어왔다. 입원 기록부터 환자 기록까지 기본에 충실한 정도가 아니었다.

‘누가 가르쳤는지 정말 잘 가르치긴 했네. 그건 그렇고 자신 있으니까 수처 했겠지? 아니면…….’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딱히 떠오르진 않았지만, 환자 기록에 담긴 정성을 떠올리며 직접 확인했다. 마음에 안 들면 쫓아낼 시늉 정도는 해야 할 것이다.

제 실력과 주제를 모르는 놈은 꼭 사고를 치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산증인이 바로 이준영, 자신이기 때문에 더욱 지나칠 일이 아니었다.

거즈를 여는 순간 솔직히 놀라고 말았다.

1년 차가 보일 수처 실력이 아니었다.

웬만한 고연차들도 이 정도 실력을 보이긴 어려웠다.

트레이닝 방식이 예전과 다르다고 해도 사람 손은 달라지지 않는 법인데 솔직히 의외였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제법이네. 이런 수준이면 음성으로 보낼 이유가 없잖아? 금경태,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야? 아니면 너도 까닭 없이 밉보인 거야? 이제 막 1년 차 된 놈이?’

은근한 의아함이 꼬리를 물었다.

한편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금경태가 자꾸 떠올라 공연히 정신만 사나워졌다.

한가한 오전을 보내며 실없이 웃고 말았다.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까마득한 후배인 1년 차 때문에 이렇게 많은 의문과 생각이 떠오를 줄은 몰랐다. 그것도 얼굴 본 지 반나절도 안 돼서 말이다.

금경태만 빼면 나쁘지 않은 일이었기에 그냥 지나쳤다. 내심 무료하고, 무기력한 생활을 깰 신선한 자극을 기대했는지도 몰랐다.

3일째 되던 날인가?

김지훈이 잔잔한 호수에 돌을 또 던졌다.

기흉 환자에게 흉부 도관 삽관술을 시행하고 떡하니 입원시켰다. 인턴만 마친 의사가 할 수 있는 술기가 아니었다. 게다가 정확한 곳에 제대로 위치시켰다.

‘성형외과도 모자라 흉부외과까지?’

그뿐인가?

깊은 밤이나 새벽에 오는 아뻬 환자는 대부분 다른 병원으로 보냈는데 환자 한 명 있다고 노티를 하고 있었다.

팽팽 놀아도 아무 말 하지 않을 음성 병원에서 불과 사흘 만에 완전히 피 곤죽이 된 채였다.

은근한 흥미가 일었던 것 같았다. 아니면 이제 일반외과 의사의 길에 접어든 후배를 보며 잠재돼 있던 의욕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첫 수술이었다.

아뻬라 할지라도 사람 생명이 달린 질환이다.

수술을 기피했다고 해도 그 점만은 잊지 않았다.

절대 방심하면 안 되기에, 이미 치명적인 실수를 경험했기에 통상의 경우처럼 넘어갈 수 없었다.

무뚝뚝함이 무색할 정도로 매 과정을 지적하며 수술 내내 새카맣게 태웠다.

한 번만 태워도 풀이 완전히 죽어 나가떨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이를 악물었다.

강한 멘탈이 마음에 든 때문인지, 아니면 수처 실력을 보았기 때문인지 마무리를 맡기고 말았다.

1년 차치고는 상당히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생각과 달리 관심 어린 눈길이 갔다.

궁금함마저 떠나질 않았다.

‘잘해 봐야 아뻬나 탈장 정도 볼 수 있을 텐데, 3개월 내내 이런 식으로 일할 수 있을까?’

궁금해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

김지훈의 몰골이 갈수록 험악해졌다.

비명이 터질 정도로 응급실이 바빠졌다.

당연히 눈에 보일 정도로 입원 환자가 늘었다.

물론 일반외과는 전과 다름없었다.

한가하다고 해도 외래에서 논 것만은 아니었다.

첫 주에 탈장과 아뻬 하나를 더 했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이런 후배는 철저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본능이 발동한 모양이었다. 혼이 쏙 빠지도록 살벌하게 태워 훅 불면 산산이 흩어질 재만 남겼다.

‘멘탈 정말 강한 놈이네.’

결코 주눅 들거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어설프지만 노력 가득한 손도 보여 주었다.

배우고자 하는 의지만 보인 것이 아니었다. 정신력만큼이나 마음 씀씀이도 칭찬할 만했다.

너무 열심히 일해 원장이 권한 개인적인 식사 대신 구내식당에서 직원들과 함께 탕수육을 먹었다.

응급실 근무를 하기로 한 인턴들이 일주일 늦게 내려온다는 소식에도 군말 없이 근무에 임했다.

그 때문이 분명했다.

일반외과 병동에 새로운 환자들이 차기 시작했다.

‘화상은 차치하고 유방 농양 환자까지 입원시킬 줄은 몰랐네. 게다가 이혁민이 함몰 유두 복원술을 하며 퍼스트를 세웠다고?’

덕분에 녹슬었던 손에 슬슬 기름칠을 할 수 있었고, 오지랖 넓은 보호자에게 꽤나 시달리기도 했다.

‘영훈이 엄마였던가? 하긴 진료 시간에 할 일도 없었는데 설명하느라 재밌긴 했네.’

당연하게 여겼던 한가함마저 어색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고작 1년 차 하나 때문에 10년 동안 거의 변함없이 이어 온 생활이 송두리째 흔들린 것이다.

‘내가 지금 저놈한테 영향을 받고 있는 거야?’

매일 매 순간 의문이 끊이질 않았다.

진료실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나은 일이었지만, 생각할수록 희한하고 신기한 놈이었다.

무엇보다 배우는 속도가 놀라웠다.

타고난 손인지 이번이 다르고, 다음은 더 달랐다.

자신도 모르게 아뻬 수술 수를 셌다.

다섯 번째 수술 만에 마음속 말을 던지고 말았다.

지금도 똑똑하게 기억나는 말이었다.

“그렇지. 여기선 그렇게 해야지.”

순간 침을 꿀꺽 삼킬 정도로 당황스러웠지만 다행히 마스크에 얼굴을 가린 채였고, 1년 차에 불과한 놈이 눈치챌 리도 없었다.

잘한다는 생각도 잠시 또 다른 면에 놀랐다.

어쩌면 그때 이미 동질감을 느꼈는지도 몰랐다.

손만이 아니라 일복까지 타고난 김지훈이었다.

‘백마령 고개 버스 전복으로 33명이나 들어왔었지? 서도진과 안호석이 막 응급실 인턴으로 온 날이었구나. 연락받고 김대성 선생과 도착했을 때 이미 정리가 거의 다 된 상태인 걸 보고 그때 널 다시 봤는지도 모르겠다. 아니구나. 수술 전이었던가?’

이준영 교수에게도 그날의 의미는 상당히 컸다.

33명의 환자 중 1명이 빤뻬리였다.

한때 수없이 했던 수술이었지만 10년 전 일이었다. 아직도 모든 과정이 머릿속에 그대로 그려지기에 언제든 할 수 있는 수술이라고 해도 큰 문제가 있었다.

손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어머니를 수술했을 때와 똑같은 부위를 열어야 했다.

수술 동의까지 받았건만 도통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외래를 나서 보호자에게 설명하려는 순간 망치로 뒤통수를 맞는 충격을 느꼈다.

보통 의사에겐 분명 별일 아니었다.

단지 김지훈의 손에 들린 수술 책과 어떻게든 퍼스트를 잘 서겠다는 눈빛을 봤고, 설명하는 와중에도 쉬지 않고 수술 과정을 상기하며 손을 움직였을 뿐이었다.

‘내 젊은 시절과 판박이처럼 똑같았어.’

특별하고도 강한 자극이었다.

지난날의 열정과 희망이 스쳐 지나가듯 희미한 빛을 보였다.

부끄럽게도 수술 중 복막을 여는 순간 찾아온 공포에 멈칫거렸다.

1년 차 수준 때문인지 김지훈은 의아한 눈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의아해했을 수도 있었지만 내색을 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런 면에는 둔한 걸까?’

시작이 어려웠을 뿐인 모양이었다.

김지훈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수술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예전의 열정이 조금씩 되살아나며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우습게도 방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수술 테이프들을 보기 시작했다.

큰 수술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흘렀는데 어찌 된 일인지 절로 손이 움직였다.

머릿속으로 담낭을 떼고, 간을 절제했다.

피만 떠올리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때부터 다시 시작했는지도 몰랐다.

이유는 김지훈이었고, 결과도 김지훈이었다.

비록 모든 수술이 마이너 수술에 불과했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재가 되도록 태웠다.

아등바등, 그러나 훌륭하게 쫓아오는 모습이 대견하기만 했다.

어느새 마무리는 김지훈의 몫이라 여겼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것이 인연이었다.

기억 속 먼 예전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마무리를 맡기고 수술실 창 너머에서 지켜본 날이었다.

우연히 들린 김지훈의 말이 가슴을 후벼 팠다.

“도진아, 이제야 과장님이 날 확실하게 가르치실 생각인 모양이야.”

“그렇게 타고도 웃음이 나오세요?”

“도진아, 그럼 이 시점에서 웃어야지 울어?”

좋다고 웃으며 콧노래까지 흥얼댔다.

그도 잠시, 환자의 회복을 기다리는 동안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오더를 확인하고, 수술 기록을 하며 콧등까지 찡그리는 모습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문득 전공의 시절이 떠올랐다.

‘내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스승님에게 배웠던 때가 너무도 그리웠다.

전공의 때처럼 병원에서 잠을 청하고 싶었다.

그때 김지훈이 또 한 번 가슴을 깊게 찔렀다.

“과장님, 제 방에서 주무세요.”

“네 방?”

“그동안 거의 대부분 당직실에서 잤습니다. 편하진 않으시겠지만 깨끗해서 괜찮으실 겁니다.”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는데 숙소에 올라갈 틈은 더더욱 없었겠지. 이런 놈을 가르치지 않으면 누굴 가르칠까? 후우! 내가 자격이나 있는 걸까?’

김지훈의 침대에 누웠다.

어느 병원이나 편한 침대를 제공하지 않건만 무척 편했다.

불현듯 김지훈이 어떤 전공의인지 알려 주지 않은 이혁민에게 마음속 불평까지 했다. 무려 5년 동안 전화 한 번 하지 않은 후배에게 말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 급격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남몰래 수처와 타이 연습을 했다. 한때 일상처럼 귓가를 울렸던 따르르 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수술 테이프를 보고 또 보았다.

마치 첫발을 내딛는 전공의처럼.

이준영 교수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신상민 선생님도 무척 신경 써 주셨는데.’

생각해 보니 마음의 빚을 갚아야 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한 사람 두 사람, 짧은 시간이나마 목소리를 들으며 안부를 전했다.

10년간의 어둠이 준 가슴 깊숙한 곳의 회한과 후회가 아련하게 느껴졌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미망 속에서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감사한 일이다.

똑똑!

누굴까?

“이 교수, 여기 있었구나, 여기? 할 일 없지? 그치? 우리 얘기 좀 하자.”

박승준 교수, 지동훈 교수와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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