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반복되지 말아야 할 기억 Ⅱ (2)
다들 눈이 동그래졌다.
“선생님, 교과서에도 안 나오는 방법인데 국내에만 낼 이유가 있습니까? 유학까지 다녀오셨으니까 미국에도 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미국에요?”
허경발 교수마저 흠칫 놀랐다.
당시는 미국과 모든 면에서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의료 후진국이었다. 때문에 유학은 고사하고 외국 연수만 다녀와도 확연히 다른 대접을 받을 정도로 차이가 컸다.
허경발 교수가 바로 부교수가 된 배경에는 뛰어난 실력만이 아니라 유학 경력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물론 부작용도 있었다.
국내에서 전문의 면허를 딴 교수들과 무언의 알력이 있긴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기와 견제는 당연히 따라붙는 일이었다. 부당함을 참지 못하는 대쪽 같은 성격도 한몫했지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이준영이 잠시 딴생각을 했다.
‘유학을 다녀오신 건 중요하지 않다. 1년 반 내내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면서도 교수실 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내가 배워야 할 것은 바로 그런 자세다.’
어쨌든 그런 나라에서 미국 학회에 논문을?
결코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허경발 교수가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이런 결과를 우리만 알고 있으면 안 됩니다. 설령 채택이 안 되면 어떻습니까? 밑져야 본전인데 일단 내시죠.”
“이준영 선생, 어떻게 생각합니까?”
뜻밖의 물음이었다.
단순히 의견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더 많은 일을 감당할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
허경발 교수의 신뢰가 한눈에 보였다.
금경태가 남몰래 인상을 쓰고 있었지만 이준영으로서는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내 보고 싶습니다.”
결국 동시에 제출하기로 했다.
누군가에겐 무척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남았다.
해외 학회에도 제출하는 이상 논문에 실린 의미가 더욱 커졌기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바로 저자 순위였다.
제1저자는 당연히 허경발 교수였다.
전공의들의 노력이 대단했지만, 그 이상으로 고민하며 연구를 주도했다.
관행을 따르며 전공의에게 연구를 맡기는 다른 교수들과 확연히 차이가 있어 일말의 이의도 있을 수 없었다.
문제는 제2저자였다.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의미기에 제1저자만큼 인지도가 상승할 것이다. 누구든 스스로 상당한 공헌을 했다고 여기면 욕심내지 않을 수 없었다. 해외 학회에도 제출하기로 한 이상 그 의미가 더욱 커졌다.
허경발 교수가 일일이 눈길을 주었다.
결코 공헌이 적지 않았지만 뒤늦게 참가한 이혁민과 신기동은 당연히 아니었다. 누구 이름을 올릴지 궁금해하면서도 슬그머니 이준영을 보며 당연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욕심을 낼 법한 송재덕마저 슬쩍 뒤로 물러났다.
‘선생님, 전 아닙니다.’
‘욕심내지 않아 고맙습니다.’
남은 사람은 이준영과 금경태였다.
지난 시간 우직하게 연구를 지속해 온 사람과 최종 결과물인 논문 작성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 과정과 결과의 차이나 다름없었다.
허경발 교수는 누구보다 예리한 사람이었다.
냉철한 시선이 누군가에게 머물렀다.
“이준영 선생을 제2저자로 올리겠습니다. 비록 저자 순위는 뒤로 밀렸지만 여러분들의 노력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이준영 선생, 영문 작성 함께합시다. 금경태 선생도 지금처럼 신경 써 주길 부탁합니다.”
이준영이 숨도 쉬지 못했다.
절대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기에 더욱 감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논문 작성을 가장 잘하는 금경태를 놔두고 자신과 함께하자는 말에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를 정도였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모두들 아쉬운 기색을 보이면서도 웃으며 축하했다.
금경태도 마찬가지였지만 회의실을 나오자마자 심각한 안색으로 눈가를 찌푸렸다.
‘왜 이준영이지?’
지난 몇 달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논문 작성에 매달렸다. 최종 수정본은 허경발 교수조차 지적거리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작성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을 두고 말이다.
인간은 때론 반복되는 거짓이나 핑계를 불가피한 일을 넘어 진실이라고 굳게 믿는다. 죄책감이나 무책임을 보상하기 위한 기제일 수도 있었다.
금경태 역시 그런 함정에 빠졌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에 과장을 핑계로 함께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한 번 두 번 반복해 쌓이고, 논의에 참석하는 횟수를 줄인 일도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 변명해 왔다.
논문 작성에 열을 올린 것 역시 보상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일이기에 맡았다고 생각했다.
‘난 내 상황에 맞게 최선을 다했어. 논의에 몇 번 참석하지 못했다고 해도 준영이보다 공헌이 적을 수는 없어. 설마 이준영이 허경발 선생님에게 개인적으로 접근한 것은 아니겠지?’
혼동되는 거짓과 진실은 의심까지 불러왔다.
대상이 교수로 남고자 하는 목표에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이준영이었기에 참을 수 없는 분노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확실한 해결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준영이가 제2저자가 되는 것만은 막아야 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유일한 희망은 일반외과에서 가장 강력한 권한과 힘을 가진 과장이었다. 허경발 교수의 논문이 지닌 의미를 안 과장도 두고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해외 학회지에 게재된다면 과장 자리를 넘볼 수도 있는 연구 실적인데 앉은 자리에서 당하지는 않겠지.’
“과장님, 국제 학회에도 제출한다는데 제2저자에 이름을 올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과 교수님들도 대부분 관행적으로 과장님 이름을 제2저자로 올리지 않습니까?”
“흐음! 그렇긴 해.”
관행이라는 말은 과거에는 물론 현재도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논문을 검토한 과장도 위기의식을 느꼈고, 체면이 있어 넌지시 자신의 의중을 전했다.
“허 교수, 논문 봤는데 정말 대단한 연구를 해냈어. 의미가 무척 커. 얘기 들으니까 금경태도 꽤 공헌을 했던데, 개인의 경사를 떠나 우리 과 전체가 누려야 할 명예라는 생각이 들어. 내 입장도 있고 말이야.”
씨알도 안 먹힐 말이었다.
허경발 교수는 결코 외압에 흔들릴 사람이 아니었고, 말 한마디에도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는 성격을 가졌다.
그런 교수가 결정을 번복할 리 없었다.
영문 논문 작성에 꽤 긴 시간이 걸렸다.
번역 때문이 아니라 내용을 보다 보강하고, 단 하나의 오류도 없이 철저하게 검토를 거듭했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저자 순위도 논문에 적히지 않았다.
‘저자 순위를 기록하지 않은 걸 보면 마음이 달라졌다는 말인가? 과장님과 등 돌려야 손해뿐인데 허경발 선생님도 어쩔 수 없겠지.’
송재덕이 전문의 시험 준비에 들어가 새로운 치프를 뽑을 때까지만 해도 금경태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는 줄 알았다.
과장은 치프는 금경태가 해야 한다는 명백한 의중을 밝혔고, 허경발 교수는 말없이 따랐다.
그것으로 다였다.
도리어 역효과가 나고 말았다.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전화벨 소리가 이준영 교수의 상념을 깼다.
국제전화를 걸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무언가 묻는 소리에 무조건 ‘예.’라고 대답했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반갑기 짝이 없었지만, 그놈의 성격 어디 가지 않았다.
(선생님, 별일 없으시죠?)
“무슨 일이야?”
(안부 전화 드렸습니다. 요새 일석이가 간담도까지 맡는다고 들었습니다.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아주 잘하고 있다. 네 자리 없을 수도 있어.”
(정말입니까? 일석이가 하도 자랑해서 긴가민가했는데 정말 잘됐네요.)
“무슨 자랑?”
전화기 너머로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응급 수술 때 일석이부터 찾으셨다면서요? 선생님께 확실한 신뢰를 얻었다고 좋아 죽더라고요. 조마조마했는데 그런 말 들으니까 저도 너무 좋습니다.)
아무리 친구라지만 일과 자리에 관해서는 결국 경쟁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런데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이 가득 묻어 있었다.
금경태와 지난날의 기억 때문인지 김지훈의 마음이 더욱 가슴으로 다가왔다. 생각해 보면 신현수, 이경석을 비롯해 펠로우까지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었다.
허경발 교수도 그랬을 것이다.
‘그때 스승님은 우릴 어떻게 보셨을까? 난 지훈이처럼 생각했을까?’
절로 고민이 깊어지는 순간이었다.
김지훈의 밝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순식간에 고민이 저 멀리 사라졌다.
(선생님, 송재덕 선생님도 잘 지내시죠?)
마음이 너무 편해진 탓일까?
삑사리가 났다.
“왜? 대장 할 생각 있어?”
(어? 선생님도 농담을 하실 줄 아시네요.)
이준영 교수의 말문이 막혔다.
‘녀석! 많이 컸네.’
뭐라고 대꾸 한마디라도 해야 하는데 제자 앞에서는 왠지 더 근엄해지는 자신을 어쩔 수 없었다.
“전화비 많이 나온다. 끊자.”
김지훈이 아랑곳하지 않았다.
(선생님, 정말 기쁜 일이 있습니다. 이번 주부터 어시스트로 수술 참가하게 됐습니다. 개복 수술도 중요하지만,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라파로 기구가 굉장히 다양해서 배워야 할 것이 정말 많습니다.)
이준영 교수가 흠칫 놀랐다.
‘연수 중반도 아니고 초반인데 수술에 참여해?’
어느 사회든 의료계는 보수적이다. 확실하게 인정하지 않으면 절대 수술을 주지 않는 것은 만국 공통의 일이다. 더구나 김지훈은 낯선 이방인에 불과했다.
얼마나 노력했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놀람을 떠나 누구보다 기뻐할 수밖에 없는 소식이었지만 나온 말은 엉뚱하기 짝이 없었다.
“어시스트를 서게 됐는데 한가롭게 전화나 하고 안 바쁜 모양이다.”
(예전과 비교하면 여긴 천국입니다. 응급실 당직을 요청했는데 조건이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네요. 허락 떨어질 때까지는 꿈도 못 꿀 처지라 잠 푹 자고 있습니다. 그래도 참관하고, 병실 환자 어떻게 치료하는지 보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갑니다.)
보나 마나 미국 의사들도 깜짝 놀랄 정도로 강한 열의를 보였을 것이다. 그 덕에 어시스트를 설 기회를 잡았을 테고, 무엇을 배우려는지 대충 감이 온 응급실 근무도 정식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점점 더 바빠진다는 데에 한 표 던졌다.
‘중증 외상 환자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았구나. 네 일복이 미국에서는 어떨지 모르겠다. 그동안 고생 많이 했는데 잠시나마 적절한 휴식 시간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생각과 달리 또 애먼 말이 나왔다.
“열심히 해.”
(세상에서 제일 자상하면서도 무서운 선생님께 배운 게 있는데 당연한 일이죠.)
‘내가 자상했었나?’
이준영 교수의 얼굴이 벌게졌다.
태어나 처음 들은 것 같았다.
심지어 아내나 아들에게도 못 들은 말인데 제자에게 들으니 스스로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어쨌든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기에 얼굴도 벌게질 수 있는 일이었다.
서둘러 말을 돌렸다.
“경아하고 희연이는?”
(경아 씨도 자기 일 열심히 하고, 희연이는 무럭무럭 잘 크고 있습니다. 애 키우는 일까지 법으로 정해져 있어서 보통 힘든 게 아니지만, 경아 씨하고 잘해 내고 있습니다.)
희연이의 조그만 얼굴이 떠올랐다.
한여름에 태어나 첫 번째 한여름을 맞이했다.
“희연이 돌잔치는?”
(조촐하게 셋이 했습니다. 장모님이 많이 서운해하셨지만 돌잔치 때문에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라서요.)
이 말 저 말 하다 보니 시간이 제법 흘렀다.
이준영 교수가 정색을 했다.
“생활비도 빡빡할 텐데 이만 끊자.”
(예, 선생님. 참! 수신자 부담인 거 잊으셨어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수신자 부담으로 전화드리겠습니다.)
웃음소리에 고소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점점 뻔뻔해지는 제자였다.
전화를 끊은 이준영 교수도 웃고 말았다.
금경태와의 기억으로 아무 생각 없이 통화를 허락한 사실이 이제야 떠올랐다. 통화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반가움만 앞섰던 모양이었다.
문득 송재덕 교수가 떠올랐다.
‘만일 나 혼자 통화했으면 내일 한바탕하시겠네.’
이경석이 있는데 왜 그리 어여뻐하고, 지금까지도 탐을 내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혁민 교수와 신기동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다들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루 종일 뛰어다니는 건 송재덕 선생님 닮았고, 이론을 게을리하지 않는 건 혁민이, 때때로 보이는 예리함은 기동이 닮았나? 나하고 공통점은 뭐지?’
따르륵 소리?
우연이겠지만 기본을 강조하는 스승의 말을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실천했다. 8년 동안 보아 온 제자의 모습은 자신의 젊은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기에 소중한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오늘도 스승님께 안부 전화를 드렸겠지?’
나이가 먹어서인지, 타향살이 때문인지 요즘 들어 부쩍 주변 사람을 챙기는 김지훈이었다. 분명히 큰 스승님인 허경발 교수에게도 연락했을 것이다.
따르르르릉!
이 저녁에 누가 또 전화를?
고성문이었다.
(이 교수, 별일 없지? 이번 주말에 스승님 모시고 시간 되는 교수들과 식사 한번 하자. 재덕이는 꼭 나오라고 해.)
“무슨 일 있으십니까?”
(사위 놈이 장인 걱정은 안 하고 우리 스승님, 지 스승님 걱정만 하고 계십니다. 난 찬밥이야.)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제자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관계도 더욱 돈독해지고 있었다. 유난히 자신과 가족을 챙겼던 고성문의 마음까지 새삼 다가왔다.
즐거움도 잠시, 흐릿한 답답함이 느껴졌다.
손일석에 대한 말을 하며 즐겁게 웃었던 김지훈의 얼굴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포기한 동료들에게마저 최선을 다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모두가 하윤호 같은 결말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었어. 강병옥이 변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때 경태에게 먼저 말했어야 했어.’
이준영 교수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금경태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다는 말이 맞는 걸까?
왜 이리 후회라는 감정이 남는지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