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반복되지 말아야 할 기억 Ⅱ (1)
교수 자리를 노리는 마음은 누구나 같지만 과장을 대하는 태도가 도를 지나쳤다. 이미 안팎에서 금경태의 행동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허경발 교수도 예의 주시 하고 있었다.
다만 윗사람인 과장과 가르쳐야 하는 전공의가 모두 연관된 일이기에 신중함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금경태의 속을 확신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대로 간다면 머지않아 활화산처럼 터질 수 있었다.
‘금경태 선생, 의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가 아닙니다. 내 오해이길 바랍니다.’
거의 필연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이준영의 성격과 말투를 생각하면 절대 무시하면 안 되는 경고였고,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기 이전에 라이벌의 말이었다. 허경발 교수의 위상 역시 과장에겐 현저하게 못 미치는 상황이었다.
금경태가 눈가를 찌푸렸다.
‘어차피 교수만 되면 반은 끝난다. 허경발 선생님께 줄을 대 봐야 준영이를 제치고 내가 교수가 될 수 있다는 확실한 보장도 없어. 지금은 과장님만이 아니라 재단이나 원장단 선생님들에게 모두 잘 보여야 돼. 허경발 선생님은 그다음이야.’
경고의 목소리는 주변 말에 불과했다.
연줄이 얼마나 중요한 사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현실은 연줄이 장래를 좌우하는 세상이었다.
더구나 집안까지 나섰다.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문제가 있었다.
금경태가 말을 돌렸다.
“준영아, 이번 조정이 몇 번째지?”
“셀 수도 없어.”
단 영점 몇 프로의 차이만으로도 현상 결과가 달라졌다. 연구를 시작한 지 이미 6개월이 훌쩍 지나도록 제자리걸음이지만 성공하면 차원이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확실히 성공하기 어려운 연구야. 그래도 만에 하나를 대비해 완전히 발을 빼면 안 되겠지. 준영이 저 자식은 연구 이외의 문제가 산적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자연스럽게 눈길이 갔다.
“근데 넌 논문은 쓰고 있는 거야?”
“써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부족해.”
“교수 연구도 중요하지만 전문의 시험 보려면 논문이 필수야. 앞가림 잘해.”
걱정하는 투였지만 눈은 웃고 있었다.
‘실력만 압도적이면 걱정할 일이 없겠는데.’
과장에게도 수술을 받고 있어 집도 횟수마저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술 실력은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수시로 들리는 따르륵 소리와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타이용 실을 보면서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허경발 교수가 항상 강조하는 말을 귀담아듣기만 해도 되는 일을 두고 말이다.
희한하면서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그 외의 일은 상당한 차이가 나고 있었다. 어느 쪽으로든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뒤처지고 있다는 사실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번 연구는 명예보다 환자를 위한 일이야. 원하는 결과를 얻으면 그 이상의 보람도 없을 거야. 덕분에 논문 쓰는 방법도 배울 수 있잖아.”
각자 다른 삶의 자세였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한순간에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우직한 모습이 답답할 정도였지만 이준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도리어 이혁민, 신기동과의 시간이 즐거운지 점점 더 큰 열의를 보였다.
다들 마찬가지였다.
3년 차 치프인 송재덕이 작은 키를 만회하려는 듯 온 병원을 뛰어다녔다. 3년 내내 본 모습이기에 이젠 모두들 당연하게 바라보았다.
“엘리베이터 기다릴 시간이 어딨니? 계단이 훨씬 빨라. 급하다. 뛰자. 나보다 느린 놈은 오프 취소다. 가자.”
날쌘 다람쥐가 따로 없었다.
수술 실력도 물이 올라 이젠 전공의 중 가장 빠른 손을 자랑했다.
물론 정확하고 확실함이 뒤따랐기에 허경발 교수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병원 내에서 가장 큰 키와 체격을 자랑하는 이준영은 몸이 몇 개라도 되는 것처럼 보였다. 응급실, 중환자실, 수술실, 병실, 하다못해 검사실에서도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렸다.
“응급실 환자 상황이 급합니다. 최대한 빨리 찍어 주셔야 합니다.”
인턴이나 1년 차의 부탁이면 검사가 밀렸다는 핑계로 뻗댈 수라도 있지만 2년 차의 부탁이었다. 더구나 합리적인 이유와 맞물려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 때문에 거의 대부분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준영이가 있어야 돼. 해결사다, 해결사.”
송재덕 말대로 든든한 버팀목이자 해결사였다.
죽어나는 건 1년 차였다.
이혁민의 발이 보이지 않았다.
신기동은 매서운 눈매와 달리 혀를 빼물기 일쑤였다.
그래도 다람쥐처럼 뛰어다니는 송재덕을 따라잡기 힘들었고, 여기저기 출몰하며 신출귀몰을 자랑하는 이준영의 그림자를 밟기 어려웠다.
“2년 차 되면 편해질까?”
“이준영 선생님을 봐. 물 건너갔어. 송재덕 선생님을 보면 3년 차가 아니라 치프가 돼도 편할 일은 없겠다.”
그 덕에 환자들 복 받았다.
이런 식으로 일하면 전공의 간에는 불협화음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세상일 바라는 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한 명의 삐걱거림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일에 관한 한 금경태도 만만치 않았다.
과장의 눈에 쏙 들 정도로 깔끔하게 모든 일을 끝냈다. 수술 욕심 역시 여전했고, 실력 하나만은 인정하고도 남았다.
문제는 일하는 방식이었다.
“이혁민, 이 환자 검사 결과 안 챙겼어? 빨리 가져와. 신기동, 넌 중환자실 환자 드레싱은 왜 안 한 거야? 수술 중이었다는 소리는 하지도 마. 수술 사이 시간은 놀라고 있는 게 아니야.”
일에 지친 1년 차지만 2년 차에게 덤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이 맡은 일을 넘기지 않고 먼저 움직이는 선배들의 모습에 마음을 달랠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마음속에 쌓이는 불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혁민아, 금경태 선생님 때문에 미치겠다. 시간 있을 때 직접 하면 안 되나? 몸이 두 개라도 감당 못할 것 같아.”
“어쩌겠어? 참아. 난 이준영 선생님 때문에 미치겠다.”
“왜? 무슨 일 있었어?”
“오늘 새벽 늦게 응급 수술 떠서 걱정 많이 했는데, 아침에 드레싱을 다 해 놓으셨더라. 얼마나 무안하던지 얼굴을 들 수가 없더라.”
신기동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비교돼. 부럽다.”
“다른 과 2, 3년 차 선생님들을 봐도 대개 그렇잖아. 송재덕 선생님과 이준영 선생님이 특별한 거 아니겠어?”
“우리는 그러지 말자. 특별해지자.”
이런 상황을 놓칠 송재덕이 아니었다.
“경태야, 각자 할 일이 따로 있을 뿐 2년 차도 배워야 하는 전공의다. 그걸 잊으면 안 된다. 알았어?”
“죄송합니다. 이리저리 일이 겹쳐서 그랬습니다.”
‘이 자식들이 대놓고 불평을 터트린 건 아니겠지?’
그렇게 미묘하게 벌어지는 틈을 표면적으로 얼기설기 메우는 사이 6개월이란 시간이 더 흘렀다.
허경발 교수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송재덕까지 적극적으로 가세해 툭하면 1년 차를 포함해 6명이 모여 머리를 맞댔다.
금경태가 빠지는 날이 잦아 사실상 5명이 주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야! 농도 맞추기 참 어렵다, 어려워. 준영아, 네가 제일 답답하지? 그럴 거야. 그치?”
왜 아니겠는가!
1년 내내 오프도 잊고 집중했지만 시간마저 부족했다. 세상에 없는 진단 방법을 찾는 일이라고 해서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다.
“언젠간 답이 나오겠죠.”
“그래야 된다. 반드시 그래야 돼. 그동안 우리가 투자한 시간과 땀이 아까워서라도 결과를 내야 돼. 혁민아, 기동아, 열심히 하자. 열심히.”
답답함이 극에 이를 때쯤 겹경사가 터졌다.
고성문이 일반외과 전문의가 됐다.
축하 자리가 떠들썩했지만 한편으로 무척 서운한 분위기가 감지됐다.
송재덕과 이준영은 물론 불과 6개월 동안 함께 일한 이혁민과 신기동마저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군대 제대하시고, 원주에서 개업하시면 얼굴 보기 힘들겠네요. 잔소리하는 사람이 있어야 살맛이 나는데 무슨 재미로 살죠?”
“앓던 이 빠진 것처럼 표정이 환한데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말해. 재덕아, 4년 차 돼서도 지금처럼 잘해 나가야 돼. 정 보고 싶으면 면회 와.”
“다들 가는 군댄데 면회는 무슨? 괜히 속만 들켰네.”
정 많은 송재덕이었다.
자리 내내 고성문 곁을 떠나지 못했다.
이준영도 서운함이 가득한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님,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많이 배웠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았습니다. 몸 건강히 다녀오십시오.”
“야! 준영이도 말 잘하네.”
“선생님이 준영이를 얼마나 아꼈는데 이럴 때마저 입 다물면 사람이 아니죠, 사람이. 나 전문의 됐을 때는 더 많이 말해야 돼. 아니면 알지? 몰라?”
그렇게 고성문과 작별했다.
쌓인 정이 적지 않아 한동안 분위기가 무거울 정도였다. 웃을 일도 많았지만 혼나기도 많이 혼났는데 오래도록 머릿속에서 고성문의 얼굴이 떠나질 않았다.
누군가 떠나면 누군가 오기 마련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임 1년 차 2명이 들어왔다.
5명이었던 전공의가 7명으로 늘었다.
두 사람의 힘이 더해진 만큼 각자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무거움을 덜 것이다.
얼마나 기쁜지 피곤을 덕지덕지 붙인 이혁민과 신기동이 만세 삼창을 할 정도였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드디어 바라고 바랐던 일이 벌어졌다.
완벽한 4년 차 치프가 된 송재덕의 입이 찢어지는 동시에 이준영도 처음으로 웃을 수 있었다.
얼마나 기쁜 일인지 허경발 교수가 이혁민, 신기동까지 불러 술을 샀을 정도였다.
“선생님, 어제 나온 사진 정말 확실하게 나왔던데 다음번도 그럴 수 있겠죠? 기분 좋습니다. 정말 좋습니다.”
“조금만 더 노력합시다. 이준영 선생과 우리 1년 차 선생들을 믿습니다.”
드디어 1년여에 걸친 연구가 가시적 성과를 보인 것이다. 비록 단 한 장의 사진뿐이었지만 다음 환자, 또 다음 환자에게서 정확한 정보를 얻는다면 실로 획기적인 결과를 낼 수 있다는 희망이 강렬해졌다.
금경태에겐 돌발 변수였다.
오프라고 먼저 나간 것을 통탄할 지경이었다.
0.1퍼센트도 안 되는 성공 가능성이 현실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에 몸이 달았다. 이제라도 열심히 참석하는 수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3년 차가 된 데다 과장이 주는 일까지 적어졌다는 구실을 대며 다시 연구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허경발 교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준영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연구 성패와 이후 다가올 이해에 좌고우면하지 않는 진심과 끈기를 가지길 바랄 뿐이었다.
환자의 담도와 간 내에 박힌 담석이 정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수술 중 담도 조영술이 거듭될수록 하나하나 정확한 데이터가 쌓였다.
“야! 담도 굵기가 상당히 가늘어서 걱정했는데 오늘도 정확하게 나왔네. 좋다, 좋아. 준영아, 너도 좋지? 그치?”
“예, 좋습니다.”
“그래. 우리 웃자. 얼굴에 꽃 피니까 얼마나 좋니. 가슴이 개운해진다.”
모든 환자에게서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
1년 넘게 흘린 땀의 결실을 보았다.
마침내 정확한 진단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이준영은 물론 허경발 교수마저 흥분을 감추지 못할 정도였다. 이혁민과 신기동도 시간 날 때마다 자료를 만지작거리며 벅찬 가슴을 달랬다.
대단한 성과였지만 여기서 끝내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벅참도 잠시 허경발 교수가 직접 논문을 작성했고, 매번 연구에 참여한 전공의들과 상의했다.
논문 작성에만 몇 달이 넘게 걸렸다.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가장 적극적으로 사소한 문구까지 수정하며 열의를 보인 사람은 다름 아닌 금경태였다. 때론 밤을 꼬박 새워 눈이 시뻘게질 정도였다. 노력과 좋은 머리에 힘입어 논문은 점점 완벽해지고 있었다.
‘됐어. 확실하게 만회할 기회야.’
6개월 만에 논문이 완성됐다.
1년 반에 걸쳐 의국 전체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기존 연구물을 확인하는 수준의 여타 논문과 달리 최초의 시도였고, 매일매일 수없는 시행착오를 거듭한 결과였다.
다들 감개무량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가장 큰 공헌을 한 이준영이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가며 가쁜 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종내에는 얼굴까지 시뻘게져 자신의 감정을 오롯이 내보였다.
‘드디어 우리가 해냈구나.’
누구보다 기쁘기에 전에 보지 못한 표정 변화였다.
허경발 교수가 어깨를 두드렸다.
“이준영 선생, 수고했습니다.”
예의상 아니라는 말 한마디 정도 해야 하건만 이준영은 얼굴만 붉힐 뿐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가장 존경하는 허경발 교수가 자신을 격려하며 신뢰한다는 사실에 푹 빠져 하루 종일 둥둥 떠다녔다.
‘논문은 내가 다 쓴 거나 다름없는데, 왜 준영이에게만 수고했다고 하시지?’
반면 금경태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드러낼 일이 아니었다. 천금 같은 기회를 잡기 위해서 모든 감정을 숨겨야 했다.
이제 학회지 게재와 학회 발표만 앞뒀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불안 반 기대 반인 상황에서 손을 놓을 때가 다 된 송재덕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