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56화 (956/1,329)

6화. 지우고 싶은 기억 Ⅱ (1)

손일석이 입을 풀듯 입술에 침을 발랐다.

“운을 타고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데, 김 교수가 딱 그런 사람이었네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겉돌고 있을 때 잡아야 하는 기회가 눈앞에 팍! 뜬 겁니다.”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급하시기는! 수술이 예정된 환자 흉부 사진을 보며 경험 많은 의사들조차 고민에 빠져 있더랍니다.”

“왜?”

“이상 소견이 보이는데 뭔지 알 수가 없었던 거지요. 그런데 지훈이 눈에 병명이 그냥 저절로 보였다는 겁니다. 그것도 정확하게요.”

호기심이 동했다.

“그게 뭐니? 뭐야? 뭘까?”

“선생님, 제가 운을 타고났다고 했죠? 폐결핵이었답니다. 우리는 상당히 많이 봐서 첫 번째로 의심하는 질환인데, 미국 애들은 거의 못 봐서 이젠 생소한 질환이랍니다.”

신기동 교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후진국 병인데 우리나라는 왜 유병률이 높은지 모르겠어. 어디든 경험이 중요하니까 미국 의사들이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먹고살 만하면 줄어들어야 하는 질환인데 이상하긴 합니다. 어쨌든 그 덕에 미국 놈들이 깜짝 놀라면서 실력 있는 의사가 왔다며 보는 눈이 달라졌답니다. 그 덕에 전례를 깨고 두 달 만에 어시스트를 세운 겁니다.”

“운뿐이겠니? 지훈이 성격 어디 가겠어? 거기서도 맨날 뛰어다녔을 거야. 나 같아도 수술 줬겠다. 그치? 내 말이 맞지?”

손일석이 씨익 웃었다.

‘그렇지. 이쯤에서 수술 얘기가 나와야 말이 풀리지. 송재덕 선생님, 감사합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거기에 운까지 겹쳤으니 게임 끝난 거죠.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어시스트 서는 걸 본 집도의가 지훈이 실력에 살짝 놀라면서 얼마 후 메스를 넘겨줬다는 사실입니다.”

다들 깜짝 놀랐다.

유학 경험이 있는 교수들은 입을 쩍 벌릴 정도였다.

“일석아, 지훈이가 집도를 했다고?”

“신 교수님, 사람 말 끝까지 들어야 한다고 했을 텐데요. 개복 수술이나 라파로로 담낭 떼는 것 정도야 시작에 불과한 거죠. 이준영 선생님, 담낭농증을 라파로로 수술했는데 거의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왜?”

제자의 일인데 말투는 여전히 무덤덤했다.

‘이미 정보가 샜나? 반문하는 것 봐서는 아닌데, 성격 참 일관성 있으시네. 스승은 표정 없는 로봇, 제자는 무쇠 체력을 가진 로봇, 둘 다 똑같다. 나는 스승님과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손일석이 힐끗 신기동 교수를 보며 말을 이어 갔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는지에 따라 재미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다들 어느 정도 짐작하는 눈치에 맥이 살짝 빠졌지만 손일석은 굴하지 않았다.

“케이스가 만만치 않았는데 너무 빨리, 너무 깨끗하게 끝낸 거 말고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환자 경과도 너무 좋아서 4일 만에 깔끔하게 퇴원시켰답니다. 물론 상처 치료는 병원 앞 호텔 같은 데서 받긴 했겠지만, 어쨌든 미국 의사들 눈에 보통내기가 아닌 의사가 온 거죠. 우리 병원 에이스 실력인데 인정받지 못하면 말이 안 되죠.”

손일석의 뺨이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재미있게 얘기한다는 것이 마치 자신의 일처럼 느껴진 모양이었다. 친구이자 동료인 김지훈이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뿌듯해하고 있었다.

신현수가 나직한 소리를 터트렸다.

‘역시 지훈이 너답다.’

국내에서 툭하면 했던 수술이지만 매번 성공을 장담하기 힘든 질환이 바로 담낭농증이다. 만만치 않은 케이스라는 말, 미국인의 비만 정도, 적응 기간을 생각하면 성공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무엇보다 미국 의사들의 잠재적인 편견을 깨트렸다는 사실에 감탄하고 있었다. 유학, 혹은 연수를 떠난 의사가 어떤 대접을 받는지 잘 아는 데다 불과 두 달 조금 더 지난 시점이기에 더욱 놀라운 일이기도 했다.

이준영 교수가 신현수의 얼굴에 더 눈길을 주었다.

라이벌 관계에 있으면 하다못해 시샘하는 눈치, 혹은 별일 아니라는 눈치 정도는 보일 줄 알았는데 조금도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손일석 이상으로 기뻐하는 것 같았다.

송재덕 교수의 눈은 더더욱 피할 수 없었다.

“현수야, 지훈이가 잘나가는 게 좋니? 좋아?”

“예. 개인적으로 자극도 되고, 병원과 우리 과를 위해서 정말 바라던 일입니다.”

“그래, 그렇구나. 이 교수, 우린 참 운도 좋아. 지훈이 하나만도 복덩인데 현수하고 경석이까지 복이 세 개다, 세 개. 실력이 빠지길 해, 인성이 빠지길 해. 좋다, 좋아.”

신현수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건강한 라이벌 관계를 형성한 것이 인생에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김지훈의 성공은 강력한 자극이었고, 이는 곧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고마워하고 있었다.

물론 펠로우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기동 교수의 눈에 차지 않았지만 말이다.

“손일석, 느끼는 거 없어?”

“왜 없겠습니까? 친구의 행복은 제 행복이고…….”

찌릿찌릿!

칠지도를 뽑으려 하고 있었다.

이런 말 듣고자 물은 말이 아니었다.

손일석이 재빨리 태세를 전환했다.

“열심히 확실하게 하겠습니다.”

“너희 둘은?”

오성민과 김경수까지 유탄에 맞았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손일석 넌 말만큼 못하면 전임은 생각도 하지 마. 오성민, 너 요새 넋이 빠진 것 같은데 긴장해. 김경수, 혈관 똑바로 하자. 지켜본다.”

신기동 교수의 매서운 눈은 파트를 가리지 않았다.

모든 교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 교수 말이 맞다, 맞아. 복덩이 세 개보다 여섯 개가 좋겠지. 나도 신경 쓰마. 원장 일 다 때려치우고 우리 펠로우들 잘하는지 눈 부릅뜨고 본다. 잘하자.”

송재덕 교수가 박승준 교수를 보았다.

“과장 태도가 제일 중요하잖아, 제일. 좋은 게 좋다고 물러 터지면 안 돼. 알지? 내 말이 맞지?”

“예. 확실하게 가르치겠습니다.”

일상 대화처럼 오고 간 말에 점점 뼈가 실렸다.

“내도 예의 주시 하고 있다. 오성민, 신 교수 눈이 정확한데 혹시 무슨 일 있나?”

“예? 별일 없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교수들의 눈이 다르지 않았다.

오성민 역시 지적할 것이 없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손일석조차 환자에 관한 한 워낙 엄격한 교수들이었기에 그렇게 보일 뿐이라 여겼다.

다들 무심코 지나쳤고, 김경수만이 나직한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정점은 역시 무뚝뚝함의 대명사였다.

눈길 한 번 주는 것으로 펠로우들이 어깨를 흠칫거렸다. 나직한 헛기침 소리에 하마터면 경기를 일으킬 뻔했다. 다행히 입이 열리지 않았다.

이내 소소한 대화가 이어졌고, 큰 웃음이 터질 정도로 즐거운 자리였지만 긴장을 풀지 못했다.

“어이구! 늦었다, 늦었어. 가자. 집에 가자.”

펠로우들만 남았다.

손일석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지훈이 그 자식 얘기를 내가 왜 꺼냈을까? 혹을 뗄 생각은 조금도 없었는데 왜 혹이 하나 더 붙었지? 어후! 죽어라 죽어라 하시네.”

“그러게 말이다. 유학 간 지훈이가 우리에게 불똥을 튀기다니 정말 대단해. 성민아, 간만에 맥주 한잔하자. 우리도 먹고 살아야지.”

“그래. 가자.”

“어? 너희들 지금 당직인 날 놔두고 둘이 술 먹겠다는 거야? 한 달에 한 번 우리 모두 주말 당직 빼 줄 때 먹기로 했잖아. 배신이다, 배신.”

김경수가 짐짓 눈을 부라렸다.

‘성민이 입장도 있고,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 말 못해 미안하다. 나중에 잘 해결되면 얘기해 줄게.’

“오늘처럼 시간 나는 날이 또 언제 오겠어? 넌 당직이나 열심히 서.”

동기들마저 사라지자 손일석이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된 김에 일단 퇴근하고 보자는 마음을 먹자마자 휴대폰이 난리를 치고 있었다.

응급실은 영원한 친구다.

특히 일복 많은 놈에겐 말이다.

‘김지훈 이 자식이 일복은 놔두고 간 게 틀림없어. 죽일 놈. 평생에 도움이 안 될 놈.’

애먼 김지훈만 욕먹었다.

“왜 이렇게 귀가 가렵지? 누가 내 욕 하나?”

이역만리 미국에서도 귀를 긁고 있었다.

***

퇴근길에 응급실로 눈길을 주던 이준영 교수가 나직한 한숨을 토해 냈다.

보호자에게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손일석 뒤로 송진우와 강병옥이 보였다. 처치실을 들락날락하며 마지막 4년 차 생활을 불태우고 있었다. 차상수와 오하석은 헉헉 숨까지 몰아쉬며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꿈 많은 시절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찬 시기다.

지금은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 4년 차 생활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손을 놓기 직전까지 새까맣게 탔었나? 스승님보다 무서운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혁민이, 기동이, 정말 열심히 일했지. 경태 넌 그때까지만 해도 내 일생의 라이벌이었어.’

문득 김지훈의 지난 모습이 떠올랐다.

펠로우 때도 모자라 조교수가 돼서도 온 병원을 뛰어다녔다. 신현수와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모습은 흐뭇함 그 자체였다.

그 때문인지 더욱 지난날을 떠올리게 했다.

‘지훈이와 현수, 나와 금경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꿈처럼 행복했던 시절이 있어 금경태와의 일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까지 더욱 가슴이 아팠다.

순조롭게 전문의가 돼 군대에 갔던 시절이 어쩌면 인생의 황금기였는지도 몰랐다. 평범했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었다.

‘아내와 결혼하고, 혁원이를 낳았던 때가 제일 행복했었구나. 스승님이 정말 기뻐하셨는데.’

은근히 추억이 많았다.

군대 생활 나쁘지 않았다.

밤낮없이 뛰어다니던 전공의 때와 달리 시계처럼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에 어리둥절했었다. 덕분에 가족과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즐겁기만 한 생활이었다.

짬밥이 쌓여 통합 병원에 배치받았을 때 송재덕과 함께 근무했다. 무척 보고 싶었던 얼굴이었는데 막상 어제 본 것처럼 서로 무덤덤했던 것 같았다.

“선생님, 잘 지내셨습니까?”

“이 대위, 너 군인이다, 군인. 다시 인사해.”

여전했다.

“충성. 대위 이준영 금일부로 통합 병원 근무를 명받아 이에 신고합니다. 충성.”

“그래. 이제 군인답다. 덩치하고 딱 어울려. 평소에도 말을 그렇게 하면 얼마나 좋니. 어쨌든 잘 왔다. 잘 왔어. 오늘 저녁에 환영식 하자. 준영아, 너 오니까 든든하다. 든든해.”

송재덕의 일상은 변함없었다.

반짝이는 계급장을 달고, 작은 키로 온 병원을 헤집고 다녔다. 유쾌한 웃음 속에 의무병들과도 무척 친해 인기 만점이었다. 환자가 발생했을 때는 당직이 아니어도 뛰어나올 정도로 열의가 넘쳤다.

“안달복달한다고 3년 빨리 안 간다. 이왕 군 생활 하는 거 즐겁게 하자. 즐겁게.”

“제대하시면 교수 지원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무뚝뚝한 놈이 정보는 빠르네. 대장 할 거야, 대장. 여기 와서 보니까 대장이 최고더라. 나도 허경발 선생님처럼 발자국 좀 남겨 보자. 할 수 있겠지? 그치?”

“그럼요.”

“말속에 영혼이 없다, 영혼이.”

하루하루가 즐거운 나날이었다.

두세 달에 한 번 정도 허경발 교수를 만났다.

그때마다 자신을 간담도 파트 교수로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역력해 송구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마음은 언제나 포근하고 즐거웠다.

행복한 나날은 유난히 빨리 간다.

1년이 후딱 지나갔다.

대위 3년 차, 5호봉이 됐을 때 송재덕이 제대했다.

“준영아, 난 간다. 넌 말뚝 박아도 될 정도로 군대 체질이지만 일반외과 의사가 별로 필요하지 않은 동네라는 거 알지? 민간인 빨리 돼라, 빨리. 아후! 속 시원하다.”

펠로우가 없던 시기라 바라던 대로 곧바로 대장 파트 전임강사가 됐다.

겸사겸사 허경발 교수를 함께 찾았을 때 무척 반가워하는 모습에 불현듯 빨리 제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준영 선생, 세 달 만인가요?”

“예. 그동안 별일 없으셨습니까?”

“병원 생활이 변화가 있겠습니까? 우리 송재덕 선생처럼 건강하게 남은 생활 무사히 마쳐야 합니다.”

군복 대신 가운을 걸친 송재덕이 씨익 웃었다.

“선생님, 하나도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준영이가 군대 체질입니다. 군대 체질. 보세요. 딱 각이 잡혀 있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런가요? 다녀온 지 오래돼서 각이 뭔지 가물가물합니다. 내 군번이 어떻게 되더라.”

송재덕이 가늘어진 눈매로 허경발 교수와 이준영을 번갈아 보았다. 이런 종류의 농담은 거의 하지 않았던 허경발 교수였기에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모양이었다.

‘군번을 찾을 선생님이 아닌데 수상해. 그러고 보니 준영이 저 자식도 왠지 웃는 것 같네. 그럼 결론은 하나네.’

감 딱 잡았다.

“선생님, 준영이가 간담도 교수 지원했습니까?”

“안 어울리나요?”

‘내 이럴 줄 알았다. 어떻게 매일 얼굴을 봤는데 한마디도 안 할까? 준영이 너답다, 너다워.’

“아이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흐음! 이렇게 되면 준영이가 모든 면에서 제 직속 후배네요. 전공의도 후배, 군대도 후배, 교수도 후배. 준영아, 잘하자. 잘해야 한다.”

허경발 교수마저 웃었다.

걱정 하나 없을 정도로 행복한 시절이었고, 군대를 제대한 후에도 모든 인연이 쭉 이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은 보기와 달라 무척 상심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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