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54화 (954/1,329)

5화. 지우고 싶은 기억 Ⅰ (1)

세상 어떤 일이든 완벽한 비밀은 없다. 더구나 금경태는 실력과 행동으로 결정돼야 할 일을 두고 연줄로 과장에게 매달렸다. 과장 역시 은연중 관행이란 미명하에 지속적인 압력을 가했다.

밀접한 관계 속에 함께 일하는 사람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심각할 정도로 횡행하는 라인, 연줄, 혈연, 학연, 지연의 폐해를 지적하는 사람에게는 무척 민감한 문제였다.

“여러 부분을 생각하면 금경태만 한 인재가 없어. 우리 과를 반석 위에 올리려면 능력을 고루 갖춘 인재들이 필요해. 허 교수도 세상을 넓게 봐. 유학 갔다 온 경력만 믿으면 곤란해. 서로 도우면서 믿고 사는 게 세상 아니야? 논문도 그런 맥락으로 봐야지.”

노골적인 말까지 들어야 했던 허경발 교수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명예는 노력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금경태 선생,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은 잘 압니다. 하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가야 스스로 빛나는 법입니다. 이준영 선생과 후배들을 보세요. 과장님, 의사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인성이라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금경태 선생, 일반외과 의사의 실력은 손을 통해 보고, 의사로서의 자격은 행동을 통해 봅니다. 실력이 곧 자격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깨닫길 바라는 준엄한 경고였다.

과장에게도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전했다.

“과장님,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았습니다만 원칙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사람 고집하고는, 좋은 게 좋은 거야. 내가 말한 내용 잘 알아들었을 거라 믿어.”

이미 결정 났다는 듯, 과장의 능글맞음에 화가 치밀었다. 자신만이 아니라 전공의들에게도 잘못된 신호와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는 태도였다.

당장 개선을 요구하고, 관철되지 않으면 병원을 박차고 나갈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몇몇 얼굴이 떠올라 도저히 실행할 수 없었다.

매서운 성격에 호랑이라 불리는 사람이었지만 송재덕, 이준영, 이혁민, 신기동이 눈에 밟혔다. 하나같이 자신을 믿고 따르는 후배이자 마음속 제자들이었다. 그들을 외면한 채 자신의 삶만 도모하는 것은 선배의 도리가 아니었다.

‘피할 수 없다면 하나하나 뜯어 고치는 수밖에. 우리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고 고친다면 더 큰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바라는 변화는 없었다.

허경발 교수가 마음속 결정을 내렸다.

얼마 후 눈에 보이는 변화가 일어났다.

교수 중 실력이 가장 뛰어난 허경발 교수가 금경태를 배제하고 이준영과의 수술을 고집한 것이다. 치프가 과장 수술을 전담하는 까닭에 얼핏 자연스럽게 보였지만 금경태에겐 위기나 다름없었다.

‘이건 아니야. 어떻게든 끈을 유지해야 돼. 만약 허경발 선생님의 논문이 해외 학회에 실리기라도 한다면 이준영에게 완전히 밀릴 수도 있어.’

생각만으로도 최악의 상황이었다.

눈에 띄게 향상되는 이준영의 손까지 보였다. 비등해도 자존심이 상할 판인데 때때로 금경태 자신도 놀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이고 있었다.

위기가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결국 머릿속 생각을 토해 내고 말았다.

“선생님, 저도 선생님 수술에 참가하고 싶습니다.”

허경발 교수가 묘한 눈빛으로 물었다.

금경태 역시 가르쳐야 할 전공의이자 행동거지만 빼면 무엇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일반외과 의사였다. 하기에 한 가닥 희망을 품었는지도 몰랐다.

“금경태 선생, 우리의 업은 환자를 치료하는 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열의와 실력 아닙니까?”

“맞습니다. 분명 중요한 사항이지요. 하지만 더욱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기본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이는 실력에만 국한된 말이 아닙니다.”

또 무엇이 필요한 걸까?

과장과 깊은 관계를 갖는 것이 죄라도 되는 걸까?

금경태 입장에선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었다.

그렇다면 이준영에게라도 조언을 구했어야 했다. 하지만 자존심이라는 놈이, 동기에게 물어야 한다는 자격지심이 발목을 잡았다.

결국 기존 생각대로 수술과 이론에만 더욱 집중했다.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춘다면 다른 문제는 저절로 묻힐 것이라 생각했다.

바람과 달리 사태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이 문제였다.

금경태가 가진 장점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좋은 머리, 뛰어난 수술 실력, 해박한 이론까지 일반외과 의사로서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은 단점이 장점을 희석시켰다.

교수를 향한 야망을 비롯해 미래에 대한 목표는 나무랄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추구하는 방향과 방법이 옳다고 볼 수 없었다.

과장에게 지나친 아부를 한다면 과장일까?

환자를 선택적으로 보는 것은 타인의 오해일까?

득이 되는 일은 발 벗고 나서지만, 손해를 보거나 혹은 득도 손해도 아닌 일에는 열의를 보이지 않는 모습은 또 어떨까?

허경발 교수는 이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

스스로 깨닫고 고치길 바라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지만, 금경태는 그 속에 담긴 경고를 무시했다.

연구와 논문은 문제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고, 수술 배제는 경과일 뿐이었다.

‘우직하게만 보이는 이준영 선생이 더 뛰어난 일반외과 의사라는 사실을 왜 모를까? 내가 말한 기본이 이준영 선생에게 있음을 왜 모를까?’

시간이 가도 금경태는 자신의 태도와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했다. 초조함에 도리어 무리수만 둘 뿐이었다. 허경발 교수가 과장의 말을 따르기를 바라며 말이다.

당연히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허경발 교수 논문이 국내 학회지에 정식으로 게재됐다. 과장 대신 이준영이란 이름이 제2저자에 떡하니 올라 있었다.

안팎으로 난리가 났다.

과장이 노발대발하며 금경태의 면전에 학회지를 집어 던졌다. 허경발 교수와 마주칠 때마다 찬바람이 휭휭 불어 모두들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금경태 역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반면 외부적으로는 충격에 가까운 반향을 일으켰다.

모든 일반외과 의사들의 때 이른 시선과 관심이 허경발 교수에게 쏠렸다.

학회지 게재 이후에도 관심은 식지 않았다. 어느 면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도리어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아무런 역할도 맡지 못한 금경태의 몸이 더욱 달았다.

그때 기회일지 모르는 일이 벌어졌다.

“선생님, S 병원에서 수술 중 담도 조영술 시연이 가능한지 문의해 왔습니다. 맡겨 주신다면 철저하게 준비하겠습니다.”

전공의라고 해도 치프 위상이 무척 높았던 시기였다. 허경발 교수도 이를 무시하기 어려웠던지 금경태에게 준비를 맡겼다.

무난하게 시연이 준비됐지만 의외의 문제가 입에 오르기 시작했다.

다른 병원 의사들 앞에서 수술을 통해 연구 결과가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야 하는 자리였다.

수술 팀 구성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준영과 금경태의 눈빛이 번쩍였다.

심한 불안과 막연한 희망에 금경태가 또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논문 저자 문제로 허경발 교수를 심히 못마땅해하는 과장의 입을 빌린 것이다.

“허 교수, 우리 과 명예가 달린 일이니까 수술 팀 똑바로 구성해. 실수라도 나오면 그런 망신도 없어. 팔은 안으로 굽는다지만, 믿을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하니까 어시스트로 누굴 세울지 신경 바짝 써. 과장으로서 하는 말이야.”

자신이 총애하는 금경태를 세우라는 말이었다.

감정이 실려 말투마저 강압적으로 변했다.

허경발 교수에겐 통하지 않았다.

수술 팀 구성은 전적으로 집도의에게 달린 일이었다. 실력만이 아니라 수술 중 담도 조영술의 의미를 가장 잘 아는 의사들로 구성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다.

“수술 중 담도 조영술을 실제로 적용할 수 있도록 가장 큰 공헌을 한 이준영 선생과 시연을 시작하겠습니다. 세컨과 써드는 우리 과 2년 차들입니다.”

정말 대쪽 같은 사람이었다.

올바른 결정이었기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다만 구습에서 비롯된 부당한 권위를 앞세우는 일부 의사들의 뒷말은 감당해야 했다.

모든 열과 성을 다해 시연을 준비했건만 금경태의 바람, 과장의 고압적인 지시와 달리 허경발 교수는 핵심이 되는 시연을 이준영과 진행했다.

학회 때 못지않은 찬사가 이어졌다.

대단한 성과였지만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일반외과 내부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초래된 행사였다.

과장이 사사건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며 불같이 화를 냈다. 반면 허경발 교수는 초지일관 원리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결국 언젠가는 터져야 할 일이 터지고 말았다.

서로에게 완전히 등을 돌린 것이다.

과장의 권위에서 나오는 힘과 허경발 교수도 출세를 외면하지 못할 것이라 여긴 금경태로서는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오판이 이어졌다.

한쪽에 너무 가깝게 서면 다른 한쪽은 평생 가까이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다. 전공의로서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지 않았다면 절대 걱정할 일이 아니었건만 시쳇말로 정치질에 몰두하고 말았다.

게다가 이미 미국 학회를 비롯해 해외의 유수한 학회에 논문을 제출했다. 만일 해외 학술지에 실리고 호평을 받는다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후폭풍이 불 것이다.

어떻게든 금경태라는 이름 석 자를 전면에 나오게 해야 했다. 집안 어른들까지 동원해 여기저기에 부탁 아닌 부탁을 하며 기를 썼다.

‘준영이에게 밀릴 수 없어. 어떻게든 과장님과의 끈을 유지하면서 허경발 선생님까지 잡으면 나를 알릴 수 있는 최고의 기회가 온다.’

아슬아슬한 줄타기였다.

허경발 교수가 극도로 싫어하는 행동이었고, 빤히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사람이 있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금경태가 필사적으로 뛰어다니는 동안 이준영은 조용히 결과를 기다리며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 이제는 오로지 일반외과 의사 본연의 일만 하면 되는 때였기에 이혁민과 신기동도 들뜨지 않도록 단단히 단속했다.

“똑바로 하자.”

사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1년 차 교육은 내리 사랑의 원칙대로 이혁민의 논리, 신기동의 날카로움이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송재덕은 복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준영이를 보면 마음 편하고, 경태를 보면 답답하기만 하네. 따끔하게 혼내서라도 고쳐야 하는데, 명백하게 뭐라도 손에 잡혀야 말을 하지. 추측만으로 꺼낼 일이 아니라 더 답답하다. 어휴! 누구 못지않게 뛰어난 놈이 왜?’

전문의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기에 주어진 시간도 없었다. 선배라지만 같은 전공의이기에 관여하고 나설 일인지조차 애매모호했다.

“경태야, 허경발 선생님 말씀을 새겨들어야 된다.”

“시험 준비 하시다 말고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엉뚱한 말을 했나? 그렇지? 그랬으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금시초문인 것처럼 정색하는 모습에 도리어 민망할 지경이었다. 많은 동료가 불안해하며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길 바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해외 학회에서 연락이 왔다.

학술지 게재가 승인됐다.

상당히 빠른 심사와 결정이었다. 그만큼 연구의 의미가 크고, 담도 및 간 내 담석 수술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검사법이라는 말이었다.

불끈 주먹을 쥐기가 무섭게 새로운 연락이 왔다.

발신자 주소를 보며 모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허경발 교수까지 말이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일반외과 기본 교과서로 채택되는 새비스톤(Sabistone)의 집필진이었다. 정중한 문구로 보다 자세한 연구 내용과 결과를 요구했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의료 선진국의 전유물, 세계 공통의 교과서에 대한민국 의사의 이름과 진단 방법이 실릴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실로 기대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준영, 이혁민, 신기동 모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전문의 시험 준비 중이던 송재덕이 한달음에 달려와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내가 뭐랬니, 내가. 미국 학회에 제출하자고 한 사람이 나란 걸 잊으면 안 된다. 다 내 선견지명 덕이야. 선생님, 안 그렇습니까?”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허경발 교수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한 채 새비스톤 집필진이 보낸 편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만 기뻐할 때가 아닙니다. 철저하게 준비해서 우리의 연구가 인정받도록 합시다. 이준영 선생, 금경태 선생, 이혁민 선생, 신기동 선생, 부탁드립니다.”

일일이 이름까지 부르며 신뢰의 눈빛을 보냈다.

‘금경태 선생, 어느 누구의 명예를 위한 일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제발 날 실망시키지 않길 바랍니다.’

금경태에겐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않은 허경발 교수가 준 또 하나의 기회였다.

턱없이 부족한 인원, 밀려드는 환자와 수술로 숨 가쁘기만 한 나날이었지만 모두들 최선을 다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자료를 다시 분석해 정리했다.

이젠 이준영이 책임자나 다름없었다.

“기동이는 데이터에 오류가 있는지 다시 확인하고, 혁민이는 자료 정리와 분석을 맡아. 경태야, 넌 나와 허경발 선생님께 보고할 자료를 점검하자.”

이혁민이 흠칫 놀라며 신기동을 보았다.

‘이준영 선생님이 이렇게 신이 나 말할 때도 있네.’

‘그러게 말이다. 새비스톤 위력이 대단하긴 하다.’

허경발 교수도 매일 밤늦도록 교수실 불을 밝히며 사소한 문제나 오류가 있는지 꼼꼼히 살폈다.

금경태로서는 달리 선택의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승복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분명히 연구에 참석했고, 일반외과 치프라는 사실과 라이벌이 앞서고 있다는 현실에 자존심만 구겨지고 있었다.

‘허경발 선생님은 왜 준영이만 믿으실까? 도대체 부족한 게 뭐지? 혹시 나 모르게 다른 짓이라도 하는 거 아냐?’

반복되는 회의, 질투, 의심이 중대한 심적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서서히 미움이 커져 갔다. 좀처럼 웃지 않는 허경발 교수가 이준영을 보며 미소를 지을 때면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해졌다.

그 와중에 일반외과 학회가 열렸다.

자신들의 성과물을 내놓고 평가를 받는 자리이기에 모두들 중요하게 생각하는 행사였다. 특히 초미의 관심사는 허경발 교수의 논문 발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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