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반복되지 말아야 할 기억 Ⅰ (2)
이경석의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컷!”
이마가 땀에 푹 젖은 채 손일석과 함께 마무리를 하고 최철한에게 수술을 넘겼다. 그사이 상의가 오갔는지 신현수가 새롭게 참가했다.
모두들 진지하고 열의에 차 있었다.
그보다 더 눈에 띈 것은 써전들의 자세였다.
누가 참여했든 결국 최철한의 수술이다.
아무리 어려운 수술이라도 기록지에 이름 하나 달랑 올라가겠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오직 환자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바치고 있었다.
이준영 교수가 나직한 숨을 내뱉었다.
‘난 저렇게 행동했을까? 그때 이미 금경태를 견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지금도 오래전 일이 생생하게 기억났지만 당시의 감정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조차 후배들이 보이는 건전한 라이벌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
남은 수술을 끝낸 후에도 의문이 가시질 않았다.
악연이든 선연이든 끈질기긴 마찬가지였다. 혹은 같은 스승에게 배웠지만 지금은 연락조차 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간암 말기였는데 살아 있을까?’
이준영 교수의 의식이 오래전 전공의 시절로 다시 돌아갔다.
***
모두가 잠든 늦은 밤.
차트 정리를 하던 신기동이 낄낄 웃었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이혁민이 힐끗 노려보며 콧등을 찡그렸다.
마지막 수술이 끝난 후 날아든 이준영의 묵직한 눈빛이 눈에 선했다. 지금도 귓가를 윙윙 울리는 무뚝뚝한 몇 마디는 긴장 그 자체였다.
“난 힘들어 죽겠는데 뭐가 그렇게 즐거워?”
“세게 탔구나? 이준영 선생님?”
어느 틈엔가 탔다는 말이 혼난다는 말을 대신했다.
“그럼 누구겠어? 죽는 줄 알았다.”
“혁민아, 너무 힘들어하지 마. 이준영 선생님 타는 거 보니까 우리하고 하나도 다를 게 없더라. 너도 그 수술 들어왔어야 하는 건데 아깝다.”
“누구한테 탔는데?”
“송재덕 선생님! 이준영 선생님한테 수술 주실 때만 해도 분위기 좋았는데 마무리는 정말 살벌했어. 집도의 태도 찾으시면서 그냥 쏴 대는데 무서워서 고개도 못 들었다.”
“키는 작아도 화력 세기로 유명한 선생님이 작정했으면 당연히 살벌했겠지. 너 혹시 일 말고 다른 스트레스도 많이 받아? 너도 허구한 날 타면서 그런 모습을 보고 좋아하는 게 말이 돼?”
이혁민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신기동이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생각해 봐. 체격으로는 국민학생이 고등학생 혼내는 거잖아. 거기다 송재덕 선생님은 앉아 계셨거든. 머리가 이준영 선생님 허리에 있더라. 그 자세에서 노려보며 태웠는데 목 안 아프신지 몰라.”
키 작기로 수위를 다투는 전공의가 키는 물론 체격까지 가장 큰 전공의를 앉아서 태웠다? 생각해 보니 자세상으로는 누가 누구를 혼내는지 모를 수도 있었다.
이혁민도 피식 웃고 말았다.
“그것만이 아니야. 송재덕 선생님은 툭하면 같은 말 반복하고, 이준영 선생님은 묵묵히 식은땀만 쭉쭉 흘리시는데 평소 성격이 그대로 보이더라. 그때는 살벌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왜 이렇게 웃기냐. ‘돼. 안 돼. 똑바로 해.’ 소리를 수십 번은 들은 것 같아.”
날카로운 성격답게 말이 많지 않은 신기동의 입이 오늘따라 유난하게 열렸다.
사실 누구나 수술과 환자에게 미진한 점이 없을 수 없기에 거의 매일 벌어지는 일이었다.
이런 맛이 있어야 내일도 힘을 낼 것이다.
결국 입 밖으로 웃음이 터졌다.
“기동아, 네 말 들으니까 생각난 건데 저번에 고성문 선생님이 이준영 선생님을 태우는데, 그때도 정말 살벌…….”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거구의 전공의가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며 스윽 시선을 던졌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이혁민과 신기동이 입을 꾹 닫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미 자동 기립한 상태였다.
“이혁민, 신기동.”
설마 들었을까?
등짝에 맺힌 한 줄기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빨리 일 끝내고 자.”
툭 한마디 던지고는 책 몇 권을 들고 나갔다. 수술 방법에 관한 책이었다. 아마도 오늘 송재덕에게 지독하게 탄 부분을 확인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후아!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1년 차들이 이마를 닦으며 훅훅 숨을 내뱉었다.
숙소로 향하는 이준영의 얼굴은 평소와 똑같았다.
‘자식들! 1년 차라 봐준다.’
책을 펼치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째깍! 째깍!
오늘도 시곗바늘은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2년 차가 돼서도 육체적 피로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변화가 있다면 허경발 교수의 수술을 조금 더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과장 수술은 치프나 3년 차가 맡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금경태가 은연중 욕심을 부린 탓이었다. 그 덕에 가장 존경하는 교수의 손을 볼 기회를 더욱 많이 얻었다.
정말 열심히 배웠다.
허경발 교수도 어여삐 보였는지 수술이 끝난 후 항상 따로 자리를 가졌다.
“이준영 선생, 다음번에도 이런 식이면 곤란합니다. 기본은 아무리 강조해도 절대 지나치지 않습니다. 수처, 타이, 기구 다루는 손까지 모두 다시 연습하세요.”
존댓말로 혼나면 희한하게 더 무섭다.
이준영도 어깨를 움찔거릴 정도였다.
“이준영 선생, 타이 연습한 거 맞습니까?”
번번이 살벌하게 혼났지만 마지막은 입가에 걸린 미소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고, 가끔 1년 차 앞에서 매서운 말을 들어도 결코 창피하지 않았다.
‘기본이 중요하다는 말씀은 빼놓으시질 않네. 그래, 욕심 부릴 때가 아니야. 내 수준을 알고 더욱 기본에 매진해야 돼.’
각오를 다지며 실행에 옮겼다.
인턴 때처럼 수처와 타이 연습을 했다. 수술실 밖에서도 기구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따르륵! 소리가 끊이지 않는 만큼 개인적인 시간이 점점 사라졌다.
가끔은 기본에 너무 집중해 정신줄을 놓기도 했다.
“준영아, 오더 내는 동안에는 손 좀 가만히 놔두자. 신경 쓰인다.”
“죄송합니다.”
오더 내는 일은 무척 중요한 일이었기에 바짝 집중해야 했지만, 지적하는 고성문도 피식 웃기만 했다.
“기구 만지면서 오더가 귀에 들어오니? 머리 따로, 손 따로 잘하네. 살살 다뤄, 살살. 그 큰 손에 힘주면 기구 부서진다. 야! 손이 얼마나 큰지 뭘 쥐었는지 보이지도 않네. 배 속에 손 들어가는 게 용하다, 용해. 선생님도 희한하게 보이죠?”
“우리 병원에서 체격이 제일 큰 놈인데 어련하겠어? 혁민아, 기동아, 너희들도 이런 모습은 잘 보고 배워야 한다.”
“준영아, 바느질만 하는 데만 사용하지 말고 가끔은 먹자. 실 달린 거 말고 신선한 걸로. 아! 삼겹살 좋다. 좋아. 갑자기 배고파지네.”
결국 든든한 후원 아닌 후원 속에 여러모로 1년 차와 하등 다르지 않는 처지가 됐다. 당연히 이혁민과 신기동이 해야 할 일도 늘었다.
“기동아, 연습 좀 했나? 오늘 배 닫을 때 퍼스트 서다가 이준영 선생님이 힐끗 쳐다보는데 하마터면 죽는 줄 알았다. 타이가 왜 이렇게 어렵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허경발 선생님을 닮아 가시나. 눈빛만으로도 사람 잡을 것 같아. 그만큼 실력이 늘 텐데 복인 줄 알자.”
이준영에겐 끝이 아니었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아이디어 하나로 해결될 스터디가 아니었다.
꾸준히 정보를 쌓아 갔지만 여전히 더딘 진전을 보였다.
그러나 허경발 교수는 물론 이준영까지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반면 상당한 관심을 보였던 금경태가 슬슬 고개를 젓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사진이 제대로 안 나왔네. 준영아, 안 되는 진단 방법을 찾고 있는 거 아닐까?”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잖아.”
“이론과 실전이 같을 수만은 없잖아. 과장님 수술도 벅찬데 스터디까지 하려니까 힘들다. 과장님이 요즘 의국이 부쩍 신경 쓰이는지 자주 찾으셔서 환자 볼 시간까지 없네. 당분간 네가 스터디에 집중하는 게 좋겠다.”
거짓말이나 핑계는 아니었다.
무슨 이유인지 과장은 날이 갈수록 3, 4년 차를 놔두고 2년 차에 불과한 금경태를 유독 자주 찾았다.
그 탓인지 많은 수술에서 퍼스트를 세웠고, 그만큼 집도 기회까지 늘었다.
반면 허경발 교수는 연차에 맞게 교육 일정을 조절했다. 욕심을 내는 기색을 보이면 어김없이 호통이 터졌다.
이준영으로서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지만 불평할 일도 아니었다.
‘허경발 선생님 말씀대로 차근차근 기본을 쌓는 것이 중요해. 어려운 수술을 먼저 했다고 해서 앞서가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전공의 몫을 또다시 이준영이 떠안았다.
제 할 일 하기도 벅찬 1년 차, 이혁민과 신기동의 도움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날이 갈수록 점점 똑같은 몰골로 변해 갔다. 아니, 애초부터 2년 차의 탈을 쓴 1년 차였다.
당연히 금경태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은 열심히 했지만 스터디엔 소홀했다. 눈에 빤히 보이는 일을 고성문과 송재덕이 모를 수 없었다.
“준영아, 요새 너만 자료 붙잡고 있는 것 같다. 경태는 뭐 해? 과장님 오더 꼬박꼬박 챙기는 것도 좋지만, 이게 한두 사람 노력으로 가능한 스터디가 아니잖아?”
“과장님 일이 많은가 보죠. 원래 자질구레한 일까지 많이 주시잖아요. 개인적인 심부름까지 해야 하는 경태도 편하지만은 않을 겁니다. 준영아, 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아닌가? 아니야?”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송재덕이 고개를 흔들었다.
“목소리 듣기 참 힘드네. 환자한테 하는 말의 10분의 1이라도 들으면 원이 없겠다.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이라고 했던 말 취소할 테니까 마음에 있는 말 좀 듣자. 전후 사정을 확실하게 알아야 우리도 대책을 세울 거 아냐?”
“함께하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보를 서로 공유하고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물끄러미 이준영을 보던 고성문이 한숨을 내쉬었다.
‘둘 다 뛰어난 놈들인 건 분명한데 찝찝하네. 과장님은 왜 유독 경태에게 신경 쓰는 걸까?’
과장의 행동을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금경태의 행동이 미심쩍었지만 사사건건 따질 수도 없고, 전공의 신분이기에 의문만 깊어질 뿐이었다.
약간의 불안감이 조금씩 커져 가는 동안 시간은 쉼 없이 흘렀다.
셀 수 없는 검사와 3, 4년 차들의 적극적인 도움에도 스터디는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 이어졌다.
금경태 역시 회의 때마다 참석했지만 열의를 잃고 있었다. 조영제 비율 등을 새롭게 조정한 후 시행한 결과가 실망스러울 때는 아예 포기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6개월째 제자리네.”
솔직히 이준영도 힘이 빠지고 있긴 했다. 그러나 가장 큰 힘인 우직함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성격이었다. 실망이 다가올 때마다 더욱 자신을 다그쳤다.
‘지금 포기하면 아예 안 한 것만도 못해.’
그 와중에 변수가 하나 발생했다.
고성문이 손을 놓았다.
면허 시험이 남았지만 개원 후 첫 일반외과 전문의 배출이었다. 교수들만이 아니라 병원에서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특히 허경발 교수는 여간 신경 쓰는 것이 아니었다.
“혼자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을 겁니다. 송재덕 선생, 스터디는 2년 차 선생들과 진행할 테니 같이 준비한다는 생각으로 사소한 문제도 발생하지 않도록 신경 쓰세요.”
3년 차 치프가 된 송재덕에겐 상당한 부담이 분명했다. 강조 어법이라고 항변하는 말투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준영아, 경태야, 이젠 고성문 선생님이 안 계시니까 우리 어깨가 더 무거워졌어, 더. 그렇다고 기존의 일 등한시하면 안 된다. 안 돼. 고성문 선생님 시험 준비는 내가 맡을 테니까 너희들은 스터디 준비 잘해. 지금이 중요하다. 중요해.”
이혁민과 신기동의 위치도 바뀌었다.
“6개월 됐으면 감 좀 잡았지? 이젠 어리바리하게 일하면 안 된다. 안 돼. 준영이 얼굴 봐라. 저 덩치가 일에 스터디에 지쳐서 바짝 말랐다, 바짝. 우리도 열심히 하자, 열심히.”
전문의 시험이라는 어느 연차도 경험하지 못한 일을 앞두었기에 새로운 시작과 다름없었다.
한 명의 부재로 일이 다시 늘었지만 이준영에겐 도리어 좋은 기회였다.
‘수술 기회는 저절로 늘 테니까 스터디에 더 집중해야 돼. 혁민이하고 기동이도 참가하는 게 좋겠어.’
“이혁민, 신기동, 연구 같이하자.”
이준영의 묵직한 눈빛을 거부할 수 있는 아래 연차는 없었다. 심지어 송재덕조차 한 수 양보할 때가 있을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연구 참가 인원이 늘었다.
어떻게 보면 의학보다 수학적 계산이 더 필요한 과정이었다. 담도 굵기, 길이, 간 내 담도의 부피와 조영제의 농도를 비교 분석하는 작업이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각각의 차이가 너무 미세해 탈이지만 말이다.
이런 특징이 1년 차들의 성향과 맞물리며 의외의 결과를 몰고 왔다.
이론을 중시하는 이혁민이 푹 빠져들었다.
어쩌다 주어지는 오프도 잊고 연구 자료에 매달렸다.
성격 어디 가지 않아 어려움이 가중될수록 더욱 강한 의욕을 불살라 이준영에게 큰 힘이 되었다.
“선생님, 이 부분은 해석을 달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허경발 선생님께 직접 말씀드려.”
날카로운 성격의 신기동은 수학적 계산에 상당한 장점을 보였다. 끙끙대야 하는 복잡한 계산도 볼펜 몇 번 끄적이면 말끔한 답이 나왔다.
“벌써 끝냈어? 우리 기동이가 수학을 잘해서 날카롭구나. 맞네, 맞아. 왜 몰랐을까? 왜?”
후배들의 공을 절대 자신 앞으로 돌리지 않는 이준영의 정직함, 우직함과 무척 잘 어울렸다.
조금씩 길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금경태의 열의는 지금도 오락가락했다.
“준영아, 새롭게 나온 거 있어?”
“어제 농도 다시 조정했고, 다음 수술부터 적용한다고 하셨어. 1년 차들 힘이 커.”
“하필이면 과장님이 부르셔서 참석을 못했더니 꽤 찜찜하네. 혹시 허경발 선생님이 따로 말씀하신 건 없었어?”
동기이기 때문일까?
이런 일에는 말을 아끼는 이준영이 적은 말수만큼 보기 힘든 표정 변화를 보였다. 눈에 뜨일 정도로 눈가를 찡그렸다.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문제 삼지 않으시는 분이잖아. 다만 요새 눈치가 안 좋으셔.”
“무슨 눈치?”
“내 입으로 말할 일이 아닌 것 같다.”
단순히 참석 빈도가 저조하다는 말이 아니었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