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반복되지 말아야 할 기억 Ⅰ (1)
허경발 교수의 위명은 거론할 필요조차 없었다.
노련하고 경험 많은 의사들로 구성된 교수진 중 젊은 축에 속하는 교수였다.
그 때문인지 누구나 무심코 지나칠 만한 사소한 문제까지 귀신처럼 잡아내 한시도 방심할 수 없었다.
더구나 가히 압도적인 카리스마까지 보였다. 이제 의사의 길에 들어선 젊은 의사들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눈만 마주쳐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교수와 전공의 사이기에 사정권에서 벗어날 시간이라도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거의 24시간 내내 절대 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가공할 벽이었다.
바로 일반외과 2년 차인 이준영과 금경태였다.
묵묵함 속에 감춰진 뜨거운 불길과 출중한 능력에서 뿜어져 나오는 날카로움은 공포의 대명사였다.
게다가 가장 무서운 사람이 바로 하나 위 연차다.
허경발-고성문-송재덕-이준영-금경태.
한마디로 누구 한 명 만만치 않은 층층시하였고, 어느 과도 이렇게 무시무시한 라인업을 구축하지 못했다.
그런 선배들을 보면서도 이혁민과 신기동이 지원했다. 얼마나 간절히 일반외과 의사가 되기를 원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금경태가 1년 차들을 따로 불렀다.
2년 차의 호출에 이혁민과 신기동이 조금도 긴장을 풀지 못했다. 당연히 산만 한 덩치에 무뚝뚝한 성격으로 유명한 이준영도 함께했다.
“이혁민, 학교 수석 졸업에 인턴 최고 성적인 건 안다만 써전은 머릿속 지식이 다가 아니야. 처음부터 다시 배운다는 생각으로 나대지 말고 열심히 해.”
“예, 선생님.”
“신기동, 너 성격 예민하다는 거 아는데 일하면서 짜증 부리면 곤란해. 안 힘든 사람 없다. 두고 볼 거야. 준영아, 할 말 없어?”
이준영이 딱 두 마디만 했다.
“열심히 하자. 환영한다.”
이혁민과 신기동의 온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인턴 때부터 느꼈듯, 이준영의 무뚝뚝한 말투와 눈빛이 전하는 중압감은 다른 어떤 선배 전공의보다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덜하지 않았다.
‘기동아, 무섭지 않은 선생님이 없지만 우리 지원 잘한 거지?’
‘죽기밖에 더 하겠어?’
절대 1년 차의 단순한 푸념이 아니었다.
3월이면 다가오는 또 한 번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4년 만에 모든 연차가 채워졌고, 젊은 의사들의 인연이 시작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마어마한 업무에 1년 차들이 혀를 빼물면서도 열정을 잃지 않았다.
“기동아, 역시 연차가 무섭긴 하다. 허경발 선생님은 쳐다볼 수도 없고, 고성문 선생님하고 송재덕 선생님 수술도 무시무시하네. 우린 언제 저렇게 될까?”
경상도 억양이 물씬물씬 풍겼다.
“난 금경필 선생님하고 당직 서서 걱정이야. 수술 욕심이 너무 많으셔서 언제 수술 받을지 모르겠어. 이준영 선생님이 말은 없어도 후배는 훨씬 잘 챙기는 것 같아.”
“설마 수술 안 주겠나? 후반기에는 당직 순서가 바뀔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여러모로 걱정이 많았지만 의국 분위기는 의외로 즐겁기 짝이 없었다.
물론 항상 긴장 상태 1년 차에겐 다른 세상 일이었고, 모두가 환자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전제하였다.
삐끗하면?
가르쳐야 할 부분이 생기면?
“준영아, 나 좀 보자.”
“경태야, 이건 아니라고 했지? 그리고 1년 차들 교육에 바짝 신경 써. 너 책임져야 할 후배가 있는 2년 차다. 잊지 마라. 잊지 마.”
3, 4년 차가 굳이 1년 차를 태울 이유는 없었다.
솔선수범 내리 사랑을 실천했고, 이준영과 금경태는 자연스럽게 따라 배웠다.
그 결과가 김지훈을 비롯해 까마득한 후배들에게까지 이어져 전통이 됐다.
이혁민과 신기동이 거의 매일 몸서리를 쳤다.
“어후! 혼나지 않는 날이 없네. 왜 이렇게 부족한 게 많은지 큰일 났다.”
“혁민아, 이준영 선생님 너무 무섭지 않아? 말 몇 마디 들으면 혼나는 게 아니라 온몸이 타는 것 같다.”
“태운다는 말이 어감도 좋고 더 그럴듯하네.”
그 와중에 고성문과 송재덕은 항상 티격태격하면서도 단짝처럼 모든 일을 함께했다. 전공의 이상의 관계를 쌓았는지 때론 누가 치프인지, 누가 3년 차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선생님, 이번 수술에서 주의할 점이 뭐예요?”
“3년 차가 그런 걸 왜 물어봐? 알아서 해.”
“왜 이러세요? 왜? 허경발 선생님한테 저 맞아 죽으면 선생님도 편하지 않을 겁니다. 빨리 알려 주세요, 빨리.”
“하여간 아쉬울 때만 찾아요. 준영아, 너 전에 이 수술 들어갔었지? 재덕이한테 주의할 점 알려 줘.”
“내 이럴 줄 알았어. 쪽팔리지만 살려면 어쩔 수가 없네. 어쩔 수가. 준영아, 자세하게 읊어 봐. 평소처럼 몇 마디로 끝내면 죽을 줄 알아.”
이럴 때는 이준영 입도 활짝 열렸다.
결코 송재덕의 살벌한 눈빛 때문이 아니었다.
과묵함은 사안에 따른 일일 뿐이었다.
그렇게 잠깐의 웃음과 휴식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일에 파묻혀 살았다.
치프인 고성문까지 눈가가 까맸다. 1년 차는 힘들다는 소리 자체를 아예 원천 봉쇄 당했다.
물론 송재덕과 2년 차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이준영과 금경태는 눈에 보일 정도로 강한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성격 차이는 매우 컸지만 모든 면에서 비등비등했고, 둘 다 병원에 남기를 바라 잠을 잊을 정도로 치열하게 경쟁했다.
허경발 교수는 일종의 복이라 생각했다.
지대한 관심과 기대는 연차를 가리지 않았지만, 그중에서도 고성문은 예외적일 정도였다. 부임 첫해에 함께 근무를 시작해 각별함이 적지 않았다. 그만한 자격과 능력을 가졌기에 고성문에 대한 욕심을 숨기지도 않았다.
“고성문 선생, 군대 다녀온 후 정말 병원에 안 남을 겁니까? 과장님도 상당히 긍정적입니다.”
환자와 관련된 일이 터지면 눈물을 쏙 뺄 정도로 엄격해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교수였지만 이상하게 말을 놓지 않았다.
습관이 아닌 후배 의사들에 대한 예의였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아버님께서 고향에 꼭 병원을 세워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시는 데다 건강까지 안 좋으셔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교수 임용은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지만 정말 아쉽군요. 다시 한 번 고민해 보세요. 그리고 한 가지 상의할 일이 있습니다. 담석 수술할 때 담도나 간 속에 담석이 남아 있는지, 다 제거됐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답답한 적 있었죠?”
진단 기구 자체가 열악하기 짝이 없던 시절이었다. 가장 중요한 해상도마저 크게 떨어져 수술 전후 초음파나 CT로 확인하는 일조차 여의치 않았다.
“예. 그런 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스터디 하나 하려고 하는데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릴 겁니다. 누구와 하면 좋겠습니까?”
전부터 말해 왔던 수술 중 담도 조영술이었다.
담도에 조영제를 넣고 촬영하면 간단할 것 같지만, 담도 굵기에 따른 조영제 농도가 매우 정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진 자체가 까맣게, 혹은 온통 하얗게 나오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담석 유무를 알 수 없었다.
고성문이 신중하게 대답했다.
“몇 달 내에 끝날 스터디가 아니라면 2년 차들이 주축이 돼야 할 것 같습니다. 송재덕 선생은 제가 손을 놓으면 의국을 이끌어야 하고, 혼자라서 전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게 좋겠군요. 이준영 선생, 금경태 선생과 진행하겠습니다. 고성문 선생, 내가 한 말 절대 잊지 마세요.”
고성문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허경발 교수가 부임한 해 1년 차를 시작한 인연 때문인지 혼나기도 많이 혼났고, 기대 또한 넘치게 받아 왔다. 교수로 남으라는 말 역시 수없이 들은 터였다.
물론 과장의 결정이 있어야 하지만, 교수 제의만으로도 고맙고 감사한 일이었다.
배울 점이 너무 많아 마음속으로는 이미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미 수술할 병원조차 변변치 않은 지역사회에 공헌하기로 결정했다. 대학 교수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임을 의심치 않았다.
그런 이유로 뜻하지 않게 이준영과 금경태가 허경발 교수의 스터디에 참가하게 됐다.
“야! 이거 내가 해야 되는 건데 시간이 탈이구나, 탈. 준영아, 경태야, 되게 오래 걸린다니까 끈기를 가지고 열심히 해. 열심히.”
“예, 선생님.”
“오프 때도 집에 못 가겠네. 쯧쯧! 불쌍한 놈들. 허경발 선생님께 가 봐. 난 오늘 집에 간다. 준영아, 당직이지? 잘 서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허경발 교수와 밤늦도록 계획을 짜며 함께 상의한 후에야 퇴근했다.
이준영은 응급실 환자와 수술 탓에 제대로 듣지 못했고, 금경태마저 논의 직후 바로 퇴근해 다음 날 송재덕에게 매달려야 했다.
물론 이준영의 생각일 뿐이었고, 옆에서 볼 때는 얘기가 달라도 한참 달랐다.
송재덕이 가슴을 쳤다.
“준영아, 말을 해, 말을. 네 입이 아무리 무거워도 부탁하는 자세가 아니지 않니? 어떻게 생각해?”
“어제 무슨 얘기 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부탁하는 놈이 왜 이렇게 무뚝뚝해? 덩치나 작아야 한 대 쥐어박지. 동기 사랑은 나라 사랑인데, 경태 이 자식은 뭐 하는 거야? 그치? 내 말이 맞지?”
“뭐가 말입니까?”
“동기 사랑은 나라……. 말을 말자, 말을. 이리 와.”
처음부터 한발 늦었다.
더구나 금경태는 눈치 빠르고 빠릿빠릿한 반면 이준영은 좋은 말로 우직하기만 했다. 말수까지 적어 스터디가 진행되는 초반에는 그저 듣기만 하는 것처럼 보였다.
금경태가 대단한 열의를 보였다.
‘확률이 너무 낮아서 탈이지만 성공하면 대단한 연구 실적이 될 거야. 내 시간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어.’
의욕과 달리 지난한 작업이었다.
기존에 알려진 진단 방법도 아니었다. 한국 최초를 넘어 세계 최초의 연구지만 열악한 의료 환경을 생각하면 결과를 장담할 수조차 없었다.
게다가 동일 환자에게 같은 검사를 반복할 수 없어 단 한 번의 촬영으로 끝내야 했다.
수집한 정보는 당연히 단편적이었고, 성과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매일 몰려드는 환자와 씨름하며 이틀마다 당직을 서면 누구나 파김치가 될 수밖에 없다. 더디기만 한 스터디는 정신적 피로까지 가중시켰다.
반짝이는 머리가 아니라 끈기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준영아, 감이 좀 잡히니? 이거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힘드네. 허경발 선생님도 답답하신 눈치더라. 나도 답답하다, 답답해. 근데 경태는 어디 갔어?”
“퇴근했습니다.”
“자식이 초반에는 열심히 하더니 점점 꾀를 부리네. 이럴 땐 경태의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필요한데, 무슨 일 있대? 연애라도 하나? 맞지? 내 말이 맞지?”
각자 자기 일 하기 바쁜 마당인 데다 당직 날까지 다른 탓에 알 도리가 없었다. 자신의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은 이준영이나 금경태나 다를 바가 없기도 했다.
“모르겠습니다.”
‘한 놈은 고지식하고 무뚝뚝한데 속을 알겠고, 한 놈은 똑똑하고 말만 잘하는데 모르겠고. 어렵다, 어려워.’
송재덕이 쩝쩝 입맛을 다셨다.
정신없이 일하는 모습만 본 1년 차 때는 보이지 않던 차이가 2년 차가 되면서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각자의 성격이자 개성이었지만 내심 우직함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진단 방법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우직함이 더 필요한지도 몰랐다.
이준영이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주어진 일에 매진했다. 실제로 다들 머리 좋다고 인정하는 금경태보다 먼저 실마리를 잡았다.
“경태야, 우리가 간 내 담도 크기를 과도하게 잡은 것 같아. 적정하다고 결론 내린 환자에서도 사진이 하얗게 나오는 경우가 많은 걸 보면 조영제가 많이 들어갔단 말이잖아.”
“그래? 자세하게 얘기해 봐.”
“비율 조정을 다시 할 필요가 있어 보여.”
전공의와 함께했지만 어디까지나 허경발 교수의 스터디였다. 계획을 잡고, 논의의 중심에 서서 수술 중 직접 연구를 시행하는 사람 역시 허경발 교수였다. 교수실 불이 꺼지는 것을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기에 이준영은 자신의 생각을 아주 상세히 솔직하게 말했다. 평소 무뚝뚝한 모습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까지 많아져 얼마나 강한 열의를 가졌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금경태 역시 이내 귀를 기울였다. 이준영의 의견을 여러모로 검토한 끝에 자신의 진가를 발휘했다.
반짝이는 아이디어였다.
곧바로 상의한 바를 보고하자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고 여겼던 허경발 교수가 무척 기뻐했다.
“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아주 좋은 의견이에요. 누가 생각해 냈습니까?”
금경태가 재빨리 나섰다.
“함께 상의했습니다.”
“그래요? 잘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환자를 위한 길이니까 시간이 없고 힘들어도 조금만 더 신경 씁시다.”
교수실을 나온 금경태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현재 우리 과 실세는 아니지만 실력으로 보면 곧 치고 올라갈 가능성이 높아. 무난하게 교수 자리를 따려면 과장님만이 아니라 허경발 선생님에게도 잘 보여야 되겠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콧소리까지 냈다.
“준영아, 만일 원하는 결과가 나와서 논문까지 발표하게 되면 우리 이름도 올라갈까?”
“허경발 선생님 성격에 안 올릴 리가 없잖아.”
“완벽한 진단 방법이 나오면 반향이 대단할 텐데, 제2저자면 날개를 다는 꼴이 되겠네. 이럴 때가 아니지. 우리가 상의한 방법을 다시 한 번 살펴봐야겠다. 오늘 당직이지? 수고해.”
이준영이 금경태를 보며 콧등을 찡그렸다.
무뚝뚝하다고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금경태의 말과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허경발 교수의 연구이자 동기라는 생각으로 마음에 묻었다.
스스로 느끼는 부족함도 무시할 수 없었다.
‘연구도 연구지만 이제 2년 찬데 수술에 더 집중해야 돼. 기본이 안 돼 있으면 교수는 꿈도 꾸지 못할 거야. 이대로 가다간 경태한테 밀릴 수밖에 없어.’
똑똑하고, 말 잘하고, 실력까지 겸비한 금경태는 최고의 라이벌이었다.
하기에 당면 과제는 일반외과 전공의 본연의 일에 집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다. 물론 가장 존경하는 교수의 연구를 등한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몸이 두 개여도 시간은 부족하기만 했다.
그래도 온갖 희망이 가득한 시절이었다.