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55화 (955/1,329)

5화. 지우고 싶은 기억 Ⅰ (2)

수술 중 담도 조영술은 논문 제출 이후에도 계속됐고, 그만큼 정확하고 다양한 자료가 쌓였다.

외국 학술지와 교과서 게재 소문에 수많은 의사들이 발표장에 몰려들었다.

긴장과 기대 속에 진행된 발표가 끝났다.

허경발 교수와 이준영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께 찬사가 쏟아졌다. 얼굴도 모르는 의사들까지 이준영에게 눈길을 주었다.

금경태는 스스로 구경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발표가 끝난 후 허경발 교수가 함께 연구한 전공의들을 소개했지만 형식적인 예의일 뿐이라 여겼다.

아무 역할도 못하고, 얼굴조차 내밀지 못했다는 사실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극단으로 치닫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의국 전체가 이룬 일이라는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이건 아니야. 이준영, 끝나지 않았어.’

학교 다닐 때부터 친구였고, 일반외과를 함께하면서 라이벌이 된 이준영은 더 이상 친구도 라이벌도 아니었다. 오직 밟고 넘어서야 할 장애물일 뿐이었다.

금경태가 몇 날 며칠 동안 잠도 잊고 고민에 잠겼다.

‘이런 식으로 가면 결과는 빤해. 허경발 선생님의 마음을 잡는 것이 최선인데 어떻게 해야 상황을 뒤집을 수 있지?’

분노와 미움 속에서도 현실을 잊지 않았다.

허경발 교수의 이름이 과장을 넘어서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거의 확정적으로 변해 가는 교과서 게재가 정식으로 결정되면 필적하는 명예를 가진 의사는 있을 수 없었다.

힘의 균형추가 새로운 사람에게 기운다는 말이었다.

‘정확하게 판단하지 않으면 죽도 밥도 안 된다.’

당장의 권위보다 미래의 권위를 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답은 이준영에게 있었다.

의미 없어 보이는 행동일지라도 따라 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다. 장래를 위해 귀찮음, 짜증, 의도된 웃음은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금경태의 행동이 확 변했다.

이기와 이타는 단 한 글자 차이에 불과했다.

자신의 일에 충실하며 아래 연차를 살뜰하게 챙겼다. 대개는 혼자 결정했던 의국 일까지 상의하는 모습에 이준영이 웃음을 보일 정도로 마음을 놓았다.

불편했던 시간은 잠시였을 뿐이라 생각했다.

‘그래. 지금이 바로 경태 너다운 모습이야. 학교 다닐 때 좋은 친구, 좋은 선배였잖아?’

이혁민도 꽤나 놀란 모양이었다.

“이준영 선생님, 금경태 선생님이 변하신 것 같습니다.”

“원래 모습이야.”

“그런가요? 요새 분위기 같으면 일할 맛이 저절로 날 것 같습니다.”

다만 신기동의 예리한 눈빛은 변함없었다.

‘이상해. 별다른 계기도 없고, 도리어 마음에 안 드는 상황일 텐데 갑자기 무엇 때문에 변한 거지? 혹시 변한 척하는 걸까?’

회의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았건만 허경발 교수마저 일부나마 마음을 열었다.

이대로 포기하기엔 아까운 인재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마음과 생각만 바꿔 준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일반외과 의사가 바로 금경태였다.

“경태야, 내일 허경발 선생님 수술 들어가.”

“뭐?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방금 전에 분명하게 말씀하셨어. 일반외과 의사답다는 말씀까지 하셨다.”

금경태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된다.’

진심이어야 했다.

거짓을 거짓으로 덮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어느 누구나 속마음을 알았다면 가식이 진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미우나 고우나 모두 일반외과 의사라는 사실, 한솥밥을 같이 먹은 관계는 변하지 않으니 말이다.

시간은 매일매일 어김없이 흘렀다.

일생에 다시없을 정도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새비스톤 집필진이 수술 중 담도 조영술을 정식으로 기재한다고 알려 왔다.

삽시간에 각 병원으로 소식이 퍼졌고, 허경발이라는 석 자를 모르는 의사가 없을 정도로 이름이 오르내렸다.

Hur's op. Cholangiogram.

(허경발 교수의 수술 중 담도 조영술)

날고뛴다는 의사들도 이루지 못할 업적이었다.

실로 대단한 영예였다.

당연한 일처럼 병원 내 위상이 크게 달라졌다.

가장 늦게 교수가 됐고, 과장의 힘은 여전히 막강했지만 최연소 과장이 될 것이란 말까지 돌았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환자들까지 몰려들어 더욱 힘을 실어 주었다.

부작용은 필연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과장과의 관계가 거칠어졌다. 모든 원인을 과장에게만 돌릴 수 없었지만 노골적인 견제가 가장 큰 이유임은 분명했다.

이준영에게도 일생의 전기가 된 시기였다.

어마어마한 가슴 떨림을 맞이한 해였다.

해외 학술지에 실린 논문과 제2저자로 등재됐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도리어 외부의 변화에는 조금도 휘말리지 않았다.

전공의 신분으로 다른 병원에 이름을 알린 일마저 개의치 않을 정도였다. 어차피 혼자 한 일도 아니고, 의국 전체가 힘을 합친 결과였기에 내세울 일도 아니었다.

그보다 백배 천배 중요한 일이 있었다.

한 해가 지고 한 해가 시작되던 날이었다.

두 달만 지나면 정식으로 4년 차가 된다.

‘어느새 최고 연차가 됐는데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아. 평생을 배워도 채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의사로서, 한 인간으로서의 고민이었다.

자연스럽게 허경발 교수가 떠올랐다.

최고의 실력을 가진 교수, 인생의 길잡이라는 등의 거창한 말은 필요 없었다. 결코 연구 업적과 그로 인해 얻은 권위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존경할 뿐이었다.

단지 그 길을 따라가고 싶을 뿐이었다.

지난 3년 동안 보고 배우며 쌓여 온 감정이었다.

평생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해졌다.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는 간절함이었고, 교수로 남고 싶다는 목표에 더 큰 의미를 담는 순간이었다.

‘말도 안 놓으시는 선생님인데 말씀을 드려도 될까? 간담도를 하고 싶다는 사실만 말씀드릴까?’

허경발 교수가 보이는 전공의에 대한 존중과 존경은 일종의 어려움이었다. 많은 시간을 함께했건만 앞에만 서면 아직도 몸이 굳었다.

고심 끝에 결정했다.

하얀 눈이 내리는 가운데 허경발 교수를 찾았다.

교수실 문을 두드리는 그 순간까지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평소 성격을 생각하면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군대 다녀온 후 교수 지원을 하고 싶습니다. 만일 교수가 될 수 있다면 간담도를 하고 싶습니다.”

“내 파트를 하고 싶다고요?”

허경발 교수의 목소리가 왠지 평소와 달랐다.

“예. 하고 싶습니다.”

“그래요? 의사에게 교수란 자리는 명예나 찾는 단순한 직위가 아닙니다. 그 점을 생각하고 말하는 거겠죠?”

왜 교수가 되고 싶은지, 교수가 되면 무엇을 어떻게 할지부터 환자에 대한 말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꽤 시간이 흘렀다.

허락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허경발 교수가 저녁 식사 제의를 했다. 특별한 일이 있다고 해도 전공의와 개별적으로 식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동안 밥 한 끼 제대로 못 샀군요. 갑시다. 올해에는 눈이 많이 올 모양입니다. 오래간만에 술 한 잔 곁들이고 싶군요.”

뜻밖의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묘한 감정 속에 소주잔을 기울였다.

허경발 교수는 자신의 지난날을 꺼내며 평소 들을 수 없었던 생각까지 말했다. 그 덕인지 마음이 무척 편해졌고, 용기까지 샘솟았다.

‘교수가 안 되어도 좋다. 내 마음만은 말씀드리자.’

막상 입을 열려니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 짧은 사이 별생각이 다 들었다.

친근한 태도에 숨은 카리스마는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허경발 교수의 입지가 크게 강화된 이후라 행여 오해를 살까 두렵기도 했다.

선생님과 스승님의 차이는 무엇일까?

스승의 은혜라는 노래까지 있지만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과연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한 번 결정하면 결과가 나올 때까지 우직하게 밀어붙였다. 당연하게 여겼던 일이자 자신감이었는데 허경발 교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격하게 뛰었다.

이준영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지금 아니면 말씀드릴 기회가 없다.

술기운을 빌릴 수는 없었다.

차가운 밤공기와 흩날리는 눈발에 정신을 맑게 가졌다.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마음속 말을 진솔하게 꺼냈다.

“선생님, 스승님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이 시대에 누가 이런 말을 할까?

허경발 교수가 불콰해진 얼굴로 조용히 이준영의 얼굴을 응시했다. 갑작스러운 말에도 불구하고 놀람도, 의외라는 눈빛도 보이지 않았다.

술기운 속에서도 끈질기게 남아 있던 매서움이 사라졌다. 눈가에 살짝 미소가 걸리는 것 같았다. 이준영이 보였던 지난날의 마음과 행동을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잠시 후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스승과 제자라! 내가 그럴 자격이 있을까?”

원치 않는다면 절대 나올 말이 아니었다.

어색했다면 자신의 뜻을 확실하게 전할 교수였다.

이준영이 입도 열지 못했다.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안은 채 묵묵히 허경발 교수의 말을 기다리며 스승과 제자라는 말을 곱씹을 뿐이었다.

마지막 잔을 비웠다.

허경발 교수가 갑자기 이준영의 등을 두드렸다.

“준영아.”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러나 분명히 웃고 있었다.

“우리 함께 열심히 잘해 보자.”

간절히 원하던 말이었다.

존댓말이 사라졌다는 것만으로도 허경발 교수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지만 결국 이준영의 가슴이 터졌다.

훅훅! 열기 가득한 숨이 하얗게 퍼져 나갔다.

스승은 제자를 보며 웃었고, 제자는 스승을 보며 입술만 꽉 깨물었다.

그렇게 20대 후반의 전공의와 40대 초반의 교수가 제자와 스승이 됐다.

형식은 중요치 않았다.

누군가를 인정하고, 누군가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스승님!”

손을 흔들며 집으로 향하던 허경발 교수가 빙그레 웃으며 차창 밖만 바라보았다.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선 이준영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얗게 물든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결코 그날의 감정과 기억을 잊지 못할 것이다.

다음 날.

“이준영 선생, 이 환자 백혈구 수치가 어떻게 됩니까?”

허경발 교수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고, 아무도 어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이준영도 허경발 교수가 말을 놓는 경우는 단둘만의 자리에 국한된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알았다.

‘후우! 요즘처럼 즐거운 때가 없는데, 8개월 후면 손을 놓고 군대 가야 한다니 정말 아쉽다.’

그렇게 4년 차를 시작했다.

초반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새비스톤 개정판이 나온 것이다.

목차에서 ‘Hur’를 찾고, 내용을 읽느라 부산을 떨었다.

전공의 이름은 나올 리 없건만, 의국 전체의 힘을 쏟은 결과이기에 모두들 환호와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무사히 전문의가 돼 군대에 간 송재덕의 목소리가 무척 반가웠다.

(준영아, 이게 다 누구 덕분인 줄 알지? 내가 미국에 제출하자는 말 안 했으면 어떻게 할 뻔했니? 사람은 역시 머리가 잘 돌아가야 돼, 머리가. 준영아, 내 말이 맞지?)

“예. 허경발 선생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뭐? 하여간 평소 말 없는 놈들은 조심해야 된다니까. 들리는 말이 아니라 속에 숨은 뜻을 들어야지. 준영아, 한 번 의국 선배는 영원한 선배야. 우리 잘하자. 잘해야 한다.)

고성문도 허경발 교수와 직접 통화하며 기쁨을 함께했다.

그렇게 모두 같은 마음이었건만 과장은 얼굴을 펴지 못했고, 금경태는 심각한 표정을 숨겨야 했다.

스승의 명예는 제자의 영광이다.

누구보다 기쁜 사람은 바로 이준영이었다.

홀로 있을 때면 미친놈처럼 웃었다.

사연도 다르고 일어난 일의 비중은 비교할 수도 없지만, 김지훈도 음성에서 똑같이 웃었을 것이다.

딸깍!

커피 잔 놓는 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모처럼 모두 모인 자리에서 손일석이 호들갑을 떨었다.

“선생님, 혹시 지훈이, 아니 김 교수 소식 들으셨어요?”

“무슨 소식?”

통화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이준영의 귀가 활짝 열렸다.

정보통으로 유명한 손일석이 스윽 눈길을 주며 뜸을 들이자 다들 궁금한 눈치였다.

“이번에 어시스트를 서게 됐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현수의 눈이 찢어졌다.

“난 또 뭐라고? 그건 다 아는 얘기잖아. 괜히 궁금해했네. 어쨌든 무척 빨리 적응하네. 이준영 선생님, 일 년이 지나도 어시스트 서기 정말 힘든 일인데 지훈이가 이렇게 빨리 인정받아서 기분 좋으시죠?”

“어시스트가 뭐 대단한 거라고.”

상당히 어색해하는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무엇보다 기쁘다는 표현을 심각한 어색함으로 대신하는 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다.

이경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석이 정보가 이 정도로 늦진 않을 텐데 이상하네.”

“야! 역시 조교수님은 다르시네. 신 교수님, 사람 말, 특히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는 법입니다. 일단 김 교수가 어시스트를 서게 된 계기부터 말씀드리죠.”

“무슨 일 있었대?”

손일석이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눈가를 좁혔다.

‘이번에도 반응이 안 좋거나 정보가 이미 샜으면 망신인데, 설마 지훈이 이 자식이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 거 아니겠지?’

궁금해하는 눈초리 속에 나직한 헛기침 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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