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57화 (957/1,329)

6화. 지우고 싶은 기억 Ⅱ (2)

배신감을 느꼈는지도 몰랐다.

‘경태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그때 조금만 더 이해하고 감쌌으면 우리 관계는 어떻게 됐을까?’

지난 시절을 두고 만약이라는 말만큼 의미 없는 말은 없지만 아직도 끈덕진 미련이 남았던 모양이었다.

허경발 교수도 금경태의 변한 모습을 기억하며 많은 기대를 했었다.

과장과 허경발 교수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완전히 등을 돌린 것은 군대를 제대한 직후 교수에 지원하면서부터였다.

부푼 꿈을 안고 막 제대하던 날.

금경태와 병원에서 마주쳤다.

근무지가 판이하게 달라 그간 얼굴 한번 보지 못했다. 이미 서로가 교수 지원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반가움이 앞선 이준영이 미소를 머금으며 손을 내밀었다.

“경태야, 반갑다.”

“과장님 만나러 가는 길이야?”

“너도 지원했다며? 위장관 파트지?”

이준영이 간담도 파트에 지원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금경태가 입만 삐죽거렸다. 그러고는 손을 흔들며 별말 없이 사라졌다.

‘확정됐구나. 바로 알게 될 텐데 말이나 하고 가지.’

3년간의 군대 생활은 많은 부분을 변하게 한다.

어린 나이도 아니고 거의 서른 다 돼 가니 금경태 역시 느낀 점이 많았을 것이다. 전공의 4년 차 시절의 마지막 기억도 나쁘지 않았다.

과장의 교수실 앞에 도착했다.

약간은 흥분된 소리가 문밖에서도 들렸다.

이준영이 멈칫거리고 말았다.

‘스승님 목소리?’

“과장님, 이미 이준영 선생으로 결정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와 금경태 선생을 제 파트 교수로 임명하시겠다는 이유가 뭡니까? 과장님 파트인 위장관 파트 교수로 임용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경태가? 이게 무슨 말이지?’

“간담도 환자가 많이 늘어서 보다 능력 있는 교수가 필요해. 내 파트는 이혁민이 오게 될 거야.”

“과장님 파트는 어떻게 결정하시든 문제가 없습니다. 제가 관여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요. 하지만 우리 파트 교수 선발에 관한 한 제 의견이 가장 중요하지 않습니까? 어떤 능력을 말씀하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필요로 하는 능력은 따로 있습니다.”

“내가 그런 점을 모르는 것 같아? 고민 끝에 결정한 일이고, 교수 선발 권한은 과장인 내게 있다는 것을 잊지 마. 파트 사정만 고려할 일이 아니야.”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이준영이 꼼짝도 하지 못했다.

올해 교수 티오는 2명이었다. 허경발 교수의 치솟는 명성 덕에 다른 병원 출신도 지원했지만 금경태와 함께 확정적이라고 들었다.

과장과 친분이 깊은 금경태는 위장관, 허경발 교수가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자신은 간담도 교수가 돼 나란히 근무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막판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이준영도 놓치기 아까운 인재야. 원한다면 항문이나 혈관 쪽도 있어. 그렇게 알고 그만해. 결정 난 사안이니까 더 이상 거론하지 마.”

“과장님!”

대답은 들리지 않고 문만 벌컥 열렸다.

못마땅한 얼굴로 교수실을 나오던 과장이 이준영을 보고는 눈가를 찌푸렸다.

너무 당황스러워 인사도 못했고, 그게 더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이준영의 머릿속이 텅 비었다.

과장이 혀를 끌끌 찼다.

곤란함이 아니라 이런 일도 혼자 결정하지 못해 짜증 난다는 얼굴이었다.

‘감히 과장인 내 말에 이의를 제기해? 이름 좀 알렸다고 내가 누구인지, 누가 윗사람인지 생각도 안 하는군. 경태 말대로 허경발을 견제할 사람이 필요해. 간담도를 온전히 맡겼다간 곧 내 뒤통수를 치겠어.’

교수들을 확실히 휘어잡아야 앞날이 편한데, 허경발 교수는 부임 직후부터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교수 재임용 때 탈락시키면 된다며 참았지만 수술 중 담도 조영술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부당하다고 느끼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 교수가 과장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어떻게 견제해야 좋을지 고민을 거듭할 때 금경태의 말이 확 와닿았다.

‘과장님, 죄송하지만 제가 간담도를 하는 것이 모두에게 유리할 것 같습니다. 우리 과는 과장님 통솔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금경태의 속이 보였다.

자기 자신의 욕심 때문이라는 사실도 잘 알았지만 엄연한 현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어차피 금경태는 손에서 못 벗어날 테니 손해 볼 일도 없었다.

‘이참에 누구 손에 우리 과가 있는지 확실하게 알려 주는 것도 좋겠지. 이준영, 넌 줄을 잘못 섰어. 허경발이 아니라 내가 과장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알았어야 했어.’

과장이 힐끗 눈길만 주고는 사라졌다.

뒤쫓아 나온 허경발 교수가 꾸벅 인사하는 이준영을 보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예리하게 번쩍이는 눈빛은 여전했다.

금경태의 속을 아는 사람은 과장만이 아니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전공의 시절의 행적, 애초에 위장관을 택했다는 사실, 이준영이 지원한 간담도 교수 자리를 원했다는 것만으로도 전후 관계를 확신할 수 있었다.

‘금경태,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더 이상 일반외과 의사로 인정할 수가 없다. 더더욱 널 가르칠 수는 없어.’

“준영아, 네가 우리 파트 교수다. 날 믿고 기다려.”

순간 감사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스승이라는 생각이 교차했다. 제자 된 도리로 스승을 난처하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 자신의 일인데 금경태를 향한 분노나 원망보다 왜 그런 생각이 먼저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었다.

“선생님, 저 때문에 곤란한 일이라도…….”

“너 때문이 아니야. 환자를 위해서라도 자격이 있는 사람이 교수가 되는 것이 마땅해.”

단호한 표정을 지은 허경발 교수가 툭 어깨를 한 번 치고는 뚜벅뚜벅 어디론가 향했다.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에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준영으로서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내의 걱정스러운 눈초리에 누군가를 향한 분노가 치밀었다. 과장은 그럴 수 있다고 쳐도 금경태는 절대 그래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달라졌다고, 아니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여겼기에 친구라 믿었었다. 건전한 라이벌로서 서로를 자극하고 발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금경태, 네가 이럴 수는 없어.’

점입가경이었다.

얼마 후 허경발 교수가 과장과 여러 번 충돌했다는 말을 들었다. 재단 관계자들을 만나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는 말도 들렸다. 급기야 부당함을 바로잡지 않으면 병원을 옮길 수 있다는 발언까지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스승에게 폐를 끼쳤다는 생각에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독하게 마음먹고 기다린 끝에 통보를 받았다.

의외의 결론이 났다.

생각지도 못한 결과였다.

“올해 일반외과 교수는 예정대로 2명을 충원하겠습니다. 또한 과장님과 허경발 교수님의 제안을 따라 2명 모두 간담도 파트 교수로 임명합니다.”

재단의 고육지책이었다.

개원한 지 10년도 되지 않아 더욱 병원 발전에 매진해야 하는 상황에서 교수 한 명 한 명이 무척 중요했다. 더욱이 많은 환자들이 허경발 교수와 과장을 모두 찾고 있었다.

과장의 체면을 살리면서 허경발 교수의 입지까지 세워 준 면이 강했다. 세계 학회도 모자라 교과서에까지 이름을 올린 교수를 무시할 수 있는 관계자는 아무도 없었다.

얼핏 원만한 해결처럼 보였지만 미봉책에 불과했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허경발 교수의 대쪽 같은 성격을 간과했다는 것이었다.

“금경태 선생, 왜 갑자기 간담도로 마음을 바꿨습니까?”

“교수님 밑에서 보다 많은 것을 배우고 싶습니다. 간담도 분야에 또 하나의 새로운 이정표를 만드시지 않으셨습니까? 열심히 노력해 제 목표를 이루고, 선생님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

말과 행동이 본질적으로 달랐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결정됐다.

허경발 교수에게 제자는 오직 한 명뿐이었다.

금경태는 어떻게든 눈에 들려 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허경발 교수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이준영도 이를 악물었다.

같은 파트 교수였지만 필요한 말 이외에는 나누지 않았다. 워낙 무뚝뚝한 성격까지 겹쳐 마치 견원지간처럼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최선의 길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도 남았다.

‘스승님께 보답하고, 금경태를 이기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것이 바로 내 자신을 위한 일이다.’

불편함을 비치기보다 자신의 일에 묵묵히 전념했다. 마치 전공의 때처럼 고되고 힘든 상황을 마다하지 않았다. 수없이 밀려오는 응급 환자까지 도맡아 치료하며 최선을 다했다.

“이준영 선생, 내일 간암 수술 환자 최종 확인했습니까?”

연이어진 응급 수술에 시뻘게진 눈으로 이준영이 고개를 푹 숙였다.

“집도를 누가 하든 환자에 대한 최종 책임은 교수에게 있습니다. 전공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같은 말을 들어도 전공의 때보다 훨씬 아팠다.

허경발 교수의 엄한 눈길을 뒤로하고 밤늦은 시간도 잊고 환자를 보았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힘과 열정을 쏟았다.

실력은 한순간에 늘지 않는다.

서서히 노력한 만큼 딱 그만큼만 늘기 마련이다.

허경발 교수의 혹독한 가르침과 교수라고 보기 민망할 정도로 발에 불이 나도록 달리는 사이, 금경태와의 차이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준영아, 내일 대장 수술 있는데 간에 퍼졌어. 절제해야 할 것 같으니까 수술 들어와야 한다. 꼭 들어와.”

“시간이 안 될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야? 네가 날 안 도와주면 난 어떻게 수술하니? 어떻게? 허경발 선생님께 잘 말씀드리고 네가 들어와. 혹시 말하기 무섭니? 무서우면 내가 얘기할게, 내가.”

이제는 독특한 말투가 완전히 입에 붙은 송재덕도 전폭적인 신뢰를 아끼지 않았다. 금경태에게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매번 같은 부탁을 반복했다.

이준영에겐 삶의 힘이었다.

솔직히 금경태도 이제 라이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설혹 과장 자리에 먼저 오른다고 해도 스승, 선배, 동료, 후배의 인정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왕이면 스승님 뒤를 이어 과장을 하면 좋겠다.’

사람인 이상 욕심이 없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열정, 일반외과 의사로서의 자부심이 압도적이었던 시절이었다.

오직 앞만 보고 달렸다.

이준영 교수가 소주 한 병을 앞에 놓았다.

혼자 무슨 술을 마시냐는 아내의 잔소리에 묵묵히 미소만 보냈다. 안주도 없이 술만 마시는 모습을 본 아내가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병원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그럴 일이 있나? 금경태가 생각나서 그래.”

“나쁜 기억만 준 사람을 왜 떠올려요?”

“지훈이와 건강하게 경쟁하는 신현수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드네. 그때는 나도 금경태와 다르지 않았던 것 같아.”

손사래를 치는 아내를 보면서도 굳은 얼굴을 풀지 못했다.

어쩌면 정말 그랬을지도 몰랐다. 금경태는 자신의 욕심을 드러냈을 뿐이고, 이준영 자신은 가슴 깊숙한 곳에 숨기고 있었다는 차이에 불과했을 수도 있었다.

“혁원이는 연락 없었어?”

“뭐 하고 사는지 매일 바쁘대요.”

하루하루 다르게 쑥쑥 커 가는 아들을 보며 힘을 냈던 시절이 그리웠다. 그 시간을 끝까지 지켜 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아프고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지훈이가 아니었으면 행복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살았을 수도 있었겠지?’

아니다.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더욱 무거운 회한이 다가오는지도 몰랐다.

전임 강사 2년 내내 잘나갔다.

과장과의 관계가 문제였지만 평소의 무뚝뚝함이 도리어 도움이 됐다.

허경발 교수에게 배우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간 보상은 기대 이상이었다.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점차 쌓이는 실적과 교수로서 손색이 없는 실력은 금경태를 압도하고 있었다. 라이벌이었다는 사실조차 희미해질 지경이었다.

매사에 자신감이 넘쳤다.

젊은 나이에 대가 소리를 듣기 시작한 허경발 교수의 뒤를 이어 간담도의 대가가 될 수 있다는 확신에 찼다. 그만큼 노력했고, 성과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 참이기도 했다.

거칠 것도 없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병원 측은 조교수 임용을 넘어 아예 평생 남기를 바랐다. 허경발 교수가 있는 한 티끌만큼도 떠날 생각이 없었지만 기분 좋은 일이었다.

“이준영 교수님, 이른 말이지만 조교수 임용 즉시 응급실 과장을 맡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남은 1년 잘 부탁드립니다.”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며 학회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다. 환자 수는 물론 수술 건수가 적지 않아 선배들조차 경험을 공유하길 바랐다.

그야말로 순풍에 돛을 단 세월이었다.

반면 금경태는 궁지에 몰렸다.

나날이 영향력을 상실하는 과장은 더 이상 힘이 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일반외과 중핵으로 자리 잡은 허경발 교수는 필요한 일 이외에 말이 없었다.

‘이준영, 너만 없었으면.’

미움이 미움을 만드는 사이 전임 강사 첫해가 지났다.

상황은 점점 이준영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돌아갔다.

새로운 교수진이 보강된 것이다.

군대에서 제대한 이혁민과 신기동이 각자 원하는 파트에 교수로 임명됐다.

이로써 고성문을 제외한 일반외과 전공의 2, 3, 4기 모두 차례차례 교수로 임명됐다.

그마저 금경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허경발 선생님과 준영이 라인으로 꽉 채워지는구나. 차라리 생판 모르는 사람이 교수가 되는 것이 나았어. 제길! 과장은 끈 떨어진 연 신세고, 재단은 준영이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데 난 뭘 하고 있는 거지?’

단지 사람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위장관 교수가 된 이혁민과 뜻밖에도 생소한 혈관 파트를 맡은 신기동이 오히려 성과가 좋았다.

답답한 마음에 가끔 술자리를 하며 친분을 깊게 하려 했지만 그동안 한 행동이 있었다.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사실상 고립무원에 빠져들었다. 한때 이준영보다 몇 발 앞섰다고 자신했건만 불과 일이 년 사이에 완벽히 패배한 것이다.

‘그냥 위장관을 했어야 했어. 이렇게 된 이상 깨끗하게 인정하고 나가야 하나?’

고민이 거듭되는 나날이었다.

좁쌀처럼 남은 미련과 구겨진 자존심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조교수 임용이 단행됐다. 불행히도 티오는 한 명이었고, 대상자는 이준영이었다.

더 이상 버틸 이유가 없었다.

나갈 때와 자리를 찾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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